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400. 토요일 (이언 메큐언)
건조한 문장으로 토요일 새벽이 열렸고, 신경외과 의사인 헨리는 무심한듯 새벽하늘을 바라보다 비행기의 불시착을 목격한다. 이 사건이 불길한 시작인듯,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계속되는 문장을 따라갔다. 이미 작가의 손이 내 목을 감아쥐고 있다.
토요일 단 하루의 시간이 소설의 전부다. 하지만 그 하루로 수렴된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미래가, 런던의 한 복판에서 중동과 미국 정세로 까지 뻗어나가며 서로 얽혀서 여러 만남과 사건을 이루어낸다. 그 정점에 백스터가 얼굴을 움찍거리며 서 있다. 한 문장을 더 읽어나가기가 힘겨울 지경인데 냉정하고 차분하게 자기 리듬을 지키는 헨리, 아니 이언 메큐언은 악당에게 선처를 구상하는 신경정신외과의 이기도 하고, 독자의 몇 시간을 철저히 장악한 사기꾼이기도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언 메큐언의 소설을 읽는다. 그에게 내 시간을 맡기고 수술실의 헨리의 손 아래에 썰려나가는 두개골을 보고, 기억이 부서진 헨리의 어머니의 수영복을 떠올린다. 유전자 몇 개의 운 나쁜 나열로 자신의 신체와 감정도 조절하지 못하는 백스터를 어떻게 할 것인가. 헨리의 지나치게 운이 나빴던 혹은 여느 날과 같이 저문 바로 그 토요일은 어떤건가.
나의 토요일. 한 블록 건너 상가 앞의 교통사고로 꽉 막힌 찻길을 바라보며 도서관에 다녀왔다. 막내가 커다랗게 틀어놓은 만화 주제가를 들으면서, 손발이 뻣뻣해지도록 긴장되는 상태로 책을 읽었다. 잠시 세탁기를 조정하는 사이, 택배가 왔는지 막내가 문을 열었다.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일렀는데. 순간 가슴이 서늘하게 얼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