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35인의 여성/노동/계급 이야기
낸시 홈스트롬 엮음, 유강은 옮김 / 메이데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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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에 대규모 집회가 있어 조합원들과 올라갔는데, 어떤 여성기자가 인터뷰를 하자했다. 

당시 우리 지회가 한창 진행중이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과 관련한 인터뷰일거라 생각했는데, 

“한명숙씨가 총리가 되었는데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어떤 기대를 하느냐.” 고 질문을 해 황당했다.

“별 기대 없는대요.” 했더니 기자는 당황하며 “그래도 같은 여성이니까, 도움이 되는 변화가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한번더 물었다.  “아니요. 전혀.” 라고 불친절하게 대답하고 인터뷰를 끝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고 약속하고 대통령이 된 노무현의 비정규보호법이 사실은 비정규직을 더욱 확대하고 강화하는 법이라 노동자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법이라는 것이 이미 만천하에 드러난대다, 

그즈음 노무현정부 아래 열사의 이름을 단 죽음이 스물이 넘던 시절이다. 

그 아래서 총리를 하는 자가 여성이고 남성이고 그게 뭐 그리 대단할거라고 기대를 한단말인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부르주아 계급의 잘나고 똑똑한 여자들이 자기들보다 못나고 멍청한 동일계급 남자만큼 대우받지 못하는 지분에 대한 투쟁이라고 생각했다. 

여성 지배계급을 위해 복무하는 페미니즘이 표가 필요할 때만 몰계급적인 단결을 여성노동자들에게 호소하며 사기친다. 

비록 진심은 아닐지라도 표가 필요할 때를 위해서라도 못배우고 가난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위해 뭔가 이해하고 함께 해줄 것처럼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천박한 대한민국 페미니스트들은 더 큰 권력자의 밑에 줄설줄이나 알았지 노동계급의 여성을 위해서는 위선일지라도 연대한적이 단한번도 없다고 생각했다. 한명숙이 총리가 된들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에 복무하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위해 일할거라고 손톱만큼도 기대하지 않았다.


가난해서 못배웠지만 공장에서 일하며 그나마 남편에게 당하는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지만 않아도 다행인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즘, 

일은 똑같이 하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늘 더 작은 임금으로 더 낮은 지위에서 출산이라도 하면 두배의 노동을 감당하면서도 소박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삶을 살아내는 여성을 위한 페미니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사회주의자인 나의 반성은 노동운동진영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서 구체적인 꼴을 갖추었다. 

노동해방이라는 평등한 사회구조의 시스템을 꿈꾸는 집단 속에서도 가부장제는 어찌나 견고하던지. 

여러차례의 성폭력 사건을 대응하고 내 자신이 금속노조 안에서 두 번의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 발생한 사내하청 여성노동자의 직장내 성희롱 사건에 대한 피해자 대리인이 되어 활동하며, 

나는 이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마음먹게 되었다. 

더 이상 ‘동지’에게 성폭력을 당하며 사회주의를 말하고 실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끄러우니까.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는 그런 책이다. 

슬프고 단단하며 아름다운 그녀들의 이론은 고백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세상의 모든 딸들은 어쩌면 이렇게 동일하게 가슴을 치며 강제된 차별을 내면화 했던 걸까. 

모두 나의 이야기 같다.

가난한 여성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순종과 복종이 우리를 어떻게 고통스럽게 하는지. 

또한 우리는 어떻게 동일한 꿈을 꾸는 남성들에게조차 배제되는지.


계급의 문제를 말할 때 페미니스트들은 가난해서 경멸받았던 자신의 출신성분을 확인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급’도 ‘페미니즘’도 그녀들을 오해할 준비가 되어있는것처럼 보인다. 

양쪽 모두로부터 의혹의 눈빛을 받는 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답답함으로 숨통을 조여온다. 

인간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전망에 대해 말할때조차 우리는 쉽게 소왼된다. 

그리하여 부르주아 페미니즘과 다를뿐 아니라, 

가부장적인 사회주의자들과도 다른 내 존재에 대한 확인과 성찰에 심장이 뛰었다. 


