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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소년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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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때 룸메이트 언니의 영향으로 처음 접하게 된 아다치 미츠루. 절제된 듯한 간결한 그림선 만큼이나 절제된 표현들, '억눌림'이 아닌, 분명하게 '표현'은 하되 간결할 줄 알았던 그 매력에 아다치 미츠루를 참 좋아했던 것 같다. 

당시에 읽었던 러프와 터치 이후로는 아다치 미츠루의 다른 작품들을 만나지 못했던 내게 알라딘 메인의 아다치 미츠루 신작 단편집 소식은 묘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러프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맘설레하던 시절을 기억하며 거침없이 구매를 클릭하고, 오늘 도착한 한무더기의 책들 중 가장 먼저 집어들었다.

총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모험 소년, 단편 중 하나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단편 리스트에 모험 소년이라는 작품은 없다. 단편집의 제목인 '모험소년'은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컨셉이다.

오늘을, '살아가며', 예전의 어느 한 때에 비한다면 지금은 다소 현실을, '알고있다고 믿는' 나처럼, 일단 몸과 나이는 '어른인' 사람들이, 우연한 계기로 과거를 떠올리고, 과거의 꿈을 떠올리며, 그 때의 자신을 만나게 된다는, 이 단편집속 작품의 설정들은 내가 아다치 미츠루의 배너를 알라딘에서 보고, 아다치미츠루의 작품을 읽던 그 대학 1,2학년  시절을 잠시나마 떠올렸던 그 마음만큼이나 아련하다. 철없고 순수하던 마음이 아련하다 못해 아찔하기까지 한 그 때를 떠올리는 마음은 마지막 작품인 '스케치북' 속의 남자가 10년 전 그 카페에서의 자신을 떠올리고는 앉아있기가 불편해져 이내 카페를 나설 수 밖에 없던 마음과 닮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을 떠올리는 일이 내게 아찔하다는 것은 그 시절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가 철이 들었거나, 혹은 성숙했음을 전제로 이야기하는 것일텐데, 그 시절보다 내가 철이 들었다는 건 다소 슬픈 현실인지도 모르겠고, 철이 들었다는 것이 꼭 성숙함을 근거로 하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실은 진짜 철이 들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각 단편 속 주인공들이 과거의 한 시기를 떠올림으로 현재 자신을 돌아보고 정제할 수 있었으며, 미래를 살아갈 따뜻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내가 살아왔던 과거도, 또한 앞으로 만들어갈 과거도 그런 따뜻한 에너지를 만들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일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 만화처럼 간결하나 분명하게 새긴다. 

훈훈한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 옆에 두고 가끔 꺼내보고 싶은 만화다. 몇년 후쯤 다시 이 만화를 읽을 땐, 이 만화를 처음 읽으며 가졌던 지금의 아련함도 함께 떠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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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09-01-30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거 읽었어요! 1월에~ 12월에 선물로 받은건데~ 단편이라서 좀 아쉬웠어요..하나의 주제로 묶은 건 괜찮았는데...오래 전에 보고 히데노리를 접한 이후 아다치 미츠루는 자연 스럽게 멀어졌는데...10년두 넘게 안접하다가 보니 괜찮네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어요..
 
코드 훔치기 - 한 저널리스트의 21세기 산책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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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화의 물결 또는 재자본주의화의 물결은 옛 체제에 지쳐 있던 사람들에게 풍요와 행복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지켜지지는 않았다. 흔히 '신자유주의'라는 경멸적 어휘로 불리는 미국 중심의 이 새로운 세계 체제는 많은 사람들을 주변부로 내몰고 있다. 개혁은 너무 느리거나 방향을 잘못 잡은 듯 싶고, 그래서 경기는 침체되고 실업자는 늘어나지만 옛 체제가 그런대로 쳐 놓았던 사회적 안전망은 거의 파괴된 상태다. <사회주의의 미래 中>-18쪽

