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자이너 모놀로그 - 개정판
이브 엔슬러 지음, 류숙렬 옮김 / 북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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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이제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와 브이데이 운동이라는 정반대의 세계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연극의 애매모호한 에너지와 사회운동이라는 더 확실한 세상 사이에서 사는 것은 나를 확장하고 영감이 가득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술은 운동을 더욱 창조적이고 과감하게 만들었고, 운동은 예술을 더욱 날카롭게 초점을 맞추게끔 만들었습니다.

 

여성들은 제 몸의 주인이 자신들임을 재천명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몸의 욕망과 위반, 승리, 수치심, 모험담 등을 이야기 했습니다.

서문 10주년 기념판에 부쳐 中

 

금기시되어 있는 단어 보지, 라는 말을 함으로써 생기는, 그 위험한 시도로 생기는 힘이 있나봐.

공공연한 영역에서 보지라는 말을 쓰지않을 뿐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도 보지라는 단어는 회피한다.

서문 10주년 기념판에 부쳐는 보지라는 말이 뉴욕 다운타운의 작은 극장에서 말해진 이후 10여년동안 벌어진 승리의 기록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끝내려면 모든 이야기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수치와 모욕과 빈곤과 인종차별주의를 보아야만 합니다. 세상에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굴복당한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물어야만 합니다.

이 문장을 읽고 울컥 했네.

 

2.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여성 성기의 독백이다.

직역하면 보지의 독백, 그러나 북하우스는 책 제목을 버자이너 모놀로그라고 붙였다.

북하우스는 어떤 판단을 했던 걸까?

금기에 도전하는 보지의 독백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지않고

버자이너 모놀로그라고 무슨말인지 들어서 모를 제목으로 보지를 가리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한 이유가 뭘까.

보지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는 행위가 감당이 안된다고 행각한 걸까.

엘리트들의 도서관에 보지라는 말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보지의 독백은 바로 그 지점을 깨고 금기에 도전하며 용감하고 정직하게 도전한 것 아닌가.  

보지라는 말은 여성의 몸을 부끄럽거나 더러운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비속어 이고

여성이 스스로의 몸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서 급진성을 띄며 선언된 것이다.

북하우스는 그 급진성을 스스로 포기하며 책을 낸 셈이다.

 

글로리아의 표현을 빌면 200명이 넘는 여성들과의 내밀한 인터뷰를 연극을 위한 시도로 바꾼 이브 엔슬러의 공연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힘 이었다.

글로리아가 서문에서 제목까지 포함해 여성들의 말을 그대로 출판한 빌라드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고 인사한 이유가 있다.

북하우스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은 것인가.

 

 

3.

내가  그 말을 하는것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구, 말 못하겠어. 못 한다니까. 어떻게 아래 얘기를 해? 그냥 다 알잖아. 거기 있는거. 지하 창고처럼, 가끔 덜커덕 거리며 이런저런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지. 파이프 소리도 들리고, 쥐 같은 것들도 있고, 물이고이기도 하지. 어떤때는 수리공이 와서 물 새는 곳을 고치기도 하지. 그렇지만 대부분 거기 문은 잠겨 있어. 그냥 잊어버리고 살지. 내 말은 거기도 집의 일부이긴 하지만 평소에는 자주 들어가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아. 볼일이 없는 거지. 집집마다 창고가 필요하긴 하지만 언제나 거기 있으니까 잊어먹고 사는 거지 뭐.

 

보지에 관한 온갖 이야기가 축제처럼, 시원하다.

한번도 안해본 얘기를 하는 여성들, 의 이야기를 듣는다.

말하는 것, 듣는 것, 나누는 것 마으로 해방되는 느낌이 있다.

매우 은밀하고 집요한 금기니까.

그러거보니 나도 보지에 대해선 말해보지 않았네. 들어보지도 못했고, 읽는게 처음이야.

그런대 이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다니.

우린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은가봐. ^^;

 

이를테면 우리가 뚱뚱한 허벅지가 아름답다고 가르치는 문화에서 자라났다면 우리는 모두 드러누워서 밀크셰이크와 과자를 씹어 삼치며 매일먀일 허벅지살 찌우기에 돌입했을 테죠. 하지만 우리는 그런 문화에서 자라지 못했잖아요. 나는 내 허벅지를 증오했고 내 보지는 더욱 증오했어요.

