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빌어 책을 보고 있다. 철학의 역사는 그림만 보고 있는데두 시간이 꽤 걸린다. A반 필라소피는 겉보기만큼 재미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서울 집안 행사와, 5/30일 여의도 한강공원 10키로 경기를 참여하는 중간 짬이나서 지하철에서 오가며 다 훑어보았다.  비교적 삶과 <<논고>>와 <<탐구>>에 대한 평이한 설명때문에 그림이론과 언어게임이론에 대한 윤곽을 보았다는 것이 바쁜 주말 일정 가운데 혜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천재성와 삶의 괴리는 너무 진한 엘리트 의식때문은 아니었을까?  혼자 읽다가 생각이 든다. 

마감기일 넘기지 말고 도서관에 갖다 줘야지? 매번 연체...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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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묻지 말아야 될 세가지(1998)

오늘 한 직원이 어제 모 프로그램을 보면서 외국인이 본 한국인이란 주제로 한담을 했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국 사람들이 욕을 많이한다는 점, 흑인과 백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는 점, 강대국 사람에게 잘 대해준다는 점들이었다. 욕을 많이 한다는 점에서는 공감을 하고 그럴 수도 있다고 여긴다. '알게 모르게 쌓인 것들이 얼마나 많으면?' 하고 마음으로 함께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른 편견은 수긍이 가고, 그런 일들은 허다하게 보아왔으니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러 이야기 가운데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학연, 지연, 혈연에 대한 부분이다. TV를 보지 않았으니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겠지만,


사람을 처음 만나면 무엇을 물어봅니까하고 묻는다면 열이면 아홉,
''아 그사람요? 제가 아는데..." 외에도
① "고향이 어디세요?",
② "나이가 몇이지요?",
③ "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에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공기처럼 우리 사회에 살려면 익숙해지고 그냥 지나칠 일이지 굳이 심각하게 고민할 대상이 아니지 않았을까? 물론 심심해서 적당한 얘깃거리가 없어서도 이겠지만 대답에 대한 느낌은 보통 수준을 넘어선다.


곰곰히 되짚어 보면 생활하면서 조금 두드러지거나 모자란 것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대부분 이 세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아직 어리니까 그렇겠지?' ' 뭐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해야지' 이 정도 생각은 귀엽게 봐 줄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 ' 역시 감자야? 깽깽이야, 멍청도, 보리 문둥이?' 라는 수준으로 올라오면 심각하다 사람에 대한 평가의 30%이상은 이 지역차별로 묻혀 버린다. 군사문화가 가져왔다고 하기에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혈연 비슷하게 얽힌 학연에 대한 부분은 더 가관이다. 고등학교, 전문대, 4년제라는 것은 어쩌면 신라시대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을 연상하게 할 지도 모르겠다. 박사라는 명함 역시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 아닐까?


학교에 대한 부분은 묻지 않았는데, 나이... 고향은 알게모르게 물었던 것 같다. 앞으로는 묻지 않을 생각이다. 사람을 충분히 알 때까지는 ... ... 그 사람을 올바르게 평가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이에 몸에 베어버린 이 차별은 합리성이 있는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들말고 이 사람이 과연 성실한가? 일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가? 사고가 진취적인가? 동료들을 함께 생각하는 줄 아는가? 하는 점들이 명료화하고 판단의 기준으로 될 날은 언제일까?


정말 권하고 싶은 한가지 제안은? 새내기가 들어오면 절대 위 세가지에 대해서 묻지말라고 권하 싶다. 본인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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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는 모임(조직,단체,기업,동아리)이 가져야 될 한가지!
- 권위 끝, 민주 시작과 끊임없이 주고받기(1999년 흔적)

  권위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권위의 종류에 상관없이 무너지는 속도는 정말 엄청나다고 여깁니다. 보수적 관료적 권위 못지 않게, 합의나 존경으로 생긴 권위도 그 수명이 무척 짧다고 여깁니다. 기체 분자의 브라운 운동처럼 의식과 정보는 끊임없이 새로 생기고 없어지기를 거듭합니다. 유행처럼 흔히 말하는 모임『짱』의 생명도 그만큼 줄어드는 것은 아닐까요.

