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소년
아메바피쉬 지음 / 씨엔씨레볼루션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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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꺄아~~~~~~~~!!!

어떻게 이런 만화를 그릴 수 있을까. 

처음 본 아메바피쉬에게 매료됨. 경의를 표함. 

대한민국에도 이런 만화가 나오는 구나. 

외로운 전위 사이버의 느낌이다. 하!



2. 

누추하고 남루한. 다 쓰러져가는 철거촌. 여유가 조금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사가고 빈집이 더 많은 아파트 벽에

"불안해서 못살겠다! 철거반대!!" "서민죽이는 재개발 정책"

검은색 현수막이 붙어있다. 

아이는 텅빈 공터에서 혼자 그네를 탄다.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도록 진동을 만드는 엄마의 고함소리에 쫓겨 학교가는길 

온통 검은색 어두움속을 책가방 매고 고개숙인 아이가 걷는다.

절대적인 어두움. 

분명 학교에 가는 아침, 어딘가에 해가 빛나고 있을텐대 

아이가 걷는 세상이 온통 어둡다. 적막한 세상에 한치의 빈틈없는 어두움. 

저 검은 세상이 잊혀지지 않는다. 

꼬마 아이의 절대적인 어두움에 마음에 움직여, 두고두고 마음이 아프다. 


시끄러운 소음들에거 격리되어 의자에 앉아 만화를 그리는 꼬마아이의 교실장면 

거지라고 놀리는 같은반 아니들이 꼬마의 눈에는 모두 괴물처럼 보인다. 


반 친구들도 날 괴롭혀...

선생님도 공부 못하는 나에겐...관심이 없으셔...

아빠는 술만 먹으면 엄마랑 나를 때려...

엄마는... 내가 아... 아빠를 닮아서 싫어해...


그래서 사라지고 싶은 아이, 에게 나타난 꿈의 쾌변신이 만병통치약이라고 만화책을 준다. 

만화책 속 물고기를 타고 우주를 날아다니고 


단순한 그림이지만 평면을 입체적으로 활용하고, 테크노의 느낌을 살려서 

빨강, 노랑, 파랑, 검은색, 흰색 원색들의 강렬함이 외롭고 차가움을 잘 표현한다. 

손잡을 친구가 생기는 해피엔딩이라 다행이지만, 슬프다. 


이런 종류의 작품은 일단 봐야한다. 직접 내눈으로 보지 않으면 알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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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혁명의 기록 - 동학농민전쟁 120년, 녹두꽃 피다
이이화 지음 / 생각정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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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래전 '인물로 읽는 역사이야기'는 재밌고 새로웠다. 

왕이거나 훌륭한 사람들, 이미 태몽부터 범상치 않은 사람들의 전기문이 하나같이 지루하던 차에 

이이화의 역사 인물들은 귀천을 넘어 생생하게 고민하고 실수도 하고, 개성이 강하여 

살아온다면 알아볼수 있을것처럼, 그래서 좋았다. 

전봉준. 

조선의 왕족과 관료들에게 이겼으나 외세 일본의 신식무기에 패한 동학농민전쟁의 패장

가슴아프고 슬플까봐. 읽을까 말까......망설이다, 이이화 선생이 잘 안내하려니 믿고, 책을 폈다. 


전봉준이 죽고 난 뒤 남평 이씨의 행방은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문장도 참 슬픈 문장이다. 

전처의 소생과 함께 이남이녀의 아이들을 키우며 집안을 건사했던 여인 

잘난 남편은 자유와 정의, 평등을 위해 목숨걸고 싸우러나가 선봉에선 장수가 되었다가 사형당해 죽고 

그 사이 아이들 넷을 키우며 살던 그녀는 남편이 붙잡힌 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이들과 도망가지 않았을까.

어디서 뭘하며 불안한 숨을 달랬을까. 

의로운 남편이 사형당해 죽었으니, 분하지 않았을까. 


문장이 편안하다. 불필요한 허세나 난해함이 손톱만큼도 없다. 



2. 

고려말 귀족들의 횡포를 막고 날때부터의 신분이 아니라 유교이념에 따라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를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했던 정도전의 개혁은 조선말이 되니 앙상한 뼈대마저 흔들려 

천지에 부정부패와 탐욕만 횡횡한다. 

