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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을 예로 들자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는처음에 터널 안으로 들어갈 때와 나중에 나올 때가 완전히 똑같습니다. 어머니의 손에 달라붙어서 두려워하는 얼굴을 하고 걷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것을 보고 전혀 성장하지 않은 거 아니냐고 하는 비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아무리 의지할 만하지 않아도, 보통 초등학생이 부모에게서 떨어져서 온전히 자립하는 것은불가능한 일입니다.
때가 될 때까지 아이는 부모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서둘러서 성장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빨리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것은 단지 부모에 대한 불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 P100

일본의 영화계에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쟈리모노(1), 유아물)‘라고 했었습니다. 이때 입장료를 내는 것은 어른이므로, 유아물은 주로 어른들에게 지명도가 높은 명작, 예를 들어 집 없는 아이』 같은 것들이 선호되었지요. 그런 작품에다가 작은 동물이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어린이용 웃기기 장면을 추가하여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만들면 된다고 하는 발상이 누름돌같이 우리 머리 위에 얹혀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유아물류의 발상이 싫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내게는
"오리지널로 만들게 해 달라."라고 말할 만큼의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 P106

간단히 말해서 아동문학이란 "어떻게 해도 안 돼,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야."라는 엄격하고 비판적인 문학과는 달리, "태어나길 잘했구나."라고 말하는 문학입니다. 살아 있길 잘했구나, 살아도돼, 하는 식으로 아이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이 아동문학이 태어난 기본적인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 P163

‘아이들을 향해 절망을 말하지 마라‘는 겁니다. 아이들 앞에 섰을때, 우리는 그런 입장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통 때 아무리 니힐리즘과 데카당스로 넘치는 이야기를 떠들어댔어도, 눈앞에 아이가 있을 때는, ‘이 아이가 태어난 것을 소용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는 법입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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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미쓰다 신조의 소설.
잘린 머리나 도조 겐야 시리즈를 읽지 않았지만 1950년대 말 일본 대학 도서관 지하의 민속자료 연구실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괴담 나누기는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리즈를, 교수와 문학과 학생을 중심의 ‘추리‘는 기타무라 가오루 시리즈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그 공포와 폭력의 수위는 매우 높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역할을 갖고 있다. 민속학자 도조 겐야는 이야기를 채집해서 (영적 능력이 있는) 여학생 도쇼 아이에게 편지나 전화로 전달한다. 아이는 대학원생이자 작가인 덴큐 마히토에게 구두로 풀어 전한다. 그리고 대화하듯 덴큐는 아이에게 기담의 수수께끼, 혹은 범죄의 배후를 밝혀낸다.

지방 어느 산골의 살인과 요괴의 출현은 지역사람들의 구전(내가 봤슈)과 교수, 아이의 개입을 거쳐 덴큐에 닿고 그의 추리 기록이 다시 미쓰다 신조, 김은모 역자의 손을 지나 독자인 나에 와 닿았다. 그러니 애초의 그 입 찢어진 귀신이나 목없는 혹은, 잘린 목의 악한 기운이나 두꺼비인간 없이 안전하게 읽을 수 있다. 그러니 살해된 피해자들에 대해 연민은 옅어지고 귀신/망자 혹은 살해범들을 향한 궁금증만 커진다.

책 마지막은 미쓰다 신조의 시리즈로 연결된다. 이미 작가의 팬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책이다. 난 범죄 해석이 너무 억지스러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범인을 밝혀낸 다음의 일 처리도 석연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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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전화번호를 교환한다. 그러고는 일어서서나간다. 여자는 젊고 아주 예쁘다. 남자는 중년이며 겉모습이 트렌디하다. 어쩌면 그 남자는 자신이 이 카페에서 젊고 예쁜 여자들을 유혹하는 습관이 있던 사르트르쯤 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 P47

글쓰기는 허구라는 조건만 충족시키면 <용납될 수>있는가? 여기에서처럼 후회의 부인을 통해 범죄를 정당화함으로써 글쓰기가 범죄를 더 악화하지 않는가?
다비드 본의 그 글귀를 본 이상, 선택해야 한다. 글쓰기는 윤리 밖에 위치한다. 혹은 글쓰기는 계속 윤리의 영역에 속한다. - P90

