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효 - 성난 도시로부터 멀리 [일반반]
우효 (OOHYO) 노래 / 카카오 M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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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하루에 한 번씩은 들어줘야(특히 출근길)... 「A Good Day」도 good(특히 저녁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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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산타 리타 - 1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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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한 깊은 맛을 내서 아이스 핸드드립으로 먹기 좋아요. 이름에 괜히 버본을 붙인 게 아닌 듯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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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O.S.T
정재일 작곡 / 스톤뮤직엔터테인먼트(Stone Music Ent.)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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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ost에서「짜파구리」가 제일 좋고 그다음은 「물바다」~ 엔딩곡「소주 한 잔」보컬이 전문적이지 않다 싶었는데 배우 최우식 씨가 부른 거였군요ㅎ 봉준호 감독의 작사도 멋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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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바예호적으로 : 우리는 무엇을 나누는가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그저 하는 일이라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음습한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공평하고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노동의 결과로

서서히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며,

상사이며, 부하인 존재.

세월의 도표는 상사의 명패에

빠짐없이 투시되지만,

까마득한 그 옛날부터

백성의 굶주린 방정식에 대해

상사의 눈은 반만 열려 있음을 고려해볼 때...

인간이 때로 생각에 잠겨

울고 싶어 하며, 자신을 하나의 물건처럼

쉽사리 내팽개치고,

훌륭한 목수도 되고, 땀 흘리고, 죽이고,

그러고도 노래하고, 밥 먹고, 단추 채운다는 것을

어렵잖게 이해한다고 할 때...

인간이 진정

하나의 동물이기는 하나, 고개를 돌릴 때

그의 슬픔이 내 뇌리에 박힌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인간이 가진 물건, 변기,

절망, 자신의 잔인한 하루를 마감하면서

그 하루를 지우는 존재임을 생각해볼 때...

내가 사랑함을 알고,

사랑하기에 미워하는데도,

인간은 내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인간의 모든 서류를 살펴볼 때,

아주 조그맣게 태어났음을 증명하는 서류까지

안경을 써가며 볼 때...

손짓을 하자 내게

온다.

나는 감동에 겨워 그를 얼싸안는다.

어쩌겠는가? 그저 감동, 감동에 겨울 뿐...

세사르 바예호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시 전문

 

 

 

봉준호 《기생충》을 보고 나서 바예호의 시를 떠올렸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슬픔과 기침을 숨길 수 없지만 생각해보면 숨길 수 없는 게 참 많다. 이 영화에서는 가난의 징표 '냄새'를 가장 숨길 수 없었다. 전원 백수 가족은 외양, 신분, 표정 등 거의 모든 걸 감출 수 있었지만 그들의 반지하 집 냄새가 체취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다송(박사장 집 아들)의 여유롭고 호화로운 생일 파티장을 바라보며 기우(전원백수 가족의 장남)는 다혜(박사장 집 딸)에게 묻는다. 내가 이곳에 어울리느냐고. 그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지만, 기택(전원백수 가족의 가장)은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을 더 많이 겪어본 터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냄새)의 모욕에서 결국 폭발하고 만다. 끝까지 숨기고 싶어서 수석(水石)을 들고 지하로 내려갔던 기우와 끝까지 숨길 수 없어서 칼을 들고 지상에서 돌진하던 기택. 기우의 계획은 실패했기에 다시 살아갈 기회가 주어졌지만 기택의 무계획은 사건을 일으키며 언제 지상으로 올라갈지 모르는 더 깊은 지옥이 주어졌다.

※ 아이들 이름에 한자 뜻을 담은 듯.

부유한 집 아이들(다혜, 다송) 이름 돌림자엔 多(많을 다)

백수 가족 아이들(기우, 기정) 이름 돌림자엔 飢(굶주릴 기)

 

 

 

이들의 삶은 돈의 유무로 영향을 받지만 각각의 죽음은 완전히 다른 연유에 기인한다.

