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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을 따라 길게 뻗은 일본열도에서 영토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현재 3곳.(한국인의 입장에서 기술한다면 두 곳) 한국과는 이른바 독도-다케시마 문제, 대만 및 중국과는 센카쿠열도-댜오위타이 문제, 그리고 러시아와 북방 4개 도서 문제이다.

이 가운데 제삼자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일본인들의 손을 들어줄 만하며, 일본인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곳은 바로 현재 러시아령인 에토로프, 쿠나시리, 시코탄, 하보마이 네 개 섬이다. 일본에서 치시마 열도, 러시아에서 쿠릴 열도라 부르는, 홋카이도에서 캄차카반도까지 마치 목걸이처럼 죽 늘어진 이 섬들은 1875년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의해 일본에 속하게 되었다.당시 영토분쟁중이던 두 나라는 사할린을 러시아가 가지는 대신 치시마 열도를 일본이 갖기로 타협을 본 것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소련은 러일전쟁 때 빼앗겼던 사할린 남부를 돌려받는 것은 물론이고 치시마열도 전체를 빼앗았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치시마열도냐는 것. 전쟁통에 무작정 소련군이 들어오다 보니 섬 하나하나를 다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에토로프, 쿠나시리까지는 치시마열도였지만 시코탄과 하보마이는 열도의 일부가 아니라 홋카이도 소속이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지리적으로 구체적인 고증 과정은 모르겠으나, 이 주장이 맞다고 보았던 듯, 1956년 소련은 이 두 섬을 일본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격화되자 소련은 이 문제에 대해 입을 씻어버렸고, 일본인들은 여기에 에토로프와 쿠나시리를 더해 북방 4개 도서라 부르면서 회복해야 할 땅으로 생각해왔다. 소련이 붕괴된 후 희망을 걸었던 일본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고려하겠다는 반응을 얻어냈고, 1993년 도쿄 선언, 1997년 크라스노야르스크 선언에서도 일본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듯한 조문이 반영되었다. 일부에서는 일본이 거액의 보상비를 지급하고 땅을 사오기로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2004년 현재까지 이 섬들은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영토문제에 있어서 조약, 선언, 역사적 정당성이란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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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 시기(17세기 초)에 여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 가운데 월터 롤리 경이라는 교양 있는 귀족이 있었다.(여왕의 정부였다는 설도 있음) 그런데 말년에 어떻게 미움을 받았는지, 런던 교외의 외딴 성에서 옥살이를 하게 된다.

수감생활이라고는 하지만, 귀족에다 여왕의 총신이었으니 좋게 말하자면 정무에서 물러나 느긋하게 쉴 기회가 된 셈. 롤리는 자신의 필생 과업이라 생각해온 <세계사>의 집필에 들어간다. 아는 것도 많고 머리고 좋고 문장력까지 있었으니 집필 작업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기거하는 탑 아래에서 농민들끼리 싸움이 붙었다. 별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으나 무료하던 수감자는 그 사건의 전말을 기록해놓는다.(대저 기록이란 역사가의 사명이 아니던가!)

그런데 다음날, 하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사건에 대해 화제가 돌아갔는데, 이 하인이 설명하는 상황이 자기가 보고들은 것과는 또 영 딴판이라... 열받은 롤리 경, 간수고 보초고 다 불러서 그 상황에 대해 설명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사람들 이야기가 또 다 제각각인 것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지나쳐버렸을 에피소드. 그러나 머리 좋은 롤리 경, 한참을 곰곰 생각하더니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른 자신의 원고, <세계사>를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작은 사건에 대해서도 다 말이 다른데, 수백 수천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공정하게' 쓸 수 있냐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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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시간이 흐르면서 그냥 에피소드로만 남을 일일지 모르지만... 며칠 전 59명의 국회의원들이 간도협약 무효화 결의안을 제출한 적이 있었다.

