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없이 시간을 때워야 했는데 글자를 읽을 기운은 없어서 웹툰을 봤다. 이백 여 편을 다 봤으니, 실은 시간과 마음을 비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간 순삭, 하면서 고민도 현실에서 순삭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래 전에 나왔고 2005년엔 티비 드라마로도 제작 되었었다는데 (그것도 신세경 박유천 주연) 전혀 몰랐다. 

큰 폭발 사고로 오른 쪽 눈의 시신경(과 전체 몸)을 변화 시켜 냄새를 후각이 아닌 시각으로 아주 정확하게 인지하는 고등학생 윤새아. 이 아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인간 관계의 이야기다. 

방화사건, 연쇄살인, 국제마약조직의 마약 판매, 청계천 오염, 마약향수 등의 테마 속에 윤새아는 위기에 빠지고 헤어나온다. 그리고 연애도 한다. 여자 고등학생 주위에 성인 경찰, 연구원 그리고 화가가 포진해있고 새아는 혼자 일어서려 애를 쓰면서도 '여자'가 된다. ;;;; 

향/냄새가 주제이다 보니 향에 미친 천재와 조종 당하는 정신 이상 연쇄 살인자가 나오는데 범죄 관련 부분은 수위가 꽤 높다. 만화에서는 둘로 나뉜 향 천재, 향 살인마 캐릭터가 등장하는 소설 '향수'를 찾아 읽었다. 



'향수'의 주인공 장-밥티스트 그루누이(개구리)는 루이 14세보다 백년 후, 1738년 여름에 태어난다. 모친은 그를 낳자마자 방치해 죽길 바랐지만 도리어 영아 살해로 모친이 처형된다. 체취가 없고 기이하게 혐오감을 주는 아이는 악착같이 살아남아 파리의 향수 장인 가게에서 600 여개의 향을 제조 하며 큰 이익을 남겨주고 자신은 향 '추출' 기술을 배우기 위해 남프랑스로 내려간다. 그가 거쳐가는 인물들은 모두 황망한 죽음을 맞는다. 그루누이는 광야의 동굴에서 7년을 지내고, 몽펠리에의 귀족 과학/철학자의 이론에도 협조하며 여정을 이어간다. 향수의 고장 그라스에서 기술을 배우는 그루누이. 자신의 무취와 향제조를 이용해 주위 사람들을 조종하는 한편 살인을 통해 향의 '정수', 생명과 아름다움의 '정수'를 향으로 뽑아내려한다. 25명의 여성들은 그의 재료가 된다. 아무런 목소리도 반발도 내지 못한다. 소설은 역겨운 인물의 혐오스러운 범죄를 그리는데 인물을 실제로 상상하기 보다는 그 주변의 상황, 냄새를 더 열심히 그리고 있다. 하지만 여성 스물 다섯이 죽고, 공포에 떠는 것은 완전히 무시한다. 마지막 희생자는 열일곱의 로라. 거부인 그 아버지는 (메리 셸리의 <마틸다>의 아버지 처럼) 자신의 딸에 대한 욕망을 품고 있다. 최고의 향의 재료는 꽃, 미인이라는 (하지만 더해서 생명력과 악(취)도 필수라는) 뻔한 공식을 강조한다. 소설 전체가 범죄자의 서사이며 그의 '처벌'도 주인공의 의도대로 완성 된다. 노골적 성경 패러디와 시대사 병치는 과격하고 희화화된 묘사까지도 작가의 계산 속에서 안전하고 솜씨좋게 펼쳐진다. 다 읽고 '이게 뭐야' 라는 기분이 들었는데 교훈이 빠진 빅토르 위고의 향도 나는듯 하고 피해자의 공포나 목소리를 지워버린 스티븐 킹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작가 쥐스킨트의 다른 작품을 딱 하나만 더 읽어 보고 싶다. 