수석 보물이 되기도 하고 흉기가 되거나 무용지물이 되기도 하는 돌처럼 인간도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로 분류된다. 서로를 공손히 떠받들기도 하지만 발길질로 처박기도 한다. 가난한 자들끼리도 서로의 가난과 양심을 저울질한다. 격차는 전 세계적 고민거리다. 봉준호 감독의 관점은 사람을 단순한 이분법 도식으로 나눠서 보지 않는 미덕이 있다. 흙수저/금수저 운운하며 자신을 구획 짓는 사람들은 프레임에 갇혀 있다. 똑같이 1남 1녀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들 관계 속에는 다양한 결이 있다. 부와 가난의 척도로 살고 바라볼 때 인간의 가치는 얼마나 빈약해지는가. 부유해서 성격이 좋고 가난해서 성격이 나쁘다고 재단할 때 우리는 세상을 더 나쁘게 몰아가는 거다. 냄새 같은 특정한 이유로 즉각 혐오와 차별을 만들 때 우리는 세상을 더 극도로 몰아가는 거다(인종 차별에서도 냄새가 얼마나 강력한지 생각해보라). 기택은 아내 사랑의 질문으로 부로써 가릴 수 없는 박 사장의 치부를 꼬집기도 한다. 전원 백수 가족은 죄책감과 연민으로 문광(전 입주 가사도우미) 가족을 틈틈이 걱정한다. 하지만 상황 타개가 여의치 않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선을 부와 권력으로 제압하려는 박 사장처럼 우리의 소통 기력도 점점 고갈되어 가는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은 수직으로 붕괴되어가는 세상에서 가족 서사로 세상에 대응하는 전략을 여러 전작들에서 보여 줬다. 두 사람만의 관계(연애)에 천착 일색인 영화 서사에서 더 고심하는 발화다. '그들은 만났고 헤어졌다'가 아닌 봉 감독은 '이렇게 다른 우리들이 모여 사는데 어떻게 조화로울 것인가'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다자 관계의 기본인 가족조차 무너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 이 세계는 여러 다자 관계의 불화,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지구 입장에서는 많은 걸 파괴하고 고갈시키는 인간 종 자체가 기생충이다. 돈을 주고 의식주의 모든 부분에서 도우미를 쓰는 이들은 기생하는 게 아닌가?

 

 

 

파탄 후 기우는 괴로움을 넘어 웃겨서 웃고 또 웃는다. 기택은 더더 지하로 내몰려 그의 웃음과 울음은 표출조차 힘들어진다. 이게 인간의 진짜 빈곤 아닌지. 우리의 웃음은 기반이 불안하고 슬픔은 물속 돌처럼 묵직해진다. 인간의 삶은 대책 없는 떠내려감, 치솟는 역류, 숨 막히는 지하 속에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희생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의 인간 됨을 얼마나 더 놓치려 하는 걸까. 감동에 겨워 얼싸안을 수 있는 존재를 우리는 하나하나 잃어가고 있다. 가족도 친구도 나 자신도. 당신은 자신 있나.

 

 

 

 

 

 

 

 

 

 

● 도스또예프스끼적으로 : 어떤 것도 시작하지 않았고 끝내지 않았기에

 

"내가 자신을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내 전생애를 통해 어떤 것도 시작하지 않았고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ㅡ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지하로부터의 수기』

 

 

지상도 겨우 반만 볼 수 있는 창을 통해 우리는 반지하에 사는 전원 백수 가족의 시점으로 이 영화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저렇지 않다는 우월감을 누리며. 공짜 와이파이를 찾으려 분주한 아이들과 일감을 손에 놓지 않는 아내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며 어기적 일어나는 기택은 관계에서도 공간에서도 자기 내면에서도 지하생활자다. 볼품없고 능력 없는 중년이든 상관없이 시시때때로 물어오는 가장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타인에게 협력하거나 기대는 게 최선이다. 기우의 과외 채용을 위해 기정이 위조한 증명서를 보며 잘못을 가리기보다 위조문서학과에 합격할 실력이라며 칭찬하고, 아들에게 계획이 있다는 것을 신기해하는 무기력한 자다. 피자 박스 접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는 재주로 뭘 해도 안 되니 어쩌란 말인가. 도스또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는 부양할 가족도 없었고 유산이라도 받아 칩거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기택이 가족에게 기생하듯 가족에게도 기생할 대상이 나타났다. 기우부터 차례차례 백수 가족은 박 사장의 집으로 잠입해 들어간다. 다혜의 일기장부터 다송의 트라우마까지 백수 가족은 숙주의 속속들이 파악해갔다. 다혜가 동생 다송의 천재병 흉내를 비난하지만 전원 백수 가족의 음흉한 사기와 서로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우리는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박 사장 저택에 비밀스럽게 기생하는 가족은 백수 가족만이 아니었다. 그들보다 더 깊은 곳에서 더 처참히 기생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숙주를 뺏긴 분노와 뺏기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기생하는 자들끼리 사생결단 혈투가 벌어진다. 한바탕 숙주 쟁탈전을 치르고, 돌아온 숙주가 잠들 때까지 수치를 뒤집어 쓴 채 쥐 죽은 듯이 기다렸다 검은 발바닥으로 기어서 오물 속을 떠내려가듯 헤집고 돌아가지만 백수 가족을 기다리는 건 물속에 잠긴 집이다. 그들에게는 누추하고 냄새나는 집조차 보장되지 않는다. “만약에 젖지 않는 것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라면” 닭장이든 궁전이든 상관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사람들이 단지 그것만을 위해 살고 있지 않으며, 만약 사람이 살려고 한다면 그는 저택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인간은 “두 다리를 가진 감사할 줄 모르는 존재”, “가장 큰 결함은 끝이 없는 무례함.” 그에 더해 도스또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와 기택은 마조히스트적인 “무기력”에 사로잡혔다는 것. 