700여 페이지의 묵직함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안정감 있는 문장의 번역이 좋다.

1800년대, 노동계급이 투쟁하기 시작했을때부터 급진적인 여성들은 견고한 억압과 차별에 주눅드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며 어떻게 저항했는지, 

그녀들의 선동은 때론 흥분하고 때론 도발적이며 자주 가슴이 아프다. 

여성노동자들의 망치질 소리가 꽝꽝 울린다. 

모든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더라고 모든 선동에 기꺼이 심장이 뛴다.

선동과 고백을 지나 임금노동과 투쟁의 의제들, 성노동자와 노예제, 여성에 대해 은밀하게 진행되는 공적처벌, 제3세계의 여성과 환경정의까지. 

다양한 글들에 모두 동의하지 않더라도 모두 진지하게 균형잡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러 문장과 많은 행간에서 눈물이 나는데, 그럼에도 그녀들은 진취적이고 씩씩하다. 

맞다. 내몸에 페니스가 없기 때문에 당하는 모욕과 수치심의 냄새는 제발 긍정의 존재로 나를 확인시켜 달라고 몸안에서 오래도록 아우성쳤다. 

천천히 밑줄치며 읽어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는 나와 우리를 확인한다. 


학문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어 분류하고 체계화하여 총화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로 이정도의 진지한 이야기와 성찰, 이론을 가려뽑아 묶어낸 낸시에게 고맙다. 

번역을 한 유강은의 내공도 내것인냥 자랑스럽다.


더 인간다운 사회의 관계망을 형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긍정하며 살기위해, 내 몸에 대한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지구별에서 얼마나 많은 실험이 용기있고 현명하며 좌충우돌하는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즐겁다. 그리하여 인류에게 익숙한 계급착취와 가부장제를 넘어 

‘지구 행성 자체를 파괴할 태세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야만적 체계에 대한 대안을 이론화하고 건설할수 있는 거대한 잠재력’에 동참한다. 

더 평등하고 아름답게 살고자 분투하는 여성들의 꿈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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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03-30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책을 읽은 덕에 이런 글을 볼 수 있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황금 노트북 3
도리스 레싱 지음, 안재연 외 옮김 / 뿔(웅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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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0년 4월 2권을 읽은 후, 3년이 지나 이제야 3권을 읽는다. 

참으로 매력적인 황금노트북은 이미 3년이 지났음에도 첫페이지를 여는 순간 

안나와 몰리, 매리얼과 토미가 살냄새를 풍기며 안긴다. 

이런 책은 아마 황금노트북 밖에 없지 않을까. 

보통은 3년이 아니라 3주만 지나도 줄거리와 인물들이 헷갈린다오. 



2. 

위대한 소비에트 국가에서 벌어지는 스탈린의 폭정이 영국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조건없이 찬미되고 수용되다가

인민을 학대하는 것을 더이상 감출수 없어 만천하에 폭로된후의 경악

공산주의의 민낯이 결국 독재의 천박함이라고 인정하기에 꿈과 이상은 너무 아름다웠거든

심지어 공산주의 이름으로 거짓과 폭력이 횡횡할때 

어떤 공산주의자는 인간의 지성에 대한 신뢰가 통으로 무너진다. 

헐거운 이론과 가난한 영혼들이 어떻게 인민을 기만하게 되고 스스로의 삶을 망가뜨리는지, 알고 있어. 나도. 

레싱처럼 날카롭게 쓰지는 못하지만. 

레싱의 투명한 영혼이 보이는 것 같아. 



3. 

그녀는 노란노트에 끊임없이 사랑이야기를 쓴다. 

내가 경애하는 두작가 모두 직관으로 번뜩이고 현실을 정확하게 뚫어보지만 

에트우드가 시적이라면 레싱은 소박한 솔직함의 힘이 있다. 


냉정하게, 냉정하게, 냉정하게, 그것이 핵심이다. 그것이 기치다. 처음엔 미국에서부터, 하지만 지금은 우리에게도, 런던 주변의 정치적 사회적 청년 그룹들. 토미의 친구들. 새로운 사회주의자들을 생각해 본다 - 감정을 계산하는 속성, 냉정함,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것이 바로 그것이다. 


