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휴전선 - 이라서, 이기때문에, 이니까의 자기생산.
그래요. 스스로 금을 긋고, 그 밖을 나와 다른 것으로 경계짓는 일들. 그 울타리로 인해 스스로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끼지만, 그 안락함과 편안함은 고스란히 저들을 밀어내거나 뱉거나 해서 생기는 반사이익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쪽의 친숙함이나 친밀함이 경계밖의 소원함이나 불편함의 반사느낌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너지보존의 법칙처럼. 사회의 편안함 총량이 일정하다면 말입니다.(그렇다면 이 불편함들이 다 편안함을 독식하는 녀석들이 있다는 이야기네요.)
오늘도 삶터로 향하며 일용할 휴전선을 긋습니다. 지나치는 노숙자들과 리어카에 잔뜩 박스를 실은 늙은 어르신네들 1), 하청에 하청, 비정규직을 가로지르는 심리적 장벽들. 자주 보고 만나면 익숙해지듯 마음에 낀 때는 이내 불편을 잊어버립니다. 지나치듯 거두어버리는 시선들에 낀 때도 이내 불편을 잊어버립니다. 시간의 켜에 불감은 무감으로 변하고, 세상의 경계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나는 해당사항 없을 것이라 안위합니다. 나만은 나만은 예외라는 진리를 실천하며 살아냅니다.
그래요. 의식없이 그어버린 선들. 그 선들은 아마 처음은 점선이었을 것입니다. 마음들이 여물지 못해, 그 점선 사이로 아픔이, 안타까움이 들락날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다보니 핑계가, 안위가, 이라서-이기때문에-이니까의 행렬들이 점점 그 간극을 메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점선이 실선으로 두터워지고 무뎌지고 실선의 장벽이 커져버렸습니다. 실선이란 성안의 나는 저기 성밖의 사람들과 다르다라고 주장하고 싶어지고 싶어지고 말입니다.
그런데, 실선의 장벽이 점점, 그렇게 만든 휴전선이 저쪽으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요? 내안의 휴전선이 점점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협착되도록 다가서는 것은 아닌가요? 내 성만이 높고 큰지 알았는데, 좁혀지고 무뎌진 시선은 높아지기만하는 성벽의 밖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알량한 앎으로도, 서푼어치 논쟁한번 하지 않은 이념으로도, 밀리면 끝이라는 정규직으로도, 중산층으로도, 연구원으로도, 여성으로도, 농민으로도,
어떨까요. 실선의 장벽을 서서히 내리고, 또 다른 휴전선이 보일 만큼 시선을 높이면 어떨까요? 내 안의 다른 휴전선들이 보일만큼, 삶의 강팍을 밀어내면 어떨까요? 여유나 아픔을 그 속에 키워보면 어떨까요? 슬픔이 깃들 수 있도록 내버려두면 어떨까요? 그리고 실선의 휴전선들에 구멍 숭숭내어 점선으로 만들어버리면 어떨까요? 철조망 걷어버리고, 당신의 아픔과 슬픔이 내왕하고, 정규직의 맹독성을 희석시켜보면 어떨까요? 시대가 산출한다는 평균적인 삶에 물음표를 던져 가고오게 하면 어떨까요?
어떡하죠. 이 사회(야! 한국사회?)는 너무 물밑 연대가 부족하다죠. 마치 강고한 성들을 하나씩 안고 살아서 옆집이 옆사람이 어떻게 아파하는지조차 보이지 않는다죠. 그런데 그렇게 누리고 있는 일상이란 성들의 기초가 바위가 아니라면 어떡하죠? 더 이상 쌓아올릴 것도 없는 마지막이라면 어떡하죠? 끊임없이 내왕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아 쌓아올린 불감의 성, 무감의 성의 기초가 바위가 아니라 바다라면 어떻게 하죠?
정규직의 아성이 결국 제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진다면 어떡하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늘 만나고 섞이고, 강자와 사회적약자가 늘 함께 섞인 바다라면 어떡하죠. 비정규직의 불편함으로 정규직의 편안함이 만들어졌다면 어떡하죠. 당파로 쌓아올린 성이 일상의 바다에 근거없이 올린 것들이라면 어떡하죠.
그래요. 구획짓고, 구분짓고, 나누고, 편가르고 한 일들. 가족이란 바다에 모두 우리 구성원들이죠. 노약자-정규직-비정규직-반정규직-학생-여성-농민-이주노동자---- 여러 색깔 가운데 혹 당신은 한가지만 편애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강한 것에만, 힘들에만 바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시선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나요? 그래요. 저 끝단. 힘도 없고, 빽도 없고, 무지렁이같은 동선. 무심결에 뱉어버린, 발에 툭툭 차이던 깡통같은 것이라고만 하지 맙시다. 휴전선의 경계에서 사격하던 마음을 거두고, 저편이 최소한 동시대를 살아내는 친구로 호명하면 어떨까요? 2) 좀더 힘이 더 있다고 여기면 힘이 없는 편의 시선으로 아파하는 연습을 해보며는 어떨까요? 무감에서 불불불감으로 불불감에서 불감으로... ...
저기 파리처럼보이는 것에서 마음도 눈길도, 아픔도, 슬픔도 섞어 사람같아 보이는 것. 사람이란 존재로 들어오게 하면 어떨까요? 결국 별난 족속있겠어요. 섞이고 아파하지 않으면 슬퍼하지 않으면 휴전선 밖으로 밀려난 것들이 모여 고스란히 우리에게 쓰나미로 몰려오는 것들이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휴전선도 만들 수 없는 우리는 수생, 아니 해상생물?인가요? 저기 탑만 올리는 자본의 육상생물 말고?? 어쩌면 우리는 애초에 내 안의 휴전선을 칠만큼 굳센인간들이 아닌지도 몰라요.(굳세다구요. 할 수 있다구요. 그럼 자본에 투항하시든지, 저기 육지로 백기들고....어서...!!). 철망을 거두세요. 거둡시다. 거둘 수 있어요. 아파한다면... ...


뱀발.
아~ 참!! 참터가 여러분들에게 혹시 실선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아니겠죠. (허걱~ 휴전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구요. ㅁ. 설마~) 설령 그러시더라도, 호의와 호감 다시 충전해주시구요. 이왕이면 닫힌 실선...조금씩 점선으로 바꿔주시면 안될까요? 그 점선 사이로 참터의 아픔이나 기쁨이나 열정들이 들낙거리면 좋을텐데. 하하. 입추가 훌쩍 지났습니다. 이제 열린 점선 참터와 친하게 사귀어보았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동선, 몸의 동선이 점선안팎으로 왔다갔다할 것이라고 기대해봅니다. 몸 건강하시구요.
1)
'저울눈금을 확인한 고물상 주인이 ㎏당 50원 하는 폐지를 부리다 리어카 밑바닥에서 젖은 라면상자 두 개를 발견하고는 이런 일이 벌써 한두 차례 아니라며 남은 이보다 빠지고 없는 이가 더 많은 노인을 다그치자 재생이 가능한 폐지를 주워온 노인네는 요 며칠 궂은 날씨를 탓하여 본다.//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고물상에서는 눈물이 젖어도 폐지가 젖어서는 안 된다.' (박영희, 고물상을 지나다)
2)
겨자씨만한 것.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불씨와 같은 것.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면 중심이 되는 것.
최후의 보루 같은 것. ( 박영희, 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