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에서는 두뇌싸움의 하이라이트로 "죽은 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놀라 달아나게 하다"(死諸葛走生仲達)라는 장면을 꼽는다. 이 표현은 수백 년간 인구에 회자되며 아예 격언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별로 조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내가 더 감탄했던 장면은 가후가 조조를 따끔하게 혼내주는 부분이다. 

조조가 연주에 기반을 두고 화북을 장악하려 애쓰던 시절, 이각 곽사의 잔당이라 할 수 있는 장수(張繡)와 대결하게 되는데, 다른 쪽에서 압박이 들어오자 장수와의 싸움을 그치고 군대를 물린다. 이때 신이 난 장수가 쫓아가 공격하려 하자, 가후는 "조조는 꾀가 많은 사람입니다. 필시 준비를 해 두었을 것입니다."라며 만류했다. 말을 듣지 않고 군대를 데리고 나간 장수, 옴팡 깨져서 돌아온다. 풀이 죽어서 가후한테 미안해하는 장수... 그런데 가후는 싱긋 웃더니 다시 한번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추격해보라고 한다. 어리둥절해하지만... 뭐 어쨌건 그대로 따라 해 본다.그랬더니 역시 조조군은 대오가 흐트러져 박살나고, 많은 노획물을 가지고 돌아온다.

진영에 돌아온 장수가 가후에게 묻는다. "어쨌든 자네 말대로 하니 성공했네. 그런데 자네는 그리 되리란 걸 어찌 알았는가?" 가후의 대답이 걸작이다. "조조는 자기가 항상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물러날 때도 꼭 꼼수를 써 두지요. 하지만 한번 추격했다가 장군께서 당한 것을 보고는 틀림없이 교만해져서 방비를 풀었을 것입니다."(이 스토리는 <연의>만이 아니라, 정사 <삼국지>에도 나온다)

정말 대단한 심리전의 고수 아닌가?  <삼국지연의>가 단순히 문학작품이 아니라 CEO의 바이블이 되는 이유도 이런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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