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에서는 두뇌싸움의 하이라이트로 "죽은 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놀라 달아나게 하다"(死諸葛走生仲達)라는 장면을 꼽는다. 이 표현은 수백 년간 인구에 회자되며 아예 격언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별로 조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내가 더 감탄했던 장면은 가후가 조조를 따끔하게 혼내주는 부분이다. 

조조가 연주에 기반을 두고 화북을 장악하려 애쓰던 시절, 이각 곽사의 잔당이라 할 수 있는 장수(張繡)와 대결하게 되는데, 다른 쪽에서 압박이 들어오자 장수와의 싸움을 그치고 군대를 물린다. 이때 신이 난 장수가 쫓아가 공격하려 하자, 가후는 "조조는 꾀가 많은 사람입니다. 필시 준비를 해 두었을 것입니다."라며 만류했다. 말을 듣지 않고 군대를 데리고 나간 장수, 옴팡 깨져서 돌아온다. 풀이 죽어서 가후한테 미안해하는 장수... 그런데 가후는 싱긋 웃더니 다시 한번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추격해보라고 한다. 어리둥절해하지만... 뭐 어쨌건 그대로 따라 해 본다.그랬더니 역시 조조군은 대오가 흐트러져 박살나고, 많은 노획물을 가지고 돌아온다.

진영에 돌아온 장수가 가후에게 묻는다. "어쨌든 자네 말대로 하니 성공했네. 그런데 자네는 그리 되리란 걸 어찌 알았는가?" 가후의 대답이 걸작이다. "조조는 자기가 항상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물러날 때도 꼭 꼼수를 써 두지요. 하지만 한번 추격했다가 장군께서 당한 것을 보고는 틀림없이 교만해져서 방비를 풀었을 것입니다."(이 스토리는 <연의>만이 아니라, 정사 <삼국지>에도 나온다)

정말 대단한 심리전의 고수 아닌가?  <삼국지연의>가 단순히 문학작품이 아니라 CEO의 바이블이 되는 이유도 이런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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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훔치는 사람들 - 1768년 중국을 뒤흔든 공포와 광기
필립 쿤 지음, 이영옥 옮김 / 책과함께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이런 역작에 첫 리뷰어가 되다니... 영광이다. 신문과 인터넷에서 꽤 떠들어댄 책이라 누가 먼저 써 놓았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

이 책은 이산출판사에서 나온 조너선 스펜스의 <강희제>와 여러 모로 쌍벽을 이룰만한 책이다. 다루는 시대가 중화제국의 정점인 강희-옹정-건륭 삼세 시기의 첫머리와 끝이기도 하거니와, 두 학자의 스타일도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강희제>의 저자 프로필을 보면 '미국의 중국사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라고 표시해놓았다. 글쎄... 그건 아닐 걸. 조너선 스펜스는 미국의 중국사학계에서 왕따당하는 존재다. 왜 그런지는 글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 역사학을 자유분방하게 넘나들지 않는가? 현재 예일대 석좌교수로 있던가 그럴 텐데, 대중적 글쓰기로 인기는 높지만 학계에선 잘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이다. 이덕일을 서울대에서 데려가겠다고 하는 거 봤는가? 시오노 나나미를 도쿄대에서 데려가겠다고 하는 거 봤는가? 같은 이치다.

그에 비해 이 책의 저자 필립 쿤은 정말 얌전한 모범생풍 학자다.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가 수제자로 찍어놓고 키운 사람인 모양이다. 그의 직함 앞에는수식어가 하나 붙는다. 학술논문이나 학계 동정을 보는 사람이라면 쿤에게 Francis Lee Higginson Professor라는 타이틀을 붙인 것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도 정확히 이 명칭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아마도 유능한 교수에게 주는 재단 상이나 명예로운 강좌 담당자의 의미리라. 페어뱅크도 이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학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단순히 윗사람들 말 잘 들어서 하버드 교수가 된 게 아님은 내용을 보면 드러난다. 미국인 교수치고는 드물게 영어와 한문, 중국어(이 두 가지는 다른 능력으로 치는 게 맞다), 독일어와 프랑스어에 일본어까지 한다.

그렇다면 글솜씨는 어떨까? 이건 스펜스에 비하면 확실히 좀 딸린다. 치밀하긴 하지만 문학적 감수성은 인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독자에게 논지를 전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는 수준이다. 자신의 발견들을 과대포장하는 능력도 없다. 그냥 고참 형사처럼 무뚝뚝하게 사건을 재구성해서 툭 던져놓을 뿐이다.

