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 - 일상용품의 비밀스러운 삶
존 라이언.앨런 테인 더닝 지음, 고문영 옮김 / 그물코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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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책, 참으로 귀하고 드문 책이다.

 

내가 아는 우화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옛날, 어느 선가(禪家)의 스승이, 재목을 알아본 제자에게 "내 밑을 떠나 수행하되, 깨달음을 얻으면 돌아오너라"라고 말했다. 제자는 인적이 드문 산 속의 암자로 들어가 수행에 정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느꼈다. 스승께 이 소식을 전해야겠다...

 

옛 절로 돌아온 제자, 스승의 방을 찾아가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흐뭇한 얼굴로 심오한 경지를 이야기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스승은 엉뚱한 소릴 한다. 마침 그날은 비가 오고 있었다. "네가 마루에 오를 때 도롱이를 신발 왼쪽에 벗어놓았으냐, 오른쪽에 벗어놓았느냐."

 

아무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제자는 깨달았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제자는 공손히 절을 하고 물러나왔다. 다시 수행을 하기 위해...

 

 

지금까지 환경오염과 자원낭비를 경고하는 책들은 수없이 나왔다. 그러나 그중 상당수는 단순히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자본주의적 물질문명을 '지탱'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어떻게 하면 배기가스를 줄일까, 어떻게 하면 자원낭비를 줄일까 하는 표면적인 문제들만 떠들어댔다. 국제유가가 요동칠 때면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어쩌구저쩌구, 기형물고기가 발견되면 공장폐수 방류현장을 쫒아가 기업윤리가 어쩌구저쩌구... 마치 그런 문제는 거대기업의 문제이고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만 한정된다는 듯이.

 

반면 이 책은 커피, 신문, 티셔츠, 신발, 자동차, 컴퓨터, 햄버거, 감자칩, 콜라 등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소재들의 순환과정을 추적하면서 그 흐름이 전지구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 개인 하나하나가 의식을 가지고 실천할 때 어떻게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그저 담담하게 구체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또 하나 이 책의 멋을 더해주는 것은 번역본을 만든 사람들의 노고. 1930년대 박태원과 1970년대 최인훈의 소설 주인공으로 사용된 평범한 소시민 '구보'의 이름을 빌려와 이 책의 주연배우로 등장시켰다. 내용에 인용된 대부분의 수치와 지명들도 최대한 한국적인 상황을 반영하도록 고쳐놓았다. 단순히 책으로 돈만 벌겠다고 하면 이런 작품이 나올 수가 없다. 찾아보니 그물코란 출판사의 첫 작품이었던데, 그 뒤로도 계속 이런 의식을 담은 책들만 내고 있다. 그 프로정신과 의식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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