개인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그래서 개인주의자는 은자가 아니다. 공심의 결여나 비사교성은 개인주의와 무관하다. 개인주의자는 개인주의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 개인과 연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중략)
존재하는 것은 개인주의라기보다는 개인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인주의적 개인은 개인주의에 대한 각자의 개념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막스 슈티르너는 이기주의라는 말을 긍정적 맥락에서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이기주의자다. 이타주의자란 타인의 쾌락을 통해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일 뿐이다. <개인들의 시대 中>-30~32쪽

실천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태도는 순수 또는 순결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는 것일 것이다. 순수한 민족(피), 순결한 이념, 순수한 교리 따위에 대한 집착은 흔히 광신자들을 낳고 광신자들은 언제 어디서고 이단과 불순분자와 인민의 적과 민족의 원수를 발견해서 그들에게 성전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불순함에 대한 옹호가 필요한 것은 그래서다. 불순함을 옹호하는 정신은 너그러움을 옹호하고 실천하는 정신이다. 그것은 나와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서 살겠다는 정신이고 우리 속에도 수많은 그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정신이다. 그것은 새로운 세기의 시대 정신이다. <우리와 그들 中>-40쪽

자크 아탈리는 지난해에 낸 저서 21세기 사전에서 지식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세상의 광기를 자유롭게 관찰하는 사람, 확신시키기보다는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 지배하기보다는 매혹하려고 애쓰는 사람, 순응주의에서 벗어난 사람, 세상이 잠든 밤에도 깨어 있는 사람, 눈먼 확신의 속죄양" (중략)
사르트르는 지식인에 대한 모든 비난은 "지식인이란 자기와 상관도 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한 뒤 바로 그것이야말로 지식인의 정확한 정의라고 되받았다. 지식인은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다. 그 말을 바꾸면 지식인은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과 관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중략)
사르트르는 더 나아가 자신의 지적 영역에서 쌓은 명성을 남용(사르트르에게 이 남용이라는 말은 당연히 긍정적 의미로 사용된다)하여 기존의 사회와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르트르에 말하면 이 남용이야말로 지식인의 본질적인 부분이고, 어떤 체제, 어던 시대에도 지식인이 처할 수 밖에 없는 불편함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지식인의 죽음, 지식인을 위한 변호 中>-59~61쪽

위대한 반대자로 불렸떤 미국 연방 대법원 판사 올리버 웬델 홈즈가 지적했듯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모색 中>-72쪽

그러나 스포츠가 지금처럼 실력 위주의 위계 기준과 숙련에 기초한 성공만을 찬미할 때 오직 기록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서 그릇된 사회 진보관을 제시할 때, 인간의 신체를 능률성과 생산성이라는 기술주의적 준거틀에 맞추어 바라보게 만들 때 소외된 사람들을 현실에서 도피시키는 보상 매커니즘으로 작용할 때, 상업주의를 숭배하며 국가와의 상징적 연결을 통해서 억압적 국가의 정당성을 재생산해낼 때, 그때 스포츠는 장-마리 브롬의 책 제목대로 '측정된 시간의 감옥'이 되고 말 것이다. <호모 스포르티부스 中>-125쪽

소설 장르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랑수아 라블레는 지금부터 5백년 전에 과학이 윤리에 의해 제어되어야 할 필요성을 '양심(자각,의식)이 없는 과학(앎)은 정신의 폐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요약했다. <테크놀로지의 미래 中>-201쪽

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신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고도 불리고 더 멋지게는 '역사의 종언'이라고는 말로도 포장된다. 이런 종말의 선언은 복음인가? 드보레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에 따르면 경제가 정치를 대체해버린 이 새로은 보편적 민주주의의 질서보다 더 맹목적이고 위험한 유토피아는 없다. 왜냐하면 냉전의 종식은 우리를 '역사 이후' 시대의 평화로운 해안가로 인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화정을 위하여 中>-208쪽

