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이전에 에리히 프롬이 적확히 지적했다. 그 이전엔 또 누가?

1.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발성을 통제되지 않은 충동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지만 자발성과 자발적 활동은 자유와 자기 존재의 특징이다.

2.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프랑스인들이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한다. 프랑스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사용했던 전략과 전술로 전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난 세대 혹은 지난 세기의 윤리 문제를 되돌아보고 과거의 악덕과 죄를 바라보며 우리가 이 악덕과 죄를 뛰어넘어서 기쁘다고 단언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윤리 문제도 대부분 해결되었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지금도 과거와 모습만 다를 뿐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은 윤리 문제에 봉착해 있다.

19세기의 악덕은 무엇이었을까? 첫째가 권위주의, 즉 맹목적 복종의 요구이다. 특히 아이들, 여성, 노동자들에게 권위의 명령에 고민하거나 질문을 제기하지 말고 맹목적으로 복종하라고 요구하였다. 불복종은 그 자체가 죄였다.

두 번째 악덕은 착취, 정확히 말해 야만적인 착취다. 우리는 19세기 직전까지도 상류층의 신사 숙녀들이 노예무역으로 돈을 벌고 콩고의 흑인들을 거리낌 없이 착취하였으며,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어린아이들을 공장에서 부려먹었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란다. 이러한 19세기의 윤리 문제와 악덕은 거의 잊고 살았기에 되돌아보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19세기의 세 번째 악덕은 성과 인종차별이다. 모두들 이런 불평등에 확실한 근거가 있고 신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기에 신의 말씀과 인간 차별 사이에 존재하는 확연한 모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세기의 네 번째 악덕은 탐욕과 축재다. 중산층에게는 저축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아끼고 절약하여 돈을 모으고 절대 쓰지 않으면 부자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그런 것들이 더 이상 덕목으로 꼽히지 않지만 19세기에는 덕목이었다.

19세기의 마지막 악덕은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이다. 전형적인 사례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과 관련한 프로이트의 말이다.

“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가? 그게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어떻게 그 요구를 달성할 것인가? … 내 가족은 모두 내 사랑을 자기들을 좋아한다는 증거로 알고 소중히 여기는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내 가족과 동등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내 가족에게 부당한 처사이다.”

프로이트는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명확히 표현할 수는 없어도 절감하던 사실을 용감하게 발설하였다. “나의 집은 나의 성이다. 나는 나다. 낯선 이여! 조심해라!”

3.
일단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비합리적 권위는 항상 공포와 감정적 복종에 바탕을 둔 압력 행사를 동반한다. 전제 국가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는 맹목적 복종의 권위이다. 이에 반하는 합리적 권위도 있다. 합리적 권위는 능력과 지식에 근거하며 비판을 허용하고, 그 본질상 감소하는 경향이 있으며, 복종과 마조히즘 같은 감정적 요인보다는 직업 능력처럼 한 인간의 능력에 대한 현실적 인정에 바탕을 둔 모든 종류의 권위를 말한다.
능력 있는 의사를 찾아갈 경우에 나는 그의 합리적 권위를 인정한다. 그가 자기 분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그의 처방에 따라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는 전혀 다른 동기에서 시작되고 전혀 다른 기능과 결과를 낳는 비합리적 권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권위이다.
또 한 가지, 공개적으로 행사하는 권위와 익명의 권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둘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개적 권위란 예를 들어 아버지가 조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마라.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도 알잖니.” 익명의 권위는 엄마가 조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엄마는 네가 그걸 하고 싶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단다.” 조니는 엄마의 목소리 톤에서 엄마가 무엇을 원하고 원치 않는지를 알아차린다. 조니는 엄마의 슬픔, 절망, 공포 등을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 때문에 엄마가 암묵적으로 그에게 암시한 말을 따르지 않을 경우 흠씬 두들겨 맞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가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첫 번째의 권위는 공개적이고 솔직하다. 두 번째의 권위는 익명이다. 관용과 양보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게임의 규칙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대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잘 안다. 우리는 무조건 공개적 권위를 택해야 한다. 그래야 권위의 요구에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저항했다. 공개적 권위는 대결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익명의 권위는 난공불락의 철벽이며 배후에서 작용하기에 누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게 만든다. 게임 규칙은 드러나 있지 않아서 감으로 느끼지만 확신할 근거는 없다. 19세기와 현대는 바로 이런 두 가지 종류의 권위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익명의 권위는 어떤 모습일까? 익명의 권위는 시장이요, 여론이며, 건강한 인간 이성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고 싶다는 소망, 무리에서 벗어나다가는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모두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동한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하지만 실제로 현대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착각한다.
우리는 착취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아주 많이 변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 마땅하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19세기에 존재하던 의미의 착취가 실제로 끝났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뿐 아니라,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야만적인 착취의 대상이던 식민지 주민들과 관련해서도 착취는 끝이 났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물질적 형태의 착취는 아직 완전히 사라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급격한 감소 추세로 미루어 볼 때 다음 세대에는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격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19세기에 노예가 될 위험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4.
프랑스어 이름 — ennui, malaise, la maladie du siècle(세기의 질병) — 은 이미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 프랑스인들은 그것에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우리가 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우리는 이 질병을 ‘신경증’이라 부른다.
(중략)
무엇을 질병으로 불러도 되는지를 주입당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분해서 죽겠다고, 삶이 무의미해서 죽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불면에 시달린다고, 아내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할 수 없어 괴롭다고, 술을 마시고 싶어 미치겠다고, 직장이 불만스럽다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허용되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질병의 표현 형태로 가능한 온갖 것들을 들먹인다.
그럼에도 불면과 음주와 직장에 대한 불만 토로는 세기의 질병의 다양한 측면에 불과할 뿐이다. 세기의 질병, 즉 인생의 무의미함은 인간이 사물로 변한 데 그 원인이 있다.

