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14장에서 스포는 이미 당했고 저자인 조지 엘리엇의 개인사를 소설에 투사해 해석하는 것에 거부감마저 들었지만 앨리엇의 대표작 <미들마치>보다는 얇아서 읽기 시작했다. 


초반부에서 만나는 아홉 살 매기는 빗기기 힘든 억센 검정 머리칼에 어두운 피부, 말은 안듣는데 글은 잘 읽는 똘똘한 아이다. 아버지 친구가 놀러왔을 땐 총명함을 빛내며 <악마의 역사>를 읽는다. 어린아이가 읽기에 이건 좀...하는 아저씨에게 검은 몸에 빨간 눈을 한 악마의 모습 그림을 내보이며 설명도 당차게 한다. 매기 아버지는 그 책이 고급 장정에 세일이라서 사주었을 뿐인데. 이토록 총명하고 사랑스런 딸이지만 "아, 얘가 아들이었어야 했는데"가 아빠의 속 마음이다. "어릴 땐 해가 될 게 없지만, 너무 똑똑한 여자 애는 꼬리 긴 양보다 나을 게 없지. 그렇다고 값을 더 받을 것도 아니고 말이야." 머리 모양 흉을 들으면 승질 내며 자기 머리칼을 잘라버리는 아이, 금발인 사촌 루시에게 골을 부리는 아이, 세살 위 오빠 톰에 비해 차별 당하는 걸 의식하는 아이, 구박당하느니 집시의 여왕이 되겠다고 가출하는 꼬마가 주인공인데 어떻게 재미가 없겠냐고요!!! 


그런데 어째 쎄하긴 했다. 아홉살 아이가, 오빠랑 뛰댕기며 노는 게 제일 좋은 어린이라지만 '난 똑똑한 여자가 될거야'라는 결심을 하며 책읽기를 즐기는 아이가 어떻게 나중에 커서 오빠랑 한 집에 살며 수발을 드는 장래 희망을 가질 수가 있지?? 싸우다가도 금방 기권하면서, 오빠, 나 미워하지마, 라며 매달린다. 아홉살 열두살 열네살 매기는 내내 그런다. 아이 돈 언더스탠 허. 


이 소설은 저자의 개인사에 바탕해서 (저자가 유부남 편집자와 공공연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를 '남편'이라고 칭해서 사회적으로 지탄을, 가족에게선 의절을 당한다) 남매의 '궁극적 화해'를 아름다운 자연과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그렸다고 하.지.만. 매기가 목매는 절대적 가치는, 부모가 편애하는 오빠, 자신을 여자라고 무시하는 오빠를 향한 더없는 사랑??? 모든 선악, 행불행의 기준이 바로 그 오빠 (그리고 그 이전엔 아빠, 엄마와 이모들이 다 못났다고 구박하는 매기 자신을 인정해주는 유일한 사람)의 인정???? 이랍니다.


매기네 집은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는데 강물 사용을 둘러싸고 법적 분쟁이 일어난다. 매기 아버지는 소송에 지고 파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과한 '자신감'이 일을 그르쳐버린다. 그러니 이 소설은 아버지의 몰락 후 자식들이 분투하며 가세를 일으키는 이야기이긴 한데 매기에게 주어진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선 능력있는 어머니의 사후에 아버지가 넋을 놓아버리자 스칼렛이 팔을 걷어부친다 (그리고 연애와 결혼을 삼세 번 한다). 90년대 드라마 <엄마의 바다>에선 아버지의 파산, 사망 후 생활력 없는 어머니를 보호하며 장녀(고현정 분)가 생활 전선에 뛰어 뜬다 (그리고 연애를 한다). 여기서 매기는, 너무 어린 (중2쯤 나이의) 나이에 학교를 그만 두고 여러가지 일(교사일 포함)을 한다. 그리고 그 다음 일자리를 가기 전에 스무 살 즈음에 고향에 돌아온다. 그녀는 더이상 몬난이가 아니라 매력적인 여성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억세고 엉켜있던 머리칼도 말을 잘 들어서 엄마가 좋아한다. 이젠 엄마 말에 대들지도 않아서 엄마는 '니가 이렇게 이뻐질줄 몰랐다'라고 감탄한다. 도도한 부자 이모들도 다들 칭찬+참견이다. 니가 무슨 일을 한다고 그러니? 이젠 얌전히 있다가 시집이나 ... 


