지속의 순간들
제프 다이어 지음, 한유주 옮김 / 사흘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카메라를 잘 몰라도 휴대폰만 있으면 일상의 순간들을 누구나 손쉽게 기록할 수 있는 시대다.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따지던 시대가 이백 년도 안 된다. 이제는 예술보다 가치를 더 따진다. 우리는 예술을 어떻게 알아볼까. 도로테아 랭은 “카메라는 사람들에게 카메라 없이 보는 법을 가르치는 도구”라고 말했다. 소설가이면서 규정하기 어려운 인상적 에세이를 여럿 쓴 제프 다이어는 자신이 사진가였다면 찍고 싶었을 사진들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라 소개하며 이 책에서 자신만의 포토 로드를 선보였다. 사진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발터 벤야민, 수전 손택, 존 버거 등을 인용하는 것을 최대한 피했다고 했는데, 이 책의 성과는 그들 못지않았다. 그래서 이 책은 뉴욕 국제 사진센터 주관 사진 관련 부문 상을 받았다.

 

 

 

“『지속의 순간들』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전통이란 결코 완결되지 않으며, 그렇다기보다는 항상 점차 진보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사진의 역사적 계보를 좇는 나열이 아니라 활발한 예술의 중심이던 20세기 초중반의 미국을 초점으로 사진가들이 이전 세대와 동시대 사진가들에게 영향을 받고 의식하면서 하나의 예술 연대를 이루는 양상을 짚어낸다.

 

 

 

 

 

「*

우리가 랭의 <하얀 천사의 행렬>에서 본 인물은 디캐러바의 사진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또 다른 랭의 상징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주자 어머니>는 코소보에서 일어난 알바니아인들의 인종 청소를 포착해낸 사진에서 난민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불안을 호소하듯 입가에 가져다 댄 오른손은 60년이 흐른 뒤에도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케르테스와 스미스, 스티글리츠 등 여러 사진가들을 그토록 매혹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ㅡ고독한 사내의 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ㅡ은, 자신의 이웃인 무슬림들에 의해 온몸에 불이 붙은 크로아티아 민병대원이 잠식한다. 버스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가난에 찌든 러시아인 어머니들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으러 그로즈니까지 왔다. “그들은 마치 지갑처럼 두려움을 운반한다.” 오든은 썼다. “공포에 잠겨 있는 것, 이것이 그들이 유일하게 하는 일이다.”

 피츠버그에서 유진 스미스는 벽에 손바닥 무늬를 남기고 있던 어린아이의 사진을 찍었다. 코소보의 펙에서, 나흐트웨이는 피를 묻혀 남긴 손바닥 얼룩과 그림(이 역시 피로 그린 것이다)으로 뒤덮인 한 가족의 거실을 사진에 담았다. 끔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손바닥 얼룩들은 길고 펄럭이는 귀를 지닌 토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얼룩들은 자신들이 존재했다는 표시를 남기려는 소망으로 옛사람들이 동굴에 남긴 흔적들과 닮았다.

이러한 충동이 결국 카메라를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미지를 고정시킬 수 있는 방법을 희구해왔다.

 

**

모든 위대한 사진가들은 가끔, 그리고 우연한 경우에만, 다른 사진가들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모두 다른 위대한 사진가들이 찍은 사진과 매우 흡사하게 보이는 사진들을 찍었다. 라티르그는 이를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과장되게 선언했다. “한 사진가는 단 두 명의 사진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 천 명의 사진가가 되어야 한다.” 라티르그의 주장대로, 카멜레온 같은 특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눈부시게 빛나는 사진들을 충분히 많이 찍었던 브라사이는 라티르그의 우아함과 고요함을 공유한다.

 

 

 

***

사진가는 가능성을 이해한다. …… 그가 사진을 찍었을 때, 그는 아마도 모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가 제대로 사진을 찍었는지, 그가 찍은 것이 어떤 사진이 될지를 알 수가 없다. 그는 단지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처럼 보일지 아닐지를 알 수 없다. 내 말은, 그가 본 것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찍은 것이 사진처럼 보일 수 있을지 없을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가 …… 사진을 찍는 행위와 결부된 무언가가 변화를 일으킨다.