5.
이제 불평등이라는 세 번째 악덕과 그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몇 세대만 지나면 미국의 인종차별은 완전히 철폐될 것이다. 성차별 역시 철폐될 것이다. 물론 새로운 차별이 등장하겠지만 10년 전에 남편이 아내에게 당연히 요구하던 것들을 지금은 어떤 남편도 아내에게 요구할 수 없다. 오늘날의 공장에 10년 전만 해도 당연했던 말투와 대우로 노동자들을 대하는 공장장은 없다. 이런 의미의 차별은 실제로 폐지되었고, 그런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달성한 동등권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평등은 이런 종류의 동등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평등의 개념은 계몽주의 철학에서 절대주의 국가에 저항하며 발전하였다. 이마누엘 칸트의 말대로 모든 인간은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한에서 서로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목적이지 결코 수단이 아니며, 그 어떤 인간도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계몽주의 철학과 인문주의에서 말하는 평등의 의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평등을 동일하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같다는 것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등한 권리를 원한다면 타인들과 동일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강요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타인과 같아진다.
비획일주의자들에게 넓은 여지를 허용하는 것이 미국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비획일주의자들에게 일부러 높은 자리를 마련해주지는 않더라도 풍부한 활동의 여지는 주어진다. 이들이 감옥에 갈 위험도, 굶어죽을 위험도 없다. 그럼에도 타인과 같아지려는 경향은 사회적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인간은 자신을, 자신의 확신,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자기 고유의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타인들과 구분되지 않을 때 자신과 일치한다고 느낀다. 타인들과 순응하지 못하면 끔찍한 고독이 닥칠 것이며 집단에서 추방될 위험에 처할 것이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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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웃음이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대단한 학식인양 인용하는 사람이 있는지. 동물을 ‘영혼 없는 기계‘로 본 데카르트나 ‘얼빠진 상태‘로 본 하이데거도 대책없이 자기 도취적인 인간 중심주의 관점인 건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다윈도 수세에 몰릴 정도였으니 뭐.
행동 심리학자 스키너에게도 비우호적인 저자 프란스 드 발은 동물을 통해 우리 생물이 얼마나 유사한지 말하는데, 합리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이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이라고 생각했고, 많은 심리학자들은 아직도 즐거워서 혹은 무엇이 재미있어서 웃는 동물이 있다는 주장을 의심한다. 하지만 유인원이 슬랩스틱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아마도 가벼운 신체적 사고 장면 때문에 그럴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걸어오다가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면, 유인원은 처음에는 염려하여 긴장하는 반응을 보이지만, 그 사람이 멀쩡한 것으로 드러나면 분명한 안도감을 드러내며 웃는데,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가 보이는 반응과 같다. 흑표범 가면을 쓴 사람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마가 웃었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한 적이 있다. 보노보에게서도 비슷한 반응을 볼 수 있다.