 

 

 

"그래서 나는 바보 같은 기행에 몰두하게 되었다. 정말이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당신 자신들을 봐라, 신사 양반들, 그러면 당신은 그렇군, 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삶 비슷한 것을 살기 위해, 나는 모험들을 생각해 냈으며, 나 자신의 삶을 만들어 냈다. 얼마나 많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모욕감을 느끼곤 했는가. 사람은 일반적으로 이유 없이 모욕감을 느낀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고, 일부러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나, 내가 당신에게 확언하건대, 끝내 그는 진짜로 모욕감을 느끼는 데까지 다다른다. 인생 내내 나는 어째서인지 이 같은 재주를 부리는 데 끌려 있었다. 나는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한 번은, 심지어 두 번까지도 나는 사랑에 빠지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고통을 받았다. 신사 양반, 확신한다. 내 영혼 깊은 바로 그곳에서도 나는 내가 고통을 받고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고통을 받았고, 정말 진짜로 그랬다. 나는 시기하게 되었고, 이성을 잃었다.……. 그리고 신사 양반, 모든 것은 권태, 바로 그 권태 때문이었다. 무력감이 억누른다. 의식의 직접적이며 당연하고 솔직한 결말은 정말 이 무기력이다. 즉 의식적으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것이다."

                  

ㅡ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지하로부터의 수기』

 

 

책과 낭만주의 사상에 빠져 현실과 대인 관계에서 모두 실패한 도스또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는 그의 모욕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 주려 한 유일한 구원자 창녀에게 화대로 5루블을 쥐여주며 모욕한 뒤 자신의 지하로 자발적으로 숨어들었다. 아들 기우가 계획을 묻자 무계획에 대한 장광설을 쏟는 기택은 자신의 모욕을 다른 이에게 투사해 살인으로 대갚음하고 타인이 만든 지하로 숨어들었다. 숨을 곳조차 내 것이 아니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는 20년을 지하에서 살았고(현재 40세)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기택은? 기우가 저택을 사지 않는 이상 그가 자발적으로 나올 의사는 없어 보인다. 지하생활자가 세상의 가치, 이성과 싸우며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스스로를 정화하는 미치광이 수정궁을 완성했다면 기택은 무엇을 완성할 것인가. 열정이 실패로 돌아오고 실의를 비겁으로 바꾼 뒤 삶 전체를 무기력의 지하 세계로 끌고 들어가 이제 마지막 생존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기생하는 방법을 끝없이 연구할 것인가. 생각이 있어도 없어도 자신의 몰락을 배태하는 두 사람. 사실 이것은 많은 인간의 모습이지 않은지. 최소한 나는 여기서 예외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렇기에 도스또예프스키와 봉준호 같은 예술가들이 내세우는 반(反) 주인공들을 거듭 목도하게 되리라. 모르스 부호로, 수기로, 소설로, 영화로 질기게 이어지며.

