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오딧세우스에게 반한 '한낱' '여'신으로 그려진 (게다가 천병희 번역은 그 여신이 인간에게 계속 존댓말을 하도록 만들었다. 오딧세우스는 감히 반말로 응대함) 키르케가 존엄을 되찾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주연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소설이다.
그녀의 출생, 어린시절, 가정환경 (아버지가 헬리오스, 태양신 (티탄버전)이며 조카가 메데이아와 미노타우로스임), 성장의 원경험은 프로메테우스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
키르케는 계속 싸우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성장한다. 처음엔 어른(신)과 역할, 규율, 미모에 대한 잣대에 저항하고 남자의 허세와 폭력, 배신에 맞서고 자신 안에 가득한 폭력과 잔인성에 괴로워하며 고독과 남과의 교류를 고민한다. 자신의 갈 길, 정체성을 계속 다듬어가는 모습인데다 번역문 내내 풍기는 우아함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렴, 여신인데.
초반 첫 '유배' 혹은 독립 후 겪는 좌충우돌 폭력의 경험 후에 오뒷세우스를 만나고 그에게 여러 은혜를 베푼다. 그리고 다시 접하는 그의 소식과 인연들이 진짜 이 책의 내용이다. 본부인 페넬로페와의 관계가 흥미롭게 그려진다. (그녀의 버전은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 강력추천이고요) 사이사이 호머 이야기와 그리스 신화들이 재미있게 이야기를 받쳐준다. (그 많고 많은 꼬이는 족보들) '일리아스'를 여성의 시각으로 다시 썼다는 소설 The Silence of the Girls (Pat Barker)보다 훨씬 훨씬 낫다. 그 소설은 절반 가까이 아킬레우스의 목소리를 빌어야만 했고 징징대다 끝났는데 (인간이라 어쩔 수가 없었는지도) 키르케는 다르다. 그녀는 잡것 칼립소와도 다르다.
키르케에게 '집/고향'은 어디일까. 이타카를 그리면서도 십여년을 떠돈 오딧세우스와 달리 키르케는 자신의 고향/정체성을 향해 차근차근 자신의 힘으로 나아가고, 남을 속이지 않고, 자신의 '업보'와 숙제도 해결한다. 절대 깽판치고 도망가지 않는다.
책 내내 싸우다 마지막엔 너무 부드럽게 감동 코드가 아닌가 싶어 아쉽기도 했고 가부장제의 상징인 아버지, 오딧세우스를 의식하고 자주 소환하는 게 갑갑하기도 했지만 '극복'에 목매지 않고 당당한 자태를 지켜서 마음에 들었다.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꽤 많은 소설인데다 (여성들이 둘러 서서 한 남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장면에서 음하하하) 여신의 성장기에 공감할 인간적 디테일이, 특히나 육아와 사춘기 아들 키우는 부분이 찰지다. 그렇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야 이야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