안나부인, 우리 스스로가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백만년후에 솟아날 그 풀잎들에 의지해야 한다는 걸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이 문장에 거의 동의한다. 

야만과 폭력과 사기가 판치는 이 미친세상에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만년후에 빛속으로 솟아날 그 잠정적인 녹색 풀잎에라도 의지해야지. 

이문장의 느낌을 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다들 미친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리고 마치 어떤걸 가질지 선택할수 없는 질병의 이름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문장을 곰곰이 검토하면서 누워 있었다. 

안나는 이런식이다. 

시간이 갈수록, 나이먹을수록 더해간다. 

'사랑하고 있다'는 문장의 겉과 안과 모서리, 위와 아래, 감추어진 그늘과 가끔 빛나는 심장의 한쪽까지 

구석구석 곰곰히 끊임없이 검토한다. 번번히. 

으아, 안나. 그만좀 해. 


귀뚜라미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린다. 



4. 

3권의 파란노트는 최악이다. 

그녀의 사랑과 일상의 정신분열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이러고 살면 행복하지 않을 거야. 

안나는 여성이라면 어떤 남자와 어떤 방식으로 연애를 해도 불행할 수밖에 없고 

사랑을 하지 않으면 고통이 없을지는 몰라도 심심하고 재미없게 살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모양이다. 

안그래. 안나. 안그렇다구. 

탈출구는 없으니. 그냥 뻔뻔스런 남자와 자기를 학대하는 감정소모전에 칼을 갈다가도, 문득 그에게 안겨 행복하다. 

어쩌면 그녀가 말하는 정신분열의 연애가 20세기 자의식강한 여성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1세기지만 아직도 현실일지 몰라. 

사랑과 연애에 대한 그녀의 이 끔찍한 악몽과 정신분열은 안나만의 것이 아닌지도 몰라. 


3권의 반은 정신분열이고 반은 멀미나게 울렁거리는 꿈이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3권을 레싱이 쓴 이유는, 아마도 1,2권의 그 빛나는 책을 3권의 상태속에서 구상하고 썼기 때문일까. 

그래도 굳이 3권을 쓰지말지. 

이미 하고 싶은 말은 다 쓰고서. 피곤해. 레싱. 


그게 바로 우리 모두의 문제야. 우리의 모든 강렬한 감정들이 하나씩 차례로 봉해져 버린다는 것, 어떤 이유들 때문에, 그것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무관해져 버렸어. 나의 가장 강렬한 요구는 - 한 남자와 있는것. 사랑. 그게 다야. 난 정말 거기에 재능이 있는데. 

이 문장을 말하기 위해 이렇게 긴 정신분열의 분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안나의 답답함이고 레싱의 슬픔이다. 

재능있으면 사랑하면 되찮어. 아이고. 참. 


이번에 그녀가 사랑하는 솔은 최악이야. 

돌아보면 그녀의 삶에서 그녀의 사랑만큼 멍청한 주제는 없었다. 

그녀는 딱 사랑할때만 바보같은데, 딱 그 사랑이 그녀의 일상을 온통 휘둘러 흔들어버린다. 

21세기의 여성들은 그렇지 않길 바래. 

연애는 그냥 할수도 있고, 안할수도 있고, 남자랑 살수도 있고, 혼자 살수도 있고

왜 꼭 혼자살면 뭔가 부족한듯하고 공허해져야 하냐고. 

사람이 살다보면 외로울 때도 있는거다. 

남성, 애인의 부재에 대해 너무 두려워하니, 정신분열 된다. 


20세기 영국좌파 지식인여성의 자기분열이 지루하다. 

어쩌면 21세기 남한좌파지식인여성들의 자기분열 또한 그녀들만큼 뒤틀려 지루할지도 모르고 

최근엔 우리사회에 '좌파지식인여성'이 있나? 그러고보니 희귀한 정체성일세. 


안나의 파란노트가 책장이 안넘어 가서 고생했다. 