 

"〈수기〉를 바로 여기서 끝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것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가 실수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나는 이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내내 부끄럽게 느끼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더 이상 문학이 아니라 교화시키기 위한 처벌이다. 결국 구석에서의 도덕적 타락과 적당한 환경의 결핍, 살아 있는 것들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지하에서의 자신의 과장된 악의 때문에 어떻게 내가 내 인생을 소진했는가에 관하여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신에게 맹세코 흥미롭지 않다. 소설은 주인공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 일부러 반(反)주인공의 모든 특징들을 모아 두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불쾌한 인상들을 남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삶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며, 우리 모두는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정도에 따라 비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토록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참된 〈실제의 삶〉에 대하여 사람들이 상기시킬 때, 때때로 참된 〈실제의 삶〉에 어떤 혐오감 같은 것을 느끼며 그래서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 우리는 참된 〈실제의 삶〉을 거의 노동이나 근무 같은 것으로 생각할 정도가 되어 있으며 우리 모두는 속으로 책에 씌어진 대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때때로 소란을 피우며, 왜 변덕을 부리며, 왜 바라는 것일까? 우리 자신도 무엇 때문인지 모른다. 만약 우리의 변덕스러운 소원들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더 나쁘게 될 그런 위인들이다. 그래, 한번 시험해 보자, 우리에게 예를 들면 더 많은 독립성을 부여하라, 우리들 중 누구라도 손을 풀어 줘 봐라, 우리의 행동 영역을 확장시켜 봐라, 감독을 약하게 해봐라, 그러면 우리는 아마도…. 나는 당신에게 확언한다. 우리는 곧 다시 한번 감독받게 해달라고 빌게 될 것이다. 나는 아마도 이 말 때문에 당신이 내게 화를 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은 내게 소리를 지를 것이다. 당신은 발을 구를 것이다. 「네 이야기만 해라, 지하에서의 너의 불쌍한 삶을, 그러나 감히 우리 모두라고는 말하지 마라.」 잠깐만, 신사 양반, 나는 그 모두라는 표현으로 나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내가 관련되어 있는 한, 나는 단지 내 인생에서 당신이 감히 절반도 실행할 엄두도 못 낸 것을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당신은 당신의 비겁함을 상식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당신 자신을 속이면서, 그것에 의해 위안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 비하면, 내가 당신보다 더욱더 〈살아 있다〉는 결론이 된다. 자세히 봐라! 결국 오늘날 우리는 정확히 이 〈살아 있는〉 삶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며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를 혼자 내버려둬 봐라, 책 없이. 그러면 우리는 곧 혼란에 빠질 것이고 길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합류해야 할지도,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도,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하는지도, 무엇을 존경해야 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심지어 인간들이, 진정한 자신의 육체와 피를 가진 그런 인간들이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을 치욕으로 여기며 전례가 없는 일반적인 인간 같은 것이 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우리는 사산아들이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아버지들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더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한 취향을 발전시키고 있다. 곧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관념으로부터 태어나는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 그러나 충분하다. 나는 더 이상 〈지하에서〉 쓰는 것을 원치 않는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지하로부터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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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05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이런... 「기생충」은 스포에 유의하라 했는데 안 봐서 모르지만 치명적인 스포가 있는 건 아니겠지요? 「유쥬얼 서스펙트」에서 범인과 「식스 센스」에서 누가 귀신인지 알고 본 경험이 있다보니, 이번에도 그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ㅋㅋ
 
한번은, - 빔 벤더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빔 벤더스 지음, 이동준 옮김 / 이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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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시간 속의 뭔가를 도려내 다른 형태로 지속될 수 있도록

전이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으로부터 도려낸 그 무엇이

카메라 '앞'에 놓여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

사진 찍기는 양방향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다.

하나는 앞에서, 또 하나는 뒤에서.

그렇다. '뒤'와도 상관이 있다.

이러한 비유는 그렇게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마치 사냥꾼이 눈 '앞'의 맹수를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듯,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 반동으로 몸이 '뒤'로 밀려나듯,

사진을 찍는 사람 역시 셔터를 누르는 순간, '뒤'로 튕겨 나간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말이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은 언제나 이중적인 상을 갖게 된다.

사진은 찍히는 피사체를 보여주게 마련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뒤에 있는 것'도 보여준다.

.

.

'시간을 붙잡았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진을 통해 매번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흐른다는 점이 새로이 증명된다는 데 있다.

모든 사진은 우리 자신의 유한함을 상기시키는 하나의 기억이다.

모든 사진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포착된 모든 영상은 고귀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고,

사진을 찍는 이의 시선 그 이상의 것이며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다.

말하자면, 모든 사진은 시간의 저편에서, 신의 시야 밖에서

이루어지는 창조행위다.

.

