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다르는 보스니아의 소도시 비셰그라드에서 드리나 강가에서 놀며 사랑하는 슬라브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심장마비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통을 자신이 이어가기로 다짐한다.

#2. 소설 속에서 작가는 좋은 이야기란 드리나 강처럼 '격렬하고, 광활하고, 지류들이 흘러들어 더욱 풍요로워지고, 강둑위로 넘쳐흐르고 콸콸 솟아 흐르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독일로 피난한 뒤에는 독일에서 겪는 새로운 생활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아시야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들려준다. 그리고 할머니가 준, 비어 있는 책에는 고향에서 행복했던 기억들을 잊지 않으려고 이야기들을 기록한다. 그러나 좋았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쓰면서 알렉산드르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자기가 떠난 뒤 있었던 일들을 누군가에게 물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옮긴이의 글에서)

 

--아***  키바님의 [한권의 책] 소개 가운데서(콕!!)---

뱀발.  

1. 비셰그라드, 드리나 강,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몇번씩 단어들이 명사로 남지 않고 꼬리를 길게 늘이며 미끌어진다. 이제서야 명사형으로 남기도 하지만 말이다. 78년생 사샤 스타니시치란 저자의 이름도 그러하길 여전하다. 읽는내내 섞이고 흐릿해지고 밝아지기를 거듭한다. 모네의 수련처럼 여러 색들이 함께 부유한다. 

2.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지 못했던 것, 알려고 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것을 상기시켜야 한다. 좋았던 이야기와 좋지 않았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물어야 한다. 한자 한자 사전을 짚어가며 소통을 하려하고, 노력을 해내야 할지 모른다. 

3. 드리나 강이 그렇게 모네와 고흐의 손길로 그려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의 이야기들이 빗나가지 않고 볼록한 시간이란 쟁반에 모두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목한 시간에 담기는 것이라고, 그래서 마음 하나 하나를 헤아리는 연습을 해야하는지도 모른다고... 그래야 아주 작은 샘물이 될지도 모른다고... 

4. 어쩌면 우리는 의견도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기억도 편리대로 소비하고 말지만, 이렇게 절벽에 있는 꽃 한송이 꺾어 [시-공간]으로 잡으려는 노력이 부질없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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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몇가지 스며드는 질문.]

-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라면 어떻게 하겠다란 풍부한 가정이 스며들지 않는다면?
- 출혈 경쟁의 늪과 출판사-..갑-을-병-정의 수직적 관계의 해소 전망이 없다면 ?
- 이것을 하고자 하는진보의 운신의 폭은 어쩌면 자본량에 비례한다면?
- 진보와 자본의 공생이 가능한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기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디까지 일까?
- 도서운동의 최대 소비처, 저자, 출판사. 공급망. 저자 쌍방이 서로 남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 동네서점을 살리는 것과 인터넷 서점을 살리는 방법은 없는가? 인문서점이 급속히 소멸되었다면?
- 소극적 참여든 적극적 참여든 그 곁가지에 있는 관심은 더 큰 범위로 발화될 수는 없는 것일까? 윤리적 소비뿐만이 아니라 윤리적 생산(공급)에 대한 가정을 해볼 수 없는 것일까? 그 자본의 먹이사슬과 장점이 교집합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의를 더할 수는 없는 것일까?
- 제3세계에 대한 생각은 터질 수 없는가? 그 아이들과 마을이라면 책운동이 불가능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이는 누구인가? 아니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할 수 있다면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는가?


2. [활동에 대한 몇가지 다른 생각들.]

지금 활동이나 [하고자한 것들]이 공유될 수는 없는가? 언제든 한가닥을 끄집어내어도 정말 다시 해볼 수는 없을까? 불매가 아니라 좀더 서로 덧셈이 조금이라도 되는 방법이 없을까? 인터넷서점의 비정규직 채용에 대한 규약 및 동네인문서점을 살리기 위한 네트워크 구성이라든가? 구매시 몇 %을 동네서점 살리기에 쓴다라든가? 서로 인터넷서점이 판매만이 아니라 책으로 연결하여 생각을 키우는 활동에 동참해마지 않는 방법으로 진화할 수는 없는 것일까? 시간은 없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다시 자랄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길 수는 없는 것일까? 날이 선 비판을 좀더 세련되고 익숙한 방향이나 아이디어로 점화할 수는 없는 것일까? [불매]가 아니라 [선택]되는 구매, 공공서재에 대한 인문학 서적의 점유율이란 목표로 관의 무능에 대해 발랄함을 날릴 수는 없는 것일까?



