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dohyosae님의 "지그프리드와 龍"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프랑크왕국의 분열은 지그프리트와 브룬힐트가 활동하던 시기로부터 200년 이상 지난 시점의 일이 아닌지요? 그 전에 메로빙-카롤링 교체가 있고, 융성기를 한 번 지난 다음의 일이라 알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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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dohyosae > 山經不變

한 장군이 있어 전쟁 중 용맹을 떨쳐

수 많은 적의 목을 베고 포로를 잡았다.

그의 무공과 지략을 당해낼 자들이 없었다.

젊은 시절을 전쟁터에서 보낸 장군이

나이가 들자 문득 세상 만물의 변화가 무상함을 느껴

佛門에 들었다.

젊은 시절의 장군을 아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렇게 변하였는가"하고 물으면

장군 曰,

"산과 산길은 전혀 변하지 않았소. 변한 것 나의 마음이요."라고

답하더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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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살다 보니 하마터면 북클럽 3/4분기 책 신청을 못 할 뻔했다. 뭐 못 한다고 해서 큰일 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고르지 않은 책이 떡하니 배달되어 오고 돈 내라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니까.

북클럽에 가입한 지 벌써 3년째. 한 번인가는 분기 도서 신청을 놓치는 바람에 의무적으로 배달된 책으로 때웠다. 처음 가입할 때는 이런 식으로 과연 장사가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2000원인가를 내면 한 2만원어치에 해당하는 책을 가입선물로 준다. 사람들이 그거만 먹고 훅 탈퇴하면 어떻게 될까? 그게 무지하게 궁금했다. 물론 나는 착실하게 분기마다 한권씩 사준 회원이지만...

그런데 요즘 베텔스만 돌아가는 거 보니 장사가 무척 잘 되는 듯하다. 잇달아 오프라인 지점을 내고, 예전에 비해 종수도 크게 늘고, 무엇보다 자체 출판사업을 손댄 게 짭짤한 수익을 내고 있으니...(다빈치 코드)

독일식 뚝심의 승리라 봐야 되나, 거대자본의 횡포라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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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을 따라 길게 뻗은 일본열도에서 영토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현재 3곳.(한국인의 입장에서 기술한다면 두 곳) 한국과는 이른바 독도-다케시마 문제, 대만 및 중국과는 센카쿠열도-댜오위타이 문제, 그리고 러시아와 북방 4개 도서 문제이다.

이 가운데 제삼자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일본인들의 손을 들어줄 만하며, 일본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곳은 바로 현재 러시아령인 에토로프, 쿠나시리, 시코탄, 하보마이 네 개 섬이다. 일본에서 치시마 열도, 러시아에서 쿠릴 열도라 부르는, 홋카이도에서 캄차카반도까지 마치 목걸이처럼 죽 늘어진 이 섬들은 1875년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의해 일본에 속하게 되었다.당시 영토분쟁중이던 두 나라는 사할린을 러시아가 가지는 대신 치시마 열도를 일본이 갖기로 타협을 본 것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소련은 러일전쟁 때 빼앗겼던 사할린 남부를 돌려받는 것은 물론이고 치시마열도 전체를 빼앗았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치시마열도냐는 것. 전쟁통에 무작정 소련군이 들어오다 보니 섬 하나하나를 다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에토로프, 쿠나시리까지는 치시마열도였지만 시코탄과 하보마이는 열도의 일부가 아니라 홋카이도 소속이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지리적으로 구체적인 고증 과정은 모르겠으나, 이 주장이 맞다고 보았던 듯, 1956년 소련은 이 두 섬을 일본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격화되자 소련은 이 문제에 대해 입을 씻어버렸고, 일본인들은 여기에 에토로프와 쿠나시리를 더해 북방 4개 도서라 부르면서 회복해야 할 땅으로 생각해왔다. 소련이 붕괴된 후 희망을 걸었던 일본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고려하겠다는 반응을 얻어냈고, 1993년 도쿄 선언, 1997년 크라스노야르스크 선언에서도 일본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듯한 조문이 반영되었다. 일부에서는 일본이 거액의 보상비를 지급하고 땅을 사오기로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2004년 현재까지 이 섬들은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영토문제에 있어서 조약, 선언, 역사적 정당성이란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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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dohyosae > 약탈 혹은 발굴?

80년대 지금은 철거된 중앙청에 자리잡았던 중앙 박물관에서 서역 문물전을 개최한 적이 있었다. 호기심을 가지고 들어갔지만 벽화를 뜯어낸 유물들만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체는 뱀이고 상체는 여인인 벽화가 눈을 끌었는데 그 그림의 주인공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인류의 어머니라는 <女왜>였다.

이때 전시된 소장품은 <오타니大谷콜렉션>이라 불리는 서역의 약탈품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오타니콜렉션의 1/3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역은 결코 우리에게 혜초나 고선지의 여정처럼 멀리 있는 곳이 아니었다.

대영박물관의 문화재를 원주인에게 돌려준다면 남는 것은 건물뿐이란 웃기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서구 유럽이 제국주의를 확장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유물을 약탈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쉴리만의 트로이 유적 발굴인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도굴이며, 약탈행위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도적행위를 트로이 유적을 발굴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면죄부를 주고 있다.

솔직히 서구 열강이 중앙 아시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러시아의 남진 정책 때문이었다. 특히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식민지였던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란을 연결하는 남진 저지선을 구축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왜 중앙 아시아 탐험의 원조인 스웨덴 사람 스벤 헤딘이 영국에서 기사작위를 받고 옥스브리지-옥스포드와 캠임브리지를 합쳐서 영국인들은 이렇게 부른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지 유념해야할 것이다. 오엘 스타인 역시 헝가리출신 유대인이었지만 영국의 식민지 인도의 라호르에서 행정교육을 담당한 사람이었다.

이들 덕택에 중앙 아시아 지역이 샅샅이 탐험되고 더 이상 지도상에 Terra incognita-미지의 땅-로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댓가는 너무나 참혹했다. 중앙 아시아에는 더 이상 그 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할 유물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남아있는 것은 폐허와 바람과 모래언덕 뿐이다. 자신의 역사적 실체를 갖지 못한 민족은 그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것이다. 그 지역은 지금의 신장성新疆省지역이다. 그곳은 먼 옛적 서하가 건국되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에 흡수되어 자신들의 역사를 망각하고 존재마저 위태로운 지경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이 그곳에 존재했었다는 또는 자신들의 위대한 조상이 이곳에 있었다는 존재감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유물의 발굴이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철저하게 약탈당한 민족은 그 존재마져 위태로운 것이다. 서역의 모래바람은 이제 한 민족의 정체성마저 황량한 타림분지의 고비사막 속으로 뭍어버리려하고 있다. 그 시발점에 약탈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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