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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Q)
루터 블리셋 지음, 이현경 옮김 / 새물결 / 2006년 4월
평점 :
1.
독특하게 씌어진 책이다.
루커 블리셋은 한 사람이 아니다.
이 이름을 함께 쓰는 예술가들과 운동가들의 열린 공동체라네. 집단적인 창작물이다.
종교개혁의 시대. 격동기 유럽. 1500년대다.
초반에는 시간과 공간을 너무 자주 왔다갔다 하니 정신없다.
특히 시간이 헷갈린다.
독일과 유럽의 역사, 특히 성서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이 없으면 더 난해해진다.
음----, 그래도 읽다보면 익숙해진다.
맥락으로 무슨말인지 알아지니까. ^^
2.
화폐주조자 뮌처. 엘리아스.
그당시 병사들에게 끌려가던 선지자, 설교자들의 슬로건은 "만물은 만인의 것이다." 였단다. 멋지다.
500년전 유럽에서.
만물은 신의것이라고 주장하며 땅과 생산물을 독점하고 심지어 인간의 영혼까지 독점했던
카톨릭 사제화 1% 귀족들에게 반대하며 모든 인간에게 만물의 소유권을 돌려주는 급진적인 슬로건이다.
맘에 들어.
교황과 황제가 세상의 권력과 부를 모두 갖고서 지들끼리 싸우면서 인민을 수탈할때
신부가 아니라도 누구든 성서를 읽고 자신의 하나님을 만날수 있다는 혁명적인 사상이
농민들의 분노의 물결을 타고
도시의 가장 비천한 자들이 시위원회에 선출되어 도시를 운영하는 실험도 하고
수많은 골목을 피로물들이고, 죽음을 당하고
그 전통이 아직 유럽에 있어서 덴마크와 이탈리아 독일 스웨덴과 영국에
아직 저 국경이 모호하고 황제의 영역과 군주의 영역의 다툼이 많던 시절부터
그 반역과 저항의 전통이 아직 그들에게 있는것 같아.
18세기 프랑스 혁명은 알고 있었지만
1500년대 루터에 의해 영감을 얻은 독일 농민들과 인민들의 전쟁이
이렇게 폭발적이고 열정적인 혁명의 기운에 의해 움직인 것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증언처럼 생생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결국은 저 기운이 18세기 프랑스의 혁명을 이끌고
인디언을 학살한후 세운 미국이라는 나라는 기획된 공화국이 되었다.
19세기 러이사의 혁명이 실패로 기억되고 중국의 혁명 또한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지만
비천한 자들이 세상을 운영하는 주인이라는 사상의 실험은 아직 중단되지 않았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사람 속에서, 직공들, 거지들과 골목의 쓰레기같은 사람들 속에서 선민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고통받았고 이세상에서 쫒겨나는 것 말고는 잃을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말입니다. 거기서 그리스도와 곧 다가올 그분의 재림을 믿는 믿음의 불꽃이 살아남을 겁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상황이 그리스도께서 선택한 삶과 아주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창녀들과 뚜쟁이들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전투를 지휘할 대장들을 모집했습니다.
빼앗긴 자가 있는 순간, 저항은 있는거다.
예수의 혁명적 사상을 아무리 주류 카톨릭이 감추고 무디게 해도
단지 성서를 스스로 읽고 해석하는 순간
성서의 혁명적 사상에, 예수의 삶에 영감을 받는 저항은 필연으로 보인다. 거참.
1534년 뮌스터에서 재세례파 사도들의 선동은 비천한 자들, 농민, 노동자, 창녀와 포주, 도주중인 추방자, 인민들에게
2014년의 사회주의 자들보다 훨씬 선명하고 혁명적으로 선동한다.
인상적이다. 길어서 모두 옮기지는 않는다.
가난하게 사는것이나 교수형당하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굴레를 벗고 운명이 우리를 위해 마지막으로 마련해놓은 것을 받아들이는게 여전히 가치 있는 일일 겁니다. 우리는 싸울겁니다. 다시, 아니 시도해보다가 죽을지도 모르겠죠.
토마스 뮌터는 인민들을 선동하고 체포되어 사형당했으나 그의 사상에 감동받은 동지들, 그의 사상에 매료된 인민들이
그 후에도 어떻게 계속 살아내는지, 가슴아픈 패매를 딛고
평등한 세상, 정의, 가난으로 인한 고통스런 삶을 떨쳐버리기위한, 폭정에 맞서는
그리하여 마침내 하느님나라, 평등하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현실에서 이루겠다는 꿈을 가진 자들의 열정과 무모함.