만약 주변에 있는 남들이 비명을 지르고 낑낑거린다면, 그들은 위험에 처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거기서 벗어나는 게 현명한 행동이다. 고통의 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고음의 비명이 귀를 찢는다면, 논리적으로 당연한 행동은 귀를 막거나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동물들은 정반대 행동을 한다. 가까이 다가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하는데, 심지어 고통의 소리가 들릴락 말락 할 때조차도 그런 행동을 보인다. 이것은 남의 감정 상태에 관한 관심이다. 생쥐와 원숭이를 비롯해 많은 동물들이 곤경에 빠진 동물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행동은 이기적인 시나리오와 들어맞지 않으며, 1970년대와 1908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사회생물학 이론들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음을 증명한다.
자연을 서로 먹고 먹히는 살벌한 장소로 묘사하는 사회생물학 이론들에서는 모든 행동을 이기적 유전자로 설명했고,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경향을 ‘약육강식의 법칙’ 탓으로 돌렸다. 진정한 친절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는데, 위험을 무시하면서까지 남을 도울 만큼 어리석은 동물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행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신기루 아니면 ‘오작동’ 유전자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타주의자를 할퀴면, 피를 흘리는 위선자를 보게 될 것이다.”(Michael Ghiselin,1974)라는 표현은 그 시대의 정신을 잘 요약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면서 반복적으로 인용했다. 이 표현은 이타주의는 가짜가 분명하다는 뜻이다. 이 표현은 동정심 넘치는 낭만주의자와 희망에 부푼 사상가를 묵살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순진하게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었다. 우연치 않게도 이 시대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과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뿐만 아니라 고든 게코Gordon Gekko의 시대이기도 했다. 영화 <월스트리트Wall Street>에 나오는 인물로, 세상을 굴러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탐욕이라고 믿었다. 사람을 포함한 사회적 동물들이 자연 선택을 통해 만들어진 방식과 명백하게 어긋나는데도 불구하고 이 단순한 개념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떠받들었다.
다행히도 이제는 ‘이기적 유전자’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들리지 않는다. 행동은 언제나 이기적이라는 개념은 새로 쏟아져나온 데이터에 파묻혀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과학은 협력이, 적어도 내집단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우리 종의 가장 중요한 성향임을 확인해주었다.

우리의 태도는 상황에 따라 변하여,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동물인 동시에 가장 잔인한 동물이라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못하는데, 배려와 잔인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3세기에 카르타고의 초기 기독교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천국에 대해 아주 특이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지옥은 고문이 자행되는 장소인 반면, 천국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지옥을 구경할 수 있는 발코니이며, 그들은 그곳에서 저주받은 영혼들이 불 속에서 타는 모습을 보면서 즐긴다고 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생각인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고통받는 것보다 남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것을 더 힘들어한다. 내게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발코니가 지옥만큼이나 아주 불쾌한 곳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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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 새끼 쥐. 순수, 나는 그걸 이 단어로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삶에서 얻은 생태로 사람을 보자마자 달아나는 것보다 너는 낙엽들 속에서 장난을 한창 부리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 너를 보며 내게 잔뜩 배어있을 습속이 조금 서러웠다. 사람들이 벤치로 몰리자 그제야 너는 달아났다. 너의 소리가 남긴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설치류의 얼굴이 감정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지만, 자세한 연구를 통해 설치류도 양미간을 좁히고 귀를 낮추고 뺨을 부풀리는 행동을 통해 괴로움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른 설치류 동료는 이런 얼굴을 쉽게 알아보는데, 실험을 통해 고통을 나타내는 얼굴보다는 편안한 얼굴을 한 쥐 사진 옆에 앉기를 선호한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스위스 과학자들은 실험실 쥐들을 매일 간질이고 함께 놀아주는 과정을 포함한 긍정적 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회기가 끝날 때마다 조용한 순간에 쥐들의 얼굴을 분석했다. 그들은 단지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어떤 쥐가 긍정적 치료를 받았는지 구별할 수 있었는데, 분홍색이 더 뚜렷해지고 더 편안해 보이는 귀가 그 단서였다. 이 연구들은 설치류의 얼굴이 정적이라는 개념(동일한 포커페이스를 한 쥐들이 서로 다른 감정을 가졌다고 표현함으로써 쥐들을 조롱한 만화도 있었다)에 종지부를 찍었다.

