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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
박제상 지음, 김은수 번역.주해 / 한문화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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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을 펼쳐보고 나서 이 책이 이미 1980년대에 나왔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1986년이면 <丹>열풍이 한창 전국을 휩쓸던 시절인데... 왜 주목을 받지 못했을까?

아무튼 초판이 나온 지 16년 만에 두 곳의 출판사에서 이 책을 다시 냈다. 한 곳은 증산도와 관계가 깊은 대원출판사, 또 한 곳은 뇌호흡(단학선원)과 관계가 깊은 한문화. 대원 쪽 책은 7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이라 과연 무슨 내용으로 채웠을까 하는 호기심을 자아내지만, 이 책보다 비쌌고 결정적으로 이미 절판되어 어떤 책인지 모르겠다. 내가 구입한 한문화 판이 4쇄까지 찍은 데 반해 2년도 안 되어 절판되었다는 건 독자들에게 그리 인기가 없었다는 뜻이니, 사실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부도지> 자체의 내용은 정말 한 줌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한문화판 이 책도 300페이지를 넘은 것은 매월당 김시습이 쓴 <징심록 후기>, 이 사료를 세상에 내놓은 영해 박씨 후손 박금의 <징심록 연의 후기>, 역자 김은수가 덧붙인 논고 <한국 상대사와 그 문화>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부도지 원문에 붙인 김은수의 주해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부도지>에서 그려내는 우리 겨레의 시원사는 <한단고기>보다 더 스케일이 크며, 마고성(역자는 파미르고원으로 추정)에서 출발하여 요순시대까지의 기록에서 끝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 사서에서 악행의 대표처럼 그려졌던 순의 아버지 고수(<부도지>에서는 '유호씨(有戶氏)'로 기록)가 단군의 신하로 천부의 학문을 익힌 사상가이자 뛰어난 지도자로 그려져 있다는 점. 오히려 순이야말로 화하족의 꼬임에 넘어가 요에게 벼슬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인 유호씨와 반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선가 사서라는 성격 때문인지, 지나치게 우주 생성원리 등 철학적 문장이 많고(천부경의 원리를 연상시킴) 단조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한단고기>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문 원문을 보니 문장들이 굉장히 쉬운 편인데, 이건 박금씨 자신이 밝혔듯이 영해 박씨 집안에 대대로 전해내려오면서 옮겨쓸 때마다 문장을 고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단고기>에서 문제가 되는 문장들도, 사실은 위서 논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감안하지 못한 필사자의 다듬기 때문이 아닐지...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다.

사료가치로서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이 책의 원문이 기록문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해 박씨 집안에 전해내려온 문서는 함경남도 문천의 박씨 문중 집안에 보관되어 있고, 6.25때 월남한 박금 씨가 기억을 더듬어 복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외워쓰기를 하면 꼭 한두 군데는 틀리는 곳이 나오기 마련인데, 전란통에 두고 온 몇 년 전의 기록을 과연 완전히 기억해냈을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일관성이라든가 문장 스타일이 순전히 상상력으로 지어낸 것 같지는 않다. 매월당 김시습의 추기도 신뢰성이 가는 글이고. 분명 우리 상고사의 복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자료이며, <부도지>와 함께 세상에 나오지 못한 <징심록>의 나머지 14편이 속히 발견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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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8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본의 첫왕은 한국인이었다.
이종기 / 동아일보사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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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오래 전 내용이다. 책이 출판된 시기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원고 자체의 작성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논지는 1970년대 중반에 완성되었고, 이 책의 일본어판인 <卑彌呼渡來の謎>가 1976년에 나왔기 때문이다.(二見書房, 발매 직전 회수) 지금이야 해외여행이 자유로운 시절이지만 그 무렵 일본과 인도를 오가며 취재, 답사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 곳곳에 보이는 탁견은 동시대 역사학자들의 틀에 박힌 연구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주장의 요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허황후의 인도 아요디아 기원설이 역사적 사실이란 것이며, 두번째는 일본사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야마다이(邪馬臺)의 여왕이 수로왕의 공주라는 것이다. 원고의 작성 시기를 감안해볼 때, 수로왕릉의 쌍어문과 아요디아 라마 사원의 물고기 문양을 비교하는 등의 허황후 인도기원설은 오늘날에야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발표 시기를 감안해볼 때 저자의 주장이 퍼진 결과인 듯하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두번째 주장 역시 독창적이며 나름대로 주목할 만한 근거들을 제시한다. 구마모토현 야쓰시로 신사와 마루야마 산의 어원 추적, 마루야마 산 정상의 증토산성 유지, 미야지에서 발견한 고깔모자 쓴 아난도상, 3첫명의 가랏파가 상륙했다는 전설과 '오래오래 데라이다' 구호, 레이후 신사의 납작머리 신상, 이쓰키 마을의 3박자 민요, 에비야 벌의 전투에 얽힌 민담 등은 쉽게 넘길 것들이 아니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저런 자료가 부족하기 마련인 1970년대인 데다, 기본적으로 역사학자가 아닌 문인이라 군데군데 오류와 상상력에 의한 논리 비약이 보인다. 예를 들면 허황후의 아요디아 기원설을 펼 때 펜클럽대회에서 인연이 닿아 만난 인도 문인 나가르(Nagar)씨의 이야기를 권위의 근거로 내세우는데, 샴 족의 아유타야 왕조가 라마 왕조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오류이다.(도읍의 이름은 힌두 신화에서 빌려왔지만 그런 관계는 아니다.) 또 김해김씨 보첩 기록의 10남 2녀 가운데 1남 1녀가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과 선견왕자가 '선녀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떠났다'는 부분을 일본으로 건너간 부분으로 해석한 부분도 그럴듯하긴 하지만 다른 증거가 전혀 없이 단지 상상력으로만 재구성하고 있어 아쉽다.

