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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웨이 - 세계는 지금 새로운 리더를 요구한다
달라이 라마, 라우렌드 판 덴 마위젠베르흐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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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 일인데, EBS에서 김용옥의 강의를 보다가 상당히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강의 주제는 불교가 아니었지만 어쩌다 화제가 불교로 샜다. 달라이라마와 만난 이야기였다. 두 사람의 대화 중 핵심 부분을 조금 극적 효과를 주어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
 

Dalai Lama “Buddhism is not a religion(불교는 종교가 아니오).”
Kim(???) “So What(그럼 대체 뭐란 말입니까)?”
Dalai Lama “Buddhism is a science(과학이외다).”
 

!!!
 

전적으로 동감이다. 불자들께는 실례되는 말씀이나, 나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 즉 붓다가 말한 정법(正法)을 종교가 아니라 대단히 탁월한 수준에 도달한 심리학, 즉 사람의 마음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집요하고 치밀하게 파고든 트레이닝 시스템이라 생각한다. 무려 2500년을 내려오는 동안 각 문화권의 외피가 덧씌워져 오늘날은 종교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을 뿐 그 본질은 분명 ‘과학’이라 표현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그렇기에 ‘영적’ 지도자 달라이라마가 ‘경영 컨설턴트’와 ‘비즈니스 리더십’을 논하는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경영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집합체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비즈니스란 무엇인가?
인간의 욕망이 재화에 투영되는 과정을 관리하는 것이다.
 

리더란 무엇인가?
주어진 환경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개인 혹은 집단의) 운명을, 깨어 있는 의식으로,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자이다.
 

따라서 ‘마음의 과학’ 방면의 프로페셔널리스트라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훌륭한 비즈니스 리더로 전환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이다. <리더스웨이>는 그 톱니바퀴가 어떻게 딱딱 맞물려 돌아가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이 대담집에서 두 양반은 꽤 효율적으로 역할을 분담한다. 달라이라마가 이상적 원론을 던져놓으면 마위젠베르흐는 비즈니스 세계에서의 성공적 실천 사례를 제시한다. 달라이라마가 경전의 오래된 우화를 언급하면 마위젠베르흐는 그와 코드가 통하는 최신 통계학적 연구 결과로 호응한다. 구사하는 언어의 물감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어지는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싱크로율…… 장난 아니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과 오자와 세이지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을 텍스트로 듣는 기분이다.
 

<리더스웨이>에서 제시하는 리더십의 핵심, 피비린내 나는 무한경쟁과 기업의 이윤 창출만을 지상목표로 삼아 달려오다가 이제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야만적 자본주의의 대안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나’가 아닌 ‘우리’라는 관점의 전환, 다른 이를 밟고 올라서고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눌 때 더욱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진다는 인식의 업그레이드다.
 

이 말이 공허한 도덕률처럼 보인다면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의 성공사례(222~225쪽)를 읽어보길 권한다.(그라민 은행의 창건자 무하마드 유누스 교수는 달라이라마의 18년 터울 노벨평화상 후배이기도 하다.) 그러면 달라이라마와 마위젠베르흐가 도달한 지점이 진정한 윤리경영인 동시에 진정한 고효율경영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을 맡아 유명해진 장 자크 아노 감독의 <티벳에서의 7년 Seven Years in Tibet>(1997)이 생각난다. 영화 시나리오상의 허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소년 달라이라마가 남긴 대사 역시 김용옥의 강의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생명은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걸 인식하고 나면 다른 이를 해칠 수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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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9-04-11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색 타고 들어왔습니다.

오마이갓,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실제로 달라이 라마 좋아하는데 정확하게 보셨어요.. ㄷㄷ
 
꼬마성자
미국수피즘협회 / 정신세계사 / 198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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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이 책에 실린 우화들이 좀 유치해 보인다. 그건... 아마도 나 역시 이런 류의 우화를 수없이 접하면서 어느 정도 감수성이 무뎌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첫 우화인 '꼬마 성자'는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그만큼 영감이 스며 있는 글이다.

누군가 내게 수피즘이 뭐냐고 묻는다면 딱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있다. '이슬람의 선(禪)이죠.'

지구상에 출현했던 모든 종교는 대중을 위해 열린 문 외에도 소수의 용사들을 위해 뒷문을 열어놓았다. 불가에서 그 역할을 달마대사가 해냈다면, 이슬람에서는 루미, 유가에서는 왕양명, 기독교 세계에서는 에크하르트, 유대교에서는 하시디즘 랍비들이 그 문을 열어주었다. 그 작은 문이 열린 건물들의 외형은 모스크에서부터 법당, 교회, 시나고그까지 다양했지만 문 안의 세계는 결국 한 길로 통했던 것이다.

여기 실린 열여덟 편의 우화는 모두 '신의 본질을 발견'하는 데 헌정되어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그대로 별 문제 없고, 불자라면 '신'을 정법(다르마)로 바꿔 이해하면 될 것이다. 아이를 둔 부모라면 이 우화들에서 모티브를 취해 자녀들의 영감을 일깨우는 데 활용할 만한 교재로서도 훌륭하다.

