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어진 동백꽃은 그래도 핀다.(ing)

1. 우리는 생태학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생태라는 것이 일상에 돌아오는 순간 모든 관계는 수포로 돌아선다. 1명의 천재가 만명을 먹여살린다란 가정이 지금도 횡행하고 있다. IQ에 대한 집착은 터마이트란 삶의 프로젝트에서 실패했음에도 여전히 경영일선에선 유효하다. 아웃라이어는 다른 대상과 확연히 구분되는 통계치라 한다. 당신의 생태학이 얼마나 미세하게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해보자고 한다. 

 

 

 

--성공은 문화 embeded? --

2. 마태복음효과라 한다. "무릇 있는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출발선상의 사소한 차이가 결국의 문화적인 차이로 굳어진 결과들을 보여준다. 하키선수, 축구선수, 음악, 발레....생년월일의 사소한 차이가 결국 결과의 차이로 이어진다는 통계수치를 보여준다. IT의 인재들  역시 1954-1956년생의 어린시절 만시간의 노력을 가미한 문화적 잠재력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되물음을 한다. 생년월일로 잘린 2진그룹에 별도의 문화적 혜택을 갖게한다면 그 그룹에서 우수한 선수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점이다.  

이런 이야기는 결혼하면 오천만원 준다는 허경영의 공약만이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고 출발선상을 유사하게 하면 얼마든지 다양하고 풍부한 삶들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건강의 불평등도 그러하지 않을까? 사소한 문화적 통찰력이 있던 사실을 달리보게 할 수도 있다. 만시간의 노력은 모짜르트에게까지 이어진다. 만시간 이후의 모짜르트만의 곡이 나왔다는 점, 음악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천재이기 이전에 만시간, 10년이란 삶이 농축된 연유라고 풀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29절을 펴봅시다.-----

3. 부르디외의 상징자본, 문화자본과도 비슷하게 읽히는데 감성지능보다는 좀더 다른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사람들과 관계에 있어 교육받은 자의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에서 아이교육문제를 연구해보았는데, 문화적 차이는 별반 큰 것이 없다한다. 오히려 한쪽은 방목하거나 하는데 비해 다른 한쪽은 끊임없이 무엇을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해야하는지의 간섭이 있다 한다. 그런 관계의 처리가 상징자본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전달된다고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용지능---

4. 대한항공의 사고 이야기도 나옵니다. 사고 뒤 호되게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직문화와 관계된 것이라 합니다. 권력거리지수라고 한다는데 한마디로 아니오라고 못한다는 점이죠. 비행기타고 가다가 죽는데도 아니요라고 못하는 위계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대형항공기 사고가 대부분 이런 어이없음때문에 일어난다 하네요. 권력친화적인 습속이 문제라네요. 하물며 스웨덴, 오스트리아, 네더란드는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권력이 없음을 보여야 한다니, 어처구니 없는 현실이 자꾸 겹쳐집니다.

--권력,권위지수--

5. 아이들 공부잘하게 하는 비결이 뭔지 아세요. 모르신다고요. 당신이 원하는 것은 절대 하지말게 하세요. 그러면 아마 십년이나 이십년 지나면 궁금해서 그것을 할겁니다. 공부 너무 많이 시키지 마세요.

---판에 박힌 얘기------


뱀발. 성공학, 성공이란 말에 물리지요. 이제 그만 써먹을때도 되었을텐데.  아마 행동단위로 하는 통계치들이 나오면 또 다시 성공/경영/처세 책들이 그 물결을 타고 유행하겠죠. 이번에는 문화라는 코드로 말입니다. 이제 그만 책을 사들일 때도 되었는데, 우리는 계속 그럽니다. 패턴이 문제겠죠. 우리는 여전히 현실속에 살고, 새로운 세뇌를 해야하니까요.  하지만 가끔 이렇게 건져지는 것도 있네요. 아이들 너무 잡지 마세요. 좋아하는 것 길게 오래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해보시면 어떨까요? 성공하기 위해 사회문화를 아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란 틀을 바꾸면 여러사람이 행복하겠죠. 앞의 것은 한사람이 행복해지는 일이지만 뒤의 것은 한사람으로 인해 10명 천명 만명이 행복해지는 일이잖아요. 거기까지 처세서가 진도나가야한다면 무리겠죠. 그러면 잘 팔릴텐데...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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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어진 동백꽃은 그래도 핀다.(ing)

 

E.P 톰슨은 1960년 [뉴레프트 리뷰] 출간에 맞춰 모두에 모리스를 불러내었다. 모리스의 사회주의에 대한 노력과 삶은 그 지평이 얼마나 넓어져야 하는지를 되새기게 만든다고 했으며, 그러한 노력이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1890년, 벌써 120년전 이야기다. 모리스는 1951년 혁명으로 바뀌는 2150년의 삶을 이야기한다. 앞으로 140년이후의 일이니 그리 멀리있는 일도 아니다. 읽으면서 1951년 혁명이 68혁명을 떠올리게 만든다. 애초 1971년을 가정했다 하는데 두번째 판부터인가 바뀌었다고 한다. 각설하고  아래 시대정신이란 말이 가슴에 닿는다. 역자의 덧글에도 마음이 간다.