여전히 거울을 보듯이 레싱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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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랑, 산유화로 지다 - 향랑 사건으로 본 17세기 서민층 가족사
정창권 지음 / 풀빛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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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숙종 28년(1702) 9월 6일 향랑은 오태강에 몸을 던져 자결했고, 죽은지 14일만에 시신이 떠올랐다. 

향랑 자결의 사회적 맥락을 읽는다. 


소설처럼 극화해서 썼다. 

역사란 딱딱하게 논문쓰듯이 꼭 써야 하는것은 아니라는 정찬성에 동의한다. 

특히 역사란 과거의 어느때 어느공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아닌가. 

논문쓰듯이 쓰면 객관적이고 소설처럼, 이야기처럼 쓰면 주관적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음. 

조선왕조실록은 매우 객관적인 사실의 기록처럼 보이지만 철저하게 주관적이다. 

과거 기록을 읽는것은 그래서 그 행간의 진실을 읽는것인데 

오늘을 사는 사가의 관점이 정확하게 드러난다. 

그렇게 드러나는 정찬성의 관점이 좋다. 

그의 글쓰는 방식이 권위적이지 않고 지식을 더 평등하게 나누려는 노력이라 더욱 좋다.

그러니 겨우 양민의 딸, 이혼하고 돌아와 갈곳없어 자살한 향랑을 주목하여 조선 중기 시대를 읽지. 

그녀는 왕이나 공주는 아닐뿐더러 명품을 남긴 예술가도 아니고 겨우 이혼녀 아닌가. 

검색해보니 정찬성은 조신시대의 장애인들에 대해서도 썼네. 반갑다. 

평범한 인민들이 사는 그늘진 곳을 살피고 돌볼줄 아는 학자들은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이사람 좋으네. 

정창권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2.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어야 한다고, 천박하다. 

두 임금을 섬기지 말라고. 어떤 개떡같은 임금이라도, 어떤 재수없는 남편이라도 절개를 지키라고. 

심지어 소와 개도 의를 따라 목숨걸고 충성하는 절개가 중요하다고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얄팍한 통치 이데올로기가 인민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죽이는구나. 

힘과 권력으로 손에 물한방울 안묻히고 탐욕스럽게 빼앗으며 살다가 

외침으로 나라가 위태로우면 제일먼저 도망가서 임진왜란 벌어지고 열흘만에 압록강까지 도망이나 갔던 왕실과 양반들이 

무슨 염치로 전쟁을 살아낸 인민을 통치하냐면 

정절을 지키고 의를 지키고 예를 지키라고 

의와 예는 결국 자기 자리가 태어날때부터 있다는거다. 

장자가 중요하고 왕은 날때부터 왕이고 신분실서를 넘지 말고 분수를 지키며 살라는 거지. 

그래서 시집에서 쫓겨난 여자들은 감히 재혼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데 

친정에서도 안받아주고 갈곳이 없으니 죽을수 밖에. 

살아있을때는 모두다 천대하고 손가락질 하고 심지어 폭행해서 한평땅에 받아주는 사람없더니 

살수없어 죽은 향랑에게 열녀라고. 하. 조선 양반들 잘났어 정말. 

죽어서 열녀가 무슨 소용이고, 향랑이 바라던 것도 아니고 

다만 그녀의 억울함을 3백년 후에 정창권이 행간을 읽어 알아주어 

그녀는 아마도 저세상에서 속이 좀 후련했을까.



3. 

노동조합운동 내부에 얼마전부터 사람이 죽으면 열사냐 아니냐 논쟁이 있더니 

1700년대, 대략 3백년 전에 열녀냐 아니냐 논쟁이 있네. 

이혼하고 친정과 시집에서 모두 쫓겨나 살곳이 없어 죽었으니 사회적 타살은 맞고

그러니 그녀가 열녀라면 그렇게 죽게만든 부모와 남편과 시부모를 처벌하고 재발방지를 해야지. 

이혼녀는 언제든 좋은 남자만나 살림을 차려 살수있고, 이혼 했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고 해야지. 

