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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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배움이 짧았고 자신의 교육적 선택에 늘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다만 그 때 엄마는 어떤 '보통'의 기준들을 따라가고 있었으리라. 놀이 공원에 가고, 엑스포에 가는 것처럼, 어느 시기에는 어떠어떠한 것을 해야 한다는 풍문들을 말이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 엑스포에 가고 박물관에 간 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나를 엑스포에 보내 주고 놀이 공원에 함께 가준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누구나 겪는, 평범한 유년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무지한 눈으로 시대의 풍문들에 고개 끄덕였을, 김밥을 싸고 관광버스에 올랐을 엄마의 피로한 얼굴이 떠오르는 까닭이다. (도도한 생활) -13쪽

체르니란 말은 이국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아서 돼지비계나 단무지란 말과는 다른 울림을 주었다. 나는 체르니를 배우고 싶기보단 체르니란 말이 갖고 싶었다. (도도한 생활) -15쪽

내가 집을 떠나던 날 아빠는 오토바이 '쇼바'를 잔뜩 올린 채 도로 위를 달리며 울고 있었다. 아빠는 오토바이 속도가 최절정에 다다랐을 때 앞바퀴를 들며 "얘들아 너흰 절대 보증 서지 마!"라고 오열했고, 비닐하우스 옆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속도 위반 딱지를 뗐다고 했다. (도도한 생활)-22쪽

언니는 그 중 하나를 수줍게 가리켰다. 전투 로봇의 갑옷처럼 번쩍하니 투박하게 생긴 거였다. 친구가 놀란 표정으로 "여자 애가 왜 그런 걸 고르냐?"고 묻자 언니는 얼굴을 붉히며 "저게 가장 21세기적인 느낌 가아서...."라고 답했다. 언니는 가장 21세기적인 컴퓨터와 함께 반지하방에서 살게 되었다. 21세기가 얼마나 '슬림'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도도한 생활)-29쪽

어느 날 언니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볼펜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야, 미래가 어떻게 '완료'되냐?" (도도한 생활)-31쪽

패션은 관습적인 인사가 아니라 일상적이고 중요한 화제였다. 그녀는 점점 궁색한 자신의 옷장과 여선생들의 관심에 부담을 느꼈다. 칭찬을 들은 후엔 이상한 부채감도 생겼다. 어느 때는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모두가 재빨리 자신을 훑어보며 점수를 매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근심이 보잘것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이 누군가의 변화에 환호하는 건 우리에게 어떤 '화제'가 생겼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침이 고인다)-52쪽

어쩌면 유통기한이 정해진 안전한 우정이 그녀를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는지도 몰랐다. 하루란 누구라도 누구를 좋아할 수 있는,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근사해질 수도 친절해질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침이 고인다)-57쪽

그녀는 후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이 집주인이라고 유세를 떠는 것 같고, 그런 검열과 의식적인 배려를 해야 하는 자신이 지겨워진다. 그녀는 지각한 탓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나쁜 배역을 억지로 맡아버린 학생처럼 연극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 (침이 고인다)-76쪽

월세 부담이 컸지만 한번 쯤 무리라는 걸 모른 척하며 살아보고 싶었다. 그것이 영화관이나 놀이공원에서 잠깐 동안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환상이라 하더라도 이제 분수껏 사는 일은 지겨워져버렸다고 떼를 쓰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성탄 특선)-103쪽

의정부 북부행이라는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 어쩐지 나는 우리 모두가 아주 멀고 추운 나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119쪽

어느 날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배곯아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 (칼자국)-169쪽

어머니의 몸뚱이에선 계절의 끝자락, 가판에서 조용히 썩어가는 과일의 달콤하고 졸린 냄새가 났다. (칼자국)-178쪽

나는 엉거주춤 언니에게 5만원을 찔러준다. 언니는 기겁하며 손사래를 치고, 나는 받으라고 우기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늘 같은 식이다. 그것은 서로 덜 면구스러워질 수 있는 최소한의 연기, 온전히 속아주기만을 위해 고안된 격식과 같다. (기도)-204쪽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기다려봐" 하고 말한 뒤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이제 막 하늘에서 도착한 메시지를 전하듯 선하게 중얼거렸다.
"마음만큼 형편없는 게 또 있을까"-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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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층 숨을 고르는 듯한 느낌
    from 지극히 개인적인 2007-10-07 20:52 
    얄팍하게도 나는, 몇 살이세요? 라는 질문에 매우 자주 '80년생이요'라고 답한다. 스물 여덟,이라고 답하는 일보다 더 잦은 일이다. 이유는 이 리뷰를 읽는 분이 80이라는 숫자와 스물 여덟 이라는 두 단어를 보며 느꼈을 차이 그대로다. 물론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일 수록, 고맙게도 80년대 생을 하나로 묶어 생각해 주시는 경향이 짙다. 김애란의 새 책을 접한 문단의 반응은 극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