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조 사코 지음, 정수란 옮김 / 글논그림밭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1.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을 읽었던 때가 아마도 2002년이었던가. 

한민족 5천년의 역사가 자랑스럽게 되새김질되는 섬나라에서 태어난 나는 

계급모순 외에 민족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대 

민족문제가 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모순중 하나라는 걸 

그 고통을 냉정한 그림으로 담담하게 보여준 사코의 치밀한 시각에 감탄했었지. 

그가 다시 팔레스타인을 보여준다. 

기대하며 읽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다음 비극이 터지기 전에 이전의 사건을 소화하는 일조차 사치인것 같다. 내가 가자에 있을때, 거기 젊은 사람들은 1956년 조사를 종종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공격당하고 집이 부서지는 마당에 역사를 다루는게 무슨 쓸모냐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의 의견이 어떤 고통에 근거한 것인지 알고 있다. 

스스로 죽어가는 노동자들, 죽임을 당하는 장애인들 

심지어 2014년 한국은 세월호침몰이라는 죽음의 늪을 아직 소화하지 못한채 반복해서 다음 비극이 터지고 있다. 

그러나 비극들은 늘 연결되어 있다. 

소화할 틈없이 벌어지는 비극의 근원을 알기위해, 역사를 알고 기록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직 비극이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노근리 사람들이 기억나는 학살의 현장이다. 

한국에서 미군에 의한 학살은 적어도 53년에 끝났는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는 그때부터 아직도 진행중이다. 멀미나. 


구체적인 사람들의 개성이 다 보이는 그림의 인터뷰 

당시 몇살이었고, 학살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남았고, 가족들 중 누가 죽었는지 

유엔 공식보고서에 275명이 죽었다고 기록된 1956년 11월 3일 칸 유니스 사건을 통해

단한번의 칸 유니스가 아니라 2014년 오늘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인민들에 대한 공격과 학살의 실체, 방식 

사람들을 죽이는것에 의연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여준다. 

어덯게 100년 가까이 반복해서 저러고 일방적으로 죽이도록, 방치하니.  

미국이고 영국이고 프랑스고 모두 저 학살의 배후이고 조력자 일뿐.  

뭐가 문명이고 선진국이고 합리적이냐고. 


영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지 이전인 19세기 말경 팔레스타인 주민중 유대인은 고작 3%였고, 기독교인이 9%, 무슬림이 88%였다. 

어떻게 이런일이 벌어질까. 

어느날 우리집에 웬놈이 총들고 와서 2천년전에 조상이 살던 땅이라고 내놓으라고 하면 얼마나 황당할까. 


가자지구가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 

학살과 격리의 역사 

나찌에 학살당했던 유대인들은 불과 10년이 지나기 전에 제손에 나찌와 똑같은 학살의 피를 묻힌다. 


1948년 이스라엘군에 쫒겨 불모의 사막 가자로 도망온 사람들 

집도 절도 없고 당연히 상하수도 시설도 없고 

땅에서 먹고자고 2Km를 걸어서 물한동이 길어오고 똥오줌은 땅에 묻었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노인이 되어 늙어 죽을 동안 잔인한 이스라엘의 폭력은 계속되고 있다. 


이들에 대해 1949년 이스라엘 외무부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전망한다. 

"자연선택 과정에서 생존한, 적응력이 뛰어난 난민들은 잘해 나갈 것이고 나머지는 도태될 것이다. 일부는 사망하고 대다수는 인간쓰레기와 사회 부적응자가 되거나 아랍 국가의 극빈곤층에 편입될 것이다."


참 모욕적인 보고서다. 

사람이 살수없는 모레 땅에 사람들을 가두고 사망과 인간쓰레기와 사회부적응, 극빈곤층을 전망하다니.  

이스라엘 정부의 저 문장은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며 절대 학살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청소'라고 표현했던 철학과 닮았다. 

우생학에 대한 천박한 신봉도 나치와 닮았고  

'자연선택 과정' 이라니. 무엇이 자연의 선택인가. 지금이 신석기 시대인가. 

저 과정은 자연선택의 과정이 아니라 이스라엘 정부가 의도한 과정이다. 

이스라엘 정부가 군인들의 총칼을 앞세워 사람들을 모레사막에 가두고 죽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걸 자연선택 과정이라고 표현하는 저 악마스러움이라니. 

나찌와 닮은 유대인들이다. 저주 받으라. 


난민은 땅도 없고 가난하고 배고프다. 빈약한 원조에 의존한다. 남자들은 일이 없어 하릴없이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떠나온 땅에선 열매가 익는다. 두고 온 창고엔 석규와 밀가루가 있었다. 모든게 몇시간 걸리면 닿을 거리에 있어 애간장이 녹는다. 

하루 아침에 살던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슬픔  



2. 

가자지구에서 엘아들하 축제는 황소를 죽여서 나누어먹는 축제다. 

가난한 사람들이 축제를 빌미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 황소를 사서 길거리에서 죽이고 나누어 먹는다. 

집집마다 고기를 나눌 뿐 아니라 

3등분해서 한덩이는 가족, 한덩이는 친한 친척과 친구들, 그리고 한덩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 

황소를 잡아 골목에 흥건한 핏물은 장대비가 씻어낸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폭력은 저 축제와 닮았다. 