3. [ 몇가지 더 생각을 해봤으면 하는 문제들]

소비사원에 들어선 우리는 선택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소비만으로 단락을 차단한다는 발상도 좋지만 그 자본의 맥락과 현상을 좀더 날카롭게 분석하여 그 흐름에 무너지고 부서지고, 결국 우리에게 불편을 감수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시선을 모으고 돌리는 수고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서비스의 품질도 중요하겠지만, 과도한 관심으로 흘러가는 자본의 이기로 이미 만들어진 것,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을 놓치는 한 별반 할 것이 없다. 끊임없이 꼬리만 탓하거나 그 꼬리만 보고 탓하게 된다. 저 몸통은 또 다른 곳으로 몸을 돌린지가 오래되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4.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참에 독서운동-비정규직-사라져가는 것들-자본의 몰려다님-갑을의 관행-제도권의 무능에 대해서도 함께 깊숙히 들여다보는 혜안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 분노와 아픔이 저 끝에까지 예민해졌으면 좋겠다. 너무 시간이란 함수에 연연하여 하고자 한 것, 하려한 것들의 가능성에 대해 묻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5. [뜬금없는 진보-자본의 유대(진보의 살림살이)에 대해]

진보는 얼마나 자본주의적이어야 하는가?/소비자의 진화/얼마가 있으면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지금 대한민국원주민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돈들이지 않고 함께 살아낼 수 있을까?/진보를 자칭하기까지 얼마나 살림살이에 명민해야하는가?/R라딘에 선택적 소비를 하는 것이 진보적인가? 소비를 한다는 자체가 진보적인 말일까?/몽상과 공상/자본가가 얼마나 진보적일 수 있을까? 귀농이나 사회활동을 하거나 공간을 만들어나가는데 얼마만한 자본이 필요한가? 자본대비 기업, 자본에 대비하여 얼마나 효율이 큰가? 얼마나 살림살이를 드러내지 않는가? 얼마나 자본의 실핏줄을 타고 가면서 생각해야 하는가? 얼마나 돈의 향기 속에서 사고하지 못하는가? 진보의 막장은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아닐까?

6. 나는 요구한다. 당신이 그 시작부터 끝까지 돈에 너울치는 현실을 꿰뚫어보려는 계산이 있다면 당신의 진보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에게 친자본을 요구한다. 나에게도 나의 시선에 대한 무능에도 칼을 들이민다.

7. 다른 시선, 다른 관점이 섞이거나, 정신이 만나 열매를 맺으려면, 더구나 칼날같은 날 것이란 자본주의의 시선이 칼바람처럼 부는 곳에서, 새로움이 움트려면 그 날 것이 속속들이 재워지고 채워지고 칼날이 무뎌지고 바래지고 익혀 겨우 발효가 될 쯤, 제대로 익은 맛을 나려면...그렇게 자본주의의 양분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조금 다른 맛이 나려면 말이다.

8. 아~ 하는 사이. 어~ 하는 사이. 우리는 자본의 홍수로 너무 떠밀려내려왔다. 자본으로 호흡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 정신도 자본으로 호흡하는 방법을 배워야하지 않을까? 50만원으로 100만원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미리 계산해내지 않는 이상. 살림살이가 비교되지 않는 이상. 진보는 자본의 진창을 헤엄칠 수 없다. 자본으로 경중을 가려보지 않는 이상. 그 힘을 입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이상. 어쩌면 활동이란 것이 몇발자욱 딛기도 힘들 것 같다. 

뱀발. 소극적 불매에 참여한지는 꽤 되니 이것저것 불편하다. 기부라는 것도, 참여라는 것도 하고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나누는 것일 것 같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생각들은 내내 가시지 않아 혼자 품고 있을까 하다가 질문들을 던져본다. 이렇게까지 번지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아픔을 제대로 딛고 이익을 좀더 넓게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좀더 예민하고 깊이 타산하고 품어야겠단 반성이 많이 들고, 많이 배우게 된다. 앞장선 분들 마음의 짐으로 가져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터넷이란 공간은 대화하기 힘들다. 그 무서운 복기와 물기... 대화는 구술이란 말, 문자를 독해하는 능력이 아니다. 만나지 않고선 그리 할 말이 없다. 설마 나도 물릴 것 같다. 그럼에도 이렇게 남겨야겠다. 몇년 뒤 다른 일로 복기가 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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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기네요. 관심있는 분들만 훑어보시면 되겠네요.---

