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혁명 -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뜨거운 복음 담론
셰인 클레어본.토니 캠폴로 지음, 안종희 옮김 / IVP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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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원제는 Red Letter Revolution, 붉은 편지 혁명 이다. 

예수 혁명이라는 번역보다 더 시적이다. 

부제가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뜨거운 복음 담론' 이다. 

그러고보니 예수의 삶을 생각하면 그 제자들인 그리스도인이 미지근 하다는 것은 앞뒤가 안맞는 말이다. 

웃었다. 


1899년부터 예수님의 말씀을 붉은 글씨로 표시해서 그 의미를 부각시킨 성경이 출판되기 시작했는데......예수님의 급진적인 가르침을 받고 일상에서 그것을 살아내기 위해 헌신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이름을 선택했다. 


토니 캠폴로는 서문에서 

붉게 인쇄된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내는 것은 전쟁을 반대하는 일에 헌신하고,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불의한 정치구조에 저항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억압받는 사람을 대변하고, 이 사회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에 더 가까워지도록 하기 위해 노력 하는 것이라고 썼다. 

문득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생각났다.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은 나쁜짓해도 부자로 살고 죽어서는 천국갈려고 교회다니던대.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반동성애자, 반양성평등자, 반환경운동자, 전쟁옹호자, 사형제도 찬성론자, 보수주의자 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학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인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이 그런 이미지로 인식되는 걸 싫어한다. 우리를 이를 피하기 위해 "붉은 글씨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단다.  

그러게 나두 그렇게 생각하거든. 

우리나라의 기독교 신자들은 대체로 악마의 화신이야. 


우리는 내일을 위해 적게 쌓아 둘수록 지금, 모든 사람을 위한것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셰인의 공동체 사람들이 15년동안 심플하게 살며 깨달은 것이란다. 맞다. 

셰인의 주장은 15년동안의 실험과 삶으로 검증되어 힘을 얻는다. 

실제로 내일을 대비하지 않아도 공동체의 삶이 더 풍요롭다는 모델이 필요하다. 

예수처럼 산다는 것이 부자로 살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한달에 몇번, 가진것 중 얼마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나누며 소박하게 살아야 더욱 풍요롭다는 말이거든.


셰인과 토니의 대화가 솔직하고 담백하여 쉬운 말들이다. 



2. 

1부 신앙은 붉은 글씨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에 대한 총론이고 

2부 생활방식과 3부 세계는 현대인들이 살면서 겪는 쟁점들에 대한 각론이다. 

여성, 이민, 동성애 단락이 특히 신선하다. 


진보적인 민주당의원 바니 프랭크는 '복음주의자들의 문제는 생명이 수정에서 시작해 출생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는것'이라는 도전적인 발언을 했네......복음주의자로서 생명존중이라는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보건서비스와 주간보육, 교육에 필요한 돈을 잘 시용하려 하지 않으니까. 

낙태문제에 대한 토니의 발언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생명이 중요하기 때문에 낙태를 반대하는 자들이 왜 아이들이 굶어 죽는 문제는 외면하냐고. 

또한 생명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낙태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전쟁은 찬성하고 

어떻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증오하는지 알수가 없어. 


우리의 이데올로기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서 낙태를 반대한다는 것은 곧 열네살 소녀가 임신했을 경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내야 한다는 뜻이에요. 

신학이 인간의 삶에 대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에 대해 깊이있고 폭넓게 고민하니 좋다. 


신을 믿지 않는 나같은 사람이 읽기에는 가끔 지루하지만 나같은 사회주의자도 보는대 

한국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이런 책을 좀 보고 영감을 받길 바란다. 