 - Gary Winogrand」

 

 

 

 

 

 

1890년대 초반의 사진에는 다만 희끄무레한 광막함만 있었을 뿐 하늘도 구름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술적인 문제가 해결될수록 더 많은 걸 담을 수 있었지만 대체로 사진가들은 자기 지시적인 장소들, 사건들, 장면들을 애호하고 공유했다. 독창적인 창조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지 않는가. 사진가들의 작업을 이렇게 한눈에 보면 동시성과 연속성이 그 속에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미지가 눈앞에 제시되었음에도 사진의 의미는 대체로 복잡하고 비밀스럽다. 

                        

「*

모든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방식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결국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관찰하는 방식이다. 당신은 거리의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보는데, 이때 당신의 주목을 끈 것들은 필연적으로 결점들이다. 우리가 이러한 특이점들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한 만족과는 별개로, 우리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창조한다. 우리가 자신을 위장하는 방식은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신호를 보내는 것과 같지만, 당신이 사람들에게 당신에 관해 알기를 바라는 것과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알 수밖에 없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 Diane Arbus

**

아마도 이 책의 우연적 접근 방식과 구조의 자기 충족적 기이함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가면 갈수록, 사진의 역사는 장면들과 비유들, 주제들과 모티프들의 레퍼토리의 개인적 판본을 만든 사진가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레퍼토리는 고정되어 있기보다는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진화하지만, 이러한 레퍼토리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상당수는 놀랍게도 1840년대에 헨리 폭스 털봇이 이미 다룬 것들이다.」

 

 

 

아버스는 “내가 그들을 사진으로 찍지 않는 한 누구도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믿었다. 보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매혹, 이것이 예술가들의 큰 작업 동기이기도 할 것이다. 당시 사진가들에게는 눈먼 자들의 응시, 시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장소 같은 밤, 도시, 텅 빈 거리들과 집과 벤치, 창가의 풍경, 거리의 사람들, 노동자(특히 손과 모자), 초상 사진, 은밀한 나체, 꾸밀 수 없는 사람의 등, 실루엣으로 나타난 형상들(특히 케르테스), 고속도로, 미국의 이발소 등등이 주요 소재였다. 이들은 강박적으로 작업했는데 유진 스미스 경우, “그가 관찰하는 장소가 비극적인 장소가 된 까닭은, 단순히 그가 그곳에서 제한 없이 관찰하도록 스스로를 몰아갔기 때문이다.”(존 치버)

많은 사진가들의 작업은 “분명하게 묘사된 사실보다 신비로운 것은 없다”는 진실에 대한 열정과 “운명을 인식 가능한 것으로 변모”시키고자 한 열망이었다.

 

 

 

 

지금은 사진가보다 카메라가 더 많은 시대다. “카메라는 이제 너무 흔한 것이 되었고, 작아졌고, 또 재난을 경험하는 현장에 항상 함께 해왔으므로, 이제는 누구도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다.” 넘치는 이미지 속에서 사진이 담으려 한 꺼지지 않는 순간들은 더욱 희소해지고 있다. 생각해보라. 오늘 당신의 기억 속에 어떤 기억할 만한 순간이 있었는지를.

 

 

 

 

 

ps)

절판된 게 매우 안타까운 책이다. 존 버거가 "이 책을 읽고 나면, 삶이 더 크게 보인다"고 말했다시피, 기술적이고 딱딱한 사진론보다 훨씬 훌륭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부족한 사진을 보강해 다시 나오길 바란다. 이 책은 도서관에도 잘 없던데 나만 읽기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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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7 14: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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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다른 방식으로 보기 [할인]
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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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의 문제를 단순하게 형식주의적인 입장에서 양식상의 변화 또는 작가와 유파 사이의 영향 관계의 문제로 축소시켜 생각한다든가, 예술 또는 미학적 영역이 다른 실제적인 영역과 아무 상관없는 특수한 영역이라는 칸트의 미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미술의 영역과 그 여타의 다른 삶의 영역과의 복잡한 관계를 보다 자세하게 검토˝(옮긴이)하는 신미술사학(新美術史, New Art History)을 보여주는 존 버거.