찜찜하고 싫었다면서 영화 까지 왜 찾아 봤는지 과거의 나를 혼내주고 싶다. 영화는 개망작이니 나의 시간은 벌을 호되게 받았다. 책에서 비꼬듯 서술하는 문장과 여러 18세기 인물들의 악착스러움, '오래 지속되는 정수'를 향한 덧없는 갈망을 영화는 보여주지 못한다. 비열한 살인자 그루누이, 타인의 피를 빠는 주인공은 어리숙한 천재가 되어 향에 집착하며 화면도 공범자로 피해자의 나신을 열심히 펼친다.  (전리품에 취하는 그는 '냄새를 보는 소녀'의 연쇄 살인자와 같다) 영화에는 가부키 화장을 한 더스틴 호프만, 콰지모도 같은 그루누이, 범죄자의 향에 취하는 스네이프 교수가 나온다. 툭툭 끊어지는 이야기에 처형장의 대축제 장면은 성경 인용에 더해 실소가 나올 뿐이다. 



다 읽고, 다 보고 나서 나중에 무슨 변명인가 싶다. 향에, 무엇에 미치면 그 '정수'를 소유하고자 광기를 부리게 되는 건가. 토요일 부터 엄한 곳에서 엄한 냄새를 맡으며 평소엔 잊고 살던 세상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힘들게 돌아온 나의 일상이 소중한데 왜이렇게 추워진거냐. 나는 비염이 심해서 향수나 향이 진한 제품은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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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1-10-21 09: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냄새를 보는 소녀‘...웹툰 원작이 있었군요?
저는 예전에 신세경이 나온 그 드라마를 본 것 같아요.신세경을 좋아하는 편인데...무심히 텔레비젼 채널 돌렸는데 냄새를 맡는 게 아니고 본다!!라는 소재가 너무 신기해서 몇 편 챙겨 봤었네요.^^
냄새를 보는 특이함으로 같이 수사를 진행해 갔었던 것 같아요.신세경이 귀여워서 계속 헤~~입 벌리면서 봤었던ㅋㅋㅋ
쥐스킨트는 이상하게 ‘향수‘만 빼고 찾아 읽게 되더라구요?향수는 호불호가 있는 듯 합니다.
만두님의 리뷰를 읽으니 오늘같이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날 더 읽어 보고 싶단 생각이 드는군요...더 음침하게요ㅋㅋㅋ

유부만두 2021-10-21 09:45   좋아요 3 | URL
쥐스킨트의 <향수>는 잘 만든 소설이에요. 읽기 시작하면 계속 따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매우 불쾌해요. 여러 층위의 이야기로 분석할 수도 있고, 다양한 각도로 볼 수도 있는데 ... 여성의 목소리가 없어요. 전혀요. 그나마 ‘대사‘가 있는 고아원 보모도 이리 저리 치이는 ‘유형‘으로만 소모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작가의 솜씨가 좋아서 더 기분이 나빠요;;;;

2021-10-21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21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1-10-21 09: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목소리가 없고, 여성조차 이리저리 치이는 ‘유형‘인데 작가의 솜씨가 좋을 때의 절망을 저는 필립 로스에서 보았는데 쥐스킨트도 그렇군요. (아.... 패쓰할까 봅니다)
저도 코가 좋지 않은데 전 아직도 진한 향수를 좋아하는 ㅠㅠㅠ
날이 많이 추워졌어요. 저는 오리털 점퍼를 입고 있답니다^^

유부만두 2021-10-21 10:02   좋아요 2 | URL
이 소설은 패쓰하세요. ^^
그런데 전 이 절망감을 씻을(?) 다른 작품 하나만 더 읽고 싶어요.
많이 춥더라고요. 나흘 만에 잠깐 나갔다가 가디건 위에 반코트 겹쳐 입고 다시 나간 사람이 접니다. 어제요. 오늘은 더 춥다는데..... 뭐에요, 가을이 벌써 끝난건가요? 이런 반칙이!!!!!

수이 2021-10-21 1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려서 가을이다! 하니 가을 탈 새도 없이 겨울이 왔다고 합니다. 오리털 파카 입고 광화문 다녀온 1인이 전합니다. 맨발에 샌들 신고 마트 가기는 이제 무리더라구요. 발가락 시려워 죽을뻔 했어요 🙄

유부만두 2021-10-23 13:53   좋아요 1 | URL
얼마전 뉴요커 기사 제목이 생각났어요.
Welcome to Fall, the Two Days Between Summer and Winter
그렇습니다. 가을은 단 이틀이었더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