 

19세기까지도 소녀들이 자위행위를 통해 스스로에게 쾌락을 선사하는 행위는 질병으로 간주외었다. 그런 소녀들은 종종 '치료'를 박거나 '교정'을 받았는데, 그 방법은 클리토리스를 절제하거나 뜸을 뜨는 것이었다. 또는 질의 양 입술을 같이 꿰메버려서 클리토리스를 찾을 수 없게 만드는 '신종 정조대'를 채우기도 했다. 심지어 자팔관을 없애버리는 수술을 하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년들의 자위행위를 막기 위해 페니스나 고환을 잘라버리거나 수술을 한다는 의료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 [잘못된 신화와 비밀에 대한 여성백과사전] 에서 -

 

 

4.

브이데이

우리의 작업은 세가지 핵심적인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예술은 생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으며 사람들이 행동하도록 영감을 준다. 둘째, 지속적인 사회, 문화적 변화는 비범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에 의하여 퍼진다. 셋째, 지역 여성들은 그들의 지역사회가 필요로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며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브이데이 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된 동력들이다.

특히 중앙에서 기획한것을 지역으로 가져가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사회가 필요한 것을 지역 여성들이 스스로 발언하게 하는

세번째가 인상적이다.  

보지의 독백이라는 공연을 기획하고 실행하며 이미 고정관념들과 부듲혀 전투를 하게되고

바로 그 지역에서 필요한 사업에 수익금이 지원되는 시스템이 활력을 준다.

 

그러나 한국에서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운동이 되지 못하고 공연만 했다.

보지의 독백, 이라고 표현하지 않아서 아닐까.

기획자들이 포기한 그 표현에 도전과 활력이 있었거든.

버자이너 모놀로그라는 말은 누구도 불쾌하게 만들지 않지만, 흥분하게 만들지도 않으니까.

일단 무슨말인지 모르거든.

 

 

5.

앞부분 보지의 독백은 보지에 대해 인터뷰하고 공연한 내용이고, 마음을 울리는 대목이 많다.

일일이 옮겨적기 어렵다.

뒷부분 스포트라이트 모놀로그는 브이데이 행사를 위해 씌어진 주제가 있는 시 이다.

소외되고 학대당한 여성들 이슬람, 인디언, 위안부, 트래스젠더.

 

1998년 창립된 브이데이는 여성과 소녀들에게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근절시키기 위한 풀뿌리 활동가들의 세계적인 운동이다. 이 폭력애는 구타, 강간, 근친상간, 음핵절제와 성노예제 등이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브이데이의 활동에 대해 소개한다.

1996년 이브 엔슬러는 <버자이너 모늘로그>를 공연한 후 학대당한 수많은 여성을 만나게 되고 압도당한다.

그에 관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 그녀는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폭력에 관한 연극을 넘어서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행동하도록 사람들을 움직이는 장치로 만들기로 마음 먹는다.

결국 보지의 독백은 여성들의 목소리이고, 단체이고, 행동이고,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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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똥배
윌리엄 데이비스 지음, 인윤희 옮김 / 에코리브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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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세끼 밀가루를 먹어도 얼마든지 행복한 밀가루 중독자로서

고기는 끊을 수 있어도 밀가루는 끊지 못할 뿐 아니라 감히 상상도 못하고

어릴때 부터 남부럽지 않은 똥배가 있었고, 마흔이후 꾸준히 늘어나는 몸무게가 부담스러운 한사람으로서

밀가루 똥배는 호기심이 확 땡기는 책이다.

이제 우리는 밀가루 머핀이나 양파 치아바타로 그럴듯하게 꾸민 우리의 먹을거리가 진정한 밀이 결코 아니며, 20세기 중반 이후 수행된 유전 연구를 거쳐 변신한 물질이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식단에서 밀을 배제한다는 개념은 적어도 심리적으로, 마취하지 않고 치아 신경치료를 받는 상상에 버금갈 정도로 고통스럽다.

극렬히 동의함. 단언컨대 밀은 절대 못 끊는다. 

 

유전자 조작을 시작한 처음 10년동안, 누구든 그 유전자 조작 식물에 대한 동물실험이나 안전성 실험을 요구하지 않았다.

유전자가 수천번 조작된 현대의 밀은, 유기농으로 재배된다해도 이미 우리 조상들이 먹던 밀과는 전혀 다른 물질이라는 거다.

 

에탄올처럼 취하게 만들지 않음에도 밀은 행동을 변화시키고, 즐거운 기분을 유발하고, 중단 했을 때 금단현상을 촉발하는 몇 안되는 식품이다.