(일식)
검은색 원반이 태양 앞을 미끄러지듯 지나 서서히 줄어드는 모습을 계속 지켜봤다. 1시 40분, 달이 태양 앞을 완전히 지나갔다. 서러운 느낌, 어린 시절 영화나 바닷가에서의 하루가 끝나 버리면 찾아들던 바로 그 감정. 내게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공허감.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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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Hardcover) - 버락 오바마 2024 여름 독서 리스트
Percival Everett / Doubleday Books / 2024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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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재해석. 허크의 길동무(?) 노예 짐이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

멍청해 보인 그가 실은 볼테르를 읽고 ‘표준어’를 사용할 줄 안다? 주인 판사의 서재에서 몰래 읽으며 쌓은 문해력으로 그가 도망길에 절실하게 원하는 물건은 … 종이와 필기구다? 언어와 지식이 갖는 힘을 강조하며 계급을 비틀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 모든건 숨기고 짐과 동료 노예들은 백인이 원하는 흑인을 연기하며 목숨을 이어간다.그들은 잔인한 노예제와 백인의 가식을 꿰뚫어 보고 얄팍한 사기꾼들을 극한의 인내심을 갖고 (터뜨리며) 상대한다.

트웨인의 소설에서 위트와 사회 고발을 가져오지만 후반부에선 수동적 ‘자유’ 대신 투쟁을, 폭력과 복수를, 무엇보다 자유와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짐/제임스가 나온다. 무섭게 웃기고 무겁게 강렬하다. 허크와의 관계를 ‘새롭게’ 풀어낸 부분과 여성 인물들이 소비되는 방식이 아쉬워서 (그건 토니 모리슨을 더 읽도록하자) 별 하나를 감히 뺐다. 번역된다면 노예 말투는 또 충청 지역 사투리일 것인가. 아 그건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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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위츠 1권이 경쾌한 홈즈 분위기였고 2권은 살짝 지루했다면 이번 3권은 클래식한 애거서 크리스티에 가깝다.

호로위츠는 호손을 주인공으로 하는 “리얼” 범죄 시리즈 1권 출판 직전에 (2권은 아직 원고를 쓰는 중) 홍보차 작은섬의 문학패스티벌에 호손과 함께 간다. 그런데 그 조용하고 평화로운 섬은 겉모습과 다른 곳이었고 설상가상으로 호손의 원수가 주최측 사람이다. 불편하고 삐걱거리는 행사 진행 중 페스티벌의 큰손 후원자가 살해당한다. 그런데 그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워낙 조용한 섬이라 옆 섬 (건지 아일랜드)에서 형사가 파견오길 기다리며 호손이 사람들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시골 형사 게으른 능구랭이랑 수사 협조를 하는 사이, 또 한 사람이 죽는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번 페스티벌에 초대된 작가들이 하나같이 사연이 있는 것이었던 것이었던 거시다. 살인자를 밝힐 때까지 아무도 섬을 나갈 수 없다! (코난이 나와도 놀랍지 않을 설정)

마지막에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데 그 전에 독자는 (호로위츠도 덩달아) 여러 명의 용의자를 세웠다 지웠다 하게된다. 술도 안하고 사회성도 결여되어 보이며 상황을 잘 이용하는 호손이라 호감은 덜가지만 이런 그가 독서모임에 참여한다는게 재미있다. 이번 3권 출장길에 그는 세라 워터스의 ˝리틀 스트레인저˝를 읽는다. 작은 섬마을과 환경/시대의 변화를 소재로 삼는다는 면에서 연결점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단 ˝노인과 바다˝ 인용이 도드라졌다.

He‘d been defeated when we walked in. Now he was destroyed. (253)

이 destroyed 된 사람은 후에 호로위츠가 호손의 정체에 대한 의심을 키우게 만든다. 그게 아마 4권에서 좀 더 나오지 않을까. 2권에서 관둘까 하다가 이제 4권 The Twist of a knife을 읽을 결심을 한다.

공식대로 진행되는 소설이고 트릭도 별거 없는데 미쟝센에 신경쓰는 범인이나 탐정이 친근하다. 억지로 비비 꼬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고. 은근 나쁜놈 혼내주니까 시원하… 면 안된다지만, 쨋든 여름에는 탐정 소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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