셰인과 토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매우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시민불복종운동을 선동하는대 

모두 예수님처럼 평화롭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기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위해 시민불복종운동을 진행한 목사들의 사례가 여러번 나오는대 

잘하네. 전술이 재치있고, 감동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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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ar 2015-03-27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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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에 편지란 뜻도 있지만 `글자`란 뜻도 있죠. 여기서 말하는 Red Letter는 빨간 글자란 뜻일 겁니다. 아마도요.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양장본
200주년신약성서번역위원회 엮음 / 분도출판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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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두고 평생을 찬찬히 볼 만한 책

다 읽지 못할 책 


신약성서란 새로운 약속이라는 말이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새로운 약속,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 기쁜 소식을 말한다. 

고통스런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인간에게 약속하는 기쁜 소식이란 무엇일까. 

그 번역이 매끄럽게 우리말로 술술 읽히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여러 신학자와 신부님들이 정성으로 번역했다는 느낌이 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스물일곱 책 각각의 머리에 해제를 달아 누가, 왜, 어떻게, 어떤 문장으로 씌어진 것인지, 어떤 구성인지가 친절하다. 

본문에서도 해석과 해제가 치밀하다. 


무엇보다 예수가 존대말하니 좋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들에서 살다 정치범으로 사형당한 젊은이가 

무례하게 반말했을 것 같지 않아. ^^


4대 복음서를 주로 알고 있었는데 야고보서. 

야고보는 예수의 동생이고 예수의 죽음후 부활사건을 기획하여 제자들의 무리를 이끌었다는 주장도 있다. 

의로운 사람 야고보라고 불리는 이 거장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옹호, 그리고 실천을 강조한다. 

패싸움과 교만, 지혜의 자랑에 대한 경고 

모두 정직하고 담백하다.  


이왕이면 꼭 이 번역본으로 신약성서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평생 읽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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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Q)
루터 블리셋 지음, 이현경 옮김 / 새물결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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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특하게 씌어진 책이다. 

루커 블리셋은 한 사람이 아니다. 

이 이름을 함께 쓰는 예술가들과 운동가들의 열린 공동체라네. 집단적인 창작물이다. 

종교개혁의 시대. 격동기 유럽. 1500년대다. 


초반에는 시간과 공간을 너무 자주 왔다갔다 하니 정신없다.

특히 시간이 헷갈린다. 

독일과 유럽의 역사, 특히 성서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이 없으면 더 난해해진다. 

음----, 그래도 읽다보면 익숙해진다. 

맥락으로 무슨말인지 알아지니까. ^^  



2. 

화폐주조자 뮌처. 엘리아스. 

그당시 병사들에게 끌려가던 선지자, 설교자들의 슬로건은 "만물은 만인의 것이다." 였단다. 멋지다. 

500년전 유럽에서.

만물은 신의것이라고 주장하며 땅과 생산물을 독점하고 심지어 인간의 영혼까지 독점했던 

카톨릭 사제화 1% 귀족들에게 반대하며 모든 인간에게 만물의 소유권을 돌려주는 급진적인 슬로건이다. 

맘에 들어. 


교황과 황제가 세상의 권력과 부를 모두 갖고서 지들끼리 싸우면서 인민을 수탈할때 

신부가 아니라도 누구든 성서를 읽고 자신의 하나님을 만날수 있다는 혁명적인 사상이 

농민들의 분노의 물결을 타고 

도시의 가장 비천한 자들이 시위원회에 선출되어 도시를 운영하는 실험도 하고

수많은 골목을 피로물들이고, 죽음을 당하고

그 전통이 아직 유럽에 있어서 덴마크와 이탈리아 독일 스웨덴과 영국에

아직 저 국경이 모호하고 황제의 영역과 군주의 영역의 다툼이 많던 시절부터

그 반역과 저항의 전통이 아직 그들에게 있는것 같아.  


18세기 프랑스 혁명은 알고 있었지만 

1500년대 루터에 의해 영감을 얻은 독일 농민들과 인민들의 전쟁이 

이렇게 폭발적이고 열정적인 혁명의 기운에 의해 움직인 것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증언처럼 생생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결국은 저 기운이 18세기 프랑스의 혁명을 이끌고 

인디언을 학살한후 세운 미국이라는 나라는 기획된 공화국이 되었다. 

