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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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의 문제를 단순하게 형식주의적인 입장에서 양식상의 변화 또는 작가와 유파 사이의 영향 관계의 문제로 축소시켜 생각한다든가, 예술 또는 미학적 영역이 다른 실제적인 영역과 아무 상관없는 특수한 영역이라는 칸트의 미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미술의 영역과 그 여타의 다른 삶의 영역과의 복잡한 관계를 보다 자세하게 검토˝(옮긴이)하는 신미술사학(新美術史, New Art History)을 보여주는 존 버거.

1.
이미지는 재창조되었거나 재생산된 시각이다. 그것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순간의 사물의 어떤 모습 또는 모습들을 본래의 장소 및 시간에서 따로 분리해내 일정 기간 또는 몇 세기 후까지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2.
유럽의 유화에서 누드는 보통 유럽 휴머니즘 정신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어떤 것으로 제시된다. 이 정신은 개인주의와 분리시킬 수 없다. 그리고 고도로 발달한 개인주의 의식이 없었다면 이렇게 누드 전통에서 대담하게 벗어난 작품(벌거벗은 몸을 그린 지극히 개인적인 이미지)은 절대 그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누드의 전통은 그 자체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하나의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몇몇의 예술가가 이 점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자신 나름의 방식으로 그 모순을 해결하려 했지만, 그들의 해결책이 이 전통의 일반적인 요소로 인정될 수는 없었다.
이 모순은 간단하게 말해 다음과 같다. 한쪽에는 예술가, 사상가, 후원자, 소유주라는 구체적인 개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들의 활동의 대상이 되는 사물 혹은 하나의 추상적인 존재처럼 취급되는 사람, 즉 여성이 있는 것이다.
(중략)
오늘날 이 누드가 포함하고 있는 태도나 가치들은 광고, 저널리즘, 텔레비전과 같은 좀 더 다양한 미디어 속에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여자를 보는 방식, 즉 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 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말에 의심이 든다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 보면 된다. 이 책에서 전통적인 누드화를 아무 작품이나 하나 고른 다음, 그림 속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 보자. 머릿속에서 생각만 해도 좋고 직접 그려 봐도 좋다. 그리고 그런 전환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이미지 자체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관념에 대한 폭력 말이다.

3.
어떤 시기든 예술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만약 1500년부터 1900년 사이의 유럽 미술이 자본이라는 새로운 힘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의존하고 있는 지배계급들의 이해관계에 봉사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에 대해 나는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려 한다. 재산과 교환 방식에 대한 새로운 태도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결정되는 세상을 보는 방식은, 다른 시각예술이 아니라 바로 유화에서 시각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4.
유화는 그 자체의 고유한 특성 때문에 가시적인 세계를 재현하는 일정한 관습의 특별한 체계에 의존했다. 이렇게 한데 모인 관습들을 바탕으로 화가들은 세상을 보는 하나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액자 안에 든 유화가 세상을 향한 상상의 창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지난 사 세기 동안 생겨났던 매너리즘, 바로크,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양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유화의 전통 자체가 하나의 유산으로 남긴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장은 다르다. 유럽의 유화로 대표되는 문화를 하나의 전체로 본다면, 그리고 그 문화가 스스로에 대해 주장하는 것을 제쳐 버리고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의 모델은 세상을 향해 난 창이라기보다는 벽 안에 소중하게 박아 놓은 금고에 더 가깝다. 즉 가시적인 사물들을 한데 모아 저장해 둔 금고.

5.
광고는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매우 중요한 정치적 현상이다. 그러나 광고가 참조하고 인용하는 것들은 넓은 영역에 걸쳐 있는 반면, 광고가 제공하는 것은 좁은 범위 안에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획득할 수 있는 능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인간의 기능이나 필요성은 이 능력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모든 희망이 한데 모이고, 동질화되고, 단순화된다. 그렇게 모인 희망들은 정체불명이긴 하지만 강력하고, 물건을 살 때마다 반복되면서 마력적인 약속이 된다. 자본주의 문화 안에서 그와는 다른 종류의 희망이나 만족감 또는 쾌락은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기대될 수 없다.
광고는 이 문화의 생명이고 —광고 없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동시에 광고는 이 문화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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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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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2.
어떤 이미지가 더 많은 다른 이미지들과 결합될수록, 그 이미지는 더 자주 생생해진다.
왜냐하면 어떤 이미지가 더 많은 다른 이미지들과 결합될수록, 그것을 촉발할 수 있는 더 많은 원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윤리학』 5부, 정리 13과 그 증명