--시대정신-----

모리스의 변혁의 원동력에 대한 질문에 노인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부유하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목적없는 고독한 생활에 대한 구역질이 연인의 열정과도 같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을 이끌어냈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돈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가르지만 정작 부자들의 삶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어찌보면 별반 다를 것도 없다. 지나친 선망이 삶과 무관한 악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마음의 구역질이라는 표현이 와 닿는다.

--마음의 구역질-------

과학에 대한 표현이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다. 상업주의 체제의 부속물이자 보이지 않는 것은 연구조차 하지 않아 위험을 키우고 있는 지금의 과학이란 사람도, 사회도 묻어있지 않다. 그래서 괴물이 활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편협하고 비겁한 과학. 지금의 그 모습으로 읽혀진다. 자꾸 일과 여가을 구분해서 질문하다가 이해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 속에 모리스가 원하는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사실이 읽혀진다.

---과학,예술, 노동과 즐거움의 관계--

그가 중세 14세기를 좋아하지만, 분권과 민주주의 자치에 있어서는 배울 것이 많다. 중세가 암흑의 시대란 관점은 사회에서 개인을 발라낸 개인주의자의 시선일 뿐이다. 그 개인이 저지른 후과를 생각하면, 차라리 떨어져나오지 않은 개인이 있던 중세가 훨씬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당신의 직선적인 관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나라가 세계시장의 하나란 허세'를 버렸다고 한다. 더 이상 굶주림을 채워야한다는 허기의 삶을 벗어난다. 우리는 인간이다. 굶기지 마라. 굶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인간이기에 인간의 삶을 원하다. 동물을 넘어서 좀더 좋은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살아지지 말게 해달라. 이것은 헌장이다. 사랑도 소유가 아니다. 감금된 어리석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굶주림에 대한 생각---
--짜투리 몇조각------------

뱀발.  

1. [뉴레프트 리뷰]가 1960년부터라....아무튼 다양하고 신선한 관점들이 열렸으면 좋겠다. 지식소매상이나 도매상들이 활개를 치지 못하게 삶이나 개인이 아닌 유적존재로 묶어두면 좋겠다 싶다. 2집이 나왔다고 하던데... 

2. 지금이 별반 문제가 없다라고 생각하면, 어떤 앎도, 책도 필요없다. 그 책과 앎은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교묘히 그를 빠져나갈 것이다. 그 앎은 그의 입에 남거나 논쟁의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할 처지에 있다는 것이 안타깝지 않은가? 사람냄새가 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자와 교육받은자의 고독한 삶이 처량하지 않은가? 한번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저기 가슴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오지 않는가?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다를 것이 없다. 아마 모리스의 삶이 당신의 마음에서 가슴으로 길을 뚫어줄 지도 모른다. 

3.  그리고 여기서도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NEWS FROM NOWHERE인데 NOWHRE를 그대로 살려둘 수 없을까?       4. 토머스모어의 책이 궁금해진다. 5. 물론 유토피아에서 모든 로망을 걷어내야 한다. 다르게 멀리보는 자만이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 물론 먼 훗날의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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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어진 동백꽃은 그래도 핀다.(ing)

 

  

 

 

 

 

 

 


잡감.  이책에서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더 세다. 한차례 아렌트란 유행에 동반한 전력이 있었구. 책세상에서 나온 문고판이 인상적이어서 저자의 동선이 무척이나 궁금했던 적이 있다.

나같은 날림독서는 개념에 천착하기보다는 알랑미처럼 앎을 부유하게 하는 재주밖에 없어 건망하기 쉽상이다. 벌써 지운 듯 기억이 아련하다. 그래도 요약을 잘 해주거나 대학자의 능력으로 인해 쫓아가기가 그리 힘들지 않다. 이 책 역시 제목이 약하다 싶다. 누가 토크빌과 아렌트를 읽었다하는가? 학자들이여 지금이라도  민주주의와 활동적인 삶(인간의 조건)을  다시 당신의 연구에 끌여들려라라고 해야되는 것은 아닐지?(더 순한 표현인가?)  

아무튼 왜 우리가 동물의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아렌트의 고찰, 그리고 좀더 나은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프랑스의 토크빌이 26세의 나이에 9개월동안 미국에서 체류한 흔적이라 한다.)이다. 그점을 학자의 틀에 쑤셔넣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란 현실에 삶에, 인간의 조건이란 맥락으로 다시 드러내어 놓는다.