똥배를 말드는 밀이 중독성에서는 마약과 비슷하다니.

경험으로 보건대 충분히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혈당을 곧장 상승시키는 밀의 놀라운 능력은 '포도당-인슐린 롤러코스터'로 하여금 식욕을 돋우고, 중독성을 띈 뇌활성 엑소르핀 관계를 구축하여 내방지방을 키우게 한다. 이런 이유러 밀은 당뇨병을 예방, 완화, 완치 하려는 노력을 근본적으로 가로막는 음식이다.

 

밀이 지닌 모르핀과 유사한 효과와 아밀로펙틴A가 생성하는 포도당-인슐린 싸이클 때문에 밀은 사실상 식욕촉진제나 다름없다. 따라서 식단에서 밀을 뺀 사람들은 칼로리를 적게 섭취하게 된다.

밀을 먹으면 포도당-인슐린 싸이클이 120분간 지속되기 때문에 2시간 지나면 허기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깜짝 놀랐다.

몇년전 집에서 쉬던 6개월동안 정말 딱 그랬다.

리모콘 들고 거실 쇼파에 누워 TV보며 먹고자고를 반복하는대 딱 2시간 마다 허기가 찾아와

국수, 부침개, 냉면, 만두, 빵, 떡볶이 등등을 반복해서 먹으며,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도저히 그 2시간 반복을 중단할 수 없었다.

어릴적부터 밀가루 귀신이었던 내가 쉬면서 밀가루를 반복해서 먹은 이유가 있었구나.

밀이 모르핀과 유사한 효과를 낸다는 데이비스의 설명을 들으니 납득이 간다.

 

밀이 발휘하는 위력의 핵심은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뇌리에서 밀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밀이 과체중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상에 까지 영향을 준다고

황당하게 들리지만 임상실험과 구체적인 자료들, 흥미로운 사례들을 제시하며

밀안의 엑소르핀이 어떻게 인체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주는지 밝힌다.

 

음식의 조미료는 대화에서 재치가 번뜩이는 사람과 같은 존재다. 그것들은 의외의 상황 전개로 감정을 쥐고 흔들며 당신을 웃게 만든다. 호스래디시, 고추냉이, 머스터드를 먹고 케첩은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라.

이런 문장은 재밌다.

 

1. 현대의 밀은 우리 조상들이 먹던 밀이 아니다. 유전자 조작이 겁나 많이 되어 변형되었다.

2. 밀은 똥배를 만들고 비만의 원인이며, 모르핀과 같은 효과로 중독성이 있어서 끊으면 금단증상도 있다.

3. 한마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건강을 해친다고 표현한다.

당뇨병 뿐 아니라 정신분열증, 호르몬에 영향을 미치고 노화를 촉진하고 심장병, 백내장, 피부에 안좋은 영향을 준다.

의학적 검증을 위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접근은 지루하다.

동어반복이 너무 많은 셈이다.

4. 밀을 끊고 대신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조리법 설명

미국에서 사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는 있겠는데, 우리 현실과는 많이 다르다.

밀을 끊고나서 체중감량 뿐 아니라 당료병을 비롯해 이런저런 병이 치유된 사람들의 구체적인 예는 흥미롭다.

 

음...... 뭐랄까. 책을 읽은 후에도 여전히 밀을 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흥미롭고 유익했다. 윌리엄의 주장이 대체로 타당하다고 생각해.

특히 다이어트를 하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대도 체중이 줄지 않는것, 밀을 끊지 못하는 것이 그 사람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자본의 이윤을 위해 밀이 권장되는 시스템에 우리가 포위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검증하지 않은채 밀의 유전자를 바꾸고, 대량생산되어

안전하다는 당국의 검증을 통해 권장된 결과, 1980년대부터 미국의 모든 마트를 비롯해 밀에 포위된 채 살며

과체중에 위협받고 있다는 말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를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듯이 보이지는 사실 그렇지 않거든

 

밀을 끊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못하는 중독자로서, 부디 우리밀은 미국의 밀만큼 나쁘지 않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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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 관중에서 한비자까지 위대한 사상가 13인이 꿈꾸었던 최상의 국가 제자백가 아카이브 1
임건순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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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추전국시대

그들이 살던 시기에 천하는 항상 변화의 소용돌이에 몸살을 앓았는데, 특히 전쟁의 위협에 몸서리치곤 했습니다. 내 생명은 물론이고 내 나라와 사회적 지위, 내가 고수하는 문화와 이념이 언제 사라질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

인문학.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어때야 하는지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난세였다는 말씀

대한민국의 현대사도 난세중 난세인대

우리의 철학은 인간을 위해 얼마나 사색하고 있는걸까.