1.
이미지는 재창조되었거나 재생산된 시각이다. 그것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순간의 사물의 어떤 모습 또는 모습들을 본래의 장소 및 시간에서 따로 분리해내 일정 기간 또는 몇 세기 후까지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2.
유럽의 유화에서 누드는 보통 유럽 휴머니즘 정신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어떤 것으로 제시된다. 이 정신은 개인주의와 분리시킬 수 없다. 그리고 고도로 발달한 개인주의 의식이 없었다면 이렇게 누드 전통에서 대담하게 벗어난 작품(벌거벗은 몸을 그린 지극히 개인적인 이미지)은 절대 그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누드의 전통은 그 자체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하나의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몇몇의 예술가가 이 점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자신 나름의 방식으로 그 모순을 해결하려 했지만, 그들의 해결책이 이 전통의 일반적인 요소로 인정될 수는 없었다.
이 모순은 간단하게 말해 다음과 같다. 한쪽에는 예술가, 사상가, 후원자, 소유주라는 구체적인 개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들의 활동의 대상이 되는 사물 혹은 하나의 추상적인 존재처럼 취급되는 사람, 즉 여성이 있는 것이다.
(중략)
오늘날 이 누드가 포함하고 있는 태도나 가치들은 광고, 저널리즘, 텔레비전과 같은 좀 더 다양한 미디어 속에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여자를 보는 방식, 즉 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 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말에 의심이 든다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 보면 된다. 이 책에서 전통적인 누드화를 아무 작품이나 하나 고른 다음, 그림 속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 보자. 머릿속에서 생각만 해도 좋고 직접 그려 봐도 좋다. 그리고 그런 전환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이미지 자체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관념에 대한 폭력 말이다.

3.
어떤 시기든 예술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만약 1500년부터 1900년 사이의 유럽 미술이 자본이라는 새로운 힘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의존하고 있는 지배계급들의 이해관계에 봉사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에 대해 나는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려 한다. 재산과 교환 방식에 대한 새로운 태도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결정되는 세상을 보는 방식은, 다른 시각예술이 아니라 바로 유화에서 시각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4.
유화는 그 자체의 고유한 특성 때문에 가시적인 세계를 재현하는 일정한 관습의 특별한 체계에 의존했다. 이렇게 한데 모인 관습들을 바탕으로 화가들은 세상을 보는 하나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액자 안에 든 유화가 세상을 향한 상상의 창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지난 사 세기 동안 생겨났던 매너리즘, 바로크,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양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유화의 전통 자체가 하나의 유산으로 남긴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장은 다르다. 유럽의 유화로 대표되는 문화를 하나의 전체로 본다면, 그리고 그 문화가 스스로에 대해 주장하는 것을 제쳐 버리고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의 모델은 세상을 향해 난 창이라기보다는 벽 안에 소중하게 박아 놓은 금고에 더 가깝다. 즉 가시적인 사물들을 한데 모아 저장해 둔 금고.

5.
광고는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매우 중요한 정치적 현상이다. 그러나 광고가 참조하고 인용하는 것들은 넓은 영역에 걸쳐 있는 반면, 광고가 제공하는 것은 좁은 범위 안에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획득할 수 있는 능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인간의 기능이나 필요성은 이 능력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모든 희망이 한데 모이고, 동질화되고, 단순화된다. 그렇게 모인 희망들은 정체불명이긴 하지만 강력하고, 물건을 살 때마다 반복되면서 마력적인 약속이 된다. 자본주의 문화 안에서 그와는 다른 종류의 희망이나 만족감 또는 쾌락은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기대될 수 없다.
광고는 이 문화의 생명이고 —광고 없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동시에 광고는 이 문화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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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벤투의 스케치북 [할인]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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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2.
어떤 이미지가 더 많은 다른 이미지들과 결합될수록, 그 이미지는 더 자주 생생해진다.
왜냐하면 어떤 이미지가 더 많은 다른 이미지들과 결합될수록, 그것을 촉발할 수 있는 더 많은 원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윤리학』 5부, 정리 13과 그 증명