감정은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이기도 하다. 감정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실험을 통해 사람은 감정이 충만한 사진과 이야기를 중립적인 이야기보다 훨씬 잘 기억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우리는 자신이 하거나 하려고 하는 거의 모든 일을 감정적 용어로 묘사하길 좋아한다. 결혼식은 낭만적이거나 축제처럼 흥겨운 사건이고, 장례식은 눈물바다가 되는 상황이며, 스포츠 경기는 결과에 따라 아주 즐거운 사건이거나 실망스러운 사건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도 동일한 편견을 갖고 있다. 야생 카푸친(꼬리감는원숭이)이 돌로 견과를 깨는 장면을 보여주는 인터넷 영상은 물소들이 새끼를 구하려고 사자를 내쫓는 영상보다 조회 수가 훨씬 적다. 물소들이 뿔로 사나운 포식 동물을 물리치는 동안 새끼는 포식 동물의 발톱에서 벗어난다. 두 영상 모두 인상적이고 흥미롭지만,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두 번째 영상이다. 우리는 새끼와 동질감을 느끼면서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어미와 다시 재회하는 장면을 보고 매우 기뻐한다. 사자에게는 이 결과가 전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편리하게도 눈을 감는다.
이것은 감정이 지닌 또 하나의 측면이다. 감정은 우리에게 어느 편을 들게 한다.
우리는 단지 감정에만 관심이 많은 게 아니다. 감정은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우리 사회를 조직화한다.

본질적으로 사람의 행동처럼 보이는 제스처가 영장류의 일반적인 패턴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그때 처음 알았다. 진화의 연결 관계는 작은 것들에서 가장 잘 드러날 때가 많다. 그런데 두려움을 느꼈을 때 얼마 없는 우리 몸의 털이 곤두서는 방식(소름)에서부터 남자들과 수컷 침팬지들이 기쁨에 넘쳤을 때 서로의 등을 찰싹 때리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나타내는 표현 중 약 90%가 이러한 연결 관계를 보여준다.

