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맑스주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언어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 언어는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은 창조할 수 없다. Rawrence Goodwyn
뱀발. 누에고치가 아니라 집에고치처럼 신년 며칠을 보냅니다. 절반은 수면, 절반은 꿈과 독서를 번갈아 드나들며 구매로 떠들썩하고 한참 교통체증을 낳은 코스**를 지나쳐 늦은 기차를 타고 내려옵니다. 차창가 낮은 평야와 산은 아담하고 답답함을 덜어내줍니다. 마저 읽은 책들 사이, 생각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다가 이렇게 내려놓습니다. [살아있는 민주주의]라는 책을 가운데 놓고 시집과 가벼운 책들이 섞어 봅니다.
얇디 얇은 앙상한 뼈만 남은 민주주의를 우리는 복원할 수 있을까요? 지난 년말의 어느 님의 책 한가운데도 이 말과 유사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결사학, 어쩌면 민주주의를 별반 해본 적이 없기에 또 다시 걸음마를 해야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민주주의 기술 art란 것에도, 몸에 배인 언어란 것이 기껏해야 자본주의와 맑스 흉내내기 말투만 남은 것은 아닌지도 돌아봅니다. 입에 맴돌고 있는 단어도 다시 뱉어내어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쓰는 용어들이 얼마나 [살아있는? 민주주의]에 멀리 떨어져 있는지? 얼마나 자본을 키우는데 씨앗이 되는 말인지? 얼마나 덧셈이 아니라 뺄셈을 향하는 언어로 버무려져있는 것인지?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씩 잇기로 하지요. 새해입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사람 많이 만나시고, 좋은 생각 많이 실천하시고, 어렵더라도 재미로 배부르시고, 어려운 이, 마음 서로서로 보듬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