이 책은 1768년 청조 치하의 강남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일종의 사회적 공황 사건의 정치적 해결과정을 다루고 있다. 사실 내용은 지극히 딱딱하다. 민중의 막연한 심리적 공포, 복지부동 관료, 고집장이 권위주의 황제, 이 세 축이 동일한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정부 문서를 가지고 밝혀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의외로 재미있다. 정치범인 줄 알고 잡아들였던 떠돌이 중의 의심스런 행적이 사실은 젊은 유부녀와 간통한 후유증이었다거나, 건륭제가 관료들에게 어떻게 신경질을 내고 화풀이를 했는가가 생생하게 드러나는데... 이게 소설보다 재미있는 것이다. 

역사 속에 묻힌 사건들은 수백 년 뒤 재발견되었을 때 그 문화적 갭 때문에 일단 신기하게 느껴진다. 실제 일어난 일이지만 현대의 머리 좋은 작가가 고심하면서 짜낸 상상력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요상야릇한 재미를 자아낸다. 쿤이 그 효과를 예상하고 이리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멋을 부리지 않은 무뚝뚝한 사건 보고서가 오히려 더 싱싱한 재미를 안겨주는 것이다.

역자가 동양사학 연구자인 만큼 상당한 부분에서 역자주를 붙여 보강을 하고 용어들을 복원해주었다. 하지만 나처럼 더 깊이 공부해보고 싶은 사람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이 원래 사료에 어떻게 표기되었는지 끝내 나오지 않는 점이 불만이다.(盜魂匪? 盜靈匪?) 지도도 첫머리에 딱 한 장 있는 게 인쇄 상태가 썩 좋지 않아서 무성의해 보이고... 요새 중국에서 좋은 지도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또 쿤의 포괄적 시대인식이 '중국 전통 관료제가 전제권력과 민중 사이의 '완충장치'로 순기능을 했다'는 결론으로 흐르는 것도 썩 맘에 들지는 않는다. 나는 겉으로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건륭제의 치세가 사실은 중화제국이 나태함에 빠져 서양에 추월당하는 단서가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스펜스라면 아마 이 사건의 2년 뒤에 일어난 영국 산업혁명과 대비하여 몇 마디 했을 것이다. 쿤은 역시 강단사학자답게 좀 쪼잔하고 시야가 좁은 면이 있다.(좋은 말로 하면 신중하고 사려깊으며 분수를 안다)

제목이 선정적이어서 눈길을 끌지만, 이 책은 좁은 주제를 깊이 파들어가는 굉장히 수준높은 학술서다. 이제 한국에서도 이런 책이 출판되고 인기를 끈다는 사실에 놀랐다. 대중의 역사학 독서 취향이 점점 높아지는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에 흐뭇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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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물 2004-07-09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혼을 부르다"는 叫魂 혹은 招魂입니다. 중국사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것은 剪변案(변은 변발)으로 불립니다.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필립 쿤이 만들어낸 것으로, 전변안에서 그들은 罪犯이나 妖人 등으로 기록됩니다.

verdandy 2004-07-0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제가 알고 싶었던 건 바로 그 사건 명칭(剪辮案)이었습니다.
 
 전출처 : mannerist님의 "[퍼온글] 클래식에 관심 있으신가요?"

훌륭한 책소개, '날 선' 코멘트 잘 읽었습니다. 짝짝짝~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쇼팽 프렐류드 - 마우리지오 폴리니 조합 정말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만년의 쇼팽이 느꼈던 고독과 우울함, 향수를 잘 표현했다고나 할까요... 키신처럼 유니콘 위에서 천국을 뛰노는 연주나 아르헤리치의 여왕적 화려함(키신이나 아르헤리치 모두 협주곡만 들어봐서 비교하기가 좀 조심스럽습니다만)에 비해 쇼팽 정서에 더 근접해 있다고 느끼는 연주지요.

그런데 이 곡을 여름에 배당한 건 좀 의문이네요. '마요르카의 추억'이라 지중해의 밝은 태양을 연상했나? 마요르카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쇼팽 음악세계는 지중해문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듯한데... 하긴 뭐 장마철도 '여름'이니 장마철용 감상곡으론 딱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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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에서 정말 자주 듣는 말이다.

"나, 당신한테 실망했어요." "자네한테 정말 실망했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 표현이 정말 끔찍하게 싫었다. 듣는 거나 말하는 거나...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왜 그런 반응을 보일까 하는, 생각의 뿌리를 캐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기껏해야 첫인상, 그사람과 나눈 몇 마디 말, 식사나 회식 한두번... 아주 친해진다고 해 봤자 레크이에이션을 공유하거나 여행을 함께 가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이덴티티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지 않은가. 또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고. 작년에는 클래식을 좋아하던 사람이 올해는 락에 미칠 수도 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게으름뱅이였던 사람이 이번주에는 작심하고 운동에 나설 수도 있다. 어제 회식자리에서 끼가 넘쳐흘렀던 그 사람의 얌전하고 겸손한 오늘의 모습이 참성격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취득한 한줌의 정보로 그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틀을 규정해버린다.