간도협약이란 1909년 조선통감부가 청 정부와 협약을 맺어 간도에 대한 소유권을 (청으로) 확정지은 조약을 말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일본제국이 한반도 강점기에 맺은 모든 불평등조약을 무효화했으니, 간도협약 자체도 원천무효라는 주장이다. 이론으로만 따지자면 참 맞는 말이다.

자, 그런데 국제질서가 맞는 말대로만 돌아가나? 인민해방군 225만명에 대륙간 핵탄두를 450기나 보유한 중화인민공화국이 간도를 돌려준다? 말이 안 되지. 그럼 협상이나마 할 수 있나? 그것도 절대 아니다. 그럼 뭐 하러 이런 짓을 해서 중국을 자극하는가? 어리석은 발상이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벌어진 배경은 바로 그런 한국인들의 Pan-Koreanism에 대한 과민반응이었다. 그 거대한 국가가 한국과 북한이 통일되고 나서 연변의 조선족에게 영향을 미칠 게 두려워 벌벌 떠는 것이었다. 중국은 분명 심리적으로 쫒겼다. 그렇기 때문에 당당하게 주장조차 못 하고 뒷구멍으로 작업 들어가다 들키니까 쉬쉬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우리측에서 대응한 묘수 가운데 하나가 대만과의 직항로를 12년만에 개통한 것이었다. 중국인들을 다룰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위신을 공격하지 말고 실리에 타격을 주어야 한다. 그들은 자존심이 강한 인간들이라, 간도 문제를 언급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 고구려사 왜곡 문제를 그냥 덮고 넘어가자는 게 아니라, 명분에만 치우친 대응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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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yosae 2004-09-12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북공정의 대표적인 학자인 쑨진지孫進己는 그이 저서 <동북민족원류>에서 발해 지도를 당과 5대10국 사이에 위치시켜 중국 역사의 일부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중국의 의도는 일단 한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수면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술을 한 책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서구의 동양학 연구자들은 동북아 3국의 역사 기술의 기본 텍스트로 중국의 사서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양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중국어를 필수로 전공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잠시도 현실의 눈 뿐만 아니라 마음의 눈 까지 경계심을 풀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대부터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 가운데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는 한국과 베트남 뿐입니다. 나머지 국가는 중국의 거대한 물결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한국과 베트남에서는 화교가 힘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중국이 그토록 만주의 문제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는가는 역사적인 저항성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이 저항성을 포기하면 안된다고 봅니다.

verdandy 2004-09-13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요새님의 방문을 환영하며, 좋은 코멘트 남겨주신 데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왜곡 문제와 간도 문제를 별개의 사안이라 보고 있습니다. 위의 글은 동북공정을 주도한 중국인들의 방어적 의식에 간도협상과 2백만 조선족의 존재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지적한 것뿐이지, 이 두 가지가 같은 맥락으로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고구려는 이미 1300년 전에 망해서 사라진 실체입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한국사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좀 찝찝할 수는 있지만,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지배질서에 타격을 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외교적 혹은 학술적 노력에 의해 바로잡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간도 문제는 사정이 완전히 다릅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경선 내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땅이란 말입니다. 오늘 신문에 보니 아예 국제법상 영토분쟁의 제소 시효가 100년이라는 것을 거론하면서 2009년 이전에 이 문제를 이슈화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더군요. 그럴 리도 없겠지만, 설령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간도가 한국 땅이라 판결한다면 그들이 간도를 순순히 내놓겠습니까? 안 내놓으면 무력으로 특전사를 파병해서 간도를 점령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대응책이 없는 사안에 대해 명분론적 선언을 자꾸 내세운다면 한중관계의 마찰과 반한감정의 대두는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결국 피를 보는 것은 한국 쪽입니다.

