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에서 정말 자주 듣는 말이다.

"나, 당신한테 실망했어요." "자네한테 정말 실망했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 표현이 정말 끔찍하게 싫었다. 듣는 거나 말하는 거나...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왜 그런 반응을 보일까 하는, 생각의 뿌리를 캐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기껏해야 첫인상, 그사람과 나눈 몇 마디 말, 식사나 회식 한두번... 아주 친해진다고 해 봤자 레크이에이션을 공유하거나 여행을 함께 가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이덴티티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지 않은가. 또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고. 작년에는 클래식을 좋아하던 사람이 올해는 락에 미칠 수도 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게으름뱅이였던 사람이 이번주에는 작심하고 운동에 나설 수도 있다. 어제 회식자리에서 끼가 넘쳐흘렀던 그 사람의 얌전하고 겸손한 오늘의 모습이 참성격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취득한 한줌의 정보로 그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틀을 규정해버린다.

그러므로, '실망'이란 표현은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고 자신의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된다. 판단을 잘못 내린 것은 어디까지나 판단자의 실수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뭐 그리 잘났다고 떠들어댄단 말인가. 나라면 누군가에게 실망했다면 창피해서 입 밖에 내지도 못하겠다... 가만 생각해 보니 마음이 돌아가는 구조는 그랬던 듯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참 비위도 좋다. 심한 경우는 상대방에게서 뭔가 양보와 사과를 끌어내기 위해, 고의로 토라진 듯한 모습을 보이는 데 이 말을 이용하는 듯하다. 적어도 드라마에서 보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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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4-07-08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사람들은 늘 변하기 마련인데, 항상 과거의 어떤 사람을 기억하고 과거에 매여서 살죠.
이렇게 말하는 저도 가끔 십년만에 친구를 만나면, 저 친구 옛날엔 이랬는데 라고 얘기하게 되죠. 십년간 그 친구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르면서. 그래서 티비를 안본답니다. 과거의 유령들만 사는 것 같아서......

verdandy 2004-07-08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단순히 "실망했네"란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요. 요즘은 마음 속에서 '실망이다'란 생각이 드는 것을 경계하려 합니다. 실망이란 뭔가 '기대'한 데서 비롯하고, 기대란 자신의 틀을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 위에 덧씌우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