인민들은 분노로 넘처 정치를 개혁하고자 일어났으나 

조선의 왕족이라는 것들은 최소한의 개혁도 없이, 최소한의 타협도 없이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를 불러들인다. 

참으로 한심한 것들이다. 

거기에 붙어먹은 관리라는 것들도 기어이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바치더니 

해방후에는 친미로 갈아타고 여태 자자손손 갑질하고 산다. 

멍청하고 못난 왕족을 모셔야 하는 인민들의 삶이 전쟁과 가난으로 내몰려 유린된다. 

100년이 지나도, 멍청하고 못난 대통령 반복해서 모셔야 하는 인민들의 삶이 구차하다. 


전봉준은 가난하게 자랐으나 지식인이었고 뛰어난 선동가였구나. 

저 배짱과 기개는 어디서 나왔을까. 

전봉준의 농민군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었던 것은 워낙 부정부패가 심한 관리들의 잘못이 크지만 

농민군의 지도자들이 노비와 백정, 천민들을 평민과 똑같이 사람답게 대접하며 안고 간 까닭이 크다. 

태어날때부터 천대받던 사람들이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고 대접해주니 선봉에 서서도 얼마나 스스로 뿌듯했을까.  

스스로 억압의 굴레를 벗어 해방된 자들의 심장이 뛰어 기꺼이 한목숨 내놓았을 것이다. 

왜 안그랬겠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남도. 삼남지방은 반역의 뿌리가 깊은 셈이다. 

비옥하여 풍요로운데 착취가 심해 인민들의 껍질을 벗겼으니, 그 결과다. 

한두번의 전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풍요로운 삼남지방의 집강소조직이 마을을 접수하여 

천민을 해방시키고, 관군을 몰아내고 스스로 자치를 했다. 

부자의 곳간을 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손길에 신바람이 났으리. 

부정부패를 없애고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사람이 없으니 

사람들의 마음에 십년묵은 체증이 가시듯이 개운하여 살만하지 않았겠는가. 


뻘짓하는 흥선대원군이 중간중간 나오는대. 글쎄. 잘 모르겠다. 

전봉준이 조선의 지배자들중 그나마 흥선대원군을 낫다고 생각해 

서울로 진격하면 설득해서 안고가야할 정치인으로 생각했을까. 그다지. 

흥선대원군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이익외에 뭔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정치를 손톱만큼이라도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교활한 늙은이로 살다 이리저리 이용당하는 것이 제 역할이었을 뿐. 



3. 

전봉준의 마지막 장면은 의연하고 비장하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빈부와 귀천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위해 싸운 장수로 한치의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이 의연하다. 

어쩌면 먼저 죽어간 동지들의 피흘림이 몸에서 떠나지 않아서 였을까.


그리하여 전봉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타협없이 살아온 방식대로 죽은 녹두에 대해 추모하고 기억하는 노래와 시들을 소개해 놓았다. 

인상적이다. 

비록 그가 죽임을 당했으나 인민들은 세기가 넘도록 여전히 그를 아끼고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영웅으로 대접한다.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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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 - 시대의 흐름에 서서 한길인문학문고 생각하는 사람 11
김우창 지음 / 한길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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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3년 겨울부터 2009년 겨울까지 6년동안 격주로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들이다. 

이런 글쓰기는 인문학적 지식도 중요하지만 지구력도 요구하는 것 같아. 

2주의 시간이란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짧은 시간인대 

시의성있는 소재로 삶의 성찰을 담아내는 글을 2주에 한번씩 쓴다는 것은 

아주아주 긴 마라톤의 느낌 



2. 

인문학자의 세상읽기 

흔히 정치를 얘기할때 목소리를 높이고 핏대를 세우고 

그러나 실제 내용은 없는 빈 수레처럼 

헐뜯는 감정은 넘치지만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는, 공허한 소리와 글을 많이 보는대 

김우창의 성찰은 흥분이 없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정치를 말할때 흥분이 없다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특징이라 할 만하다. 

이 예외적인 차분함은 여유와 관조 혹은 사건의 뜨거움으로부터 떨어져 있음, 당사자가 아님 등으로 보이기도 하고 

우리 정치평론도 이제는 선동이 아니라 설득이 필요한 시기인가부다. 

