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만의 수사반장
고상만 지음 / 삼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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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하고 가장 집요한 폭력을 계획적으로 국가가 저지른다. 

읽기가 쉽지 않다.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 분노와 억울함이 너무 많다. 

작정하고 덤비는 국가의 폭력을 한 개인이 어떻게 당해낼 건가. 


1972년 춘천경찰서 김상범, 이준상, 진현천, 강원도경 수사과 황춘근등이 사건을 날조하고 조작한다. 

그들에게 고문당한 정원섭은 그들이 써주는 각본대로 자백해서 하루아침에 살인범이되어 15년 3개월을 감옥에서 살았다. 

영화가 아니다. 

살인사건 발생후 김현옥 내무부장관이 10일안에 사건을 해결하라고 지침을 내렸기때문이다. 


1982년 문영수는 묵고있던 여인숙에서 옆방 사람과 이야기도중 싸움에 휘말려 연행되었다가 경찰에 폭행당해 죽는다. 

그를 폭행해 죽인 최순경은 공문서에 문영수를 노숙자라고 쓰고 다음날 병원 해부학 실습실로 보내버린다. 


1986년 신호수는 서울서부경찰서 대공과소속 경찰들이 9개월전부터 준배해서 조작한 '장흥공작'의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차모 경찰의 고문으로 죽는다. 

경찰은 그가 대미산 동굴에서 목메어 자살했다고 발표한다. 

미친것들이다. 


잔인한 독재는 사람의 영혼을 파괴한다. 

그런데 그런 독재는 박정희 한사람이 한것이 아니다. 

김현옥 내무부장관의 열흘안에 살인사건을 해결하라는 지시, 이런 황당한 지시에 호응하여 

춘천경찰서의 김상범, 이준상, 진현천 강원도경의 황춘근 이자들이 아무나 잡아와서 고문해서 자백을 받고 

살인범을 만들었다. 

이게 사람이 할수 있는 짓이냐. 


문현수사건에서의 최순경과 그의 동료들, 신호수 사건에서 차모 경찰 이런 작자들이 전국에 다 있었다는 얘기다. 

사실상 경찰이 전부 그랬다고 나는 이해된다. 

저런 미친것들을 보면서 경찰로 밥먹고 살았으면 그자도 정상은 아니다. 

1972년, 1982년, 1986년 모두 군사독재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다른가. 

 

책을 보면 2000년에도, 2005년에도 경찰과 검찰, 법원은 여전이 사건을 조작하고 엉뚱한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손에 들고 책을 읽기 쉽지 않지만, 한번 들면 놓기도 쉽지 않다. 


저자 고상만은 더디게라도 정의는 온다 하지만, 하. 

억울한 옥살이 15년이라는 말은 정의가 와도 아주 늦게 온다는 말이고, 늦게 오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사건을 조작해 누명을 씌우고, 사람을 억울하게 죽이고, 밝혀져도 사과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국가는 손해배상하지 않는다.

그 과정이 낱낱이 서술되어 있다.  

뭐가 정의냐. 

밝혀져도 여전히 가해자들은 처벌되지 않는다. 15년 후에도, 뭐가 정의냐. 


며칠전 전서총련 간부였다는 쉰이넘은 사업가가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집으로 찾아온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에 연행되었다는 글을 보았다. 

과거에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를 받았거나 그 법으로 징역을 살았던 사람들이 청와대로도 가고 국회의원도 되는 시대에 

여전히 그 법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촛불밝혀 박근혜를 끌어내리고 대통령을 문재인으로 바꾸었으나, 국가보안법 그거하나 폐기하지 못하니 

과거의 군사독재에 있었던 국가폭력이 이제 없다고 장담할수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국가의 보안이 시민의 인권보다 중요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정의가 아직 오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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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미술관을 걷다 - 13개 도시 31개 미술관
이현애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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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그로피우스를 제외하면, 이 책에서 주목한 예술가들은 나치에게 이른바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힌 이들이다. 나치는 요시찰 인물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렸으나, 하나의 이름표로 싸잡이 부르기에 그들의 삶과 예술은 구름처럼 다양했다. 그 각양각색을 보여주는 데 이 책의 목적이 있다. 


