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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훔치는 사람들 - 1768년 중국을 뒤흔든 공포와 광기
필립 쿤 지음, 이영옥 옮김 / 책과함께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이런 역작에 첫 리뷰어가 되다니... 영광이다. 신문과 인터넷에서 꽤 떠들어댄 책이라 누가 먼저 써 놓았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
이 책은 이산출판사에서 나온 조너선 스펜스의 <강희제>와 여러 모로 쌍벽을 이룰만한 책이다. 다루는 시대가 중화제국의 정점인 강희-옹정-건륭 삼세 시기의 첫머리와 끝이기도 하거니와, 두 학자의 스타일도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강희제>의 저자 프로필을 보면 '미국의 중국사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라고 표시해놓았다. 글쎄... 그건 아닐 걸. 조너선 스펜스는 미국의 중국사학계에서 왕따당하는 존재다. 왜 그런지는 글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문학과 역사학을 자유분방하게 넘나들지 않는가? 현재 예일대 석좌교수로 있던가 그럴 텐데, 대중적 글쓰기로 인기는 높지만 학계에선 잘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이다. 이덕일을 서울대에서 데려가겠다고 하는 거 봤는가? 시오노 나나미를 도쿄대에서 데려가겠다고 하는 거 봤는가? 같은 이치다.
그에 비해 이 책의 저자 필립 쿤은 정말 얌전한 모범생풍 학자다.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가 수제자로 찍어놓고 키운 사람인 모양이다. 그의 직함 앞에는수식어가 하나 붙는다. 학술논문이나 학계 동정을 보는 사람이라면 쿤에게 Francis Lee Higginson Professor라는 타이틀을 붙인 것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도 정확히 이 명칭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아마도 유능한 교수에게 주는 재단 상이나 명예로운 강좌 담당자의 의미리라. 페어뱅크도 이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학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단순히 윗사람들 말 잘 들어서 하버드 교수가 된 게 아님은 내용을 보면 드러난다. 미국인 교수치고는 드물게 영어와 한문, 중국어(이 두 가지는 다른 능력으로 치는 게 맞다), 독일어와 프랑스어에 일본어까지 한다.
그렇다면 글솜씨는 어떨까? 이건 스펜스에 비하면 확실히 좀 딸린다. 치밀하긴 하지만 문학적 감수성은 인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독자에게 논지를 전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는 수준이다. 자신의 발견들을 과대포장하는 능력도 없다. 그냥 고참 형사처럼 무뚝뚝하게 사건을 재구성해서 툭 던져놓을 뿐이다.
이 책은 1768년 청조 치하의 강남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일종의 사회적 공황 사건의 정치적 해결과정을 다루고 있다. 사실 내용은 지극히 딱딱하다. 민중의 막연한 심리적 공포, 복지부동 관료, 고집장이 권위주의 황제, 이 세 축이 동일한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정부 문서를 가지고 밝혀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의외로 재미있다. 정치범인 줄 알고 잡아들였던 떠돌이 중의 의심스런 행적이 사실은 젊은 유부녀와 간통한 후유증이었다거나, 건륭제가 관료들에게 어떻게 신경질을 내고 화풀이를 했는가가 생생하게 드러나는데... 이게 소설보다 재미있는 것이다.
역사 속에 묻힌 사건들은 수백 년 뒤 재발견되었을 때 그 문화적 갭 때문에 일단 신기하게 느껴진다. 실제 일어난 일이지만 현대의 머리 좋은 작가가 고심하면서 짜낸 상상력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요상야릇한 재미를 자아낸다. 쿤이 그 효과를 예상하고 이리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멋을 부리지 않은 무뚝뚝한 사건 보고서가 오히려 더 싱싱한 재미를 안겨주는 것이다.
역자가 동양사학 연구자인 만큼 상당한 부분에서 역자주를 붙여 보강을 하고 용어들을 복원해주었다. 하지만 나처럼 더 깊이 공부해보고 싶은 사람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이 원래 사료에 어떻게 표기되었는지 끝내 나오지 않는 점이 불만이다.(盜魂匪? 盜靈匪?) 지도도 첫머리에 딱 한 장 있는 게 인쇄 상태가 썩 좋지 않아서 무성의해 보이고... 요새 중국에서 좋은 지도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또 쿤의 포괄적 시대인식이 '중국 전통 관료제가 전제권력과 민중 사이의 '완충장치'로 순기능을 했다'는 결론으로 흐르는 것도 썩 맘에 들지는 않는다. 나는 겉으로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건륭제의 치세가 사실은 중화제국이 나태함에 빠져 서양에 추월당하는 단서가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스펜스라면 아마 이 사건의 2년 뒤에 일어난 영국 산업혁명과 대비하여 몇 마디 했을 것이다. 쿤은 역시 강단사학자답게 좀 쪼잔하고 시야가 좁은 면이 있다.(좋은 말로 하면 신중하고 사려깊으며 분수를 안다)
제목이 선정적이어서 눈길을 끌지만, 이 책은 좁은 주제를 깊이 파들어가는 굉장히 수준높은 학술서다. 이제 한국에서도 이런 책이 출판되고 인기를 끈다는 사실에 놀랐다. 대중의 역사학 독서 취향이 점점 높아지는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에 흐뭇했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