게다가 아난도상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김유신 수련설화를 끄집어내고, 답사기를 쓰는 중에 생뚱맞게 자신이 30년 전에 썼다는 동시를 끼워넣는 등 세련되지 못한(역사학 연구서로서는) 글쓰기가 시선을 어지럽힌다.

정연한 논리와 적확한 증거를 갖춘 책은 아니나, 이곳저곳에 담긴 발로 뛰며 수집한 자료가 돋보이는 원고이다. 한일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짚어보고 갈 만한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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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열전
허경진 엮음 / 웅진북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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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리라이팅 클래식이 유행이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사회과학 쪽에서 잘 나가는 들뢰즈를 박지원과 연결시켜 풀어내려고 한 시도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듯하다.

주제와 제목만 보았을 때는, 이 책도 그렇게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이 상당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저자의 가공능력 부족으로 평범한 자료집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해 새 책이 아니고 개정판이다. 1997년에 냈던 <조선위항문학사>를 제목을 바꾸고 본문에 컬러 삽화를 넣는 등 모양새를 예쁘게 손질한 것뿐이다. 따라서 <평민열전>이라 부르기엔 좀 문제가 있다. 제목을 그렇게 고쳤지만 출발점이 문학사 책이었기 때문에, 대상으로 삼은 인물 110명 가운데 여전히 시인이 41명나 되어 균형을 잃은 상태이다. <조선 후기 시인 위주 인물선> 정도가 가장 내용과 부합하는 책 타이틀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인물의 행적묘사가 너무 평면적이라 <열전>으로 부르기도 좀 민망하다. 시인들의 예만 보아도 최대립(51페이지)이나 김규(162페이지) 같은 이들은 아예 인명사전에 나올 법만 두세줄 소개로 끝내버리고 해당자의 시만 한두편씩 올려놓았다.

행적에 관한 기록이 조금 자세한 경우라도,해당 사료의 원문을 직역한 게 전부이고, 조선왕조실록을 찾아서 해당 인물이나 주변인물과 비교해서 분석하는 공정이 전혀 없다. 자가 뭐고 호가 뭐고, 문집으로 뭐가 있고, 기질이 자못 호방했고... 대충 이런 식이다. '한문 번역작업' 이상의 노력이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왕태(126~128페이지)의 경우를 보자. 조선시대에 왕씨들은 정책적으로 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전(全)씨 가운데에는 조선시대에 성을 바꾼 왕씨들이 꽤 된다고도 한다. 그런데 왕태란 인물은 원래 가난해서 돈을 받고 공익근무를 대신해주는 것으로 생계를 꾸릴 정도였는데, 우연히 지나가던 학사 윤행임을 통해, 임금(영조?)에게 불려가서 어전에서 시를 짓고, 중부학당의 국비장학생으로 발탁되기도 한다. 재미있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덕일 같으면 이런 사례 하나를 추출해서 "조선시대 왕씨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나?" 같은 식으로 한 꼭지 썼을 게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 궁금증에 대해 아무런 분석이 없고 어전으로 소환되는 과정도 너무 간결하여 정황추측이 잘 안 된다.