독일 미술가를 처음 만나며 나치에게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힌 이들을 보는 것은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첫번째 소개되는 화가는 여자는 아직 미술학교에도 갈수없던 시절의 자의식 강한 파울라 

파울라는 다작을 남겼지만, 생전에 고작 석점을 팔았다. 구매자는 전부 친구나 지인이었다. 그중에는 이러한 말을 남긴 릴케가 있었다. "모든 예술작품과 더불어 새로운 것이 나온다. 세상에 한 가지가 더 나온다." 

파울라 편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페이지를 넘기면 두번째 소개되는 조각가 렘브루크 편의 제목이 보인다. 


정확한 자세로 좌절하기 

이현애의 책을 처음 읽는데, 인문학척 기본소양이 탄탄해 보이는 문장이다. 신뢰가 생긴다. 

1차세계대전 당시 그는 감독관이 제안한 것처럼 전투를 마친 군인이 비장한 자세로 칼집에 칼을 집어넣는 형상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전몰장병 묘지가 애국심과 영웅의식을 고취해야 한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1916년 그는 <목락한 사람>을 제작한다. 

그는 무릎과 팔이 꺽이고 고개를 땅에 처박고 넘어져 있다. 

상승과 몰락 사이에서 정확하게 좌절하기 

그리고 독일 언론은 혹평한다. 


뜨거운 열정과 병적인 몰입은 구분이 힘들다. 그는 손이 잘려서 그림을 그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환각에 빠졌으며, 군인들이 스위스 산골 마을까지 쫓아와 자기를 잡아갈 거라는 망상에 시달렸다. 그는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과 함병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화창한 6월 어느날 들판으로 달려나가 가슴에 총을 겨누었다. 향년 58세였다. 

키르히너의 청년시절 공동체 다리파는 1906년 첫 단독 전시를 드레스덴의 전기램프 공장을 빌려 열며 

지역 신문에 프로그램을 발표한다. 

우리는 창작하고 향유하는 신세대가 발전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모든 청년을 부른다. 우리는 미래를 짊어질 청년으로서, 안락함을 추구하는 앍은 힘들에 대항하여, 가난과 삶의 자유를 얻고자 한다. 창작의 욕구를 격정적이고 거짓없이 표현하는 자라면 누구나 우리 편이다. 

패기있는 선언이다. 이 소박한 모임은 그러나 다리파 이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작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모더존-베커와 콜비츠에서 여성의 시각으로 마땅한 해석을 해주어 편안하다. 

여성, 노동자를 주로 배제하는 남성들의 책에서 좀처럼 얻기 힘든 편안함이다. 

콜비츠이전에 누가 이토록 세심하게 여성노동자가 처한 현실에 형태를 부여했던가? 노동하는 남성은 콜비츠이전에 다수 그려졌지만 노동한느 여성은 타자 중의 타자였다. 


그는 하고 싶은데로 했고, 되고 싶은 대로 되었으며, 하고싶은 것과 되고싶은 것을 일치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삶은 저절로 오지 않았다. 가족과 국가는 한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함부로 펼칠까봐 온갖 저항을 아끼지 않는다. 에른스트는 이와 같은 저항을 반기듯 즐기며 마찰을 일으켰으니, 그에게 마찰은 예술이요, 예술은 마찰이었다. 


그렇다면 다다는 뭇엇을 했을까? 다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했다. 규율, 관행, 도덕, 질서, 합리가 시키는 것이라면 아무것도. 다다이스트들은 시인과 미치광이가 되어서 떠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했다. 그들은 카페나 주점에 모여서 떠들었을 뿐이다. 그들은 전쟁과 군대와 경찰을 저주했고, 작시법에 해방된 시를 주절 댔고, 이것도 예술가인가 싶은 음악과 그림을 지어냈다. 그것이 다다.

몇명 안되는 청년들이 전쟁을 경험한 후 카페나 주점에서 떠들었을 뿐인데, 백년이상 화자되는 이야기가 되었다. 

전후 시대정신을 외쳤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그런것이다.  


