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 전공 학자의 애거서 크리스티의 시대와 그 의미, 다재다능 크리스티의 인생과 작품 읽기 (feat. 사건 범인 다 알려드림)
애거서의 자서전은 어린 시절을 보낸 집 애슈필드(Ashfield)로 시작해서 애슈필드로 끝맺으며 집에 관련된 내용을 아주 많이 담고 있다. 사실 애거서는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 ‘부동산 투기꾼‘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집을 많이 사고팔았던 사람이다. 《자서전》에 "집 보러 다니는 일은 언제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다"라고 썼을정도니 말 다 했다. - P37
애거서는 화학, 약물학, 조제학 세 과목으로 이루어진 공인약제사 시험을 통과하고 자격증을 보유한 ‘진짜‘ 약제사가 되었다. 병동에 비하면 훨씬 한가했던 조제실에서 2년을 보내면서 애거서는 처음으로 추리소설을 쓸 생각을 했다. 주변에 독약이 널려 있으니 독살에 관한 이야기를 쓰면 될 듯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이다. - P55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이 독일군의 맹공에 고전을 면치못하게 되자 1941년 12월에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영국 수상은 여성도 징집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이 조치로 20세에서 30세 사이의 모든 미혼여성과 아이가 없는 독신 여성 750만 명이 동원되었다. 그들 대다수는 군수공장 등으로 파견되었고 그중 45만 명은 군대조직에 편입되었다. 전쟁 내내 집 근처를 벗어나본 적이 없던 롤리와 달리 린은 이집트,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등 넓은 세상을 돌며 전쟁을 치렀다. 두어 번 폭격을 맞아 심각한 위험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런 린에게 롤리는 "난 전쟁터에 나가본 적이 없어. 난 마땅히 내가 가졌어야 할, 내 조국을 위해 싸울 기회조차 놓쳤어"라고 말한다. 그런데 롤리에게 군 복무를 박탈당했다는 사실보다 더 쓰라린 것은 젠더 역할의 역전이었던 듯싶다. - P69
그가 장군이 된 것이 이상하다는 뜻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왜냐하면 "군대는 머리가 좋다고 해서 승진하는 데가 아니다"라는 말을 늘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군대가 똑똑한 여성들에게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힘들어질 만큼 귀한 경험을 제공했다. 반면 남성들에게 군대는 지능이 별로 필요 없는 집단이자 커스트처럼 사회적으로 열등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에게 오히려 자신감을 주었다. 군 복무와 남녀평등 문제를 연결지어 볼 때 애거서가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는지 아주 복잡 미묘하다. - P74
애거서는 여행을 사랑했다. 여행은 꿈의 속성을 지닌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행에 대한 애거서의 애정은 개인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 P229
1922년 애거서는 무려 열 달에 걸쳐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캐나다를 돌았으며, 하와이에서 한 달 동안 휴가를 보냈다. 그 경험은 그녀의 세계관을 상상할 수 없을 만치 넓혀 놓았다. 평생 해수욕을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애거서는 남아프리카의 뮤젠버그(Muizenberg) 해변에 수영하러 갔다가 처음으로 서핑을 경험하기도했다. 애거서는 그 후로도 서핑을 즐겼으며 자신이 영국 여성 중에서 최초의 서퍼였다는 사실을 평생의 자랑거리로 여겼다. - P231
푸아로나 마플은 ‘예스러움‘을 고집한 것이다. 푸아로를 연기한 데이비드 수셰이(David Suchet)도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만든 바로 그 푸아로다. 나는 그녀가 넣어둔 ‘상자‘ 밖으로 푸아로를 꺼내놓는 것을용납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상자‘는 바로 푸아로가 활동했던 시대적 맥락을 말한다. 애거서의 푸아로 프레임은 제국으로서의 영국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소환해낸다. 그리고 그것은 아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로 팔려나갔고, 셜록 시리즈와는 다른 차원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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