이곳에 수록된 110명의 인물은 조희룡의 <호산외기>(1844) 유재건의 <이향견문록>(1862) 이경면의 <희조질사>(1866)에서 추렸다고 하는데, 본문을 보면 의외로 장지연의 <일사유사>에서 가져온 인물 기록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서두에서는 원전자료와 큰 관계가 없는 <소대풍요> <풍요속선> <풍요삼선>에 대해서는 자세히 해제를 달았으면서도 <일사유사>가 어떤 책인지 언급이 전혀 없는 점도 아쉬운 부분. 아마 <조선위항문학사> 편집시의 서문을 제대로 보완하지 못해서 그런 체제가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던 한문 자료를 번역하고 어려운 어휘는 각주를 잘 달았으며 관련 삽화까지 충실히 보강해놓은 것으로 자료집으로서의 가치는 있는 셈이다. 국문학사나 조선시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사서 비치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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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황원갑 지음 / 인디북(인디아이)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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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보통 비전공자가 이것저것 뒤져 책을 내면 같잖게 보는 경향이 있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충 이것저것 짜깁기해서 책을 내 자기 이름값을 올려보려는 시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비전공자 혹은 정통적인 학문 트레이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오히려 충격적이고 신선한 기여를 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지만(그 대표적 예는 나중에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리뷰에서 다룰 예정), 유감스럽게도 이 책은 그렇게 '같잖게 보는' 비판을 얻어맞기 딱 좋은 수준에 머물러버린 저술이다.

우선 구성체제를 보면 65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 33명의 '우리 역사 속 무인들'을 정리해놓았으며, 본문 속에 사용된 삽화 외에 컬러 인쇄로 57컷의 사진을 싣고 있다. 저술 의도는 난세(?)를 맞아 문무가 조화를 이룬 국난극복의 정신을 되살리자는 의도라 한다. 그런데 우선 '무인들'의 범주가 문제가 된다. 서문에 보면...

 "무인 출신이지만 한 나라를 창업한 고구려의 추모성왕을 비롯하여 그 어떤 명장보다도 전략과 군공이 탁월했던 광개토대왕, 백제의 온조대왕과 근초고대왕, 발해 태조 대조영과 무왕, 후백제의 견훤, 후고구려의 궁예, 고려 태조 왕건, 조선 태조 이성계 같은 제왕들의 일대기는 다른 기회에 따로 엮기로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이 이 다음에 다른 책으로 써먹기 위해 '민족사를 바꾼 무인'이지만 왕이었던 인믈들은 빼놓겠다는 소리다. 가장 기록이 풍성하고 국난 극복의 정신을 되살리기에 알맞은 분들을 자신의 집필 편의상 알짜를 쏙 빼고 적는다? 이거... 너무 한 거 아닌가?

또 서문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학술적 문제는 될 수 있는 한 짧게 줄여서 장황한 사설을 피했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로서 그간 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거의 반영되지 않아(이 점은 책 뒤의 참고문헌 목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내용 서술은 국사교과서나 청소년용 위인전 수준으로 후퇴한다. 언론 서평에서는 마치 새로운 내용들인 양 선전해 놓았지만, 어느 정도 교양 역사서를 읽어보았다면 어디선가는 한 번 보았을 것들이며, 저자 자신이 직접 새롭게 발굴해낸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자면, 거란의 침입과 서희의 강동 6주 담판 문제는 우리가 '세 치 혀로 거란군을 물러가게 만든 외교술'으로 수십 년간 배워 왔지만, 사실 최근의 동양사 연구 성과들은 거란이 고려와 전면전을 할 수 없는 내부적 상황에 있었고, 시위효과를 위해 출병한 것 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고리타분한 옛 설명을 답습한다.

또 구색을 맞춘답시고 실어놓은 삽화들은 1970년대풍 묘역(이제 인물 전기에 이런 자료 좀 안 실었으면 좋겠다. 현대에 들어와 종친회나 군청에서 깨끗하게 단장한 천편일률적 묘역 모습이 내용 이해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영정, 기념관의 복원화들이 대부분이며, 막상 입체적 이해에 도움이 될 유물 사진이나 지도가 보이지 않는 점도 큰 결함.