번번히 실패함에도 번번히 예수때부터 사형당하는대도 반복해서
이것은 마치 인간의 몸안에 디앤에이로 기억되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은 아름답다.
카를이 자기발에 너무 큰 신발을 벗더니 진눈깨비가 내리는 길 위에 맨발로 선다. 그리고는 토끼처럼 야영지를 가로질러 간다.
카를은 인민군의 연락병이다.
지휘자들 옆에 바짝 붙어있는 십대아이.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본 적 없는, 진눈깨비가 내리는 길위에 맨발로 서서
교황과 귀족, 부르주아의 탐욕과 폭정에 맞서 사람처럼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살수 있어서
심장이 타오른다.
3.
이런 식으로 하루 먹을거리를 얻는 것은 정말 힘들고도 슬프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노동에 대해 극히 위선적인 거직말들을 꾸며냈다. 혐오스러운 또다른 우상숭배. 자기를 두들겨 패는 몽둥이를 핥는 개. 바로 그게 노동이다.
계급사회에서 노동은 정말 그러하다.
계급사회가 아니었던 적이 없으니, 노동은 수천년동안 결코 신성한 적이 없었다. 늘 대를 물리는 고통스런 천형이었지.
이제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으니 여러분은 혼자 힘으로 성경을 읽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더이상 박사들의 도음은 필요치 않습니다.
이것은 심장뛰는 혁명적 발상이다. 하느님이 나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사제를 거치지 않고, 내가, 성서를 읽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 내가.
눈과 진흙 속으로 발목까지 푹푹 빠진다. 뼛속까지 시리다. 캘라리우스는 슈튀브너가 통상 클라우스 샤흐트 맥주집에 죽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인 이사야에게는 안성맞춤인 신전이다. 음식 냄새와 맥주 냄새 짙게 밴 수증가가 그 신전의 방향이고, 한없이 늘어지는 노랫가락과 손님들의 욕설이 시편이다.
신전과 시편에 대한 이런 비유는 참 좋다.
애초에 하느님은 불경하고 힘없는 노예들의 신이었거든.
어제 레데커는 시청광장에서 시민들에게 열변을 토했다. 그 결과 그들가운데 스물 네명이 위원회에 선출되었다. 대장장이, 직조공, 목수노동자, 심지어 제빵사와 구두수건공도 있었다. 이런 밑바닥 인생들에게 이 세계의 운명이 맡겨질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해본적이 없었다.
1534년 뮌스터에서는 이미 밑바닥인생들이 시의 위원이 된다.
우리는 2014년에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정치다.
4.
바티칸 핵심 인사인 카라파의 눈이 Q다.
카라파의 쁘락찌
Q의 눈은 그런데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다.
카라파에게 보내는 그의 보고서는 탁월한 정세분석이다.
특히 루터가 그의 성서로 인해 자극받은 그를 따르던 개혁가들을 어떻게 배신하고, 교황의 품에 안기는지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재밌어.
읽으며 내내 이 Q가 누군지 궁금했다. ^^
루터가 활짝 열어놓은 대문으로 민중, 농부들과 시민들은 루터보다 훨씬 급진적인 요구를 하며 싸운다.
루터는 스스로 자기연 대문을 닫았으나
그문은 이미 그의 힘으로 닫을수 있는 수준의 대문이 아니었다.
그 문으로 근대의 사상과 인간을 존중하는 벼락같은 사상이 열렸다.
Q의 맞은편에서 저항의 역사를 증언하는 그은 많은 이름중 우물에서 나온 게르트 대장이 가장 잘 어울린다.
그는 최초의 전쟁과 패배이후 여러번 패하고, 그때마다 변화하면서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이 새로운 신분의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어 살아남는다.
그럴때마다 더 매력적인 새로운 미녀들이 그에게 애정을 보내고 그를 사랑하는 것은 뭐랄까. 덤이다.
21세기 이탈리아 좌파의 어떤 공동체는 이제집단 창작으로 자신들의 정신적 선배이고 영혼의 뿌리인 근대의 시작
종교개혁과 농민전쟁 그 폭발적인 사건 이후의 진보적인 실험들에 대해서
이렇게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심지어 1000페이지가 지루하지도 않다.
무게있는 역사드라마로 만들어져도 좋을, 잘 만들어진 대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