 

임건순은 제자백가의 사상이 유가를 중심으로 교조적으로 해석되어 재미없을 뿐 아니라

제대로 공부하는대 걸림돌이 되어 온 것이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이다.

네. 재미있는 제자백가의 백가쟁명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오.

편견없는 기각으로 학문적 성과를 기꺼이 나누어주는 학자들은 늘 고맙다.

넘의 논문 표절하는게 공공연한 교수들은 많지만, 그런 학자들은 드물기 때문에 더욱, 고맙다.

그들은 무질서한 시대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고, 난을 치로 전환하려고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통으로 시간순으로 소개해주니 전체적인 맥락과 각 사상의 문제의식이 잘드러나 좋다.

 

 

2.

춘추시대의 첫번째 패자 제나라의 환공, 제자백가를 시작하는 관중의 등장

관중의 등장은 사실 타고난 신분과 혈통이 아니라 능력과 실력만으로 검증받고 인정받는 실력파 유랑 지식인 집단의 등장을 예고한 것이고,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제나라 사람도 아니고 신분도 미미한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해 부국강병을 이룩한 제나라의 환공이 결국은 패자가 되었으니, 이제 다른 나라의 군주들도 실력을 기준으로 지식인을 등용하게 되었습니다. 열국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지요.

 

관중 치국의 핵심은 반드시 인민을 부유하게 하는데 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인민을 잘먹고 잘살게 해줘야지.

적어도 인민을 굶어죽게 하거나 밥벌어먹고 살 길이 막막해 자살하는 비율이 세계 최고가가 되게 하지는 말아야지.

정치를 한다면 굳이 관중이 아니더라도, 이것은 기본 아닐까.

 

인본주의자 안자의 여민동락. 인민과 함께 즐거움을 누린다.  

전형적인 춘추시대 귀족으로 우아함과 지조를 지키며 위대한 재상으로 이름을 날렸고, 또 공자와 맹자의 사상에 적잖은 영향을 준 인물

저잣거리 작은 집에 살면서 거친 밥만 먹으며 반찬을 두가지 이상 올리지 않았다는 안자. 청렴결백한 생활을 했고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했으며 인민이 재해를 겪으면 자신의 가재도구까지 모두 털어서 나누어준 인물

귀족이면서 저잣거리 작은집에 사는

계급질서를 옹호한다 해도 정치를 하려면 이정도는 되야 존경받는 재상이 된다.

도무지 대한민국의 인사청문회를 보면 청렴결백은 바라지도 않으니 사기꾼이나 아니면 다행인대

100% 경제범죄자거나 논문을 표절했거나 부동산 투기꾼이거나 사는곳을  사기치더군

 

손자

"전쟁이란 국가의 가장 큰 일이고 병사들의 생사가 걸려 있으며 국가의 존망이 달린 일이기에 신중하게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그 유명한 <손자병법>은 이런말로 시작합니다.

 

최고의 병법은 적의 의도를 사전에 꺽어 놓는 것이고, 그 다음의 병법은 적의 외교를 끊어놓는 것이며, 그 다음 병법은 적의군대와 직접 들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고, 최하의 병법은 적의 성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다.

 

살았던 시대의 시간순으로 제자백가를 한명씩 소개하고 각 장의 마지막에 현실에 대해 질문한다.

제자백가의 주장에 따른 임건순의 현실 해석 또한 명쾌하다.

손자가 묻습니다. '너희는 왜 국정원 마피아를 일벌백계 하지 않는냐?' 고요.

 

공자

이민족을 조상으로 두었지만 선대에 이미 제나라의 지배층이 된 귀족출신 안자. 그는 실제 정치 현장에 등용되어 오랫동안 재상으로 활약했지만 그와 달리 공자는 민간의 하급 무당 출신이며 취직하여 정치 현장에서 일한 적이 없었고 주로 재야에서 활동했습니다. 공자는 귀족 입장에서 사고 했지만 어릴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다시피 할 정도로 갖은 고생을 하면서 컷고, 그래서 하층민의 삶과 고통을 잘 이해했던 사람이지요.