19세기 러이사의 혁명이 실패로 기억되고 중국의 혁명 또한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지만 

비천한 자들이 세상을 운영하는 주인이라는 사상의 실험은 아직 중단되지 않았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사람 속에서, 직공들, 거지들과 골목의 쓰레기같은 사람들 속에서 선민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고통받았고 이세상에서 쫒겨나는 것 말고는 잃을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말입니다. 거기서 그리스도와 곧 다가올 그분의 재림을 믿는 믿음의 불꽃이 살아남을 겁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상황이 그리스도께서 선택한 삶과 아주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창녀들과 뚜쟁이들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전투를 지휘할 대장들을 모집했습니다. 


빼앗긴 자가 있는 순간, 저항은 있는거다. 

예수의 혁명적 사상을 아무리 주류 카톨릭이 감추고 무디게 해도 

단지 성서를 스스로 읽고 해석하는 순간 

성서의 혁명적 사상에, 예수의 삶에 영감을 받는 저항은 필연으로 보인다. 거참. 


1534년 뮌스터에서 재세례파 사도들의 선동은 비천한 자들, 농민, 노동자, 창녀와 포주, 도주중인 추방자, 인민들에게 

2014년의 사회주의 자들보다 훨씬 선명하고 혁명적으로 선동한다. 

인상적이다. 길어서 모두 옮기지는 않는다. 


가난하게 사는것이나 교수형당하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굴레를 벗고 운명이 우리를 위해 마지막으로 마련해놓은 것을 받아들이는게 여전히 가치 있는 일일 겁니다. 우리는 싸울겁니다. 다시, 아니 시도해보다가 죽을지도 모르겠죠. 

토마스 뮌터는 인민들을 선동하고 체포되어 사형당했으나 그의 사상에 감동받은 동지들, 그의 사상에 매료된 인민들이  

그 후에도 어떻게 계속 살아내는지, 가슴아픈 패매를 딛고 

평등한 세상, 정의, 가난으로 인한 고통스런 삶을 떨쳐버리기위한, 폭정에 맞서는 

그리하여 마침내 하느님나라, 평등하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현실에서 이루겠다는 꿈을 가진 자들의 열정과 무모함.

번번히 실패함에도 번번히 예수때부터 사형당하는대도 반복해서 

이것은 마치 인간의 몸안에 디앤에이로 기억되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은 아름답다. 


카를이 자기발에 너무 큰 신발을 벗더니 진눈깨비가 내리는 길 위에 맨발로 선다. 그리고는 토끼처럼 야영지를 가로질러 간다. 

카를은 인민군의 연락병이다. 

지휘자들 옆에 바짝 붙어있는 십대아이.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본 적 없는, 진눈깨비가 내리는 길위에 맨발로 서서 

교황과 귀족, 부르주아의 탐욕과 폭정에 맞서 사람처럼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살수 있어서 

심장이 타오른다. 



3. 

이런 식으로 하루 먹을거리를 얻는 것은 정말 힘들고도 슬프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노동에 대해 극히 위선적인 거직말들을 꾸며냈다. 혐오스러운 또다른 우상숭배. 자기를 두들겨 패는 몽둥이를 핥는 개. 바로 그게 노동이다. 

계급사회에서 노동은 정말 그러하다. 

계급사회가 아니었던 적이 없으니, 노동은 수천년동안 결코 신성한 적이 없었다. 늘 대를 물리는 고통스런 천형이었지. 


이제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으니 여러분은 혼자 힘으로 성경을 읽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더이상  박사들의 도음은 필요치 않습니다. 

이것은 심장뛰는 혁명적 발상이다. 하느님이 나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사제를 거치지 않고, 내가, 성서를 읽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 내가. 


눈과 진흙 속으로 발목까지 푹푹 빠진다. 뼛속까지 시리다. 캘라리우스는 슈튀브너가 통상 클라우스 샤흐트 맥주집에 죽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인 이사야에게는 안성맞춤인 신전이다. 음식 냄새와 맥주 냄새 짙게 밴 수증가가 그 신전의 방향이고, 한없이 늘어지는 노랫가락과 손님들의 욕설이 시편이다. 

