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 훔치기 - 한 저널리스트의 21세기 산책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품절


자유화의 물결 또는 재자본주의화의 물결은 옛 체제에 지쳐 있던 사람들에게 풍요와 행복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지켜지지는 않았다. 흔히 '신자유주의'라는 경멸적 어휘로 불리는 미국 중심의 이 새로운 세계 체제는 많은 사람들을 주변부로 내몰고 있다. 개혁은 너무 느리거나 방향을 잘못 잡은 듯 싶고, 그래서 경기는 침체되고 실업자는 늘어나지만 옛 체제가 그런대로 쳐 놓았던 사회적 안전망은 거의 파괴된 상태다. <사회주의의 미래 中>-18쪽

개인주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그래서 개인주의자는 은자가 아니다. 공심의 결여나 비사교성은 개인주의와 무관하다. 개인주의자는 개인주의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다른 개인과 연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중략)
존재하는 것은 개인주의라기보다는 개인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인주의적 개인은 개인주의에 대한 각자의 개념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막스 슈티르너는 이기주의라는 말을 긍정적 맥락에서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이기주의자다. 이타주의자란 타인의 쾌락을 통해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일 뿐이다. <개인들의 시대 中>-30~32쪽

실천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태도는 순수 또는 순결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는 것일 것이다. 순수한 민족(피), 순결한 이념, 순수한 교리 따위에 대한 집착은 흔히 광신자들을 낳고 광신자들은 언제 어디서고 이단과 불순분자와 인민의 적과 민족의 원수를 발견해서 그들에게 성전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불순함에 대한 옹호가 필요한 것은 그래서다. 불순함을 옹호하는 정신은 너그러움을 옹호하고 실천하는 정신이다. 그것은 나와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서 살겠다는 정신이고 우리 속에도 수많은 그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정신이다. 그것은 새로운 세기의 시대 정신이다. <우리와 그들 中>-40쪽

자크 아탈리는 지난해에 낸 저서 21세기 사전에서 지식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세상의 광기를 자유롭게 관찰하는 사람, 확신시키기보다는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 지배하기보다는 매혹하려고 애쓰는 사람, 순응주의에서 벗어난 사람, 세상이 잠든 밤에도 깨어 있는 사람, 눈먼 확신의 속죄양" (중략)
사르트르는 지식인에 대한 모든 비난은 "지식인이란 자기와 상관도 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한 뒤 바로 그것이야말로 지식인의 정확한 정의라고 되받았다. 지식인은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다. 그 말을 바꾸면 지식인은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과 관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중략)
사르트르는 더 나아가 자신의 지적 영역에서 쌓은 명성을 남용(사르트르에게 이 남용이라는 말은 당연히 긍정적 의미로 사용된다)하여 기존의 사회와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르트르에 말하면 이 남용이야말로 지식인의 본질적인 부분이고, 어떤 체제, 어던 시대에도 지식인이 처할 수 밖에 없는 불편함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 <지식인의 죽음, 지식인을 위한 변호 中>-59~61쪽

위대한 반대자로 불렸떤 미국 연방 대법원 판사 올리버 웬델 홈즈가 지적했듯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모색 中>-72쪽

그러나 스포츠가 지금처럼 실력 위주의 위계 기준과 숙련에 기초한 성공만을 찬미할 때 오직 기록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서 그릇된 사회 진보관을 제시할 때, 인간의 신체를 능률성과 생산성이라는 기술주의적 준거틀에 맞추어 바라보게 만들 때 소외된 사람들을 현실에서 도피시키는 보상 매커니즘으로 작용할 때, 상업주의를 숭배하며 국가와의 상징적 연결을 통해서 억압적 국가의 정당성을 재생산해낼 때, 그때 스포츠는 장-마리 브롬의 책 제목대로 '측정된 시간의 감옥'이 되고 말 것이다. <호모 스포르티부스 中>-125쪽

소설 장르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랑수아 라블레는 지금부터 5백년 전에 과학이 윤리에 의해 제어되어야 할 필요성을 '양심(자각,의식)이 없는 과학(앎)은 정신의 폐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요약했다. <테크놀로지의 미래 中>-201쪽

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신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고도 불리고 더 멋지게는 '역사의 종언'이라고는 말로도 포장된다. 이런 종말의 선언은 복음인가? 드보레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에 따르면 경제가 정치를 대체해버린 이 새로은 보편적 민주주의의 질서보다 더 맹목적이고 위험한 유토피아는 없다. 왜냐하면 냉전의 종식은 우리를 '역사 이후' 시대의 평화로운 해안가로 인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화정을 위하여 中>-208쪽

전세계적으로 볼 때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은 그것이 교육이든 자연자원과 환경이든 우리가 앞세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보다 양으로나 질로나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현재의 세대 또는 기성 세대가 미래의 세대 또는 새 세대에게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면 그들은 지금의 성장에서 생기는 몫의 큰 부분을 떼어내 비축해 놓아야 한다. 다시 말해 현재의 세대들은 특히 선진국의 시민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사회보장혜택을 줄여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세대 계약이 돼야 한다. 이것은 정부가 지금 세대의 이기주의에 맞서서 미래 세대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세대보다 미래 세대에 더 마음을 쓰는 것은 진화의 법칙이 가리키는 자연적 명령이기도 하다. <늙음과 젊음 中>-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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