 

귀족이 제대로 귀족 다울 수 있는 것은 공자가 말한 것처럼 착하고 관대하고 인자해서가 아니지요. 누군가를 착취할 수 있고 그런 특권을 가졌기에 귀족 다을 수 있는 것입니다......이건희가 이건희인 이우는 반도체 공장에서 죽어가면서까지 일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런 것이지, 그의 마음씨가 고와서 그런게 아닙니다.

임건순. 재밌는 사람이다.

귀족이 아니라 천민의 사각에서, 공화주의자 시민의 시각에서, 인민의 시각에서 읽어내는 제자백가

지배계급 그 언저리에 기생하는 학자들의 해석과 다를 수 밖에  

 

묵자

<묵자> 비악편에 보면 "추운 자입지 못하고,배고픈자 먹지 못하고,힘든자 쉬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별이라는 병리현상이 가져오는 고통이 정말 절절히 와 닿습니다.

 

노동자 출신 사상가 묵자는 실재 모든 인민이 누려야 할 각자의 몫, 최소한의 자기 몫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몫이 보장되는 것이 하느님이 뜻이고 겸애하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인민이각자 자신의 정당한 몫을 누리는 것,최대다수의 기본적인 이익 보장이 바로 묵자가 말하는 겸애입니다. 이러한 겸애를 묵자는 통치권, 즉 국가행정력을 통해 이루어내자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묵자 철학은 국가사회주의의 특징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상앙

군주가 임명한 중앙정부에 의해서만 통제받는 법 전문 공무원은 법을 교육하고 홍보하며 인민의 질문에 언제든 분명하게 답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질의와 응답을 기록으로까지 남기도록 해 철저함을 기했습니다. 법의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관련법에의거해 잘못을 해도 인민은 처벌받지 않았고, 또 법을 적용하기 애매하다 싶으면 법 적용을 보류하고 중앙에 보고해 심사와 논의를 의회하는 등 인민에 대한 법 집행을 신중하게 하려 노력했는데, 그러한 임무도 이 법전문 공무원이 담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민국 보다 훨 좋으네.

법을 집행하는 경찰은 법도 모르고, 물어보면 기냥 위에서 시키니까 한다고 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려면 돈을 왕창 줘야 하는대

법률서비스가 공무원에 의해 무상으로 지원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진나라는 매우 선진적인 나라였다. 여러면에서. 그래서 그틀이 청나라까지 간 것이다.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지금으로부터 2700년전 중국에 살았던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운영하고 싶었는지,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싶었는지

춘추전국시대의 귀족은 모두 무인이었으므로 갈등이 생기면 대화가 아니라 컬로 해결하는것이 쉬웠겠지요. 그들이 모두 무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래야 그 시대 지식인이 지닌 강단과 기백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제자백가 인물들을 우리는 학자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방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는 고리타분한 샌님을 생각하기 쉬운대

이런 설명은 유용하다.

각장마다 한사람씩 그가 살던 시대의 배경, 출생과 삶, 그의 주장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오늘의 한국사회, 폭력과 차별, 국민에게 전담시키는고통의 정치를 꼬집는다.

제자백가의 사상가들이 임건순을 보면 흐뭇해 하겠다. 재밌어.   

 

신도

객관저기오 투명하고 명시적이어서 누구든 쉽게 알 수있는 법, 소비자와 상인 모두에게 신뢰를 주는 저울처럼 구성원에게 신뢰를 주어 마음 놓고 거래하게 하고 또 보통의 덕성과 지력을 가진 군주도 나라를 편히 다스리게 해주는 법

뛰어난 한 사람의 왕, 그런것은 없으니 법에 의해 세상을  편하게 하자는 말이다.

2천년 후에도 인간들의 세상은 저 단순한 문장이 이렇게 어렵다.

 

한마디로 노자 사상은 무위하는 머리 빈 군주와 배부른 돼지 같은 우민을 위한 정치사상입니다.

 

어릴적부터 한문을 싫어했다.

일단 한글에 비해 너무나 비과학적이고 무식한 문자로 느껴졌다.

글자 하나가 뜻 하나를 품다니. 그래서 뜻이 있는 문자와 문자가 모여 문장이 만들어지다니.

너무 소모적인 글자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각각의 글자가 모두 따로 있으니 배우기 전부터 질렸다고나 할까.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은 고등학교때 러시아 글을 배워보고 싶었는대

동양철학을 보면 한문을 배워서 원서를 읽어보고 싶기도 해.

중국의 글자가 뜻을 품고 있기 때문에 글자 자체가 시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쫌 되었다.