우리도 이제는 성숙해 질 때가 된 것인가. 그래서 성찰인가, 싶기도 하다. 


어떻게 더 사람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까의 논의보다는 

누가 더 많이 부패하고, 누가 더 비리가 많으며, 누가 더 무능하고 더 뻔뻔한지를 겨루는 한국의 정치를 

신물나서 외면하거나, 화제가 된다면 입맛이 쓰고, 당사자라면 억울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익숙하다보니 

차분하고 논리적이며 일관적인 목소리가 새롭다. 


김우창은 흥분하는 선동의 정치에 질린 느낌이고, 그래서 미국 캘리포니아 사람들의 조용한 행동과 참여를 소개하기도 한다. 

이견이 발생할때 그것을 시스템 안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할 실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고 그는 바라지만 

2014년 아이들이 대낮에 바다에 수장되어도 책임지는 놈 하나없는 대한민국에서 

이 양반 너무 한가한 소리한다는 느낌도 있다. 

오로지 부자들만 위하는 것도 정치라고 천박한 자들과 인민에게 가혹한 폭력의 공권력을 경험하며 

우리는 더 시끄러워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이런 문장들은 좋다. 

그간 혼미를 더해온 것이 우리 정치의 상황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정치가 우리 사회의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가며, 또 나은 미래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대충이라도 느낄 수 있게 해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사회의 중요한 과제가 지나치게 일목요연한 것은 그 사회가 독재체제이거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나 정치의 중요한 과제, 특히 우리 사회처럼 지향해 가야 할 곳이 없을수 없는 사회에서 정치의 제일 중요한 과제는 사회의 현재와 미래의 방향을 지시해주는 일이다. 

시종일관 이 톤을 유지한다. 

어렵지 않은 문장이 담백하여 차분하게 읽을 만 하다. 


삶을 넘어가는 숭고한 이념이 있고 이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념이 삶의 희생을 요구할 때, 그것은 개인에 해당되는 일일수 있으나, 집단의 삶 전체에 요구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럴때 그것은 자기 오만의 표현에 불과하다. 정치에서 최종적인 덕성은 삶의 현실에 대한 겸허이다. 이 겸허, 거기에서 나오는 강인함이 참다운 정치적 소신의 토대다. 

정치에서 최종적인 덕성은 삶의 현실에 대한 겸허라는, 맞다. 동의할 수 있어.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겸허이다. 

일상에서든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지향에서든, 삶의 현실에 대한 겸허가 핵심이다. 

숭고한 이념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함부로 오만하다면 누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김우창의 조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3. 

문장의 이런 마무리는 거추장 스럽다. 

' ~ 완전히 결정하지는 아니 하였다.'

'~  전율하지 아니할 수 없다.'

'~  그친 감이 없지 않다.'

'~ 생각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왜 이렇게 썼을까. 

전체적으로 담백하고 편안한데 이런 방식으로 마무리하는 문장들이 많아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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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역사
카리 우트리오 지음, 안미현 옮김 / 자작나무(송학)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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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정말로 '이브'의 역사다.  기독교 문화권 여성의 역사라는 말이다. 

인도나 아랍, 아시아 여성의 역사가 정리된 것은 아직 못봤다. 


태고적 신화와 전설의 시기부터 여성의 역사인대, 통사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많이 헐겁다. 

그래도 균형잡혔으며 동시에 여성적인 시각은 좋고 각론이 잘 정리되어 흥미롭다. 

이브라고 칭해지던 때부터 여성이 어떤 차별과 금지아래 있었는지. 

어떤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고 어떻게 처벌되었는지 

오래동안 강요된 순종의 굴레가 어떤 모양인지. 


번역은 좋지않다. 

영어문장의 순서를 적절히 한글 문장의 순서로 바꾸지 않아 걸치적 거리며 두세번 읽게 만들고 가끔은 오자도 있다. 



2. 

기독교는 논리적으로 참 이해하기 어렵다. 

보통 기독교문화권의 서양사람들이 다른 문화권보다 더 합리적이라고 하지만 

성령으로 잉태한 아기라니. 거 참. 