저는 지금 간도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은 명나라를 도와 청에 대항하자던 인조 시기 서인정권의 실책, 강희제 융성기의 청을 상태로 북벌을 벌이자던 효종 시기의 무모함,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가 강화도조약으로 더 큰 피해를 보고 식민지지배로 빨려들어갔던 과거사를 되풀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커피가 처음 발견된 것은 8세기, 그러나 오늘날처럼 기호품으로 전환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커피를 처음 받아들인 아랍인들은 이 식물이 가진 각성제 효과에 주목했고, 한동안은 정례기도(이슬람은 하루 다섯 번의 기도를 하게 되어 있다)시 졸지 않도록 하는 약물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화가 늦었던 투르크인들은 아랍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교적으로 자유분방한 면을 보였다. 커피가 대중들에게 음용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로 추정되며, 술레이만 시기 이스탄불에는 거리 카페의 선구라 할 만한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커피의 서방전래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1683년의 빈 공방전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 전투는 이슬람 팽창의 분계선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함락에 실패하고 돌아간 투르크군의 둔영지에 이상한 곡물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본 오스트리아군... 처음에는 곡물이라 생각해서 빻아 먹어보기도 했다는... 어쨌든 이렇게 비인에 도입된 커피는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부르봉 왕가에 시집갈 때 가져가서 프랑스에 퍼지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 설은 들리기엔 근사하지만, 사실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 듯하다. 빈 공성전이 있기 수십 년 전부터 이탈리아 도시들에 카페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17세기 초) 오스만투르크와 무역이 활발했고 그 문화를 편견 없이 도입했던 베네치아가 아마 그 통로일 것이다.(열렬한 베네치아교 신봉자인 시오노 나나미가 커피 도입 문제를 쓰지 않은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카페(이 말은 프랑스어다) 문화가 생겨나고 커피가 음용문화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 건 역시 프랑스에서 시작된다. 계몽주의 시기의 지식인들은 거의 커피 애호가였고, 발자크 같은 인간은 아예 커피 중독으로 죽어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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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 중의 하나인데...

1230년대,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은 한때 화북의 한족들을 모두 쫒아내고 황하유역을 모두 목장화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방안은 유목민족과 정주세계 사이의 수천년의 대결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군사력으로는 우위를 점했어도 사회경제적으로는 정주세계에 끌려다니던 유목세력이 물질적 여건에서도 정주세계를 완전히 정복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몽골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던 이 방안은 한화한 거란족 출신 관료, 옐뤼추자이(耶律楚才)의 반대로 물건너가버린다. 한인들을 그 땅에 남겨두고, 농사를 지어먹게 한 후 세금을 받는 게 훨씬 득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징기스한이 살아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나, 오고데이한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화북에서 한족들을 뿌리뽑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버린다.

동북공정 사태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이 남는 역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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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4-08-18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관계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잠시 중국에 있을 때 외몽골 아이가 내게 중국인이 말하는 몽골사는 모두 거짓말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전세계인들이 중국인이 쓴 것을 읽는다고, 몽골인이 쓴 세계적인 유명한 통사가 없어서 그렇다고, 억울하다고. 중국의 역사교육과 대학원에 다니는 중국아이는 몽고가 본래 중국이었다고 했습니다. 외몽골의 아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지요. 지금은 제가 그 외몽골 아이가 된 느낌입니다.

verdandy 2004-08-19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도 중국에 계셨던 줄은 몰랐네요.^^

최근이라면 아마 그 책을 보셨을 듯한데... <외몽고독립의 흑막>(중국어)인가 하는 제목이었는데... 2000년대 초였어요.(아쉽게 저자와 출판사가 기억이...) 본래 중국의 일부였던 몽골이 소련의 농간으로 독립했다는 게 요지였지요. 중국 책들은 책 뒤에 보면 몇 권 찍었는가까지 다 나오잖아요. 보통 중국의 싸구려 정치물이나 인문서들이 1500,2000부 찍는 게 보통이었는데 그 책은 한번에 5만부인가 인쇄해서 기억에 남아요. 무슨 소린가 하면 민간 출판사의 책이지만 정부에서 밀어주는 책이란 거죠.

현재 중국 정부도 공식적으로는 몽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곧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도 남의 이야기가 아닌 듯하여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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