뱀발. 성탄을 전후해서 읽어내려가봅니다.  시도, 역사도, 사회학도 새롭게 보는, 다양하게 보는 시작임을 주장합니다. 세상의 다른 결, 자본주의와 현실을 조금 더 희미하게라도 볼 수 있으리란 노력이 배여있습니다. 무리없이 많은 이들이 녹아있어 놀랍습니다. 규모도 예리함도...쫓아가다보니 버거운지 이렇게 거추장스럽게 메모를 많이 달아놓게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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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여우 2011-07-28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이 책 꼭 읽어봐야겠네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여울 2011-07-29 14:03   좋아요 0 | URL
네, 챙겨보세요. 인상깊던 책이었어요.
 

사물과 말, 그리고 쓰기에 대해

말이야말로 봉사하고 추종해야한다. 만일 프랑스어가 그 정도가 아니라면 카스코뉴 사투리라도 사용하면 된다. 나는 사물이 우위에 서고, 듣는 자의 생각을 채워 주고, 어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말 사용법은 단순한 자연 그대로의, 입으로 내는 것이건 종이에 쓰인 것이건간에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의 사용법이고, 충실하고 생기가 있는, 간결하고 순박한 것이고.

또한 나의 말 사용법은 안이하고 매끈한 맛이 없다. 거칠고 경멸조이며, 자유롭지만 규범에 다르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마음에 든다. 나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의 버릇에 의해서이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쓰기보다는 말하는 편이 더욱 능숙하다. 운동과 행동은 말에 활기를 준다. 특히 나처럼 급히 움직이고 잘 흥분하는 인간에게는 그렇다.

두 사람이 같은 일을 가지고 똑같이 판단하는 적은 없다.


학문과 혼의 관계에 대해 

학문을 혼에 부착해서는 안된다. 합체시켜야 한다. 학식을 혼에 흘려 보내서는 안 된다. 학문으로 혼을 물들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만일 학문이 혼을 변화시키고 그 불완전한 상태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분명하게 학문을 그대로 방치하는 편이 더욱 좋다. 이는 위험한 칼이고, 그 사용방법을 모르거나 힘이 약한 손 안에 있는 경우에는 그 주인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손해를 끼친다.

학문이란 좋은 약이다. 그러나 어떤 약도 그것을 담는 항아리가 나쁜 경우에는 나쁘게 변하며, 썩지 않고 보존될 만큼 강한 효력을 갖지 않는다.

나는 또한 즐겨 우리 교육의 무능함이라는 문제로 되돌아 온다....그것은 덕과 지혜를 추구하고 그것을 품고자 하는 의욕을 가르치지 않고, 고작 단어의 파생과 어원 정도를 우리 머릿속에 심어 주었다.

우리가 편안히 사는 데에 학문은 거의 소용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학문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과 그것을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하여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우리 나라에서, 지금 이 시대에 학문은 돈주머니를 채워주는 역할은 하지만, 결코 혼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학문은 둔중한 혼과 만나면 소화되지 않는 덩어리가 되어 영혼을 무겁게 질식킨다


아는 것과 교육 그리고 선생에 대해 

선생은 마치 깔대기에 물을 부어넣듯 계속 우리 귀에 대고 소리친다. 그리고 그의 (선생이란) 직책이란 누가 이미 말한 것을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나는 선생이 이 방법을 고쳐, 그가 가르치는 아이의 능력에 따라 사물들을 음미해 보고, 먼저 자신이 선택하고 식별하여 보게 한 뒤 그 자질을 시험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어느 때는 그의 길을 열어주고, 어느 때는 학생 스스로가 길을 열어 가게 인도하기 바란다. 나는 선생 혼자서 생각하고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제자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한다.

무엇이 확정적이라고 보는 자는 미친 자들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이건, 스토아 학파나 에피쿠로소 학파의 원칙이건, 그것이 가르치는 자의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할 수 있으면 택하고, 아니면 의문으로 두어야 한다.

외워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이 주는 것을 기억 속에 보관해 두는 수작이다. 똑바로 안다는 것은 선생을 쳐다볼 것 없이, 책을 들여다 볼 것도 없이 스스로가 깨달을 수 있다. 순전히 책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역량은 비참한 역량이다!

무엇이 어떻든간에 나는 아이를 가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아이를 혹독한 학교 선생의 우울한 기분에 맡겨 두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짐꾼같이 아이를 하루에 열 너댓 시간이나 고역과 노동에 얽어두어, 그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싶지 않다..