 

임건순의 다음 책 '제자백가, 인간을 말하다'를 기다리겠다.

임건순에게 신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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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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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미니즘은 예나 지금이나 호명하고 정의하려는 싸움, 발언하고 경청되려는 싸움이다. 

모든 사회적 약자, 억압받는자들의 싸움이 그렇다. 

신뢰할 만한 존재, 경청할 만한 말로 인정받는것은 사회적 약자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다. 

권력, 힘이란 말을 가진 힘으로 표현된다. 그의 말대로 세상이 해석되고 움직이는것. 

그래서 박근혜가 역사교과서를 독점하겠다고 하는것이다. 세상을 제 눈으로만 호명하고 정의하고 해석하겠다는거지. 


내가 경험한 종류의 대화들이 남자들에게는 공간을 열어주되 여자들에게는 닫아버리는 쐐기처럼 작용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발언할 공간, 경청될 공간, 권리를 지닐 공간, 참여할 공간, 존중받을 공간, 온전하고 자유로운 한 인간이 될 공간을. 


언어는 힘이다. '고문'을 '선진적 심문'으로 바꾸거나 살해된 아이들을 '부수적 피해'로 바꾸는 것은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의 힘을, 우리로 하여금 보고 느끼고 마음을 쓰도록 만드는 언어의 힘을 망가뜨리는 일이다. 

맞다. 가장 충격적으로 망가뜨린 사례 중 하나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며 나찌가 '청소'라고 표현한 것이다. 

어떻게 호명하느냐는 철학의 문제이고 힘의결과이며 투쟁의 장이다.  

레베가 솔릿, 영민하고 화통한 그녀가 호명하고 정의하고 발언하는것을 경청한다. 

직설화법으로 말하는 그녀의 문장에 힘과 위트와 재치가 있다. 시원하다.  



2.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든다. 

이 제목은 경쾌하고 재밌게 튄다. 읽기전에 이미 느낌이 확온다.  

남자들이 자꾸 나를 가르치려들어서 짜증나고 화나는 느낌이 어떤것인지 모르는 여자들은 없을걸. 

뭘 몰라도 가르키려들고, 심지어 생전 하지 않는 집안일조차 가르치려들지. 


......그는 그녀의 목을 졸랐다. 그녀는 경찰서로 찾아갔지만, 경찰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런 폭력이 경악스럽다. 그러나 더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그런 폭력의 이면에는 피해자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학대자에게 있다고 보는 가정이 깔려 있다는 점, 그가 그걸 목적으로 폭력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성폭행은 피해자의 신체보전권, 자기결정권, 자기표현권을 공격하는 행위다. 피해자를 소멸시키고 침묵시키는 행위다. 피해자의 목소리와 권리를 지워내는 행위다. 피해자는 그런 소멸을 용케 피하고 용감히 나서야만 입을 열소 있다. 


그래도, 지금까지도 여자가 남자의 비행에 관해서 뭔가 불편한 말을 할라치면, 사람들은 으레 그녀를 망상에 빠진 인간, 사악한 음모론자, 병적인 거짓말쟁이, 그저 재미일 분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징징대는 인간, 혹은 그 모두에 해당하는 인간으로 묘사한다. 


맞다. 여기도. 지금까지도. 날마다 날마다. 

유쾌하고 발랄한 내용을 기대하며 책을 폈다가 놀랐다. 

아, 맞아. 남자들이 자꾸 나를 가르키려드는 것은 웃을일이 아니었다.


리베카가 겼었던 어처구니없이 잘난척하는 남자땜에 황당했던 경험담을 시작해서 

여성들을 진지한 대화의 상대로 생각지 않는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꼬집는 것으로 발랄하게 시작하지만 

사실 자꾸 여자들을 가르치려드는 것은 여자를 통제하고 관리하는것이 남자의 역할인냥 

여자는 남자의 말에 복종하고 순종해야 하는 질서를 강요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어떤 또라이같은 남자 하나가 잘난척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굴러가고 있음을 

이 강요는 남자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여성을 폭행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게 무슨 사랑이예요?" 라고 물었던 티나 터너의 전 남편 아이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래요. 나는 아내를 때렸습니다. 하지만 보통 남자들이 자기 아내를 때리는 것보다 더 많이 때리진 않았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 확실히 짚어두는데,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의 폭행은 미국 여성의 부상원인 중 첫번째다.  

음... 놀랐다. 

미국에서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니.

내가 기억하기로 대한민국은 얼마만에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하는지에 대한 계산된 수치는 없다. 