전세계적으로 볼 때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은 그것이 교육이든 자연자원과 환경이든 우리가 앞세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보다 양으로나 질로나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현재의 세대 또는 기성 세대가 미래의 세대 또는 새 세대에게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면 그들은 지금의 성장에서 생기는 몫의 큰 부분을 떼어내 비축해 놓아야 한다. 다시 말해 현재의 세대들은 특히 선진국의 시민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사회보장혜택을 줄여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세대 계약이 돼야 한다. 이것은 정부가 지금 세대의 이기주의에 맞서서 미래 세대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세대보다 미래 세대에 더 마음을 쓰는 것은 진화의 법칙이 가리키는 자연적 명령이기도 하다. <늙음과 젊음 中>-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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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병역거부?
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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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 교수의 평화의 얼굴은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당시 나의 도서 구매 정책 때문에 (2달간 구매 금지!) 선뜻 구매하지도 못하고 얼래벌래하다가 천원 할인 쿠폰도 놓쳐버렸다. 하지만 두달간 저 정책을 (어쨌든) 지켜준 나 자신에게는 스스로 매우 뿌듯함을 보내주고 있는 중이다. 흐흣- 그리고 천원 더 주고 산 이 책은, 그 천원이 절대 아깝지 않은 책이었다. 


김두식 교수의 쉽게, 말하듯 흐르듯 글쓰기는 이 책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글을 써야 한다면 그의 말투를 빌어오고 싶을 정도로 그의 말투는 정중하면서도 분명하다. 한껏 예의를 갖췄으며 모난 표현으로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드물다. (사실 나는 나름 '상대'의 입장이 아니라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어 '상대'의 자리에 서보지 못했기에 '없다'라는 단언은 섣불리 못하겠다.)

하지만 그것이 논리까지 두리뭉실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정중하면서도 확실한 논리로 일단 그의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수긍할 수 밖에 없도록 자신의 글을 전개해 나간다. 특히 상대의 논리를 설명하며, 그 논리가 가진 한계를 짚고, 그것으로 다시 상대의 논리가 가진 모순을 지적하는 부분에서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는지 모르겠다. 

소개가 늦었다. 이 책은 그가 오랜동안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온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에 대한 책이다. 그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에게 단순히 관용을 베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에 먼저 (그들이 대부분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기에)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정죄하는 데 앞장서 온 주류 기독교에 대한 비판 및 반성의 촉구를 선행한다. 그 역시 주류 기독교에 속한 자이기에 자신의 반성 또한 곁들인다. 그는 이러한 현상이 주류 기독교가 정치권들이 불편해할 만한 것들은 하지 않아 왔던 것과 주류 기독교에서 정의한 '이단'이라는 것을 사회 전체의 이단으로 규정해버리는 우리 사회의 몰지각성에 대해 지적한다. 기독교인으로서 무엇이 바른 것인지에 대한 사유하지 않음, 그리고 예수님의 평화의 명령을 몸소 실천하지는 못할 망정 그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모순에 대해 가감없이 지적한다. 또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들 또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였으며, 이는 기독교 내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일임을 설명한다. 

