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보이세요?



작년 태국으로 청소년 봉사활동을 하러 갔을 때 치앙마이 현지 직원들이 한국 관광객들에게 배웠는지 ‘빨리 빨리’라는 말을 우리에게 능숙하게 사용하는 걸 보고 신기하기도 했지만, 어디선가 들은 해외에 여행나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 ‘빨리 빨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해서 기분이 씁쓸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참 빠른 나라이다.

해방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압축적인 고도 경제성장 속도는 서양 선진국들에 비해 몇 배나 빨랐고 그에 따른 생활양식의 변화도 불과 4-5년 전을 무색하게 할 만큼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사용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고속철도에다가 매년 늘어나는 고속도로.......게다가 이제 어디 낯선 여행지라도 갈라치면 좀 더 빠르게 도착하기 위해 ‘네비게이션’을 이용하는 것은 필수이고, 혹 없는 사람들은 불안해하며 주변에서 빌려서라도 자가용에 부착하고야 안심하고 떠난다.


기술의 진보와 변화 발전이 그 자체만으로 인간 삶의 질을 올려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만 주로 자본가에 의해 주도되는 기술의 진보와 속도의 가속화 사이에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누려야 할 ‘인권’의 개념이 축소되거나 아예 무시되는 경향 역시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총알배송’ ‘당일배송’의 현란한 문구 속에서 하루 12시간 이상의 혹독한 노동환경에 처한 택배 노동자들의 삶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예정된 시간에서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언제 도착 하냐는 항의 전화가 택배기사의 이동전화로 난무한다.


요즘 한참 문제가 되고 있는 대형마트의 경우, 지역 경제에 미치는 폐해도 문제지만 대형마트는 존재 그 자체가 현대 자본주의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대부분의 대형마트가 24시간 운영체제로 불야성을 밝히고 있으며, 매장안의 계산대 앞에서, 우리는 영화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사못 조이는 장면 못지않게(마트계산대에도 컨베이어 벨트는 있다.......) 빠른 속도로 각종 상품의 바코드를 찍어내며,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봉투 필요하십니까? 포인트 카드 있으십니까? 고객님 얼마입니다. 얼마 받았습니다. 거스름돈은 여기 있습니다. 고객님,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를 거의 자동 녹음기처럼 말하고 있는 수납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속에 수납노동자들이, 손님이 많은 주말에는 6-8시간 동안 계속 서있는 상태로 일하면서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고작 15분을 쉴 수 있는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수납노동자들의 어색한 미소 속에 묻히고 만다.

다만 우리는 조금이라도 기다리는 줄이 짧은 계산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계산을 마친 다음에는 영수증을 예리한 눈으로 점검하며 총총히 주차장으로 향할 뿐이다.


작년 몇몇 시민노동운동단체에서 수납노동자들에게 앉아서 일할 수 있도록 의자를 설치하라는 운동을 펼쳤지만 사업주 측에서는 정말 의자만을 설치했을 뿐이다.(가본 분들은 알겠지만 계산대 뒤에 의자는 있지만 앉아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내 돈 내고 상품을 구입하는데 판매자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정당하고 옳은 의견이다. 다만 돈이 오가고 그에 따른 상품이 건네지는 과정만을 챙기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힘든 노동자의 현실은 존재해도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업주의 부당한 처사에 우리가 말없이 동조하는 ‘방관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들 의식의 흐름을 되짚어 봤으면 한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다분히 봉건적인 표현에서 혹시 우리는 ‘노동자는 노예’라는 봉건적인 인식마저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4시간 영업’ ‘당일배송’ ‘계산오류 시 5배 배상’의 호기어린 문구를 접할 때 마다 힘든 노동환경 속에서 노동자가 당연히 보장받아야 하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에 대한 논의가 사라짐은 물론이고 ‘노동자의 인권’마저 배제된 자본가와 소비자의 밀약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언짢다.


퇴근 후 가족들과 함께 대형마트에서 소비자로서 쇼핑을 즐겼던 당신은.......혹시 내일 아침에는 노동자로 출근하지는 않으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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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악녀일기
    from 木筆 2009-12-20 12:36 
              ---수리남 사탕수수농장주의 딸 14세 일기---(쿡!하세요----------- 노예들은 쟁반을 식탁 한가운데에 놓았다. 아빠는 힘이 세다. 아빠는 쟁반 뚜껑을 손수 열었다. 한 작은 게 보였다. 쟁반 안에서 몸을 잔뜩 쪼그린 채 앉아 있었다. 그게 몸을 일으켰다. 무릎까지 오는 꼭 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