유인원을 바라볼 때, 우리만 공통의 역사를 보는 게 아니라, 우리를 쳐다보는 유인원도 그 역사를 본다. 만약 유인원이 우리에게 타임머신이라면, 우리 역시 유인원에게 타임머신이다.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감정은 별로 쓸모가 없다. 단순히 두려움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그 동물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두려움이 동물에게 달아나거나 숨거나 반격하도록 자극한다면, 그 동물의 목숨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요컨대 감정은 위험과 경쟁, 짝짓기 기회 등에 적응적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다. 감정은 행동을 촉발하기 쉽다. 우리 종은 나머지 영장류와 많은 감정을 공유하는데, 모두 대체로 동일한 행동 목록에 의존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설계된 신체로 표현되는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우리와 나머지 영장류는 비언어적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다. 우리 몸은 그들의 몸과, 그리고 그들의 몸은 우리의 몸과 완벽하게 대응하기 때문에, 상호 이해의 길은 바로 눈앞에 있다. 얀과 마마가 사람과 짐승으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개체로 만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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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군! 도서관에서 빌려만 보기엔 아까운 책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훨씬 더 어두워졌다. 그 이유는 첫째, 관련된 서류들은 아카이브에 들어가 있고, 서류와 실제 사실 간에, 그리고 계획된 목표와 실제 실행 들 간에 차이가 있는 한, 이것들은 수많은 세월 동안 기밀로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제 기밀서류라는 것 자체가 아예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문자와 작성자들을 배제하는 사실적 데이터 흐름이 해독할 수 이자들의 연쇄로서 네트워크화된 컴퓨터들 사이에서 순환하고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자를 단순히 무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소위 인간들과 함께 문자를 흡수하고 획득한 기술들은 그러한 사실적 데이터들의 묘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전에는 책들에서, 그 후에는 레코드판이나 영화 들로부터 흘러나왔던 데이터의 흐름은 점점 더 블랙홀 혹은 블랙박스 속으로 사라진다. 이 박스들은 인공지능으로서 우리와는 이별을 고하며, 이름을 알 수 없는 최고사령부로 향하는 도상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은 것은 단지 회상들, 말하자면 이야기들뿐이다. 어떻게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인지를, 어떤 책에도 더 이상 적혀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이제 책들을 위해 기록하려 한다. 한계영역까지 내몰린 낡은 매체들 또한 이러한 상황의 기호와 단서 들을 기록하기에 이제 충분히 민감해졌다. 따라서 마치 마주보는 두 개의 광학 매체의 단면에서처럼 패턴과 무아레가 나타난다. 신화, 과학 소설, 신탁과 같은.....
이 책은 그 이야기들 중 하나를 담고 있다. 이 책은 기술적 매체들의 새로움에 대해 예전 종이책이 기록하고 있는 구절과 텍스트 들을 모으고, 논평을 달고, 그것들을 서로 연결시킨다. 종이들중 많은 것들은 오래되거나 벌써 잊히기도 했다. 하지만 기술적 매체들의 태동기에 그것이 야기한 충격은 너무도 굉장했기 때문에,
문학은 그것을 오늘날의 그럴듯한 매체 다원주의에서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기록해 놓았다. 오늘날의 매체다원주의란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 같지만, 실상 세계 지배를 상속하는 과정에서 실리콘 밸리의 집적회로를 방해하지 않는 경우에 한에서만 그렇다. 그에 반해 이제야 그 독점적 지배가 끝나가고 있는 정보기술 중 하나는 이러한 정보를 정확하게 기록한다. 경악의 미학. 1880년에서 1920년사이에 축음기, 영화, 타자기라는 최초의 기술 매체들에 대하여 경악했던 작가들이 썼던 것들은, 그렇기 때문에 미래로서의 우리들의 현재를 보여주는 유령 사진들로서 기능한다. 소리, 시각, 문자를 저장하고 분리할 수 있었던, 처음에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던장치Gerit들과 더불어 정보의 기술화가 시작되었는데, 앞서 언급했던 이야기들에서 회고해보자면 그것은 오늘닐의 자기회귀적인 숫자들의 흐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기술의 역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은 분 명한 사실이다. 이 이야기들은 셀 수 없이 많을지리도eahllus, 정작숫자는 빠져 있기zahlenlos 때문이다. 여기에는 모든 혁신이 기반하고 있는 실재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수의 연쇄, 설계도, 회로도로부터는 절대 다시 문자가 생겨날 수 없으며,
생겨 나올 수 있는 것은 기계뿐이다. 기술 자체가 기술의 본질에대한 경험을 방해한다는 하이데거의 멋진 문장은 바로 이런 사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와 경험에 대한 하이데거의교과서적 혼동은 불필요한 것이다. 철학적인 본질에 대한 질문 대신 단순한 지식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서는 매체에 대해 서술한 작가들의 텍스트가 기반하고 인는 기술적, 역사적 데이터들이 함께 제시될 것이다. 그래야 낡은 건과 새로운 것이, 책과 그 책을 대신한 기술적 매체들이 실제 그들의모습인 정보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매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라는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책 제목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때마다의 지배적인정보기술이 모든 이해를 원격 조종하면서 자신에 대한 환상을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계도와 회로도에서는, 그것들이지금 인쇄기술을 통제하고 있는 아니면 전자계산기를 통제하고 있든 간에, 인간의 몸이라는 저 미지의 것에 대한 역사적 형상을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매체가 저장하고유통시킬 수 있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메시지나 내용이 아니다. 어떤 기술의 시대가 지속되는 기간 동안 정보기술이 소위 영혼들을 메시지와 내용으로 장식했을 뿐이며, 정작중요한 것은 (매클루언을 엄격하게 따르자면) 단지 회로들과 그 지각 가능성의 도식뿐이다.
(중략)
(헤라클레이토스를 자유롭게 인용하자면) 대부분의 기술적 고안물들을 만들어낸 것은 전쟁이다. 그리고 늦어도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의 『중력의 무지개Gravity‘sRainbow가 출간된 1973년 이래로, 진짜 전쟁은 사람이나 조국을둘러싸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 정보기술, 데이터흐름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우리 인간들을 생략해버린, 상황의 패턴과 무아레…..