습관이 저지르는 오만함에 대해

우리에게 진짜처럼 생각되지 않는 것을 가짜라고 경멸하며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우쭐거림으로, 이는 보통 사람보다도 자신이 뛰어난 판단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결점이다. 나도 옛날에는 그런 식이었다...지금 손에 잡히는 사물에 대한 인식의 대부분도 얼마나 많은 구름을 걷어 내고, 얼마나 암중모색한 결과 얻어진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실제로 우리는 지식보다도 오히려 습관에 의해 우리 주위의 사물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유와 시간, 그리고 삶에 대해

자연이 누구에게는 더 큰몫을 주고 누구에게는 더 적게 허락한 것은 이들 사이에서 형제애를 일깨워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남을 도우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우리 모두는 태어나면서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 점에서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단 한순간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를 하나의 무리로 만들어 준 자연이 그 무리 가운데서 누군가를 노예로 예정해 두었다고 누가 감히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나는 시기가 나쁘고 불쾌하면 시간을 빠져나간다. 몇 번이나 시간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맛보며, 매달린다. 때가 나쁘면 그것을 쫓아내고, 좋으면 주저앉힌다. '시간을 보낸다'든가 '시간을 죽인다'는 통상적인 표현은 저 훌륭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인생을 흘려보내고, 피하고, 빠져나가고, 죽이고, 교묘하게 피하고, 또한 인생이 고달프고 경멸해야 하는 것인양, 가능한 한 무시하고 회피하는 것만큼 멋진 삶의 방식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지금 내가 그것을 잡고 있는 최후의 노경에 와서도 인생은 가치가 있으며, 쾌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정에 대해

내가 말하는 우정은, 두 개의 영혼이 서로 상대의 내면에 완전히 용해되어, 그들을 결합시키는 매듭이 없어져 알아 볼 수 없게 된 정도를 말한다. 누가 내개 왜 그를 사랑하는지 물어본다면 나는 대답할 수 없다. 다만 '그가 그였고, 내가 나였기 때문이다'라고밖에 답할 수 없다.

 

뱀발. 제목만 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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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5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6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화와 모임의 필요성에 대해

책을 통한 공부는 활기 없고 무기력하다. 따라서 우리의 정신을 단번에 자극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대화는 단번에 우리의 정신을 일깨워 주고 단련시켜 준다. 인간의 지식은 모두 상대적이나 '상대적 진리'는 존재한다. 그것은 어떻게 찾아지는가? 몽테뉴의 답은 명쾌하다. '서로 대화하라' 

나는 대학에서 의심스러운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사람들처럼 "결정할 수 없는 가상을 내놓는다." 그것은 진리를 언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탐구하기 위한 잠정적인 시안이나 시도와 같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에세]라고 한 것이다. 그러한 가상은 생각의 재료이지, 신앙의 재료가 아니다. 나는 신을 따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이들이 연습문제를 제출하듯이 내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가르침을 받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성격과 기질에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중요한 능력은 다양한 삶의 방식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삶의 방식에만 달라붙어 매달리는 것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다. 가장 훌륭한 영혼은 가장 많은 다양성과 유연성을 가진 영혼이다.


글쓰기에 대해

만일 나의 혼이 확실히 대지를 밟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는 이것저것 시도하지는 않으리라. 나의 생각도 고정되리라. 그러나 나의 혼은 언제나 배움과 시련 속에 있다.

몽테뉴가 말하는 에세는 단적으로 말해 '주체적인 판단의 시도'이다. 즉 자신의 체험과 견문에서 얻은 새로운 사고나 주장, 그리고 타인의 체험, 견문과 사고, 주장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인 사고나 주장이다. 따라서 앞서 나온 타인의 선입견 혹은 상투적인 주장을 물리치고, 스스로에게 명백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회의하고 음미한 뒤, 타인의 그것과 다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에세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는 산문'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다.

에세의 경우 기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즉 자신만의 지적인 스타일, 여유, 멋, 맛, 냄새, 바람, 분위기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역시 '주체적인 표현의 시도'이다.

과거의 것이나 타인의 것과 같은 글이라면 왜 다시 쓰는가? 그야말로 그것은 쓰레기가 아닌가?

 지금을 충만시키는 것에 대해

나는 민중을 사랑하고, 압제자를 미워한다. 그러나 민중과 함께 사는 것은 내게 매순간 고통이다. 나는 민중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하겠지만, 상점 점원과 함께 살기보다는 한달 중 반을 감옥세서 지내는 쪽을 택하겠다.