군대, 경찰, 학번제도, 학교, 회사, 학원, 학연, 지연, 조직 폭력 - 정체된 조직, 제한된 공간에서 이익을 취하려는 단체를 보면 공통되는 점 가운데 하나는 수직적 관계가 강하다는 점일 것 같습니다. 조직의 생명을 위해 많은 경우 합리적이거나 민주적인 것보다 서열이나 순서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조직의 운영방식이 전문적인 기량 습득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강제로 따라오게 하는 방법, 그만 그만한 능력을 가질 때 민주적인 방법으로 운영하는 것이 좋다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은 정체된 모임의 효율적인 운영방법이 아니라, 모임이 '변화 성장한다'라는 관점입니다. 모임이 변화, 발전하려면?? 성장과 변화하기를 바란다면??

예전에는 권위가 많은 것을 나타내어 주었습니다. 경력, 실력, 경험를 비롯하여 삶의 지표까지 선배로서, 선생님으로서, 먼저 들어왔다는 경험은 갖고 있지 못하는 많은 것을 나눠주게 되고, 그 혜택은 예우, 권위의 인정, 존경으로 보답하게 되었다고 여깁니다. 그것도 한번 쌓은 기술이면 평생이 갈수도 있었습니다. 혹시 이 이야기가 예의없음, 버릇없음을 조장하는 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다양성을 인정해야 된다는 관점에서 계속 글을 잇겠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이 인내심이 떨어지고 재미난 것만 좋아한다는 것이 대부분의 평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유아프로그램, 가정용 컴퓨터, 비디오게임, 다중사용자 게임, 그리고 음악프로그램 등과 같은 흥미있고 시각적인 매체 속에서 좋든 싫든 성장하고 있습니다. 라디오나 TV같은 수동적인 방송매체 시대에 성장한 우리와 달리, 그들은 상호작용을 예상하고 요구합니다. 그들은 학습을 "즉시작동"으로 경험하고 있고, 사용설명서를 읽는 것과 같은 순차적인 학습은 익숙하지도 않거니와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참여와 실험을 통해 학습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학습은 순차적이고, 피라미드식인 우리의 학습과정과 크게 다릅니다.

이러한 아이들의 성향이나 성장과정이 "학교는 무너졌다"는 개탄의 소리에는 우리는 환경변화에 우리의 관점만 고수하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머지 않아 대학까지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대학의 교육적인 역할은 강의실 패러다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곧 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생들은 주어진 교재를 읽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문제를 풀거나 아니면 실험을 하고,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문화경험을 한 아이들이 혼자서 읽고, 쓰고 문제를 풀면서 혼자서 공부하는 현재 같은 교수법을 계속 좋아할 지 모르겠습니다. 인쇄된 책자가 나옴에 따라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혁명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기술, 지식이 소수에서 다수에게 전달되는 통로가 생긴 것처럼 어쩌면 지금이 똑 같은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닌지요. "지금으로부터 30년후 대형 대학 캠퍼스는 유물이 되고 대학들은 살아남지 못 할 것이다."라는 미래학자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금 세대에게 여러 가지 큰 변화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비단 학교를 보기로 들었지만 다른 단체도 무엇인가 다른 환경을 준비하지 않는 한, 시행착오와 제자리를 찾는데 혼란, 시간의 낭비가 따를 것 같지는 않은지요.

이야기가 주제를 많이 벗어난 것 같습니다. 단편일지 모르겠지만, 여러 환경은 카리스마, 독재를 요구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분산이나 자율, 다중심, 교육과정에서 목표를 향해 합의를 이끌어내고, 설득하고, 늘 새로워지는 유연성있는 모습들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한가지 시선이나 행동보다는 다양한 시선과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판단해봅니다.

아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끊임없이 주고받고하는 수평관계를 이야기한다는 관점과 우리 관점을 비교해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얽매인 족쇄 가운데 하나도 사람관계를 학교,지역,무엇이라는 판단만 서면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물을 멀리 떨어져 보는 습관이나, 정치는 다 그런거야?! 라는 냉소 뒤에 늘 지금까지 이야기한 그런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일상의 많은 상황을 라디오를 듣거나 TV를 보듯이 다 아는 이야기냐? 뭐 특별한 것이 있겠어? 하는 것은 아닌지요. 참여없이 무엇인가? 거리가 떨어져 남의 말하듯 하는 태도는 자신의 비민주적인 모습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합니다. 끊임없이 사람과 사물의 관계에서 판단하려 하지 않는 우리의 무의식적 습관 때문에 발생한 잘못된 문화가 아닌가 합니다.