또한 정부와 국가에게는 그들이 무엇을 위해 남북대치를 하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는지의 근본적인 원인부터 되묻는다. 남북대치의 목적이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라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인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는 행위가 진정 옳은 것인지 묻는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그것의 기본정신을 포기해야만 하는 모순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는 일부 사람들의 정당한 전쟁도 있을 수 있깅 양심에 따른 무조건적인 병역 거부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에도 일침을 가한다. 정당한 전쟁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쟁에 나가기 전 그 전쟁이 정당한 지 여부에 대한 깊은 고찰과 사유가 필요하기 때문에 진짜 정당한 전쟁론자가 되기란 쉽지 않다고 말하며 정당한 전쟁이라는 것이 이론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움을 역설한다. 상대를 악에서 구하기 위해 상대를 죽일 수도 있다는 논리는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만약 진짜 정당한 전쟁론자라면 전쟁의 상황이 닥쳤을 때 평화주의자와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맺음말에서 그는 다시 입대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택하겠노라, 고 함부로 단언하지 않는다. 이는 이 책의 전신 격인 칼을 쳐서 보습을을 읽고 그에게 병역거부를 하겠다며 편지를 보냈다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그러지 말 것'을 당부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어이없게도 박민규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고 회사를 그만두겠다며 찾아온 독자를 돌려보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공동체의 성원이 없는 가운데 '홀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택하기에 이 땅의 토양이 얼마나 척박한지를 설명한다. 결국 그는 그 자신의 몫을 많은 사람들이 양심에 근거한 선택을 하게 될 때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데 있다고 보는 듯 했으며 향후 그가 그 역할을 그답게 충실히 해 나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쟁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병역 및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문제 앞에 민감하게 고민해 보지 못했던 스스로를 돌아 본다. 나 역시 어느 정도는 기성 교회의 시각에 젖어 있던 부분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역시 '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가 없었음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이 책은 이런 나로 하여금 그들에 대해 또한 나에 대해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줬으며 향후에도 끊임없이 관심을 갖겠다는 다짐의 시작이 됐다. 

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에 이어 그가 준비중이라는, 교회와 정치, 그리고 그에 대한 처절한 반성을 담았을 것으로 예상되는 세번째 책에 담겨 있을 그의 목소리 역시 매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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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1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단 생각 드네요 ^^

웽스북스 2007-08-13 13: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꼭 한번 읽어보세요 ^^

멜기세덱 2007-08-13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김두식 교수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와 주류 기독교 계는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웽스북스 2007-08-13 13:03   좋아요 0 | URL
네, 멜기세덱님~! 잘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바람결 2007-08-1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부터 관심하던 책인데, 좋은 리뷰를 만나 반갑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한 명의 종교인으로써 '평화'의 참된 의미와 대면할 수 있는 계기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웽스북스 2007-08-13 22:56   좋아요 0 | URL
네, 바람결님, 평화의 참된 의미를 마구 고민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 감사드립니다!

마늘빵 2007-08-27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이드님 서재 통해 건너왔습니다. 왜 여길 몰랐을까.

웽스북스 2007-08-27 21:10   좋아요 0 | URL
저는 이미 유명인이신 아프락사스님 서재를 여러번 다녀왔는걸요 ^^
제 서재는 뭐, 모를만 합니다 흐흣

2010-03-15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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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를 관통하는 핵심 줄기는 바로 신학자 월터 윙크가 말하는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입니다. '평화를 되찾아주는 것은 언제나 정당한 폭력뿐이다'라는 거짓된 신화가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지요.-73쪽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랑을 통한 구원' 이야기가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통한 구원'을 약자들의 자기정당화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거나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기적으로 평가절상함으로써 가능성을 우리 상상 속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75쪽

'평화를 위한 전쟁'은 '착한 살인자',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독재자'만큼이나 모순된 표현입니다. 존재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 우리의 믿음이 오히려 경이로울 정도지요.-141쪽

상대방을 악에서 구하기 위해 상대방을 죽일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할까요?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엄중함으로 죽일 수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이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144쪽