나찌시대에 퇴폐미술로 찍혀 탄압받았던 미술가들이 

전후 <카셀 도쿠멘타> 전시를 통해 나찌를 반성하며 부활하지만 

건강과 퇴폐의 이분법이 냉전시대에 추상과 구상의 이분법으로 바뀌엇을 뿐 

이를테면 추상표현주의는 반공 및 자유이데올로기를, 리얼리즘은 전체주의와 계획경제를 옹호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뭘 반성한거니. 


1966년 [뉴욕 타임스]지가 마침내 미 중앙정보국이 벌인 첩보 활동을 폭로했다. 이로써 자유주의 진영의 자유 이데올로기가 '선전선동을 위한 엔진' 이었음이 만천하에 그러났다. 추상 미술이 보편적인 예술언어이며, 정치에 관해서 침묵한다는 믿음은 주입된 이데올로기에 불과햇다. 

마치 사회주의 국가의 미술과문학만 선전선동의 도구였던 것처럼 주장하는 저 이데올로기는 지금도 횡횡한다. 

순수문학은 정치에 침묵 한다는 주입된 믿음 말이다. 

최근에는 좀 바뀌는 것 같아 다행이다. 

광화문에서 우리가 든 촛불이 혁명이었다면, 이제 시작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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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아저씨의 오두막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3
해리엣 비처 스토 지음, 이종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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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두 흑인은 농장의 주요 일꾼으로 십장을 겸하고 있었다. 리그리는 자신의 불도그들처럼 이들에게 야만스러움과 잔혹함을 체계적으로 훈련시켰다. 비정함과 잔인함을 긴 세월동안 훈련받은 탓에, 이 둘의 본성은 불도그의 그것과 비슷하게 되었다. 흔히 흑인 노예감독이 백인보다 더 악랄하고 잔인하다고들 한다...... 

리그리는 우리가 역사책에서 만나는 몇몇 군주들처럼 자신의 농장을  무력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상보와 큄보는 서로 진심으로 미워했고, 농장의 노예들은 하나같이 그 둘을 진심으로 증오했다. 리그리는 삼보와 큄보, 농장 노예라는 세 그룹을 서로 반목하게 만들어, 세 그룹중 아무에게서나 농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전에 정보를 캐냈다. 

통제국가의 기본이고 식민통치의 기본이다. 분할과 감시를 통한 통제. 

단결과 연대가 불가능해서 딱한사람 리그리 말고는 모두가 불행한 게임이 법칙. 


어릴때 어린이 판으로 봤을때 보다 흥미롭고 재밌다. 

특히 엘리자가 얼음이 깨지는 강을 건너고, 그녀의 남편이 재치있는 대담함으로 탈출하는 장면들 덕에 1편은 금방 읽는다. 

노예로 살 수 없는 사람의 절실한 마음이 어떻게 용기를 내고, 어떤 도움을 받는지 소박한 말투의 편안함도 장점 


2편도 나쁘지 않지만 1편보다는 지루하다. 

해리엇이 노예 해방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기독교적 사랑이고, 하나는 모성이다. 

그래서 에바는 예수이고 톰은 순교자다. 

에바에 대한 장황한 서술은 그래서 너무 길다. 순교자스럽게 모든 것을 인내하며 받아들이는 톰도 답답하지. 

현실에서 없는 사람들을 예로 들며 노예를 해방하자니 아무리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도 말이 안된다. 


그래서 실질적인 근거는 엄마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다른 곳으로 팔아버리는 것은 안된다는 주장이다.

보편적인 인권개념으로 납득하기 쉬운 주장이다.  


그리하여 노예를 해방하면 해방된 노예들은 왔던 곳, 아프리카로 돌아가면 된다고 그녀는 말한다.  

작품 속 캐나다로 도망가는 것에 성공한 노예는 아프리카의 인민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러 떠난다. 

무슨말인지는 알겠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참 순진한 동화다. 

이 순진한 동화의 곳곳에 가부장제의 시스템은 완고하게 작동한다. 

 

대중의 수준에 눈높이를 맞춘 덕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노예제를 시대의 화두로 만든 공로가 있다고 하네. 

어릴적에 본 어린이판보다는 훨씬 좋다. 



3. 