섹스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것과 사람이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한 이야기가 

어떻게 진지하게 논의되며 설득되고 심지어 믿어질까.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된것은 신화다. 아무도 사실로 믿지 않거든. 



3. 

종교적인 사고방식은 가정을 예찬했지만 여성을 경멸했고, 정치적인 사고는 고귀하게 만드는 여성의 힘을 찬양했지만 가족이 남성의 공적인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다. 그러나 여성들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지금도 대체로 그렇다. 


가부장적인 사회질서는 여성이 항상 굴복하고 그들의 행동과 생각이 끊임없이 감시당한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여성에 대한 모든 칭찬과 공허한 말들의 진짜 의미는 이렇다. 남성은 자기 가족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자기의 의사에 전혀 반대하지 않는 가정부. 그리고 돈을 지급해야 하는 하녀보다 더 믿들수 있는 가정부 말이다......다른 말로하자면 남자는 완전히 지배할수 있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는 사람, 일생동안 자기 소유로 남아있는 사람, 그가 어떻게 다루든 전혀 상관없이 도망칠 염려가 없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17세기 후반 메리 에스텔의 말이 21세기에도 유효하다.


노동자의 세계는 남성들의 세계였다. 공장 노동자들은 자신의 남자다움과 힘을 드러내려 했고, 그 결과 여자를 경멸했다. 

산업혁명 초부터 노동자의 절반은 여성이었다. 

그녀들은 방직공장과 향수공장, 양초공장등 유럽 도처의 여러공장에서 일했다. 

역사가 히스토리인것처럼 유감스럽게도 노동의 역사 또한 남성중심으로 씌어져 왔다. 


모든 여성은 예외없이 재생산에 참여했다. 새로운 세대를 낳고 키우며 일상적인 보살핌, 식사 준비와 청소 같은 일을 했다. 하지만 재생산은 노동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것을 위해 임금이지불되지 않은 것은 이 일을 하는 자들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카리 우트리오는 핀란드 출신의 역사학자란다. 멋지다. 

통사로 기독교문화권 여성의 역사를 정리해 냈다. 

시간순으로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 여성들에게 요구된 억압과 경멸, 그리고 그것에 저항한 여성들과 쟁점이 잘 정리되 있다.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를 무척 감동적으로 읽었는대 

일찍이 카리같은 선구자의 작업위에 펼수 있는 페미니즘의 날개였나봐.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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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조 사코 지음, 정수란 옮김 / 글논그림밭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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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을 읽었던 때가 아마도 2002년이었던가. 

한민족 5천년의 역사가 자랑스럽게 되새김질되는 섬나라에서 태어난 나는 

계급모순 외에 민족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대 

민족문제가 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모순중 하나라는 걸 

그 고통을 냉정한 그림으로 담담하게 보여준 사코의 치밀한 시각에 감탄했었지. 

그가 다시 팔레스타인을 보여준다. 

기대하며 읽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다음 비극이 터지기 전에 이전의 사건을 소화하는 일조차 사치인것 같다. 내가 가자에 있을때, 거기 젊은 사람들은 1956년 조사를 종종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공격당하고 집이 부서지는 마당에 역사를 다루는게 무슨 쓸모냐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의 의견이 어떤 고통에 근거한 것인지 알고 있다. 

스스로 죽어가는 노동자들, 죽임을 당하는 장애인들 

심지어 2014년 한국은 세월호침몰이라는 죽음의 늪을 아직 소화하지 못한채 반복해서 다음 비극이 터지고 있다. 

그러나 비극들은 늘 연결되어 있다. 

소화할 틈없이 벌어지는 비극의 근원을 알기위해, 역사를 알고 기록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직 비극이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노근리 사람들이 기억나는 학살의 현장이다. 

한국에서 미군에 의한 학살은 적어도 53년에 끝났는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는 그때부터 아직도 진행중이다. 멀미나. 


구체적인 사람들의 개성이 다 보이는 그림의 인터뷰 

당시 몇살이었고, 학살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남았고, 가족들 중 누가 죽었는지 

유엔 공식보고서에 275명이 죽었다고 기록된 1956년 11월 3일 칸 유니스 사건을 통해

단한번의 칸 유니스가 아니라 2014년 오늘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인민들에 대한 공격과 학살의 실체, 방식 

사람들을 죽이는것에 의연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여준다. 