신전과 시편에 대한 이런 비유는 참 좋다.

애초에 하느님은 불경하고 힘없는 노예들의 신이었거든.   


어제 레데커는 시청광장에서 시민들에게 열변을 토했다. 그 결과 그들가운데 스물 네명이 위원회에 선출되었다. 대장장이, 직조공, 목수노동자, 심지어 제빵사와 구두수건공도 있었다. 이런 밑바닥 인생들에게 이 세계의 운명이 맡겨질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해본적이 없었다. 

1534년 뮌스터에서는 이미 밑바닥인생들이 시의 위원이 된다. 

우리는 2014년에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정치다. 



4. 

바티칸 핵심 인사인 카라파의 눈이 Q다.

카라파의 쁘락찌  

Q의 눈은 그런데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다. 

카라파에게 보내는 그의 보고서는 탁월한 정세분석이다. 

특히 루터가 그의 성서로 인해 자극받은 그를 따르던 개혁가들을 어떻게 배신하고, 교황의 품에 안기는지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재밌어. 

읽으며 내내 이 Q가 누군지 궁금했다. ^^


루터가 활짝 열어놓은 대문으로 민중, 농부들과 시민들은 루터보다 훨씬 급진적인 요구를 하며 싸운다. 

루터는 스스로 자기연 대문을 닫았으나 

그문은 이미 그의 힘으로 닫을수 있는 수준의 대문이 아니었다. 

그 문으로 근대의 사상과 인간을 존중하는 벼락같은 사상이 열렸다. 


Q의 맞은편에서 저항의 역사를 증언하는 그은 많은 이름중 우물에서 나온 게르트 대장이 가장 잘 어울린다. 

그는 최초의 전쟁과 패배이후 여러번 패하고, 그때마다 변화하면서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이 새로운 신분의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어 살아남는다. 

그럴때마다 더 매력적인 새로운 미녀들이 그에게 애정을 보내고 그를 사랑하는 것은 뭐랄까. 덤이다. 


21세기 이탈리아 좌파의 어떤 공동체는 이제집단 창작으로 자신들의 정신적 선배이고 영혼의 뿌리인 근대의 시작 

종교개혁과 농민전쟁 그 폭발적인 사건 이후의 진보적인 실험들에 대해서 

이렇게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심지어 1000페이지가 지루하지도 않다. 

무게있는 역사드라마로 만들어져도 좋을, 잘 만들어진 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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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을 살다 - 밀양이 전하는 열다섯 편의 아리랑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6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 오월의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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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렇게 수직으로 밀양이 타오르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또 다른 고유명사가 되어가는 밀양을 지우기 위해 2013년 국가는 3,000명의 경찰 병력을 투입하여 전쟁을 선포했다. 송전탑은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삶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큰 욕심 안부리고 좋은 사람과 어울리고 사랑하고 밥을 나눠먹는게 행복이라 믿으며 살았던 게 잘못이었나.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때도 그러더니 오월의 봄은 고지식하고 우직한 느낌이고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미류는 서문부터 찬찬히 성실하다. 


좋은 사람과 어울리고 사랑하고 밥을 나눠 먹는게 행복, 맞다. 

그것이 큰 욕심이 아니라 소박한 일상이 되기위해

장애인도, 노인도, 학생도, 노동자도, 팔레스타인의 인민들에게도 

먼 미래의 어떤날 말고, 오늘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는 우리 모두 행복하기를 



2. 

할머니, 할아버지들 

욕심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것이 재미였던 노인들이 유서써서 들고다니며 하루같이 10년째 싸우고 있다.

어쩌면 좋으냐.

