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물레 - 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김종철 지음 / 녹색평론사 / 1999년 7월
구판절판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이 생태학적 재난은 결국 인간이 진보와 발전의 이름 밑에서 이룩해온 이른바 문명, 그 중에서도 특히 서구적 산업문명에 내재한 논리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사회적, 인간적, 자연적 위기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지구상에서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진실로 심오한 철학적 종교적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15쪽

그러한 예언은 무엇보다 종교적 열정에 근거를 둔 것임에 반해서 오늘의 묵시록적 전망은 다분히 과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15쪽

과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의 진리에 대한 관계는 언제나 잠정적이고 모색적인 것이었지 결코 항구적인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하게 과학적인 태도는 그러니까 늘 열려 있는 겸손한 태도일 수 밖에 없으며 자신의 현재 능력이나 인식방법으로써 포착할 수 없는 경험이라 하여 그것을 무시하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참다운 과학정신과 인연이 먼 태도라 해야 옳다. -16쪽

사람이 부도덕하고 무책임하게 되는 것은 그 자신이 행복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만이 남의 자유에 관심을 갖고 남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법이 아닌가. 이치를 따져 생각해보면 세상만물이 자기자신과 근원적으로 한 몸뚱이로 연결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공동체에 폭력을 가하고 상처를 입히면서도 스스로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인간이 내면적인 자유와 성숙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31쪽

위대한 영화예술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그의 책 <봉인된 시간>에서 시종일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자기 희생의 가치에 관해서이다. 그는 바로 이 희생의 가치가 망각된 것이 현대사회의 가장 큰 비극인 정신적 불모성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33쪽

일찌기 해월 선생은 천지만물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지 않은 것이 없고 따라서 생물이 살기 위해 다른 생물을 먹는 행위는 한울이 한울을 가지고 자기를 먹여 살리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담겨있는 것은 약육강식의 잔인한 폭력성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모든 생명이 다른 생명에 대하여 공양의 관계, 즉 희생과 헌신, 사랑의 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이 이 우주의 근본 짜임새라는 생각인 것이다. -37쪽

저 산을 밀어올리고 있는 힘, 그것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라는 직관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바로 생태학적 감수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감수성의 교육에 새로운 생존전략의 기초를 두지 않으면 안된다. 문제는 그런 감수성의 교육에 적합한 생활방식을 어떻게 강구하느냐이다. -38쪽

의사들이란 자기가 갖고 있는 의료적인 지식을 가지고 환자를 개별적으로 상대하면서 본질적으로 환경적 요인, 산업체제의 반생명성에 기인하는 질병을 개인의 책임을 돌린다는 것이죠.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구조란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비인간적인 체제를 환자에 재적응시키는 사회적 역할을 받아들이는 한 의사는 체제를 수호하는 '사제'라는 얘기지요. -53쪽

개발과 환경의 조화라는 얼핏 듣기에 나무랄 데 없는 이러한 전략에는 날로 급박해지고 있는 생태계 보전의 필요성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이 담겨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이른바 산업적 생활방식에 어떤 본질적인 변경을 가할 의도는 없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58쪽

돌이켜 보면 개발 이데올로기가 부추기는 생산과 소비의 확대라는 것은 토지와 자원에 대한 착취를 무한히 계속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점에서 이것은 물질적 생활수준의 무한한 향상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에 기초하여왔던 19세기적 세계관의 교만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개발-저개발이라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공식에 의거하여왔던 토착 전통사회들의 상호비교가 불가능한 독자성과 다양성을 처음부터 무시하고 단 한가지 형태의 '진보적' 모델을 추구해야 한다고 하는 태도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폭력을 수반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중략)
빈곤으로부터 대중을 해방한다는 최대의 명분마저 실제로 역사적 경과속에서 허구적인 것으로 판명되는 날이 오고야 만다. 국민총소득이라는 극히 기만적인 통계가 상당기간동안 사람들을 세뇌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러나 부의 총량이 엄청나게 증대되면 될수록 대중이 느끼는 박탈감이 깊어지는 사태가 심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도대체 전 세계적으로 개발에 의하여 민중의 운명이 실질적으로 개선된 사례는 어디에도 없다. -73쪽

산업주의 문명은 간단히 말하여 천지만물에 대한 인간의 배타적인 자기주장을 기초로 하는 매우 교만한 정신적 태도의 소산이다. 산업문명속에서 자연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재화를 만들어내고, 편의와 안락을 제공하는 자원으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자연이 그 풍요로운 다양성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면서 그 자체로 생명을 구가해야 할 내재적인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공리주의적, 인간중심적 시각으로만 사물을 보는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자신의 이웃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필연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 -81쪽

어디서나 사람들은 자기의 생태적 조건과 체질에 적합한 문화를 발전시켜왔어요. 고원지대에 사는 농민들은 그 나름으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왔고, 열대지방은 열대지방대로, 자기들 나름의 자기들에게 맞는 노동의 양식과 축제의식을 발전시켜왔을 거란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한국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불합리한 사고, 덮어놓고 자기가 최고이며,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푹 빠져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순진한 꼬마들로부터 정치한다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쇼비니즘에 크게 오염되어 있어요. -118쪽