3.
안톤 체호프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가 말했다. "작가의 역할은 상황을 진실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독자가 더 이상 그 상황을 피해 갈 수 없게."
.
.
(중략)
.
.
오시프 만델스탐은, 강제수용소에서 죽기 전에 이런 정확한 말을 했다. "단테에게 시간은, 동시에 단 한 번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역사의 내용이었다. 반대로 역사의 목적은, 시간을 탐색하고 정복하는 일에서 모두가 형제 혹은 동료가 되기 위해 시간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4.
이야기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숨은 것을 다루는 이야기와, 드러난 것을 노출시키고 보여 주는 이야기. 나는 그 둘을 —나만의 특별하고 물리적인 의미로— 내향적 범주와 외향적 범주라고 부른다. 둘 중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좀 더 예리하게 다룰 수 있는 범주는 어느 쪽일까? 나는 첫번째라고 믿는다.
첫번째 범주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채 남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나눔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몸은 개인의 몸인 것만큼 사람들의 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서 의문은, 풀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안고 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폭력이나 상실, 혹은 분노가 등장하지만, 그 이야기는 멀리 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안톤 체호프가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이야기가 비결을 알려 주지는 않는다. 그 이야기는, 말해지기를 요구하는 이야기들을 관찰하는 일종의 렌즈를 제시한다.
삶 속의 말은, 문학 속의 말과 달리, 끊임없이 방해를 받기 때문에, 하나로 이어진 맥락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 함께 전달되는 행동들이 만들어내는 합창을 관찰하고 거기에 귀 기울이는 일. 갈등만큼이나 미리 예견할 수 없는 공통된 행동들.
웃음은 반응이 아니라 하나의 보탬이다. 스물네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이 한 세기보다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동기를 공유할 때 그것은 말보다 더 분명하다. 침묵도 손을 뻗는 것과 같아질 수 있다.(혹은, 다른 상황에서라면, 물론 잘려 버린 손이 될 수도 있다) 말이 많은 가난한 자들은 침묵에 둘러싸이고, 그런 침묵은 종종 그들을 지켜 준다. 말이 많은 부자들은 대답 없는 질문들에 둘러싸인다.

5.
그려지는 대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그 대상의 자아 안으로 들어가려는 공생의 욕망이 있고, 동시에, 그리는 이와 대상 사이에 내재한 거리에 대한 통찰도 있다. 그런 드로잉은 은밀한 재회이면서 동시에 이별이 되려 한다! 무한히 교차하는 재회와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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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책인데, 번역이 참...
비문, 오문이 너무 많다. 이 번역자가 베이컨, 호크니, 루시안 프로이트에 대한 책도 번역했던데, 문장 전달에 더 신경을 써주셔야 할 듯. 출판사에서도 교정 교열에 더 신경을 쓰셔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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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작품인데도 퇴색되지 않는 인간 심리 묘사, 스토리 구성.
👍👍👍👍👍

"나만도...
초능력자들만도 아니었다.
이 사람들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만나게 되는 사람들...

그럼 이 도시에 사는
정상인이란
대체 뭔가."

ㅡ노말시티 5권

"마음에는...

내가 가진 초능력 같은 거
아무런 힘이 되질 못하는 걸..."

ㅡ노말시티 6권


"이 세계엔 더 이상 자연적인 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실망했었지.

이제 자연적인 건
그저 인간 정도일까.

그리고 그 인간마저...나
자신을 보면 더 이상 자연은
없다고 느껴졌어..."

ㅡ노말시티 6권

"이샤
사랑이란 건 상호적인 거 같으면서도
결국 일방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나의 감정일 뿐이고
그녀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 역시 그녀의 감정일 뿐

그게 서로 좋아하면 상호적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일방적인 자기 감정으로만 남는다는 것을...
알겠어?"
ㅡ노말시티 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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