이야기를 모으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적용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 잘 나가는 모임, 자생력 있는 모임의 경우 회사이든, 공공기관이든, 노조, 가정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느낌이 듭니다. ① 얼마나 새로운 것(정보, 의견)에 대해 열려 있는가? ② 새로운 의견이나 정보, 아이디어를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공유하는가? 소수의 의견이라도 재고할 수 있도록 여백을 만들어두는가?

한가지 확인을 하는 방법의 보기를 들면 생각나는대로 말하기-의사수렴하는 방법(브레인스토밍)이 우리 모임에서 제대로 되는가 입니다. 지식과 느낌을 공유하는 방식. 기발한 아이디어에 대해 어떠한 제어도 하지 않는 의견 수렴 방법 말입니다. 일반 회의에서 모두 다 적용되지 않겠지만 새로운 방향, 발상, 막힌 숨통을 뚫어야 된다고 느낄 때, 모임 진행이 혹시 지식이 많기때문, 연장자이기때문, 저 사람은 나랑 친한 사람이니까 발언에 대해 수긍을 하거나, 동의를 보내거나, 느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논박을 하거나 하는 분위기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덧붙이면, 새로운 지향이나 신선한 생각이 필요한 모임에서 이러한 논의 방식은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가지라도 새로운 것의 힌트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이지요. 팀웍 뿐만이 아니라 지식과 느낌 나누기, 상대방의 다양한 느낌이나 선문답도 받아들이는 자세가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③ 정보, 새로운 것에 대한 노력을 성원 각자가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라는 점입니다. 한가지 전문지식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시대는 벌써 끝이 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처럼 새로운 것에 대해 주고받기를 거듭하는 관계를 위해서 노력하는가입니다. 새로운 지식이 될 수도 있고, 사람과 관계일 수도 있고, 취미를 위한 노력일 수도 있겠습니다. 혹시 축구를 하거나, 볼링을 하거나, 풍물을 배울 때에서 사용자 설명서나 교본을 보고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새로운 사물이나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주고받기를 해보는 것은 어떨지요.

정체된 모임이나 조직은 무엇을 했느냐?로 따지는 것 같습니다. 변화, 발전을 지향하는 모임이라면 우리가 행동해서 예전보다 어떤 점이 나아졌는가 판단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관계 속에서 있는 그대로 수준을 인정하고 지금보다 한발 나은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겠지요.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해서 약속을 지키는 것이 낫다고 하면 약속을 지키는 모습, 회비를 내야한다면 내는 모습, 어쩌면 우리 삶은 작은 주고받기로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있지 않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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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계] ... 혼자생각!



1.

국가라는 것?

만들어논 시스템 때문에 세상을 제대로 판단하지도 예견하지도 못하는 우둔함을 가졌다. 역동적인 관계나 비전에 대한 수준도 늘 늦거나 쳐지거나 애초 담론을 생산하기에는 글러먹었는지도 모른다. 교육계획이나 삶에 대한 비전의 제시를 바라는 것조차 멍청한 짓이다. 국가가 무얼해주겠는가? 끝물에 생색내기에 불과할 뿐. 국가라는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할지 모르겠다. 예측능력과 삶의 변화추이에 대해 준비하거나 기획하는 것이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있을까? 자본주의 와중에 살아남는 법? 국제정세 중에 우리가 지킬 원칙들?
10년뒤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인생은 달라질 것이라구. 정말 달라진다구. 하지만 국가가 해줄 것은 생각보다 없다. 당신의 후미진 생각의 끈이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뿐, 당신께 해답을 주리라 생각조차 말아라.


2.

멀뚱멀뚱한 성격이 싫다.(이제는 그러려니 하구. 나름대로 매력이라고 까지 ~~ㅎㅎ) 잔정이나 잔잔한 이야기 나누는 것이 어쩌면 사치였다고 합리화하기에 익숙했던 것은 아닐까?

세밀하고 사교적이고 애정넘치고, 관심도 깊고 여자로서 시선은 아름답다. 하지만 운전습관만큼, 위에서 보려는 연습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분석적이고 냉랭한 남자들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없을까?