.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다"란 속담이 있다.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땐 이 말이 꽤 명쾌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적어도 사진에 있어서 이 말은 옳지 않다.

사진에 있어서 한 번이란,

정말로 오직 단 한 번을 의미한다. 

 

 

빔 벤더스는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일곱 살 때 처음 사진을 찍었고 열두 살에 자신만의 암실을 만들 정도로 열정적인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첫 번째 사진 전시를 1986년에 열었고 『Written in the West』로 1987년 첫 사진집을 낸 뒤 1992년까지 세계 순회 사진전을 가졌다. 이 책은 그의 두 번째 사진집으로, <파리, 텍사스>(1984, 칸영화제 그랑프리), <베를린 천사의 시>(1987, 칸 영화제 감독상) 이후 정체기를 겪다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으로 다시 각광을 받기 전인 1994년 출간했다.

그가 보여주는 황량함과 기이함, '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아름다운 것'(p10)을 나는 내내 사랑했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다. 그 시선은 꼭 내가 보는 풍경 같았다. 그런 것을 잡아내는 사람이 예술가다.

 

"일정한 속도로 걷다 보면 멈춰 서는 것마저 부담스러워진다"(p140)는 그의 말에 공감한다. 애리조나 주의 길라 벤드에서 지난 몇 년 동안 단 한 명의 손님도 찾지 않았던 낡은 호텔을 발견하는 눈썰미며, 그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길의 왕'답게 그는 1978년 발리섬의 우붓을 처음 갔다. 1990년 두 번째 방문에서 그는 낙원이 사라졌다고 생각해 발리 사진을 단 한 장도 찍지 않았다고 했다. 난 가지도 못했는데 낙원이 그렇게도 빨리 사라지면 😭

 

벤더스가 교우한 감독, 작가, 연예인들의 사진과 작업 풍경을 보는 것도 재밌다. 러시아 공항 화장실에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을 우연히 만나고, 그랜드캐년 사막에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우연히 만나는 것도 인연이어서 가능한 거겠지ㅎ

10대부터 미국 대중문화에 깊이 빠졌던 벤더스는 그의 <미국인 친구>(1977) 영화를 본 코폴라 감독의 초청으로 할리우드에 가게 된다. 소설가이자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한 대실 해밋에 대한 영화 제작에 열정을 쏟았는데, 해밋이 살았던 건물에서 살다가 밤마다 소방차가 출동하는 소리에 놀라 결국 이사를 했다거나, 해밋 베이커리의 시계를 보고 애걸복걸하며 사려 했지만 실패해 사진만 찍고 만 일(사진을 보니 갖고 싶어 할 만도ㅋ 굿즈 마니아로서 매우 공감됨ㅋ), 해밋의 단골 식당이었던 곳에서 그도 단골이 된 일 등 재미난 일화가 많다. <해밋>(1982) 영화 제작은 순탄치 않아 이를 계기로 할리우드의 삭막한 영화제작 환경을 성토한 <사물의 상태>(1982)를 찍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그가 느낀 미국의 인상(자아 도취에 빠진 채 고향을 잃은 사람들(덴버),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적인 형상인 늙은 카우보이들(텍사스), 레고 도시(휴스턴))은 지금도 적확하다. 1997년에는 15년 만에 할리우드로 돌아가 할리우드의 거물급 제작자가 납치당하는 이야기를 통해 상품화된 폭력과 현실의 폭력 사이를 다룬 <폭력의 종말>을 제작하기도 했다. 쇠락하고 황량한 미국 서부 풍경에 대한 그의 사랑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샘 셰퍼드를 주인공으로 한 <돈 컴 노킹>(2005)으로 남겼다. 사람은 잘 기억하지 못해도 자신이 묵었던 수많은 호텔은 정확히 기억한다고 말하는 그이기에 2000년 <밀리언달러 호텔>을 영화화한 것도 당연한 결과이겠다.

이 책의 옮긴이가 당부했듯이 이 사진집에 담긴 사진작가로서의 벤더스는 영화로 재현되기도 했다. 2008년 벤더스는 유명 사진작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회의를 담은 <팔레르모 슈팅>을 제작했다.

 

그의 사진은 관찰자의 권력적 시선이 아니라 단 한 번의 순간을 마주한 지구 여행자의 자유 추구와 인간미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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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5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5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06-05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라는 이미지만으로 의미를 읽기 위해서는 언어 아닌 언어를 익혀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