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거의 인문(酌)
알라딘서재나 블로그에 대한 생각
#1. 내가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는 이유는 블로그와 실재 그 인물과의 유격때문이다. 사실 블로그의 정보보다 오프의 만남에서 정보가 훨씬 풍부하기때문이다. 기껏 시각의 활자로 대면하는 것보다, 사람을 볼 수 있음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 던 다른 면을 느낄 수 있기때문이다. 설명으로 부족한 무엇들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오프모임의 만남이 친하다는 주례사 기조의 격려로 흐른다면 이것 역시 혈연이나 지연에 버금가는 습속일 것이다. 그 짧은 만남을 통해 조금은 더 그 사람에 대해 입문할 수 있으리라 여기기때문이다. 많은 왜곡된 관점이 수정되거나 너무 확대해서 보았던 부분, 아니면 눈치채지 못했던 다른 끼들도 드러날 수 있기때문이다. 활자보다 생각, 마음의 결, 고민, 처지는 아주 조금 읽힐 수 있다.
#2. 장사라는 것. 자본주의 아래서 장사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야생성을 전제로 하기때문이다. 가끔 인문을 이야기하는 것은 좀더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알라딘서재와 알라딘 운영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서재에 가벼운 지적만 있던 것 같은데 서재의 메인화면이나 틀을 만드는 것에 의외로 서재인들이 예민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당연한 것. 어쩌면 그 틀이 이곳 서재민주주의의 많은 요소를 없애버리고 있지 않을 것일까? 책이 화면에서 커지고 화재의 서재글이나 인기도 순으로 서열이 매겨진 것. 테마카페가 있으나 활용도가 빈약하기 밖에 없는 상황. 서재운영과 손익에 얼마만한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서재인들이 활용도를 높이고, 주관하고자 하거나, 아니면 서재를 통해 매출의 연계성도 높이겠다는 알라딘의 바램이나 욕구가 있다면, 그것이 어느 정도 같이 동행할 길이 있을까? 이곳의 민주주의를 얘기해볼 수 있을까? 서재가 매출과 연계성으로만 세팅하는 것이 아니라 북적이는 공간으로 그래서 그 틀이나 구성이 말랑말랑해서 수렴하고 확인하고 시험해보고 변신해보는 것으로 구성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3. 알라딘을 살리자고 책 몇권을 구매하겠다는 서재인들의 옛 기억?도, 버전 업에 대한 감수성도 많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더구나 서재인들의 구조에 대한 접근의 빈약함, 더 즐겁게 놀 수 있는 꺼리에 대한 제안들, 돈냄새가 너무 물씬 풍기는 것은 아닐까? 사람냄새가 나거나 다양함으로 연결되어 서재인들의 특색있는 공간이 가미되어 좀더 수평적이거나 가변적인 틀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뱀발.
1. 저자와 대화가 있고나서 서재인 몇분과 식사겸 인사를 나누다. 문서로 된 논쟁의 편협함도 출판인쇄업의 구조도 먹이사슬에 얽힌 갑을관계도, 서재인들의 일상이나 직업에 대한 소식도 듣는다. 게시판을 달구고 있는 불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다.
2. 몇주전 모임 뒤풀이. 한분이 식당 종업원의 처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그 뒤 종업원에게 주문의 당당함은 줄어든다. 그리고 나의 태도변화에 신경쓰고 있었다. 예전엔, 지금도 강한편은 아니지만 식당에 가면 난 고객으로 당당하지 않다. 반찬 더 달라는 소리는 거의 없거나 불편에 대해 주장하지 않는 편이다. 그 당당함이 한편으로 일상에서 위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 언질로 시선은 그 넓은 식당에 혼자 감당을 해내는 조선족 종업원에게 시선이 갔다. 그 사실로 난 나의 불감이 무척이나 자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장부터 말단까지의 처지와 고통은 느끼지 못했지만, 종업원에게 고객의 떳떳한 주장이 종업원에 대한 고통이나 애틋함과 교차하지 않고 있음을 다시 느꼈다.
3. 서재에 불매활동이 일고 있다. 비를 같이 맞자는 말이 마음에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법을 따지고 있었고, 다소 과도한 요구이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버티고 있었다. 현실에 있어 불감이 나를 막고 설 수도 있구나. 불감의 경계가 의외로 약하구나란 자괴감도 함께 들게 되었다.
4. 고객은 왕인가? 손님은 왕인가? 언젠가 나는 쫄병이었는데 어느사이엔가 말년 병장이 된다. 어느 사이에 감수성과 불감의 경계에 마음의 실선이 자란다. 말단이자 사장, 고객이자 서비스제공자이다. 비를 더맞으면 불감은 좀더 줄 수 있을까? 더 감수성을 자라게 하고, 민주주의의 시선을 더 확장시킬 수는 없을까? 책을 사보는 나의 불감은 어떨까? 작은 책방, 외진 헌책방, 공공도서관, 인터넷 서점, 일터에 몸담고 있는 동료들, 저자, 출판사 모두 좋은 일은 없을까? 책한권 볼 수 없는 저 낯선 나라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니라 아픔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느냐? 그 아픔을 얼마나 저편의 앎까지 확장시키느냐는 고통으로도 읽힌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끊임없는 갑-을-갑-을의 순환고리에 대한 생리, 앎의 선순환은 그려볼 수 없을까?
5. 서재가 돈도 되고 민주주의 마을로 한발다가설 수 있을까? 고객팀이라는 선명한 실선이 서재와 점선의 경계로 말랑말랑해질 수 없을까? 내지갑의 편리나 주장에서 너의 빈지갑이나 감수할 불편이 늘어날 수 있을까? 고객만의 당당함이 제공자의 노고에 조금은 가 닿을 수 있을까? 활동의 선언에 가린 그늘의 어려움을 살필 수 있을까?
6. 서재에 대한 제안은 많이 표출된 것 같다. 이참에 대폭 권한이나 운영, 직접민주주의방식을 실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좀더 놀고 싶고, 사귀고 싶고, 아픔을 나누고 싶고, 제공하는 이곳도 돈도 되었으면 좋겠다. 고객을 불편하게 하거나 열어두게 하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 되는 것은 아닌가?
7. 내 회사도 아닌데 왜이리 걱정이람. 쯔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