지금 죽으러 가는 길을 가면서 자꾸 이걸 살 길이라고 말하고 있잖아요. 그걸 따라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장에 현실적으로 패할 수밖에 없더라도 저항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죠. 적어도 불복종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복종의 핵심은 결국 아까도 말했듯이 생명의 해방구를 늘려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26쪽

늘 하는 얘깁니다만, 한국의 언론은 너무나 국제적인 감각이 없습니다. 맨날 한국과 미국과의 단순비교에 열심이지, 우리를 상대화시킬 줄 모릅니다. 그러다보니까 맨날 힘을 길러야 한다거나 쇼비니즘적인 열정만 자극하면서 강자의 논리로만 치닫는 거에요. 우리가 일본사람으로부터, 또 서양사람으로부터 힘의 지배를 받아왔으니까, 우리도 꼭같은 방식으로 강자의 반열에 서야겠다는 생각은 정말 늘푼수없는 생각이에요. 존경받을 수 없는 생각이에요. 개인적으로 누구하고 싸울 때도 마찬가지죠. 이번엔 내가 졌으니까 절치부심 근육을 길러서 상대를 꼭 꺾어버리겠다는 식으로 가본들 귀결이 뭐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인격적으로 감화를 시키는 겁니다. -150쪽

가장 귀담아들을 만한 것은 가령 이것을 통해서 그들이 사람 누구에게나 어떤 잠재된 기술과 솜씨와 지혜가 있다는 것을 빈번히 발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현금경제 밑에서 늘 소외되어 온 가난한 사람들이나 실업자들이 레츠를 통하여 스스로 쓸모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인간다운 위엄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공동체의 상호의존적 사회관계가 강화되고 지금까지 산업경제의 지배밑에서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부터 오는 힘에 속절없이 굴복하여 붕괴일로에 있던 풀뿌리 공동체가 활기 있게 되살아난다는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168쪽

산업화의 진척은 자동차관련 산업이 확대되는 것을 의미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에 관련된 일자이와 경제인구가 크게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동차관련 산업이라고 하면, 제철, 석유, 유리를 포함하여 자동차의 생산과 판매에 직접 연관된 업종뿐만 아니라 주유소, 경찰, 병원, 보험회사, 은행, 법원을 비롯하여 실제로 방대한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용과 돈이 걸려 있는 문제에서 객관적인 시각을 갖기 어렵다. 그렇기는 커녕 자신의 일거리와 생계에 어쩌면 보람있는 삶이 걸려있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묻는 행위에 적개심을 느끼기 쉬운 것이다. 오늘날 환경파괴에 대한 대처방식은 기껏 환경투자나 기술개발과 같은 순전히 기술주의적 논의로만 집중될 뿐 근본적으로 자꾸만 겉돌고 있다. 그렇게 되는 핵심적인 이유의 하나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자기자신의 문제, 즉 자기자신의 생활방식과 가치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문제로서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192쪽

텔레비전과 컴퓨터 앞에 매달려 아동기의 대부분을 '가상현실'의 체험으로 보낸 아이들이 과연 다른 사람, 다른 생명의 슬픔과 기쁨을 이해하고, 보살피고, 돌보는 능력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가상현실'의 경험은 거기서 사람이 싫증나거나 고통을 느낄 때는 언제라도 플러그를 뽑아버리면 순식간에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뿌리없는' 경험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시련이나 고통이나 기다림을 통한 도덕적 연마와 정신적 성숙을 기대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과 교사들이 일상적으로 증언할 수 있는 현상 - 무책임하고, 참을성없고, 너무나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현상은 우리가 실제로 가장 두려워해야 할 문제인지 모른다. -199쪽

권력욕망과 경쟁의 논리에 뿌리를 두고 속도와 힘을 끊임없이 과시하는 그러한 '현대적' 교통수단에 언제까지나 몸을 맡긴 채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희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말의 참다운 의미에서 평화와 사회정의와 생태적 건강이란 우리의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명에 대한 존경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이러한 존경심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극히 검소하게, 가난하게 꾸려가려는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걸어다니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생명의 공동체에 종속시킴으로써 진정한 내면의 행복과 자유에 근접하고자 하는 시도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24쪽

마음만으로 되겠느냐고 하겠지만 마음없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246쪽

문명생활의 향유가 설령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생존의 근본토대, 즉 자연적 기초를 망가뜨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그러한 문명이란 무엇인가-하고 그는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문에는 흔히 서구적 진보사관에 길들여진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드러내는 시각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자기기만적인 것인가에 대한 예리한 비판도 들어있음이 틀림없다. -248쪽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핵심적인 과제는 부분적인 성과나 후퇴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진실로 다급한 문제는 인간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마땅한가를 깊이 성찰하는 일인 것이다.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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