3.
안톤 체호프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가 말했다. “작가의 역할은 상황을 진실하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독자가 더 이상 그 상황을 피해 갈 수 없게.”
.
.
(중략)
.
.
오시프 만델스탐은, 강제수용소에서 죽기 전에 이런 정확한 말을 했다. “단테에게 시간은, 동시에 단 한 번 일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역사의 내용이었다. 반대로 역사의 목적은, 시간을 탐색하고 정복하는 일에서 모두가 형제 혹은 동료가 되기 위해 시간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4.
이야기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숨은 것을 다루는 이야기와, 드러난 것을 노출시키고 보여 주는 이야기. 나는 그 둘을 —나만의 특별하고 물리적인 의미로— 내향적 범주와 외향적 범주라고 부른다. 둘 중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좀 더 예리하게 다룰 수 있는 범주는 어느 쪽일까? 나는 첫번째라고 믿는다.
첫번째 범주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채 남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나눔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몸은 개인의 몸인 것만큼 사람들의 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서 의문은, 풀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안고 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폭력이나 상실, 혹은 분노가 등장하지만, 그 이야기는 멀리 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안톤 체호프가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이야기가 비결을 알려 주지는 않는다. 그 이야기는, 말해지기를 요구하는 이야기들을 관찰하는 일종의 렌즈를 제시한다.
삶 속의 말은, 문학 속의 말과 달리, 끊임없이 방해를 받기 때문에, 하나로 이어진 맥락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 함께 전달되는 행동들이 만들어내는 합창을 관찰하고 거기에 귀 기울이는 일. 갈등만큼이나 미리 예견할 수 없는 공통된 행동들.
웃음은 반응이 아니라 하나의 보탬이다. 스물네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이 한 세기보다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동기를 공유할 때 그것은 말보다 더 분명하다. 침묵도 손을 뻗는 것과 같아질 수 있다.(혹은, 다른 상황에서라면, 물론 잘려 버린 손이 될 수도 있다) 말이 많은 가난한 자들은 침묵에 둘러싸이고, 그런 침묵은 종종 그들을 지켜 준다. 말이 많은 부자들은 대답 없는 질문들에 둘러싸인다.

5.
그려지는 대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그 대상의 자아 안으로 들어가려는 공생의 욕망이 있고, 동시에, 그리는 이와 대상 사이에 내재한 거리에 대한 통찰도 있다. 그런 드로잉은 은밀한 재회이면서 동시에 이별이 되려 한다! 무한히 교차하는 재회와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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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책인데, 번역이 참...
비문, 오문이 너무 많다. 이 번역자가 베이컨, 호크니, 루시안 프로이트에 대한 책도 번역했던데, 문장 전달에 더 신경을 써주셔야 할 듯. 출판사에서도 교정 교열에 더 신경을 쓰셔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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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작품인데도 퇴색되지 않는 인간 심리 묘사, 스토리 구성.
👍👍👍👍👍

˝나만도...
초능력자들만도 아니었다.
이 사람들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만나게 되는 사람들...

그럼 이 도시에 사는
정상인이란
대체 뭔가.˝

ㅡ노말시티 5권

˝마음에는...

내가 가진 초능력 같은 거
아무런 힘이 되질 못하는 걸...˝

ㅡ노말시티 6권


˝이 세계엔 더 이상 자연적인 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실망했었지.

이제 자연적인 건
그저 인간 정도일까.

그리고 그 인간마저...나
자신을 보면 더 이상 자연은
없다고 느껴졌어...˝

ㅡ노말시티 6권

˝이샤
사랑이란 건 상호적인 거 같으면서도
결국 일방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나의 감정일 뿐이고
그녀가 누구를 좋아하는 것 역시 그녀의 감정일 뿐

그게 서로 좋아하면 상호적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일방적인 자기 감정으로만 남는다는 것을...
알겠어?˝
ㅡ노말시티 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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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책으로도 굿~

이 책이 장소(런던)와 매체(물감)로 범위를 한정한 게 득이 된 것인지 실이 된 것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호크니 전시회에서도 느꼈지만 이 책이 다루는 시기(제2차 세계 대전부터 1970년 대 초)가 확실히 물감을 사용한 회화의 가장 극단까지 간 게 아니었나 싶다. 뒤샹 같은 개념 미술의 현실 모형, 워홀 같은 팝 아티스트들과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기계 활용, 디지털 문화로의 돌입은 표현의 세계를 확 바꿨다. 회화를 신화의 차원으로 밀어내게 된 거라고 할까. 이젠 회화에서 예전 같은 천재를 바라는 건 무리다.











이 책은 ‘그림은 사회적, 지적 변화뿐 아니라 개인의 감수성과 성격의 영향도 받는다‘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베이컨의 출현에는 역사적인 필연성이 없었다. 사실 어떤 지점에서 그의 심리적, 미학적 기질은 매우 특이했고 낮설었다. 그래서 그의 출현은 여전히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러나 베이컨이 없었다면, 또는 프로이트, 라일리, 호크니의 기여가 없었다면 이후의 런던 화단의 상황은 분명 상당히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모든 역사는 그 경계가 어느 정도 임의적이기 마련이다. 시간은 연속적이어서 특정 일자에 칼로 자르듯이 깔끔하게 시작되거나 끝나는 일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제멋대로 한없이 뻗어 나가는 것을 피하고자 책은 종종 말끔하게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이 다루는 제2차 세계 대전부터 1970년대초에 이르는 시기의 연대적 범위 설정은 정치적, 문화적인 측면에서 잘 알려진 영국사의 전환점과 상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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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10-14 0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붓만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아닌데도 대부분 사람은 여전히 붓으로 그려진 그림을 선호하고, 붓이 필요 없는 요즘 미술을 어려워해요. 제 생각인데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회화과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해보게 됩니다. ^^;;

AgalmA 2019-10-14 22:41   좋아요 0 | URL
그런 태도도 일종의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생각해요. 회화 하면 화가, 캔버스, 물감 그런 걸로 익숙했으니까요.
저도 타블렛 툴로 그리는 그림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창작이 잘 안 익혀져요^^;;
디지털이 워낙 표현 영역이 넓으니 창작자들이야 당연히 도전해보고 싶죠. 다만 전자책과 종이책의 병행처럼 종이 그림도 계속 이어가리라 봅니다. 사람의 습성이 워낙 질기잖아요ㅎ 아무리 디지털화가 되어도 손맛이라는 게 있어서 붓질 그림을 쉽게 버리진 못할 겁니다. 모두 디지털로 간다면 나는 아날로그다! 할 반동적 창작자가 나오는 게 또 예술이고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