이혼을 하려면 산동안의 재산도 분할해야 하고,

무턱대고 의리를 지킨 절개의 열녀라는것은 심각한 왜곡이 맞다. 


죽은자에게 열녀든 열사든 이름붙이는 것이 왜 중요할까?

땅에 묻히든, 화장을 해서 한줌 재가되든 죽으면 모두 사라지는데

열녀든 열사든 이름붙여 추모하는것은 산자들의 욕망이다. 

굳이 죽은자의 이름을 부를것이 아니라, 나 죽기전에, 아직 살아있을때 

오늘, 나를 닦고 고쳐 잘 살면 그뿐 

 


4. 

정창권의 책은 더 읽어보겠지만 

풀빛은 독자에 대한 배려가 없든지, 책을 대충만들든지. 편집이 심하게 거슬린다. 

사진이나 그림의 도판은 알아보기 어렵고 

향랑자살사건과 관련한 당시의 기록들은 길게 인용되는데 연보라색이야. 세상에. 

형광등 밑에서 글자가 안보여. 진짜 맘에 안든다. 풀빛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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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반역의 기독교
에른스트 블로흐 지음, 박설호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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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에게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란들의 잘 알려진, 혹은 은폐된 고통과 불평을 마치 탐정처럼 추적하여 분석하는 작업이다. 성서를 이단의 역사라는 관점으로 독해해 나가는 일이다. 


성서의 텍스트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제들에 의해서 편찬되고, 권력을 지닌 교회를 위해서 사용되어 왔다. 즉 이스라엘의 진정한 자식들이 품은 불만을 전한 게 아니라, 권력에 봉사해온 것이다. 


이사크 바벨의 말에 의하면 <천박함은 그자체로 반혁명>이라고 한다. 

이 말에 동의한다. 

천박함은 그자체로 반혁명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여 나누고 실천하는 철학은 인간의 존엄에 걸맞는 품위가 있다. 

한편 자본에 빌붙는 권력과 그것을 행하는 자들은 실제로 천박하다. 

타인을 짓밟는 것이 교양일수는 없는 일이다. 


2. 

히틀러시대에 대한 반성이 눈에 띈다. 

독일인으로서의 느낌보다 기독교인으로서의 반성이다. 

히틀러시대에 누가 저항하고 누가 순종했는지, 카톨릭이 어떻게 히틀러에게 봉사했는지. 

나치에 대해 성당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그에 비해 소련에 대한 성당의 태도는 일관되게 조롱하며 적대적이었지. 

종교권력도 참 천박해. 



3. 

다 좋은데 저항과 반역을 너무어렵게 말한다. 

성서텍스트를 이단의 역사라는 관점으로 읽기위한 서론이 너무 길고 

뭐, 일일히 다 해명하고 확인하고 싶어한다고나 할까. 


나중에, 라고 생각했다. 

더 나이들어야 참을수 있는 난해함이다. 

관점에 동의하지만, 그 관점을 위해 이렇게 까다롭게 쓰면 대중적으로 읽히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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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여성들, 근대를 달리다 우리 시각으로 읽는 세계의 역사 5
최재인 외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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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미로운 주제다.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을 발견하는 시기의 여성들. 남자들에게 속해 있던 여성들이 어떻게 자의식을 찾는지. 



2. 

프랑스혁명을 주동한 벨시에 출신 여성 테루아뉴가 첫번째 소개된다. 

영웅적인 전사이거나 창녀로 조롱당했고 귀족에게 납치되어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재판받아 무죄로 선고된다.

골때린다. 귀족들은 사람을 납치해도 처벌되지 않았나봐. 


혁명초기 테루아뉴는 동료로서 '젊은벗'협회에도 참여한 볼리외는 테루아뉴의 삶을 이렇게 정리했다. "테루아뉴는 혁명의 살아있는 이미지였다. 처음에는 빛나는 존재였으나 혁명을 겪으며 미치광이가 되었고 8월 10일 이후에는 오물과 피로 범벅이된 역겨운 존재가 되었다." 남장한 여성 투사의 이미지는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공개적으로 매질을 당하고 광기에 빠져 감금된 희생자의 이미지와 어렵지 않게 일치되었는데, 그것은 '비정상성'이라는 범주를 통해서였다.