남녀를 떠나 친밀하고 대등한 관계는 무엇일까? 무수한 계모임이나 조직의 이름이 붙는 단체들과 나와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 부부사이도, 부모와 자식사이도 그냥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나,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은 조금은 금해야하지 않을까?

‘사랑’이라는 종교는 아편보다 더 무섭다. 끝나면 찾고, 끝나면 찾고 지칠 줄 모르는 신기루를 따라 찾아가는 그 무엇을 아닐까? ‘사랑’이라는 것을 빌미로 모든 것을 합리화하지 말자.

어떤 사람이 좋아서, 어떤 모임이나 단체가 좋아서... 정말 사랑해서 들어왔다고...그런데 변했다고... ... 단체나 모임은 어쩌면 자신의 생각과 ‘사랑’의 투영물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투영물이 되어서는 않된다.

3.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머리 속의 재단을 버리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단순화시켜보면 어떨까? 이성이나 냉철함을 모두 버리고 감정이나 감성의 교류라고 전제하면 어떨까? ‘가’님과 ‘나’님은 이런 감성이나 감정의 교류가 얼마나 있었을까? 감성이나 감정의 나이테가 얼마나 있었을까?

대물림은 나의 애정도 모르고, 갖은 냉대만 준 것은 아닌가? ‘사랑’만큼 아픔만 남은 것은 아닌가? 모임이라는 것이 한 때 좋은 추억거리로만 남는 무기물일까? 각자의 유리문을 두고 대물림을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파란색으로, 분홍색으로, 초록색으로 칠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렇게 머릿속으로 그리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지도 모른다. 지나친 애착이 되고, 그 때문에 그 영역에서 튀는 빨간색은 문제로 비출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대물림은 언제나 백지로 봐 두면 어떨까? 대물림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거리를 두고 내가 주는 감성만큼, 감정만큼 받을 수 있음. 어느 한 사람을 통해 받을 수 있다면 거기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성별의 차이를 떠나 나이를 떠나 ‘주고-받을’수 있는 그 무엇에서 시작할 수 없는 것일까?

대물림 공간에서 찬이와 윤이와 민, 그리고 아내에게 ‘주고-받을’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집안에서 가족으로 아이들이 아니라 대물림에서 만들 수 있는 나이테는 무엇일까?(주는데 몽매아인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고은’이와 이 삼촌과의 모습은 거듭날 수 있을까?

4.

비오는 날 벌쭘한 마당 혼자생각입니다. 과유불급, 연령성별거리에 상관없이 조금은 떨어져 ‘주고-받기’ 연습. 뭉클하고 애틋한 마음들이 켜켜로 쌓였으면 하는 바램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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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든스의 사적영역, 친밀성의 구조변동이 내내 맘에 남아,

강릉 상가에 다녀오면서 모임의 잘되고 못됨이 내부 인간관계에 연유하는 것이 많음. 그 문제점에 대해 논의가 끊이지 않아 슬쩍, 이 생각을 빌려와본다.

모임내 개인과 개인과 관계, 열정적인 좋아함은 남녀의 문제뿐만이 아니겠으나, 모임이나 사람에 푹 빠져 있음은 상황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런 연유로 얼마 시간이 지나, 사람에 실망하는 경우도 있고 그것인 몇차례 인과관계를 통해 모임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주는 경우가 많다고 하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정에서 그 문제점의 한가운데는 자신이 머리속으로 생각하는 관념을 과다하게 투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생각을 과다하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선후배, 의존적 경향을 강함은 일상의 주고 받음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경우가 많지 않음이겠다.

모임과 모임의 관계도 이론상의 주장만 있을 뿐, 감정이나 감성상의 주고받음 풍부함은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은 아닐까? 맹목적이지 않고 모임에 대한 이성적 판단은 유보하더라도 끊임없는 주고 받음의 관계를 일상생활의 민주화, 풍부함, 개인간의 풍부함으로 빌려올 수 있을까?

주고 받는 것, 특히 감성의 주고 받음없이 관계를 지속?해온 자신을 되돌아본다. 어쩌면 만난 사람들을 어설프게 그냥 지나치는 것으로 만난지 모르겠다. 단체에 대해도 준 것도 없고 정서상의 교류도 없었던 것은 아닌가? 파리한 회색톤의 냉랭함만 오고가고 했던 것은 아닐까?

어설픈 자신에 대해 돌아본다. 15년된 모임에 대해 한번 되새김해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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