부연하자면 총에 맞아 죽은 여성들의 3분의 2 가까이는 현파트너나 전 파트너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니까 잘 아는 남자가, 사랑했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그녀를 총으로 쏴죽인다는 말이다. 

명령하고 지배하고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허용된 남자라는 집단과 

순종하고 복종하여 시키는대로 살지 않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여자라는 집단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지금. 

이정도의 통계가 제출된 범죄에 대한 재발방지 법은 거의 없다는 것이 더 경악스럽다. 

남자들이 이렇게 많이 동일한 범죄로 목숨을 잃어도 이렇게 무대책일까. 


이 나라와 이 지구에서는 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이 엄청나게 많이 발생하지만, 그 사건들이 시민권 문제나 인권문제로 혹은 위기로 혹은 하나의 패턴으로 다뤄지는 경우는 거의없다.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있다. 


하도 많은 남자들이 현재 배우자나 옛 배우자를 살해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살인이 매년 1,000건을 훌쩍 넘는다. 그렇다면 그로인한 희생자 수가 매 3년마다 9/11사건의 사망자 수를 넘는다는 뜻인데, 이런 종류의 테러에 대해서는누구도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다. 


6.2분마다 한번씩 경찰에 신고되는 강간이 벌어지고 여성 다섯명줄 한명은 살면서 강간을 당하는 미국부터

여성버스 승객이 강간당하고 살해된 인도의 뉴델리까지 

성폭력, 배우자 폭력이 어떤 미친놈들 몇명의 예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사이의 권력과 힘의 문제라는것. 

자꾸 가르치려드는 남자들의 권력행사는 라는것을 구체적인 다양한 예와 적절한 통계를 인용하며 단호하고 시원하게 말한다. 


제니 추라는 여성은 트위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모든 남성이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1990년에 <미국 의학협회 저널>은 이렇게 보고했다. "공중위생국의 조사에 따르면, 가정폭력은 15세에서 44세 사이의 여성들에게 가장 흔한 부상원인이다. 교통사고, 강도, 암으로 인한 사망을 합한 것보다 더 많다.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살인자는 당신이 죽을지 살지 결정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살인을 통해서 단언하는 셈이다. 


6년전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고 앉았을때, 나 스스로 놀란 점이 있었다. 웬 남자가 나를 기르치려든 우스꽝스러운 사례로 글을 시작했건만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맺게 된 점이다. 



3.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그녀의 통찰은 결국 지금, 세상에 어떤 힘관계가 관철되고 있고, 누가 수탈당하는지, 누가 지배자이고 

어떻게 저항하고 있는지에 대한것으로 발전한다. 

누군가를 통제할 권리가 스스로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한 폭력의 세계화다. 


우리가 이미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들려줘야 좋을까?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프랑스였다. 그는 그녀를 식민지로 삼았고, 착취했고, 입을 막았으며, 그런 일을 그만두기로 한 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가령 코티디부아르 같은 곳에서 그녀의 사정을 결정하는일에 위세를 부렸다.....

그녀의 이름은 아시아였다. 그의 이름은 유럽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침묵이었다. 그의 이름은 권력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가난이었다. 그의 이름은 풍요였다. 그녀의 이름은 그녀의 것이었지만, 그녀가 과연 무엇을 소유했던가? 그의 이름은 그의것이었고, 그는 그녀까지 표함해 모은 것을 그의 소유로 여겼다. 그리고 그녀의 의향을 묻거나 뒷일을 염려하지 않고도 그녀를 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지구적인 권력관계가 어떻게 관철되는지 잘 보여주는, 직관이 뛰어난 문장이다. 


이 질서가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이렇게 표현된다.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IMF였다. 그는 그녀에게 올가미를 걸어 약탈당하게 했고, 보건 써비스를 폐지하게 했고, 굶주리게 했다. 자신의 친구들을 배불리기 위해서 그녀에게 쓰레기를 투하했다. 


IMF는 포식세력이었다. 개발도상국들의 문호를 열어젖혀 부유한 북반구와 강력한 초국적기업들의 경제공세를 겪게끔 만들었다. IMF는 포주였다. 어쩌면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1999년 시애틀의 반기업시위를 계기로 세계적 운동이 전화된 이래 IMF에 저항하는 대중봉기가 있어왔고, 그런 세력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덕분에 앞으로 벌어질 모든 경제논쟁의 틀이 바뀌고 있으며, 경제와 전망에 대한 우리의 상상이 더 풍요로워지고 있다. 