오늘날의 상태는 부분적으로만 매체연합 체계이며, 모두 아직 매클루언으로 소급된다. 그가 기술했듯이, 하나의 매체의 내용은 언제나 다른 매체이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연합 안에는 영화와 라디오가 있고, 라디오라는 매체연합에는 레코드판과 테이프레코더가 있다. 영화에는 무성영화와 자기 녹음Magnetton이 있으며, 텍스트, 전화, 전보는 우편이라는 매체의 절반을 독점한다. 새로운 세기의 초반, 독일의 폰 리벤Robert von Lieben과 캘리포니아의 디 포리스트Lee De Forest가 제어 가능한 진공관을 발전시킨 후, 시그널을 증폭하고 전송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1930년대 이후 존재하는거대한 매체연합 체계는 이제 문자, 영화, 녹음기라는 세 저장 매체 모두를 장악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시그널을 연결하고 전송할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 체계들 사이에는 호환되지 않는 데이터채널과 상이한 데이터 포맷이 존재한다. 전기Elektrik는 아직 전자Elektronik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데이터 흐름의 스펙트럼 안에서 텔레비전과 라디오, 영화와 우편은 사람들의 감각에 다가 가기 위해 각각 제한된 개별 창문을 형성한다. 접근해 오는 미사일을 감지하는 적외선이나 레이더 음향은ㅡ미래의 광섬유와는 달리ㅡ아직 서로 다른 채널을 사용한다. 우리의 매체연합 체계들이유통시키는 것은 사람들이 전송하고 수신할 수 있는 단어와 소음,
이미지 들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데이터들을 산출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컴퓨터를 조정하여 임의의 알고리듬을 임의의 인터페이스 효과로 바꾸는, 그것도 사람들에게서 감각이 사라져버릴 때까지 그렇게 바꾸어버리는 아웃풋을 생산하지 않는다. 계산되는 것은단지 연합 체계 안에서 내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저장 매체가 가진 송신의 질質뿐이다. 텔레비전의 음질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극장 화면이 얼마나 자주 깜빡거리는지, 혹은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사랑스런 목소리가 어떤 주파수 대역에서 줄어드는지는, 기술자와 판매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각각의 타협에 의해 규제된다. 우리의 감각은 이러한 규제들에 좌우되는 종속변수들이다.

 축음기 Phonograph와 영상기록기Kinematograph – 그 이름이 문자에서 기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에 이르러 비로소 저장할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시간은 청각적인 것에서는 소음의 주파수 혼합체로, 광학적인 것에서는 연속되는 단일 이미지들의 운동으로 저장되었다. 모든 예술은 시간에서 그 한계를 갖는다. 일상의 데이터 흐름이 이미지나 기호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이 그 흐름을 정지시켜야 한다. 예술에서 스타일이라 불리는 것은 이러한 탐색과 선택의 접속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를 사용하 여 연속적인, 즉 시간적으로 배열한 데이터 흐름을 운영하는 예술들도 이러한 접속 작업의 지배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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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0-16 0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AgalmA님의 글을 북플에서 못봐서 바쁘신가 했는데, 제가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네요. 과거보다 기술이 발전해 매체들의 음질과 화질이 개선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보다 분명한 화질과 음질이 우리의 감각을 더 자극하면서 실재계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상징계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상징계의 암호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이들 우 힘이 모두 작동하게 되는 것인지 물음을 던져 봅니다.^^:)

AgalmA 2019-10-16 01:06   좋아요 2 | URL
국내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나꼼수 등을 필두로 팟캐스트가 한참 붐이다가 요즘은 유튜브가 압도적이 되었잖아요? 예전 팟캐스트가 페이스북 같은 문자 체계 서브 수단을 짝으로 했다면 요즘은 영상 체계의 유튜브로 아예 다 넘어가려고 하죠. 이건 단순히 유튜브라는 매체의 성질 때문만은 아니죠. 우리는 되도록이면 좀더 쉬우면서 즉각적인 매체를 더 선호하는 거 같습니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더 강력한 ‘통합매체‘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도 매체의 분화라기보다 통합의 성질이라 봐야겠죠.
아마 우리는 상징계와 실재계의 통합을 바라는 게 아닐까요.
이 세계를 신이 만든 아름다운 세계로 본 것처럼, 내가 사는 이 세계를 그리 만들고 싶은 지도요. 지상에서 (나의) 천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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