그렇게 열심히 애타게 기를 쓰고 싸웠는데

자식같은 가시나, 머스메들, 경찰, 용역깡패와 맞서 그렇게 열심히 싸웠는데

그래도 철탑은 들어서고 마을은 송전탑의 전기땜에 돼지도 농사도 안되고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고, 잘싸웠다고, 힘없어 마침내 모든 송전탑이 들어서더라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해 싸울거라고 

어르신들의 지혜와 삶이 구구절절 기가막히다. 


왜 주민의 뜻을 안받아들이고, 또 여러가지 대안이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예 묵살하고 들어와서 공사를 시작하고,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완전히 한전편만 들고 경찰력을 동원해서 한전을 비호하니까 공사 시작부터 우리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거예요......아무리 우리가 경찰을 흩어보고자 하지만 할머니들은 몇걸음 걸어봤자 얼마 안 가잖아예. 금방고착 당하고, 고착 안당한 할머니는 사지를 들어서 그냥 집어 던져요. 사람을 손을 딱 잡는 순간 손목을 비틀어버리고, 베라 벨 방법을 다 쓰더라고예. 막 멍멍해요. 바보같애 우리도. 당하고도 꿈인거 같기도 하고. 경찰이 이런일도 다 하는가 싶고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거치고 IMF와 이제 나이들어 욕심없이 사는것만 남았는데 국가와의 싸움이라니. 

참,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어쩜 이렇게 제 국민에게 심술맞고 파렴치하냐. 


몇만평의 땅에 보상금 160만원, 200만원. 장난하냐.

한전이 노인들을 상대로 날강도 도적질을 하는데 경찰이 한전편만 든다.

한전이 현대, 삼성, 국회위원, 판사, 언론 느그들 상대로 하루아침에 수억짜리 집을 200만원 줄테니 비워달래도 가만있을래. 

억울해서 싸우는 노인들에게 빨갱이 몰이를 하는건 또 뭐고. 얼척이 없다. 


열일곱 사람 

김말해, 김사례, 조계순, 이사라, 희경, 곽정섭, 이종숙, 권영길, 박순연, 구미현, 김영자, 안영수, 천춘정, 박은숙, 강귀영, 성흔희, 김옥희 의 이야기를 들으면 밀양이 아니라, 21세기 한국사회가 보인다. 

평범하게 살다가 어느날 국가폭력 앞에 내던져저 막 멍멍하고 스스로 바보같은 우리가 

얼머나 순하고 착하고 현명하며 또한 강한지 

낙관적인 삶에 대한 직관이 예리하고 곧을 뿐아니라, 정식하게 순리대로 사는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억울하게 부당한일을 함께 당해 함께 저항하는 할머니들의 주름진 웃음이 시원하다. 


슬프기도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가 

부지런한 농사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니까 데모도 참 부지런히 하시네, 생각하다 웃었다. 

데모라는것이 젊은이보다 노인이 하니 더 잘한다는 생각이 들어, 웃었다.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 하니까 잘하는 게지. 모든 데모와 모든 일이 그런것 처럼. 



3. 

태어날때부터 전문시위꾼이 따로 있는것이 아니다. 

입장과 처지가 다르고 성격과 생긴것이 달라도, 어디서 살건 양심껏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면 

우리모두 이렇게 되는거구나. 

어느날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집을 내놔라, 땅을 내놔라 해도 내놓아야 빨갱이 소리를 안듣는거다.

그렇지 않고 억울해 싸우면 오만한 국가권력이 폭력을 휘두른다. 

평택이 그랬고, 용산이 그랬고, 쌍차가 그랬고, 밀양에서 그랬고, 

지금 광화문에서는 세월호 학살당한 아이들의 유가족에게 또 그렇다. 

심지어 이제 자식의 목숨까지 자본의 이윤에 눈먼 국가에 제물로 바치길 바란다. 