"도대체 어떻게 그 둘이 비교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오필리어가 말했다. "영국 노동자들은 팔리거나 교환되거나 가족과 떨어져야 한다거나 매질을 당하지 않는데."

"마치 고용주에게 필린 것처럼 고용주의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노예이 주인은 말 안듣는 노예를 죽도록 매질 할 수 있습니다. 자본가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동자들을 해고하여 굶어 죽게 할 수 있죠. 가족의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어떤게 더 나쁜 건지 모르겠네요.아이가 다른데로 팔려가는 것과 아이가 집에 있으면서 굶어 죽는 것이."

턱없이 순진한 주장을 하는듯이 보이지만, 이런 대목은 해리엇 비처 스토의 직관을 잘 보여준다. 

그녀가 바보라서 순진하거나 바보라서 가부장제에 순종하며 살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최저임금을 임기중에 1만원까지 올려준다고 공약하고 당선된 민주당 문재인 대통령이 

노동자들에게 1년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최저임금에 상여금,각종수당 산입하는 법이 국회에서 논의중이다. 이대로가면 28일 통과될 모양이다. 

앞으로 최저임금 올라고 뒤로 깎아버린다. 황당하다.  

박근혜 보다 쫌 낫다고 노동자편은 아니고, 박근혜보다 쫌 나은것이 자랑은 아니지. 

아이가 집에서 굶어 죽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스토의 고찰을 

1억4천만원의 연봉에 각종 수당 겁나 많은 국회의원들과 대통령에게 알려주고 싶네. 

양심이 쫌 있으라고. 애들이 집에서 굶어 죽는다고. 


그래서 여전히 순진한 톰아저씨의 오두막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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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문제 - 교양 있는 남자들의 우아한 여성 혐오의 역사
재키 플레밍 지음, 노지양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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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의 역사는 남성의 역사다. 아, 그런데 동시에 여성혐오의 역사구나!


계몽주의 시대의 산만한 천재이자 선천적 노출증 환자였던 장 자크 루소는 소녀들의 기를 어린 나이에 꺾어 놓아야만 남자를 기쁘게 해주기 위한 자신의 본분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고 했다네. 그는 자신의 자녀들을 일찌감치 고아원으로 보내버렸는데, 이 역시 어릴때 기를 꺽어놓기 위해서였지. 

깜짝 놀랐다. 

루소는 인간혁명의 사상이 녹아있다는 그 유명한 교육서 에밀을 쓴 사람이다. 

인권에 관한 고전으로 꼽히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도 그렇고. 

안 읽기로 했다. 소녀들의 기를 꺾어 놓아야 한다는 주장보다, 자기 자식들을 고아원에 보내버렸다는 사실이 더 용서가 안된다. 

인간혁명이고 인권이고 개뿔이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과 제인 오스틴 사이에 약 700년동안 글쓰는 여자들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는데, 글 쓰기에는 사색이 필요하고 사색은 육아에 방해만 될 뿐이기 때문이었다더군. 


영국의 비평가 존 리스킨이 말하길, "여자의 지성은 발명이나 창조를 위한 것이 아니다...여성들의 진정한 재능은 칭찬하는데 있다."


하지만 여자들은 여자 피카소까지는 배출해내지 못했는데, 피카소의 뮤즈들이 얼마나 많이 자살했는지를 고려하면 차라리 다행한 일이지. 

피카소가 말하길, 여자들은 고통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하고 했네. 자수를 두거나 박수를 치던 존재에서 고통받는 존재로 변한게 어딘가 싶지만...

여성 혐오의 역사에 남을 주옥같은 말들이, 단순한 검은 펜선의 그림과 함께 짧고 위트를 담아 간단하게 적혀있다. 


1840년에 열린 세계 노예제 폐지 대회에서는 약 4,800티로미터를 여행해 온 여성 대표들의 참석 허용 여부를 놓고 옥신각신 하느라 대회 첫 날의 반이 지나갔다네. 결국 여성 대표 입장은 허용되지 않았고 그녀들은 커튼 뒤에 관중처럼 앉아 있어야만 했다는군. 

한심한 것들. 여성들의 지위가 노예와 같으니 그 폐지를 위한 대회에 노예의 참석을 불허하는구나. 