 

투쟁은 지루하고 험난하고 때론 추악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역공도 여전히 야만적이고 강력하고 보편적이다. 

그러나 발언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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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 1~6 세트 - 전6권
최규석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1. 

습지생태보고서 때부터 딱 알아봤다. 

최규석. 어떻게 이렇게 신기한 캐릭터의 만화가가 대한민국에서 나와 동시대에 살고 있을까. 


최규석의 아웃사이더 감성의 근원은 습지에 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밝은 눈의 신통함은 그가 스스로 가난하지만 유연하게 살아낸 때문이다. 

그래서 헐벗은 자의 웃음 뒤에 숨은 눈물을 예민하게 알아챌 뿐 아니라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아픔을 웃음의 행간에 감출줄 아는 

100도씨 부터는 눈에 띄게 선이 굵어지더니 송곳은 굳이 찾아 보기 싫었었다.

최규석이 쓰는 노동운동에 대한 만화라니 

타인의 눈으로 내 상처가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이 싫으니까. 


활자중독인 내가 책은 주로 추리소설만 보고 가끔 여성주의책이나 인문학을 읽기는 하지만 

굳이 노동운동과 관련된 책은 안보는 편이다. 

책 읽는것이 일이 되기 싫으니까. 


그래도 최규석이니까. 어쩌면 숙제처럼, 그러나 기대하며 


역시. 50페이지를 넘기기전에 벌써 슬프다. 



2. 

가난한 이과장의 어린시절 어머니의 말 

아빠는 노가다하고 엄마는 품팔러 다닌대 

사람이 없이는 살아도 죄 짓고는 못사는 기다. 

거 참. 

왜 꼭 가난한 사람들이 이런 도덕률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사는지 

잘난 것들은 돈 있으면 죄도 없다는 세상이치를 넘치게 알아서 갑질하면서도 잘 살건만  


사람이 없이는 살아도 죄 짓고는 못산다는 저 말은 매우 상징적인 아이러니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큰 죄인인것처럼, 실제로 감옥에 갇히기도 하는데 

실은 없이는 살아도 죄 짓고는 못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노동운동을 하거든 


품팔고 일하고 와서 저녁 바느질하는 어머니 

뽀글뽀글 파마하고 몸빼입은 아줌마를 오래오래 처다 보았네. 

부디 우리를, 원했든 원치 않았든 노동운동을 하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너무 아프고 비참하게 그리지 않았으면

진짜 현실을 외면하며 그려주길 바라는 것인지 

모두 있는 그대로, 그 슬픔을 그려주길 바라는건지, 알수 없었다. 


용기만 있고 공포를 모르는 군인은 엉뚱한 전투에서 가치 없이 죽는다. 

용기만 있고 공포를 모르는 군인, 이 문장을 오래 보았다. 

공포를 알고, 공포를 표현하면 곧바로 비겁해지는 거라 생각했었다. 

나의 젊음은 그래서 내가 더 용감하다는 것을 나에게 검증하느라 오랜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제야 고백하건대 그래도 늘 두렵더라. 

마흔을 넘고 보니 

가치없이 죽을 수 있는 전장의 전투가 두렵다. 공포를 아는 사람이 용기를 낼 수 있기도 하고. 



3. 

내가 신뢰하는 만화가 최규석이 노동운동에 관해 그렸다. 

어떻게, 왜 이런 만화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는지 궁금하다. 

그의 시선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시선이 매우 진솔하며 특별하다. 

거짓이 없으며 사실에 기반하여, 유난히 편견많은 대한민국 

노동조합이라면 빨갱이라고 거칠게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평범한 근로자들이 어떻게 노동자가 되어가는지 

약하고 힘없어도 그들이 어떻게 용기를 내어 정의로운 좁은 길을 만들어 가는지

특별한 사람의 잘난 스토리가 아니라 평범하고 모자라는 듯한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이니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고

노동운동, 이라는 범주를 이렇게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그려줘서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을 사람으로 그려줘서    

최규석에게 고맙다.  


한가지 걸리는 것은 이수인과 구고신 두 축의 스토리가 

남성의 노동운동을 보여주는대, 마치 노동운동이 남성인듯이 보여서 

저 사업장은 분명 여성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물론 노동운동이 원래 군대문화 만연한 가부장적인 위계를 잘 따르기도 하지만 그래도 불편했다.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여성의 목소리, 여성의 노동운동이 가려지는 듯하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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