어덯게 100년 가까이 반복해서 저러고 일방적으로 죽이도록, 방치하니.  

미국이고 영국이고 프랑스고 모두 저 학살의 배후이고 조력자 일뿐.  

뭐가 문명이고 선진국이고 합리적이냐고. 


영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지 이전인 19세기 말경 팔레스타인 주민중 유대인은 고작 3%였고, 기독교인이 9%, 무슬림이 88%였다. 

어떻게 이런일이 벌어질까. 

어느날 우리집에 웬놈이 총들고 와서 2천년전에 조상이 살던 땅이라고 내놓으라고 하면 얼마나 황당할까. 


가자지구가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 

학살과 격리의 역사 

나찌에 학살당했던 유대인들은 불과 10년이 지나기 전에 제손에 나찌와 똑같은 학살의 피를 묻힌다. 


1948년 이스라엘군에 쫒겨 불모의 사막 가자로 도망온 사람들 

집도 절도 없고 당연히 상하수도 시설도 없고 

땅에서 먹고자고 2Km를 걸어서 물한동이 길어오고 똥오줌은 땅에 묻었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노인이 되어 늙어 죽을 동안 잔인한 이스라엘의 폭력은 계속되고 있다. 


이들에 대해 1949년 이스라엘 외무부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전망한다. 

"자연선택 과정에서 생존한, 적응력이 뛰어난 난민들은 잘해 나갈 것이고 나머지는 도태될 것이다. 일부는 사망하고 대다수는 인간쓰레기와 사회 부적응자가 되거나 아랍 국가의 극빈곤층에 편입될 것이다."


참 모욕적인 보고서다. 

사람이 살수없는 모레 땅에 사람들을 가두고 사망과 인간쓰레기와 사회부적응, 극빈곤층을 전망하다니.  

이스라엘 정부의 저 문장은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며 절대 학살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청소'라고 표현했던 철학과 닮았다. 

우생학에 대한 천박한 신봉도 나치와 닮았고  

'자연선택 과정' 이라니. 무엇이 자연의 선택인가. 지금이 신석기 시대인가. 

저 과정은 자연선택의 과정이 아니라 이스라엘 정부가 의도한 과정이다. 

이스라엘 정부가 군인들의 총칼을 앞세워 사람들을 모레사막에 가두고 죽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걸 자연선택 과정이라고 표현하는 저 악마스러움이라니. 

나찌와 닮은 유대인들이다. 저주 받으라. 


난민은 땅도 없고 가난하고 배고프다. 빈약한 원조에 의존한다. 남자들은 일이 없어 하릴없이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떠나온 땅에선 열매가 익는다. 두고 온 창고엔 석규와 밀가루가 있었다. 모든게 몇시간 걸리면 닿을 거리에 있어 애간장이 녹는다. 

하루 아침에 살던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슬픔  



2. 

가자지구에서 엘아들하 축제는 황소를 죽여서 나누어먹는 축제다. 

가난한 사람들이 축제를 빌미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 황소를 사서 길거리에서 죽이고 나누어 먹는다. 

집집마다 고기를 나눌 뿐 아니라 

3등분해서 한덩이는 가족, 한덩이는 친한 친척과 친구들, 그리고 한덩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 

황소를 잡아 골목에 흥건한 핏물은 장대비가 씻어낸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폭력은 저 축제와 닮았다. 

소를 거리에서 저런 방식으로 죽이고 나누고, 그리고 그 핏물에 아이들이 노는것은 내 감성에는 잔인해 보인다. 

이스라엘은 저 잔인한 방식으로 거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을 죽여 지들끼리 나누니, 더욱 잔인하다. 

조 사코의 편집과 은유는 냉정하고 날카롭다. 

그것이 이 책의 최고 장점이다. 


몇달동안 그를 네번 찾아갔는데 1948년부터 1967년까지 일을 다 얘기해서 나는 지쳐빠졌다. 그는 모든 걸 알려주려 했지만, 난 속속들이 알고 싶지 않았다. 

이런식의 솔직함도 조 사코의 미덕이다. 