읽으며 선거때만 자유만 있는 현실과, 그리스의 좋은 삶, 인간적인 삶, 정치에 대한 부분, 자본에 묻힐 수밖에 없어 생각도 꿈도 무한궤도에 장착될 수밖에 없고, 결코 다른 것을 꿈꾸지도 생각지도 못하는 생각의 감옥을 경험한다.

더구나 토크빌이 말한 결사학(학문이라 표현을 쓴다.) 대의민주주의로 매장당한 지금. 학문의 발전은 결사학의 진보에 달려있다는 그의 말은 150여년이 지난 지금 다른 울림을 가져온다 싶다.

고매한 야심도 찾아보기 힘드는 현실, 돈을 벌기위해 초조해져 아무것도 볼 수 없는 현실, 행복의 노예이자 정신의 노예란 지적이 먼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작금의 현실과 다를 것이 없어보인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날카롭고 깊이가 있다. 문제는 아직도 그의 시선을 잇는 이가 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뱀발.  

1. 아렌트의 흔적을 가르키는대로 쫓아가니 그 결이 깊고도 넓다. 그것을 다 중동내고 편취만 하려했나보다. 그래서 안내글이 필요한 듯싶다. 에둘러가기엔 벅차고 힘들고, 이렇게 돌아와보면 맥이 빠지는 경우가 많으니, 앎-삶의 안내자가 있으면 좋겠다 싶다. 그래서 좋은 선생을 찾기 마련이지만... ...독학의 어려움이 크다. 

2. 물론 두분다 그리스의 고수이다. 전 페이퍼처럼 그리스인의 삶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러니 명민해져야 할 부분, 세밀하게 보아야할 부분이 거기인 셈이다. 왜곡을 걷어내고 사회와 삶을 장착시켜 다시보는 맛도 쏠쏠하지 않을까? 피가되고 살이 되는... ... 

>> 결사에 대한 토크빌의 생각 (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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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어진 동백꽃은 그래도 핀다.(ing)

플라톤 다시보기 - 고작과 이나 사이

3만명 중에 1만 2천명을 대통령을 한 셈이고, 민회에서 말한 사람은 면세의 특권도 있었다.(쿡!)

 

 

 

 

 

 




잡감. 지난번 폴라니의 책을 보다가 아테네의 살림살이에 해당되는 부분을 상세설명을 본 기억이 있다. 아래의 인구에 대한 서술처럼 우리가 그렇게 우려먹는 그리스인은 고작 3만의 삶이었다. 이책을 읽으면서 관심이 가는 부분의 소피스트의 삶이다. 궤변론자로 폄훼된 그들의 동선은 아이러니하게도 노예제 자체를 부정했다는 점들이 나온다. 더구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관조적 이데아는 이런 흔적들을 샅샅이 소각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들과 맥락은 잊혀지고, 삶 바깥의 것으로 삶을 옭아매고, 철학을 옭아매고 했던 상흔의 출발점이란 지적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민주정을 바랬던 것이 아니라 지긋지긋해 했으며 스파르타, 이집트의 운영에 매료되었다는 점도 그 출발을 알린다. 이러한 점의 김상봉 교수의 서양철학에 대한 반성과도 맥이 닿아있는 것 같다.

인구의 절반이 살아가면서 대통령을 한다는 사실은 강수돌 교수의 강연 가정과 이어진다. 그는 내 스스로 대통령이다라는 가정을 해야한다고 한다. 그래야 어떻게 할 것인지 사안에 대해 고민과 참여, 삶에 긴장은 좀더 나은 정치를 할 수 있게 만든다고 한다. 청소년들에게 강연하는 점이나, 그의 주장이 처음엔 낯설기도 했지만 일리가 있다고 여긴다.  직접민주주의 분권의 실마리가 저기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리라. 3만명의 보다 좋은 삶, 행복한 삶에 대한 고민과 참여는 이렇게 2천5백년을 우려먹은 출발이기도 했는지 모른다. 늘 노예와 여성이 전제로 걸려있긴 하지만 인간적인 삶을 시작하기엔 이 사회가 너무나 풍요롭고 가진 것이 많다.

이렇게 쌓은 탑의 근저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시민을 소각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주춧돌이 있다. 거기에서 자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가 있다. 철인정치가 아이라 철인경제와, 철인사회와 철인문화가 이 지경으로 인간의 삶의 공백을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산술적으로 말하자면 60억이나 되는 인간이 있는 지구가 이 지경까지 왔는데, 고작 3만이 그것을 우려먹는 자양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늘 3만을 다른 세상을 만들 수는 있겠다는 과도한 산술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몽상이 아니라 유토피아 언저리에 있는 것들을 현실로 가져와 끊임없이 되묻고 타산해야 한다. 현실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기에, 세상은 결코 허투루 낭만으로 살 수는 없는 것이기에. 하지만 유토피아의 한꼭지 한꼭지는 무한한 상상으로 충만해야 한다. 많은 상상을 해볼수록 현실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워지고 있지만, 민주주의에 대해서 두루뭉실하고 밍밍해지는 현실을 개탄하는 저자의 지적이 공감한다. 저기 근저부터 다시 한번 사실을 검토해보는 것도 좋은 출발점이라 여겨진다. 