소를 거리에서 저런 방식으로 죽이고 나누고, 그리고 그 핏물에 아이들이 노는것은 내 감성에는 잔인해 보인다. 

이스라엘은 저 잔인한 방식으로 거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을 죽여 지들끼리 나누니, 더욱 잔인하다. 

조 사코의 편집과 은유는 냉정하고 날카롭다. 

그것이 이 책의 최고 장점이다. 


몇달동안 그를 네번 찾아갔는데 1948년부터 1967년까지 일을 다 얘기해서 나는 지쳐빠졌다. 그는 모든 걸 알려주려 했지만, 난 속속들이 알고 싶지 않았다. 

이런식의 솔직함도 조 사코의 미덕이다. 

20년동안 벌어진 모든일 그 억울함과 분노를 늙은 페다이는 미국인 젊은 인터뷰어에게 속속들이 말하고 싶어하지만 

미국인 인터뷰어는 그 모든것을 듣는 것 만으로도 지쳐 빠져서 속속들이 알고싶지 않다. 

맞다. 반복되는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의 증언을 속속들이 듣는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코는 독자들에게 자기가 인터뷰 할때부터 이미 고통스러웠다고 

이 이야기는 듣기가 매우 지치고 힘든이야기라고 독자들을 격려한다. 

그러나 들어보라고. 그래도 들어보라고. 


팔레스타인의 반이스라엘 게릴라들을 페다이라고 부른다. 

페다이는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전사 라는 뜻이다. 


모두에게 신뢰받는 페다이 칼레드는 오래 살아남았고 아내와 아이들이 있지만 수배자다. 

늘 쫒겨다니고 내일은 집에 오세요? 라고 묻는 딸에게 대답하지 못한다. 알지 못하니까. 

난 죽겠지. 암살당할거야. 하지만 그때까지 너무 오래 걸려. 

가자를 벗어나 도망가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는 투사는 

죽음보다 오늘 살아야 하는 일상이 더욱 외롭고 피곤하다. 

그의 눈빛이 슬펐다.  칼레드. 


사코는 과거의 학살현장과 현재의 학살현장을 교차하며 어떤것이 '과거' 냐고 묻는다. 

모두 현재라고 말한다. 


온 세상이 우릴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집에 있다가, 집이 부서지는 봉변을 당했는데 테러리스트라니!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는 프레임의 편집은 모든 가해자들의 두번째 공격이다. 

피해자를 오히려 고립시키는 이 공격은 학살을 완전범죄로 만드는 힘이 있다. 

난데없이 집에 들어와 딸옆에 앉은 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이는 짓은, 저 딸은 평생 어떻게 살까. 



3. 

1956년 4월 30일 가자에서 침입한 자에게 죽음을 당한 키부츠의 일원 로이 로스버그를 추모하는 

이스라엘의 전쟁영웅 모셰다얀의 연설 


오늘은 살인자들을 탓하지 맙시다. 우리를 향한 그 무서운 증오를 뭐라고 비난할가요? 그들은 지금까지 8년동안 가자에서 난민캠프를 지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그들이 조상때부터 살아오던 땅과 마을을 우리 집으로 바꾸는 일도 목격했습니다. 국경을 넘어서 증오와 복수의 바닷물이 밀려옵니다. 잠잠해서 우리가 경계를 늦추면 그들은 보복할 때라 여깁니다. 우리가 총을 거두라는 사악하고 위선적인 외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우리 주변 아랍인들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증오를 바로 보는 일을 두려워 맙시다. 그게 우리 세대의 운명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택입니다. 준비하고 무장하여 강하고 맹렬하게. 그렇지 않으면 칼이 우리 손에서 떨어져 우리 삶을 동강 낼 것입니다. 


뛰어난 선동이다. 

아랍인들이 우리를 증오하는 것이 마땅하고, 적들의 증오가 타오를 짓을 우리가 하고 있으니 

더더욱 의연하게 우리를 지키자는 말이다. 즉 손에서 총을 놓지 말고, 주변을 늘 경계하며 하던짓을 계속하자는 말이다. 

학살자 집단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심지어 그것이 운명이라고. 

'우리 세대'라는 표현을 하면서 다음 세대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집단적 최면이다. 다음세대, 우리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피는 우리 손에 묻히고 증오와 정면대결하자는 말이다. 

애초에 남의 땅에 와서 총칼로 몰아내고 사는 도적떼의 오만하고 염치없는 논리다. 

이미 2014년. 충칼은 이미 다음세대, 자식과 손자에게로 물려지고 있다. 

자자손손 아랍인민을 죽이며 사는것이 유대인의 운명이냐. 

파렴치한 선동이다. 

그러고도 니네는 히틀러와 나찌를 욕하지. 


이스라엘 총리였던 메나헴 베긴, 이츠하크 샤미르. 얘네는 테러단체를 이끌며 사람들을 학살했던 깡패두목 출신이구나.

깡패집단이 그대로 이스라엘의 군인이 되고.  

근본이 다르군.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1인시위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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