한편, 오빠 톰도 더이상 공부 못하는 멍청이에 개구장이 도련님이 아니라 세상 현실에 눈떠 돈을 모으고 가장 역할을 한다. 아버지의 무모함과 어머니의 '여성성'을 측은히 여기며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데 전념이다. 더해서 하나 있는 여동생을 아끼고 챙기라는 아버지 유언에 따라 동생을 '통제'한다. 그래서 여동생은 필립, 스티븐과의 관계도 오빠의 허락을 먼저 받아야만 한다. 


내가 가장 짜증난 부분이 여기다. 매기는 소설 내내 어깨에 아빠와 오빠를 얹어놓고 있다. 필립과 스티븐이 그녀에게 접근해 사이가 애틋해질 때도 그렇다. 오빠나 루시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고, 가족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양심과 원칙을 이야기하지만 매기는 이 두 남자들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 딱 한 번, 매기가 고모네 집에 다녀오는 길에 자신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그래서 피해자들이 생긴다면, 그런다고 안될 일이 뭐란 말인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그뿐. 매기는 자신의 행동에 진심을 두지 않고 계속 눈치를 보고 핑계를 댄다. 그래도 상황은 꼬이고 그녀의 평판은 땅에 떨어진다. 이 모든 게 빅토리아 시대의 위선적 사회 규범 때문이라고??? 매기의 어정쩡함 탓이 아니라? 


매기의 비참한 처지에대해 저자는 사회 여론을 만드는 부인네들의 편견,고집을 공들여 비난하고 그에 '힘없이' 따르는 남자들을 감싼다. 필립은 툭하면 '자살할래'를 입에 올리고 스티븐은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매기의 매력에 넘어간 불쌍한 사람이 된다. 이들은 저자의 눈에 매기의 자만심에 희생당한 순정남들이다. 남자들은 가산을 탕진해도 위로가 필요하며 부인네들은 편협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이라 생각없이 그저 남편과 '아들~'을 부르며 울기만 한다. (예전 드라마 <아들과 딸>이 떠오르는데 매기는 후남이처럼 독립적이지 않다. 그저 자신이 진실하면 된다, 다들 선함을 알아줄거다, 라고 고집만 부린다.) 그러니 남편도 아들도 없는 여자는 사회라는 뭍에서 설 곳이 없고 물에 빠지는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저자 조지 엘리엇도 설 곳이 없었다. 그녀가 남자 이름을 쓰는 것도 여러 생각이 들게 한다. 


마지막 장면은 피할 수 없는 귀결로 보이지만, 애초부터 톰 오빠는 매기를 아끼지도 않았다. 그의 분노는 자신의 가부장 위치에 대한 매기의 반항(이라지만 매기의 반항 의지는 빠지고 부재 상태임. 소설 내내 매기의 의지는 '도망가기'에만 적용된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위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아, 그러니 저자가 보기엔 톰 오빠도 다시 불쌍해진다. 


하지만 정말 불쌍한 건 나라고요. 첨에 맘을 다 매기에게 주고 시작했는데, 이렇게 배신을 당해서, 일요일에 헛헛한 마음으로 유툽 다큐도 찾아봤는데도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는다. 저자 조지 엘리엇은 지적인 성취와 현실 연애는 자신이 하고 극적인 남매의 화해는 매기 몫으로 만든 셈이다. 하지만 '보수적' 사회의 용인은 끝까지 받지 못했다.


이 BBC 다큐는 진짜로 소설 스포입니다. 그래도 조지 엘리엇의 육필 원고를 보여주는 멋진 스포일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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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25 15: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조지 앨리엇은 어차피 읽긴 할건데 음 이런 내용이군요.
매기에게 맘주지 않고 읽기 시작해야겠습니다. ^^

Falstaff 2022-09-25 17:35   좋아요 3 | URL
그게..... 마음 주지 않기가 쉽지 않으실 거 같은 걸요. ^^

유부만두 2022-09-25 17:58   좋아요 2 | URL
맞아요. 초반에 홀랑 빠져서 읽게 돼요. 이야기가 흥미진진 꽤 속도감 있게 펼쳐지거든요.

바람돌이 2022-09-25 19:11   좋아요 3 | URL
그럼 배신당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읽는걸로.... ㅎㅎ

단발머리 2022-10-10 1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링크 보물입니다. 저 지금 밖이라서 집에 가서 볼게요!! 만세!!!

유부만두 2022-10-11 16:21   좋아요 0 | URL
저 링크 좋아요. 그런데 스포일러 범벅이니 먼저 책을 읽으시는 걸 추천합니다. 욕하면서 읽는 그 맛, 바로 조지 엘리엇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