모랄리스트란 공통의 관심이 인간을 특히 감정이나 정서의 측면에서 자기인식에 이르도록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지성은 약화된다. 아니 과도한 지성이나 정신을 경계한다.

그는 이미 현학이 된 그리스어나 라틴어 공부를 버리고 자기 나라의 속어에 눈을 돌리라고 주장한다. 또한 현재 자신과 더불어 살고 있는 자신과 직접 관련된 사람들이나 사물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몽테뉴의 [에세]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에 관한 탐구이다. 그를 상징하는 말인 '크세주(que sais-je)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뜻이다.


판사, 성주, 시장을 지냈으니 꽤나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겠고, 따라서 그가 고독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다를 법도 하다. 그런데도 왜 그가 고독하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그가 나라나 시대의 생각과 삶에 맞섰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시대, 그 나라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을 했고 또한 다르게 살았다. 그래서 그는 고독했다.

모는 은거지에는 산책로가 필요하다. 내 생각은 앉아 있으면 잠들어 버린다. 나의 정신은 다리가 그것을 흔들지 않으면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책 없이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럴 것이다....아름다운 과수원을 혼자서 산책할 때 나의 생각이 한동안 바깥일에 향하는 경우가 있어도, 그렇지 않은 때에는 그 생각을 산책, 과수원, 이 고독한 마음, 그리고 나에게로 되돌이킨다.

나는 그날그날을 살아간다. 또 말하기는 조금 거북하지만, 나를 위해서만 살아간다. 내 의도는 거기서 그친다. 나는 젊어서는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공부했다. 그 후에는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 공부했다. 지금은 재미로 한다. 결코 어떤 소득을 위해 한 일은 없다. 이런 종류의 책을 통해 내 필요에 충당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나를 치장하려는 낭비적이고 헛된 심정은 버린지 이미 오래다.

나에게는 우울 속에서 자신의 기분을 키우는 것에는 의도와 만족 그리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태도가 있다고 생각된다. 나아가 말하자면 야심조차 거기에 섞일 수 있다. 우울의 무릎밑에는 우리에게 웃음 짓고 아첨하는 약간의 감미로운 그림자가 있다. 그것을 먹고 살아가는 성질의 인간도 있는 것이 아닐까?

독서 흔적

나의 기억력이 나를 배반하고 그 결함이 너무 심해, 몇 해 전에 정독하고 스스로 기록까지 한 책을 내가 모르는 새로운 책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들추어 보는 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의 기억력을 조금이라도 보충하기 위해  한 권 한 권의 책 뒤에(이는 한 번만 사용할 책에 대해서이지만) 그것을 다 읽은 날짜와, 그 책에서 내가 끌어낸 개괄적인 판단하는 가필하는 버릇을 들여, 그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 대해 내가 품은 풍모나 전체적인 인상을 스스로에게 생각나도록 했다.

뱀발. 조금 옮겨놓는다. 그의 생각의 초입과 말미의 격차는 실로 엄청난데 읽다보면 어느새 대단하지 않다는 생각이 옮겨진다. 그는 저기 멀리 있는 것 같지 않다. 소근소근 생각이나 판단을 유영하듯 잡아준다. 그렇게 빠져나오면 몸에 그 달라진 생각이 붙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잊어버려 헤매는 것도 산책하다 드는 생각도, 생각을 키우는 일도 낯설어보이지 않는다. 간지들 가운데 몇꼭지를 내멋대로 옮겨본다. 크리스마스 이브 상가가 있어 이동하는 와중. 일터일들도 겹쳐 기분이 싱숭생숭한 상태여서 잡념은 다음에 옮겨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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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09-12-2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몽테뉴!
여울마당님,크리스마스는 잘 보내셨나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몽테뉴에 대한 글이 있어 즐겁게 보았습니다.
홋타 요시에의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 시리즈'는 절판이 되어 정말 몇달을 미친듯이; 중고서점부터 여러군데를 찾아다녔으나 결국 못찾아 포기하고 어디 도서관에서 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네요.^^; 동서문화사의 완역 에세를 보았으나 60년대 번역은 읽어내기가 어렵네요ㅠㅠ
ps : 인용된 글귀들은 박홍규 저의 '몽테뉴의 숲을 거닐다'에서 발체된 건가요?

여울 2009-12-27 23:48   좋아요 0 | URL
네 잘 보냈습니다. 오랜만이군요...저도 완역본이 보고 싶은데...인근도서관에도 없네요. ㅎㅎ 네 인용된 글귀는 그 책이구요.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