20년동안 벌어진 모든일 그 억울함과 분노를 늙은 페다이는 미국인 젊은 인터뷰어에게 속속들이 말하고 싶어하지만 

미국인 인터뷰어는 그 모든것을 듣는 것 만으로도 지쳐 빠져서 속속들이 알고싶지 않다. 

맞다. 반복되는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의 증언을 속속들이 듣는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코는 독자들에게 자기가 인터뷰 할때부터 이미 고통스러웠다고 

이 이야기는 듣기가 매우 지치고 힘든이야기라고 독자들을 격려한다. 

그러나 들어보라고. 그래도 들어보라고. 


팔레스타인의 반이스라엘 게릴라들을 페다이라고 부른다. 

페다이는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전사 라는 뜻이다. 


모두에게 신뢰받는 페다이 칼레드는 오래 살아남았고 아내와 아이들이 있지만 수배자다. 

늘 쫒겨다니고 내일은 집에 오세요? 라고 묻는 딸에게 대답하지 못한다. 알지 못하니까. 

난 죽겠지. 암살당할거야. 하지만 그때까지 너무 오래 걸려. 

가자를 벗어나 도망가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는 투사는 

죽음보다 오늘 살아야 하는 일상이 더욱 외롭고 피곤하다. 

그의 눈빛이 슬펐다.  칼레드. 


사코는 과거의 학살현장과 현재의 학살현장을 교차하며 어떤것이 '과거' 냐고 묻는다. 

모두 현재라고 말한다. 


온 세상이 우릴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집에 있다가, 집이 부서지는 봉변을 당했는데 테러리스트라니!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는 프레임의 편집은 모든 가해자들의 두번째 공격이다. 

피해자를 오히려 고립시키는 이 공격은 학살을 완전범죄로 만드는 힘이 있다. 

난데없이 집에 들어와 딸옆에 앉은 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이는 짓은, 저 딸은 평생 어떻게 살까. 



3. 

1956년 4월 30일 가자에서 침입한 자에게 죽음을 당한 키부츠의 일원 로이 로스버그를 추모하는 

이스라엘의 전쟁영웅 모셰다얀의 연설 


오늘은 살인자들을 탓하지 맙시다. 우리를 향한 그 무서운 증오를 뭐라고 비난할가요? 그들은 지금까지 8년동안 가자에서 난민캠프를 지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그들이 조상때부터 살아오던 땅과 마을을 우리 집으로 바꾸는 일도 목격했습니다. 국경을 넘어서 증오와 복수의 바닷물이 밀려옵니다. 잠잠해서 우리가 경계를 늦추면 그들은 보복할 때라 여깁니다. 우리가 총을 거두라는 사악하고 위선적인 외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우리 주변 아랍인들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증오를 바로 보는 일을 두려워 맙시다. 그게 우리 세대의 운명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택입니다. 준비하고 무장하여 강하고 맹렬하게. 그렇지 않으면 칼이 우리 손에서 떨어져 우리 삶을 동강 낼 것입니다. 


뛰어난 선동이다. 

아랍인들이 우리를 증오하는 것이 마땅하고, 적들의 증오가 타오를 짓을 우리가 하고 있으니 

더더욱 의연하게 우리를 지키자는 말이다. 즉 손에서 총을 놓지 말고, 주변을 늘 경계하며 하던짓을 계속하자는 말이다. 

학살자 집단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심지어 그것이 운명이라고. 

'우리 세대'라는 표현을 하면서 다음 세대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집단적 최면이다. 다음세대, 우리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피는 우리 손에 묻히고 증오와 정면대결하자는 말이다. 

애초에 남의 땅에 와서 총칼로 몰아내고 사는 도적떼의 오만하고 염치없는 논리다. 

이미 2014년. 충칼은 이미 다음세대, 자식과 손자에게로 물려지고 있다. 

자자손손 아랍인민을 죽이며 사는것이 유대인의 운명이냐. 

파렴치한 선동이다. 

그러고도 니네는 히틀러와 나찌를 욕하지. 


이스라엘 총리였던 메나헴 베긴, 이츠하크 샤미르. 얘네는 테러단체를 이끌며 사람들을 학살했던 깡패두목 출신이구나.

깡패집단이 그대로 이스라엘의 군인이 되고.  

근본이 다르군.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1인시위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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