이 사건은 곧 1세대 페미니즘 운동으로 이어졌고 여성으로서는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길수 없었던 지난 2,000년의 역사가 이렇게 종식되었지. 

그러게. 노예제 폐지를 위해 달려온 여성 대표들이 대회에 참석을 거부당하고 커튼뒤에 앉아 무슨 생각을 했겠어. 

아! 내가 노예구나. 각성한 후 폐미니즘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거지. 

문장은 짧지만 행간을 읽는 재미가 있다. 


쇼펜하우어가 간결하게 정리해 주었어. 여자는 '몸만 큰 아이'로 어린아이와 남자의 중간쯤 되는 존재라고. 여기서 남자란 진짜 인간, '인류'를 뜻하지. 


그러나, 잘난 남자들이 뭐라고 떠들든지 

마리 퀴리는 자신의 결혼식에서 진한 남색 웨딩드레스를 입었다는군. 나중에 연구실에서도 입을수 있도록 말이지. 

자긍심 높은 여성들의 발걸음은 혐오의 역사를 뚫고, 간다. 의연하게. 마리 퀴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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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보급판, 반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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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 할 수 있다. 

빅터는 아우슈비츠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람이 적응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예를 든다. 

이를 닦을 수 없었지만 잇몸은 오히려 그 어느때보다 건강했다고. 

그런데 인간이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고통에 둔감해지고, 예의를 차리기 어려운 상태로 스스로 내가 인간인가 싶은 환경이라면 

적응하지 못하여 차라리 살수 없어진다면 좋겠어. 

비인간적인 환경을 살아내야 하고 그 증언을 그러나, 고통스러워도 들어야 하는것이 멀미난다. 


어느날 아침에는 평소 꽤 용감하고 의연한 것으로 알려진 한 친구가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것을 보았다. 신발이 그가 신기에는 너무 작아 할 수 없이 맨발로 눈 위를 걸어 작업장까지 가야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료가 슬퍼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다른 신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작은 빵 조작을 꺼내서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을 가두고 학살하는 것을 고발하는 아우슈비츠가 아니라 

하루하루 죽지 않고 살기위해 버텨내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모른 척 하고 사는 것은 오히려 잔인하기 때문에 빅터의 고백과 의견을 읽는다.

피해자가 증언하는 성찰의 아우슈비츠다.   


생존의 위협을 겪으며 억울함과 분노로 넘치면, 고상하고 우아하게 살기 어려워진다. 

만약 강제수용소에 있는 사람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이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면, 그는 자기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생각, 마음을 지니고 내적인 자유와 인격적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는 생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거대한 군중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한다. 존재가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이나 의지가 없는 양떼처럼 무리지어 -때로는 여기에 있다가 그 다음에는 저기로, 때로는 함께 몰려다니다가 때로는 서로 떨어져 다니는- 다니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글자 그대로 군중 속에 자기 자신을 파묻으려고 애를 썼다. 

사람들은 양떼이고, 카포들은 좀비다. 

영혼을 온전히 지키며 살 수 없으니 영혼을 묻어 둔다. 

어쩌면 대한민국 사회는 그 자체로 거대한 수용소인가. 

최근의 미투운동은 더이상 거대하 수용소에서 영혼을 묻어둔체 양떼속에 숨에 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나도 사람이라고 내적인 자유와 인격적 가치,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소리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번은 부종 때문에 고생하던 동료에게 어떻게 나았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실컷 울어서 내 조직 밖으로 몰아냈지."

한동안 이 문장을 바라 보았다. 


인간의 정신상태 - 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 와 육체의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러운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맞다. 인간은 정말 놀라워.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고,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진다. 

그래서마음이 아플때는 몸을 움직이고 단정히 하면 마음의 고통이 덜해지기도 하더라. 

몸이 아플때는 마음을 의연하게 먹어야 하기도 하지.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빅터는 그래서 거기가 수용소든 아니든 자유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며 살고 있는지 묻고 있다.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데 성공해야 한다.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을 선택할 만한 가치와 희망이 내 삶에 있는지 답해야 하는거다. 

오늘을 사는 나의 희망은 뭘까. 

나는 왜 자꾸 한국사회가 수용소처럼 느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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