--물음의 전환~-


뱀발. 

1. 제목이 약하다 싶다. 소크라테스 두번죽이기와 달리 내용의 강도에 비해 제목을 순하기 그지없다. 전공자들이 떼를 들고 일어날만도 한데, 그런 기사를 접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학문하고 삶하고 구분하는 것이 일상이어서 그랬을까? 저자가 삶하고 학문을 근사시켜서인가? 학문은 학문이고 이 세상에 별반 의문을 갖지 않는 평범한 학자로 저기 먼 그리스인의 삶과 지금은 애초에 다르다는 가정때문일까? 들구 반발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학자들이 인내심이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본다. 

2. 진지하게 3명이든 30명이든 300명이든 삶에 착근시킨다면 아주 아주 조금 다른 샛길은 날 수 없는 것일까? 사안들을 좀더 다른 것에 함침시키는 연습이나 다른 일상으로 향한 기웃거림으로 번지거나... 책을 읽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박홍규님이 참 외롭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나저나 오늘 대전에서 강연이 있다는데...망설여진다. 두탕이 가능하겠는가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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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서재에 다녀오다. 납기일을 갓넘긴 책들을 마저 마무리짓고 반납할 마음으로 산책을 나선다. 제법 쌀쌀하여 모자와 장갑을 챙겨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보름달은 어김없이 구름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동백꽃들은 화투장처럼 화사하게 마중나와 반긴다. 팔광은 아니지만 그래도 ... 신간을 뒤적이다 몇권 함께 추스린다.  

1. 근대일본의 사상가들을 따로 챙겨볼 만하다 싶고, 그리스에 대한 책 가운데, 보고 있던 책의 소크라테스의 죽음편이 상이하게 기재되어 있다. 전공분야 교수인데도 서술의 관점이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예전 묵자를 읽으면서 종교를 대입하여 난감했던 상황과 마주치는 것처럼 말이다. 삶이나 인간에 대입하지 않고, 아마 학문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것에 자주 사실들을 끼워넣으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관점이 열리는 것도 아니고 주장의 냄새로 자칫 사실도 의도도 읽히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2. 동백꽃 단편을 보다. 물론 여기 동백꽃은 김유정이 강원도 사람이니 남쪽의 이꽃이 아니다. 그 동백기름을 바른다고 할때 그 동백은 이 생강나무를 말한다. 읽으면서 우리말의 고움에 다시 눈길이 간다. 읽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전달되는 힘이랄까?  이오덕선생님의 글에 대한 논지에 전적인 찬동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 둔탁하고 무미하고 건조해지는 것 같아 우리말을 일상으로 가져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연스럽고 의미전달이 화사하도록 곱게 느껴진다. 지금 흔적을 남기면서도 내말이 거칠다는 느낌이 선다. 뒤에 풀이가 나와 다시 봐도 좋겠다 싶다. 김유정은 폐결핵으로 나이 서른에 운명을 달리했다. 1937년, 1908년생이다.  

3. 나희덕의 [야생사과]를 애벌로 다 본다.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후미 평론가의 말과 저자의 후기처럼 정말 바뀌고 있는 느낌이 든다. 바밤바님의 [좋은 이별]이란 리뷰도 그렇지만, 늘 나란 인간에 대해서도 그렇게 여기지만 내가 흩어지는 꼴을 보지 못하거나 과도한 구심만이 존재해 늘 분산된 나를 구성하려하는 습속에 대한 고민도 겹쳐진다. 늘 남의 심장을 배어 물면서도 나에 대한 집착만 있는 모습이라니... 나를 놓아주는 사이, 사이가 다른 시인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비치는 듯 싶다.  나에 대한 과도한 응축이 손내민 너를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나의 원심이 너를 받아들이는 공간이라도 만든다.면 아주 조금 너가 섞일 수 있지는 않을까? 알라딘마을 뜨겁다. 구술이 아니라 문자의 논쟁에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지만 공간이 아주 조금은 생기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서로 나를 조금 버리거나 나를 줏어담지 않고 내버려둔다면..(새는 날아가고/쇠라는 점묘화)

4. 돌아오는 길. 몸이 후끈하도록 가볍게 날아온다. 6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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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출판사 2009-12-04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을 소개하는 좋은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짧지만 여느 보도자료보다 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여울 2009-12-04 17:1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과합니다. 늘 아끼는 마음가는 곳인데. 열심히 공부하란 충고로 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