그러므로, '실망'이란 표현은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고 자신의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된다. 판단을 잘못 내린 것은 어디까지나 판단자의 실수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뭐 그리 잘났다고 떠들어댄단 말인가. 나라면 누군가에게 실망했다면 창피해서 입 밖에 내지도 못하겠다... 가만 생각해 보니 마음이 돌아가는 구조는 그랬던 듯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참 비위도 좋다. 심한 경우는 상대방에게서 뭔가 양보와 사과를 끌어내기 위해, 고의로 토라진 듯한 모습을 보이는 데 이 말을 이용하는 듯하다. 적어도 드라마에서 보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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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4-07-08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사람들은 늘 변하기 마련인데, 항상 과거의 어떤 사람을 기억하고 과거에 매여서 살죠.
이렇게 말하는 저도 가끔 십년만에 친구를 만나면, 저 친구 옛날엔 이랬는데 라고 얘기하게 되죠. 십년간 그 친구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르면서. 그래서 티비를 안본답니다. 과거의 유령들만 사는 것 같아서......

verdandy 2004-07-08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단순히 "실망했네"란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요. 요즘은 마음 속에서 '실망이다'란 생각이 드는 것을 경계하려 합니다. 실망이란 뭔가 '기대'한 데서 비롯하고, 기대란 자신의 틀을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 위에 덧씌우는 것이니까요.
 
내 안에 잠든 요정을 깨워라
제레미 W.헤이워드 지음, 백영미 옮김 / 예문 / 2000년 3월
평점 :
절판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이런 책들을 많이 보아 온 덕인지, 이제 문장을 보면 저자의 마음공부 수준이 어떤 정도인지를 대충 파악할 수 있다. 제레미 헤이워드는 분명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달라이라마와의 친밀한 관계, 쵸걈 트룽빠와의 남다른 인연, 거기다 케임브릿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정통 과학자... 잘만 풀어냈으면 끝내주는 이야기가 나올 뻔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헤이워드는 그 경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초프라나 라즈니쉬, 김용옥보다 크게 떨어진다.

이 책은 아버지로서 딸 바네사에게 물질세계의 구성원리에 대해 영적 차원에서 이해하도록 돕는 25장의 편지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편지 하나 하나를 놓고 보면 꽤 근사한 주제들이 많지만, 순전히 말로만 풀어놓은 내용이고 뒷마무리가 흐지부지되어 독자들의 호기심을 사그라들게 해버린다.

예를 들어 이야기 일곱, '마음과 두뇌의 경계는 어디일까?'는 제목은 근사하지 않은가? 이 제목만으로도 신과학-뉴에이지 책 한 권을 낼 수 있겠다. 앞부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몸-마음과 세계 사이의 이 창조적인 춤에 대해 얘기하려는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번째는 사람이 순간순간 창조하려는 세계가, 그가 성장하면서 흡수해온 관념에 얼마나 깊이 규정되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싶어서야."(98쪽)

이야~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어가면서는 뇌의 구조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더니(전두엽, 변연계, 베르니케 영역, 시상 등) 시각적 이미지가 뇌에 전달되는 과정은 일종의 전기 회로와 같다고 설명하면서, "하지만 전기적 형태가 어떻게 의식적인 상이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얼버무리고 "우리 사회의 과학 비과학계의 권위자들은 마음이 뇌라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하고 있어. 그러한 노력이 성공한다면, 마음은 결국 물질로 축소되고 마는 거야"라고 끝내버린다. 이게 뭐야~

앞부분의 전제를 확인하려면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사람의 뇌가 순수하게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가운데 단지 2%만을 뇌에 정보의 형태로 전달하고, 그가 선호하지 않는 정보는 아예 보았거나 들었다고 느끼지도 못하게 필터링 처리한다"(이건 다른 책에서 본 것임. 이 말이 눈에 확 들어왔음) 정도의 설명을 덧붙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또 정통 과학자가 쓰는 글인만큼 사진이나 그림이 보강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로만 설명하니 신과학의 성과들을 감잡기가 쉽지 않다. 편지글이라는 형식 때문에 그런 점들을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초걈 트룽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핼리팩스에 들이닥친 빙산들 이야기 (84~85쪽)도 사진 한 컷이면 독자들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겼을 것인가!

그러나 저자가 과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와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덕에  칼 융의 집단무의식 담론, 일본 신도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신앙, 티벳불교의 가치관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흥미롭게 읽었다. 본질적 가치에 비해서는 포장과 가공이 부실한 탓에 너무 덜 알려져 안타까운 책이다.(표지도 꼭 무슨 페미니즘 에세이처럼 해 놔서...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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