반면에, 전공자들이 아무래도 몸을 사릴 수 밖에 없는(공부해서 아는 게 많아질수록 자연히 그렇게 된다)주제에 대해 과감하게 통사적 정리를 시도한 것이라 자료집으로서는 가치가 있는 것이 사실이며,  명백한 목적의식(역사 고증이 아니라 문약으로 흐르는 이 시대를 훈계(?)하기 위한 것이라 선언했으니)으로 지은 책치고는 서술이 제법 객관성을 유지한다.(올해 쉰 아홉이신데, 그 연세 세대 다른 문필가들-본래 작가 출신-에 비해서는 감정이입 오바가 거의 없거나 적은 편이다)

'추천'까진 못 하겠지만, 우리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사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자료 양이 방대해서 한 번 읽고 버리거나 돌려줄 내용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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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 철도로 돌아본 근대의 풍경
박천홍 지음 / 산처럼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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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리뷰를 쓸 때 리뷰 제목을 많이 고민하는 편이다. 본래의 책 제목과는 다른, 그러면서도 책의 내용을 한 구절로 딱 잡아낼 근사한 다른 말을 붙이고 싶어서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게 쉽지 않다. 저자가 제목이나 부제나 장제목에서 멋진 표현들을 너무나 많이 썼기 때문이다.(T.T) 예를 들어보면, 서문의 제목은 '멋진 신세계, 오욕의 연대기', 2부의 제목은'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 4부 '공간의 살해', 6부 '폭주하는 시간' 등이다. 그외에도 본문 곳곳에 쿨한 표현들이 널려 있어, 웬만한 문학작품 제목들은 이 책에서 다 뽑아낼 수 있을 정도이다.

저자의 이력이 상당히 다채로운 게 눈에 띈다. 고려대 사학과(여긴 국사학이 원래 강한 곳이다)에서 학부를 마치고, 서울대 서양사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밟은 후('근대성'의 담론에 대해서는 확실히 감을 잡았을 듯)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다가 <출판저널>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고 하니 산업혁명의 상징인 철도와 한국사를 접목시켜, 대중적인 글로 풀어내기에는 아주 적합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이 책의 재미는 8폭 병풍 같은 입체적 시대상에 있다. 철도청에서 제공받은 <한국철도 100년사>등의 자료를 무미건조하게 설명식으로 나열하지 않고, 각종 근현대 문학작품에 등장한 철도의 역할, 당시 사람들의 시각, 신기한 경험, 그리고 철도 자살사고 신문기사 등을 다채롭게 인용하면서 철길 밖의 풍경들을 철도 이야기와 맛깔나게 믹싱해냈다.

서양사를 공부한 연구자답게, 마르크스, 루소, 마리네티, 짐멜, 마르크 블로흐,  토마스 아퀴나스, 장 자크 루소, 미셀 푸코 등 유명 사상가와 역사가들의 한두 구절 명언(주로 문명에 대한 포괄적 통찰)들도 적절히 활용해서 학술적인 문장 냄새를 확확 풍기는 게 이 책에선 어쩐지 별로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높게 평가하고 싶은 부분은 6부 '폭주하는 시간'이다. 기차의 도입을 곧 근대적 시간감각의 전파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는 단락인데, 전통시대 동서양의 시간관을 우선 이야기하고 나서 기계시계의 발명사, GMT의 도입과정, 정확한 역법(태양력)의 보급, 시계수입의 에피소드 등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나서야 조선 철도의 기차시간표 제정 이야기를 꺼낸다.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을 이렇게 잘 다듬어 화려한 부페로 제공할 능력을 지닌 저자는 정말, 정말로 드물다.

그러나, 400쪽에 달하는 연구서의 어느 부분에도 지도와 도표가 보이지 않는 점은 아쉽다. 철도란 본래 지리적 개념이 아니던가? 국사 교과서에도 한두 쪽은 실려 있을 시대별 주요 노선 부설도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부분적으로 말로 풀어놓긴 했지만 기차 이용 승객 숫자나 철로 총 연장 자료 같은 것을 연대별로 추린 도표가(부록으로라도) 실렸다면 우리 근대사에서 철도화의 과정이 얼마나 쉽게 눈에 들어왔을 것인가... 나쁜 면을 심하게 부풀려 표현하자면 철도사 연구가 아니라 철도사 에세이집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 책이 나온 시기는 유라시아를 관류하는 '철의 실크로드' 담론이 한참 화두가 되던 시기였다. 그런 시점에서 우리네 철도 백년사를 돌아보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었고, 그 작업을 해낸 이는 이 책의 저자뿐었다. 몇 가지 사소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글쓰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역사의 숨결을 생생하게 전달한 저자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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