누구 하나 그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이 '이단'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단이냐 아니냐 여부는 궁극적으로 기독교 내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기독교의 '이단' 정의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의 이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류에 속한 특정 집단이 소수파를 '이단'으로 정의하는 순간 사회 전체가 그 소수파를 이단으로 받아들이는 특이한 시스템이 구축된 것입니다. 반공, 애국, 기독교, 독재정권 등이 일체를 이룬 주류 사회가 소수자를 억압하는 데 철저하게 결합해 있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278쪽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그 근거로 남북 대치 상황이 주로 거론됩니다. (중략) 그러나 남북 대체 상황을 생각함에 있어서 먼저 왜 우리가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바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지키려는 민주주의는 허울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대로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자유, 믿고 싶은 종교를 마음대로 믿을 수 있는 자유,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 등과 분리된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남북 대치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모두 감옥에 넣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 자치 자체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모순된 논리입니다.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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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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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당연히 알 수 있듯, 바리데기는 우리 나라의 전통 설화인 바리공주 설화를 그 모티브로 삼은 소설이다. 바리공주처럼 일곱번째 딸로 태어나 버림받을 뻔했다 하여 '바리'라고 이름지어진 북한 소녀. 그 출생만큼이나 그녀의 운명 또한 참 지속적으로 기구하다. 한 번도 역사의 중심에 선 적은 없지만, 항상 역사와 세계의 직격탄을 맞으며 살아가는 인물이라고 할까? 

이 책은 그의 전작인 손님, 그리고 심청의 연장선 상에 있다.
예전에 심청을 읽고 간단히 리뷰하면서 이런 글을 썼었다. 

손님이 굿의 형식으로 한민족의 역사와 한을 잘 풀어냈다면
이번엔 역사와 함께 성숙해가는 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
좀더 방대한 역사를 써내려갔다


전통 설화의 설정을 빌려온 한 여성이 온몸으로 역사를 살아내면서 성숙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는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심청의 연장선 상에 있고, 전통 무속의 형식을 빌어 세상과의 화해를 꾀한다는 점에서 또한 이 작품은 손님의 연장선 상에 있기도 하다. 심청의 여주인공이 19세기를 온몸으로 살아냈다면, 바리데기의 여주인공은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21세기를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손님이 개인과 개인의 화해를 통한 세계와 세계의 화해를 추구했다면 이 책은 자신과 자신의 화해를 통한 개인과 세계의 화해를 시도한다. 

자신과의 화해가 곧 세계와의 화해의 시작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결국 세계란 개개인으로 이루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개개인에게 묻는 것이 틀린 논리는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힘들게 세상을 견뎌낸 사람들에게 그건 너무 가혹한 물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틀린 말이 아니기에 더욱 가혹했을지도 모른다. 너가 그들을 뒤돌아보지 못했잖아, 너가 그들을 미워했잖아, 결국 너부터야, 라는 마치 어르신에게 혼나는 듯한 황석영 선생님의 직설적인 메시지는 참 강하면서도 아프게 다가온다.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가혹하지만 그게 정답으로 가는 첫 걸음임을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에서는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었고, 세상은 여전히 희망적일 수 없음을 암시하며 끝내는 이 작품은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나약한 개인일 뿐인 인간 개개인이 '생명수를 알아보는 마음'을 갖는 것이 이 세계의 유일한 희망임을 말하기에 또한 지극히 이상적이기도 하다. 어떻게 읽으면 매우 희망적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읽으면 매우 절망적이기도 한 이 책 안에는 결국 인간에게서 희망을 보고 싶다,는 황석영 선생님의 바람이 간절히 녹아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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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8-10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책 구입을 망설이는 중인데~~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만요!
요즘엔 무거운 독서는 피하는 중이지만 좋은 서평에 추천 꾸욱!

웽스북스 2007-08-10 12:50   좋아요 0 | URL
균형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의식적으로 무거운 책들을 피하다 보면 또 어느순간 너무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싫고, 그래서 다시 무겁게 읽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하고, 암튼 적절히 균형감 있게 읽는 걸 좋아한답니다 전 ^^ 유치뽕한 책들도 가끔 얼마나 재밌는데요 흐흐

leeza 2007-09-08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보고 나니깐 왠지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드네요. 요즘 여기저기에 자주 나오는 책이다 보니 오히려 더 미뤄지게 된다는... 인간에게 희망을 보게 되는 그 날을 위해~ 추척 꾸욱 누르고 갑니다.

웽스북스 2007-09-08 23:58   좋아요 0 | URL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 미흡한 서평보다 더 좋은 책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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