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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 철도로 돌아본 근대의 풍경
박천홍 지음 / 산처럼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리뷰를 쓸 때 리뷰 제목을 많이 고민하는 편이다. 본래의 책 제목과는 다른, 그러면서도 책의 내용을 한 구절로 딱 잡아낼 근사한 다른 말을 붙이고 싶어서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게 쉽지 않다. 저자가 제목이나 부제나 장제목에서 멋진 표현들을 너무나 많이 썼기 때문이다.(T.T) 예를 들어보면, 서문의 제목은 '멋진 신세계, 오욕의 연대기', 2부의 제목은'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 4부 '공간의 살해', 6부 '폭주하는 시간' 등이다. 그외에도 본문 곳곳에 쿨한 표현들이 널려 있어, 웬만한 문학작품 제목들은 이 책에서 다 뽑아낼 수 있을 정도이다.
저자의 이력이 상당히 다채로운 게 눈에 띈다. 고려대 사학과(여긴 국사학이 원래 강한 곳이다)에서 학부를 마치고, 서울대 서양사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밟은 후('근대성'의 담론에 대해서는 확실히 감을 잡았을 듯)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다가 <출판저널>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고 하니 산업혁명의 상징인 철도와 한국사를 접목시켜, 대중적인 글로 풀어내기에는 아주 적합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이 책의 재미는 8폭 병풍 같은 입체적 시대상에 있다. 철도청에서 제공받은 <한국철도 100년사>등의 자료를 무미건조하게 설명식으로 나열하지 않고, 각종 근현대 문학작품에 등장한 철도의 역할, 당시 사람들의 시각, 신기한 경험, 그리고 철도 자살사고 신문기사 등을 다채롭게 인용하면서 철길 밖의 풍경들을 철도 이야기와 맛깔나게 믹싱해냈다.
서양사를 공부한 연구자답게, 마르크스, 루소, 마리네티, 짐멜, 마르크 블로흐, 토마스 아퀴나스, 장 자크 루소, 미셀 푸코 등 유명 사상가와 역사가들의 한두 구절 명언(주로 문명에 대한 포괄적 통찰)들도 적절히 활용해서 학술적인 문장 냄새를 확확 풍기는 게 이 책에선 어쩐지 별로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높게 평가하고 싶은 부분은 6부 '폭주하는 시간'이다. 기차의 도입을 곧 근대적 시간감각의 전파라는 측면에서 파악하는 단락인데, 전통시대 동서양의 시간관을 우선 이야기하고 나서 기계시계의 발명사, GMT의 도입과정, 정확한 역법(태양력)의 보급, 시계수입의 에피소드 등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나서야 조선 철도의 기차시간표 제정 이야기를 꺼낸다.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을 이렇게 잘 다듬어 화려한 부페로 제공할 능력을 지닌 저자는 정말, 정말로 드물다.
그러나, 400쪽에 달하는 연구서의 어느 부분에도 지도와 도표가 보이지 않는 점은 아쉽다. 철도란 본래 지리적 개념이 아니던가? 국사 교과서에도 한두 쪽은 실려 있을 시대별 주요 노선 부설도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부분적으로 말로 풀어놓긴 했지만 기차 이용 승객 숫자나 철로 총 연장 자료 같은 것을 연대별로 추린 도표가(부록으로라도) 실렸다면 우리 근대사에서 철도화의 과정이 얼마나 쉽게 눈에 들어왔을 것인가... 나쁜 면을 심하게 부풀려 표현하자면 철도사 연구가 아니라 철도사 에세이집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 책이 나온 시기는 유라시아를 관류하는 '철의 실크로드' 담론이 한참 화두가 되던 시기였다. 그런 시점에서 우리네 철도 백년사를 돌아보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었고, 그 작업을 해낸 이는 이 책의 저자뿐었다. 몇 가지 사소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글쓰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역사의 숨결을 생생하게 전달한 저자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