참담한 세월을 그러나 함께 연대하는 사람들과 시원하게 웃으며 데모하자고 할머니들이 알려준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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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 인권운동가 박래군의 삶과 인권 이야기
박래군 지음 / 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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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년대 살벌한 군사독재 시절 

대학교안에 경찰이고 정보과 형사고 맨날맨날 진을 치고 감시하던 시절 

시위를 시작하면 5분안에 연행되던 시절 

광주에서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절 


그 시절 학생운동이 어땠는지 회상되는 장면을 가끔 보는대 

의외로 젊어 찬란하게 혁명의 꿈에 몰입했던 시절에 대해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회상하는 장면을 보기는 어렵다. 


매일매일을 열정적으로 살았다. 그때만큼 공부에 미쳐본 적도 없었고, 그때만큼 온몸을 바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적도 없었다.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고, 혁명을 위해서라면 이 한몸 부서진다고 해도 아까울게 없겠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박래군과 함께 가장 열정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중

많은 사람은 세월따라 마음이 변하여 권력을 찾아 떠나고 

계산빠른 자들은 금뺏지를 달거나 그 언저리에서 민주투사의 명함을 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이 푹들어 일상에 갇혀  

젊어 한때 낭만적인 치기거나 무모함이거나 더나아가 어리석음으로 간주하며

그리하여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 철없는 자들을 기죽일때만

나도 과거에 다 해봤다고, 니가 뭘 아냐고, 너도 나이들어 보라고

냉철한 현실주의 탈을 쓴 비겁한 보수주의자들과는 술먹기도 싫더라.  

차라리 말을 말지. 뭐가 현실이고, 뭐가 냉철이고, 뭐가 낭만이란 말인가.

스스로 빛나던 젊은시절을 부정하며 획득한 현실에 일말의 편암함이 있다면 만족하고 살으시라. 

여전히 혁명을 꿈 꾸며 사는 사람들을 폄하하며 후려치지는 말아야, 염치라도 있다 할것이다.  

그리하여 온전하게 회상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회상은 일그러지고 비틀어지거나 혹은 자폐거나 가끔 정신분열도 보이는데 


그때의 열정으로 아직도 우직하게 한생을 살아 이제 그맘때의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가 되어서도 아직 운동을 하고 있는 

박래군의 회고는 정당하고 아름답다.

솔직하고 편안한 말투 때문에 더욱 빛이난다. 

스스로 못생겼다, 어눌하다, 늦다는 표현을 쓴다. 

그의 회상으로 인해 어두운 시대가 처음으로 화사해 보인다. 


경찰의 방어선을 뚫고 화염병을 옮길 방법으로 

고물장수 흉내내서 리어커끌고 그안에 화염병을 숨겨 나르겠다는 발상을 할때부터 실행할때까지 

비장하지만 낙관적이고 패기있는 그와 그의 동지들, 의 어깨와 눈빛, 장난기섞인 말투와 몸짓이 모두 보이는것 같아. 

요 장면은 영화로 함 만들어보고 싶네. ^^



2.

나의 인권운동은 이렇게 국가가 저질러놓은 잔인하고 끔찍한 범죄와의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국민을 고문하는 국가, 국민을 죽이는 국가 그러고도 은페하고, 조작하고, 진실을 밝히거나 책임자를 처벌하는 일을 회피하는 국가. 그런데 그런 국가는 양태만 바뀌었지 인권운동을 20년 넘게 해온 지금에도 본질은 변하지 않고 있다.  


동생의 죽음으로 방황하던 박래군은 유가협에 드나들다

국가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혹은 의문사한 유가족들의 투쟁을 함께하며 인권운동을 시작한다.

운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슬프다.

죽음으로 인해 남겨진 가족들의 싸움을 역시 유가족인 박래군이 남의일같지 않아 마음다해 싸웠겠지.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이렇게 많은 억울하고 슬픈 죽음을 만나며

박래군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렇게 동생은 26년전에 떠났다. 그런데 26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는 그의 죽음앞에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 동생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인권운동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아직도 멀기만 한 민중의 새 세상을 그리며 싸운다. 동생도 저 세상에서나마 발목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동토 위에서라도 꽃을 피우기 위해서 몸을 비틀며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동생은 그런 녀석이니까. 