여자주제에 너무 튀었다는 말이다. 참아주지 못할만큼 매력적이었다는 거지.  


근대사, 혁명에 대한 어떤 서술도 혁명에 참여한 여성의 입장에서 서술되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녀의 역사를 소개하지만 

뼈대만 앙상하여, 반복하여 그녀의 삶이 제대로 인지외어 서술되지 못함의 이유한 지적하니, 재미없다. 

분명 젊어 심장뛰고, 혁명과 동지로 부터 배신당한후 22년이나 정신병원에 갇혀 분노하고 무기력했을 그녀를 읽어주지 않는다. 



1783년 귀족집안에서 태어난 두르바는 러시아 최초의 여성장교이다. 

아버지가 군인이어서 어린시절부터 막사가 익숙했던 한편 어머니는 늘 여자는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해서 답답했다. 

결혼했고 아들을 낳았으나 친정으로 돌아온 두르바는 서른살에 남장을 하고 군에 들어간다. 

그녀는 군에 잘 적응한듯이 보이고 그 이후의 삶은 남성에 가깝다. 

어쩌면 그녀 스스로 인식하는 성정체성은 남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보인다. 

10년동안 전쟁통에 군인이라는 가장 남성적인 일을 하여 인정받았고, 회고록으로 기록했으니 나쁘지 않다. 



알제리 해방전쟁의 여성 전투원 자밀라 부파차는 이슬람 사회에서의 여성이다. 

교육받지 않은 다수의 여성이 해방전선의 전사가되어 치마폭에 폭탄을 운반했다.  

그녀들은 오빠와 삼촌에게 정치선전물을 받아보고 그들의 권유에 의해 전사가되는 경로를 선택했다. 

물론 그녀들의 선택이다. 

그럼에도 잘살때는 여자라고 사람취급도 잘 안하면서 급해지니까 같이 싸우자하고, 다시 평화로워지면 집에가두고

빈정상해. 

그녀들은 해방전쟁의 역사에서 전사로 활약하여 살해당하고 구금, 폭행, 고문당했다. 

해방된 후 알제리가 그녀들을 어떻게 대접했는지 궁금하다. 


보부아르는 나아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어떤 고문자들도 불안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삼았다. "자밀라를 심문한 이들은 평화롭게 그들의 잔인한 행위를 계속 수행할 것인가?" 작가가 독자에게 내놓은 질문은 그것이었다. 


평화롭게 고문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는 야만적이다. 박정희시대의 대한민국도 그랬지. 

이제 박근혜시대의 대한문 농성장은 평화롭게 사람을 폭행하는 것이 날마다 벌어진다. 

경찰이라는 것들이 평화롭게 잔인한 폭랭을 계속 수행하고 있으니. 

눈뜨고 날마다 그것을 봐야 하는것도 고통이다.  



내 심장이 가장 뛴것은 웰스-바네트. 

이 시기의 린치는 KKK와 같은 특정한 집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린치는 주로 읍내 시장이나 광장에서 남녀노소가 함께 바라보며 환호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심지어는 희생자의 귀나 코 등을 잘라 일종의 기념품으로 나눠갖는 엽기적인 행각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문과 살해가 마치 축제처럼 진행된 것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백인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 태도가 백신 사이에 만연했기 때문이다. 또 이런 린치는 아프리카계에 대한 무시와 편견을 사회적으로 공고히하고 대를 이어 전승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인간의 잔인함이라니. 

웰스-바네트, 단호함과 명석함이 인상적이다. 

인종과 성별과 학벌과 사회적 통념 모두에 맞서 선구적인 실천투쟁을 하며 또한 자신의 행위를 기록으로 남긴여성. 

백인은 흑인이라고, 남성흑인은 여성흑인리하고, 흑인여성은 그녀가 못배웠다고 조직적으로 무시하고 외면한다. 

그러나 그녀는 뛰어난 대중선동가였고, 자신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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