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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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를 관통하는 핵심 줄기는 바로 신학자 월터 윙크가 말하는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입니다. '평화를 되찾아주는 것은 언제나 정당한 폭력뿐이다'라는 거짓된 신화가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지요.-73쪽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랑을 통한 구원' 이야기가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통한 구원'을 약자들의 자기정당화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거나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기적으로 평가절상함으로써 가능성을 우리 상상 속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75쪽

'평화를 위한 전쟁'은 '착한 살인자',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독재자'만큼이나 모순된 표현입니다. 존재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 우리의 믿음이 오히려 경이로울 정도지요.-141쪽

상대방을 악에서 구하기 위해 상대방을 죽일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할까요?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엄중함으로 죽일 수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이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144쪽

누구 하나 그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이 '이단'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단이냐 아니냐 여부는 궁극적으로 기독교 내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기독교의 '이단' 정의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의 이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류에 속한 특정 집단이 소수파를 '이단'으로 정의하는 순간 사회 전체가 그 소수파를 이단으로 받아들이는 특이한 시스템이 구축된 것입니다. 반공, 애국, 기독교, 독재정권 등이 일체를 이룬 주류 사회가 소수자를 억압하는 데 철저하게 결합해 있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278쪽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그 근거로 남북 대치 상황이 주로 거론됩니다. (중략) 그러나 남북 대체 상황을 생각함에 있어서 먼저 왜 우리가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바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지키려는 민주주의는 허울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대로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자유, 믿고 싶은 종교를 마음대로 믿을 수 있는 자유,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 등과 분리된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남북 대치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모두 감옥에 넣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 자치 자체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모순된 논리입니다.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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