민중의 새세상. 

형제가 바란, 동생이 목숨 바쳐서라도 이루고 싶었던, 남은 형이 지금도 꿈꾸는 민중의 새세상

그런날이 올까. 안와도 좋은걸까. 



3. 

인권운동사랑방의 정식 구성원이 되어 그가 처음 한일이

인권정보자료실을 위한 책장을 만들며 한여름 옥상에서 소금땀을 흘린 것이다.

박래군의 첫일은 의미있는 상징이다.  

그가 처음 인권운동을 시작했을때만해도 뭐든 처음이고, 뭐든 맨땅에 헤딩했다는 말이고 

그가 그때부터 한일이 대한민국의 인권정보자료실에 처음으로 쌓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2008년 감옥에서 나와 감옥인권, 수용자처우, 관련해외 사례등을 찾았을때도 거의 없었다.  

음----, 아직도 우리나라 인권운동은 초반, 불모지의 느낌이 있다.

 

미국에게 잘보이기 위해

제나라 인민들의 삶의 터전을 망가뜨리기위해 

1만명이 넘는 경찰과 군인이 작전을 하여 평생을 살아온 대추리에서 쫓아낸다. 

니네는 어느나라 정부고, 경찰이고, 군인이냐. 


철거현장에서 철거민들에게 법은 늘 주먹보다 멀리 있었다. 법은, 공권력은 용역들이 저지르는 무법천지의 폭력에 애써 눈감고는 했다. 산만한 덩치의 깡패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두들겨 패도 경찰은 침묵해따. 그것이 법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에 항의하는 철거민들만 감옥에 갔다. 

돈있는 놈들 편들어 줄려고 국가가 있다. 


철거민들이 폭력에 시달리고 일방적으로 내몰릴때 공권력은 어디에도 없었는데, 망루짓고 올라가니 테러범들이라며서 대화도 없이 잔인하게 짓밟아도 되는 것인가. 이게 국가인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어쩌면 이렇게 일관되게 국민들에게 잔인한가. 

함부로 죽이고 책임지는 놈이 하나 없고 

용산에서 철거민을 학살 한 후 벌어지는 모든 은폐와 위법적인 재판과정을 보면 

경찰, 검찰, 판사 어느 한곳 정상적인 집단 없이 뻔뻔하고 오만한대 그 핵심은 

지네가 선고하고 집행하는 법을 지네가 앞서서 안지키며 사람들을 죽인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었을 때는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헌화를 하더니만 철거민 다섯명의 죽음에 대해서는추모할 수 없었을까.

대통령은 죽어서도 대통령이라 존엄하고

철거민은 죽어서도 철거민이라 비천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계급을 넘어서게 하는것, 그것도 혁명이다. 


4. 

그의 기록에 가끔 등장하는 문정현 신부님도 이렇게 썼으면 좋겠다. 

한국사회에서 신부의 신분으로 늘 투쟁의 거리에서 앞서 살게된 까닭이 무엇인지 

하느님을 믿는것과 억압받고 소외되어 억울하게 싸우는 사람과 함께 사는것이 어떤지점에서 연결되는지 

문정현의 하느님, 그의 믿음과 영성의 대화, 고백과 회상을 읽어보고 싶다. 


마틴 루터 킹이나 간디를 읽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박래군도 읽어야 한다. 

100년도 더 전에 남의나라 불복종 저항운동에 공감한다면 

지금 이땅에서 벌어지는 저항운동 또한 애써 외면하지말고 알아야 한다. 

우리의 교양이 저항이 되고, 우리의 저항이 성찰해야 하니까 

그래야 참혹한 죽음에 직면하여 가슴을 치는 고통이라도 중단될 수 있으니까. 


박래군의 삶, 그의 기록을 읽으며 위로받는다.  

동시대를 함께 살아 고마운 사람

야만의 땅을 우직하게 약자의 편에서 싸우며 사는 정의로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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