다만 각 우화 끝에 편저자가 튀어나와 '이 우화에서는 이러이런 점을 함께 생각해 보자' 라고 토를 다는 부분들이 눈에 거슬려 별 하나 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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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의 사랑 노래 타골의 죽음 노래
디팩 초프라 지음, 이현주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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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쯤 전의 일로 기억한다. 터키에서 지진이 났을 때 한국에서 발벗고 나서서 도와준 지방자치단체가 꽤 있었다.(2002년 월드컵의 터키 형제국 소동 이전의 일) 그중 하나가 서초구였다는데, 사태가 수습된 뒤 한국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메블라나 댄스팀이 서초구청 문화센터에 와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상업적으로 조직된 팀이 아니라 루미 교단 댄스팀이었다.) 루미와 나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메블라나 댄스... 긴 양털모자를 쓰고 흰 치마를 입은 남자들이, 단순하지만 가슴을 파고들어오는 음률에 맞춰 우아한 회전을 선보인다. 몸집 큰 남자들이지만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요가를 익힌 수행자들이 움직이는 듯 부드럽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 공연장에 와 있던 주한 터키 대사는 자신조차 그 공연을 보는 게 일생의 두번째 기회라 했다. 이 댄스를 보기 위해 나중에 터키 여행을 간다면 12월에 코냐(루미의 교단이 있었던 곳, 지금도 매년 12월에 축제가 벌어진다)에 도착하도록 일정을 짤 생각까지 했었는데, 이런 행운이 찾아들다니... 

잘랄웃딘 루미, 신비한 인물이다. 다른 종교권이라면 모르겠으나, 형상에 대한 숭배가 극히 금기시되는 이슬람에서 이런 꽃이 피다니...  당시 즐겨 읽던 라즈니쉬의 책에서 그의 무용이 어떤 영적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설명과 몇 가지 우화를 보고 루미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아쉬운 것은 수없이 많은 마스터들에 대해 이야기한 그의 강론집 가운데, 루미의 시를 이야기한 책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찾지 못했다는 것 뿐.)

그러다가 최근에, 의사 출신이면서 묘하게 영적인 메시지들을 툭툭 내뱉는 디팩 초프라란 사람이 엮은 루미 시집이 나왔다기에 보았더니... 나온 책의 성격이 더 수수께끼였다. 분명 상업적 출간은 아니었다. 한국기독교연구소? 도대체 기독교 목사가 왜 뉴에이지 과학자 초프라가 추린 이슬람 신비주의와 힌두교 시집을 번역해서 냈을까? 흠... 아마도 시집 안에 표현된 '절대자에 대한 사랑'을 이용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목적의식을 가지고 책을 내니 당연히 의미 전달이 왜곡된다. 예를 들어 '사랑에 굴복하여'(22페이지)를 보면...

사랑에 굴복하여/ 달빛의 광휘(光輝)로/ 창공이 환하게 밝았습니다./ 너무나도 강렬해서/ 나는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나에게 확신을 심어줍니다./

세속의 삶을/ 포기하고/ 당신 존재의 장엄(莊嚴)에/ 무릎 꿇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무릎 꿇다'의 원문은 surrender로 되어 있다. kneel down이 아니란 말이다. 번역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시의 번역이다. 다른 부분들을 보면 번역자의 솜씨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이렇게 옮겼을까? 기독교 교리에 끼워맞추기 위해 본래의 의미를 왜곡한 것이다. 나라면... 아니, 메블라나 댄스를 본 사람들이라면 surrender를 무슨 말로 옮겨야 할지 바로 떠오를 것이라 확신한다. 그 단어는 바로 '내맡기다.'

그밖에도, 초프라가 특별히 해설을 많이 붙인 건 아니지만 영어본 텍스트에서 누구 번역을 기준으로 했고, 이 시들 가운데 자신이 특별히 외워 음미하는 시 네 편이 있다고 소개한 부분을 싹 빼버렸다. 역시 종교적 의도가 의심되는 행위이다.(일일히 대조하진 않았는데, 네 편 중 하나는 '비둘기처럼'(31페이지)이고, 나머지 세 편은 누락된 것 같다.)

더 나쁜 건, 해적출판이란 사실. 1980년대라면 몰라도 2000년대에 나온 책이 저작권을 무시하고 멋대로 두 권이나 가져다가 도둑출판을 해버렸다. 사실 초프라가 특별히 시들을 해설한 건 아니니, 원저작자는 루미라고 봐야 되고, 그렇다면 13세기 작품이니 저작권은 소멸했다고 해도 말은 된다. 그런데 번역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초프라 편역의 책이라고 내세우고 서지사항을 버젓이 실어놓았다. 이건 아니지. 이런 짓은 기독교 망신이고 국가 망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을 세 개나(?) 주는 이유는, 원작시의 메시지가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페르시아어에서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약간의 손실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시를 이해하고 루미를 이해하는 사람이 옮겼다는 건 분명하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원서로 보시길 추천한다.

원제 및 서지사항 : The Love Poems of Rumi(edited by Deepak Chopra, Harmony Book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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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단편선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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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노란 표지의 '한권의 책'(학원사) 시리즈 가운데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물론 내용은 단편선이다)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왜 눈물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 친구들에게 선물할 기회가 생기면 항상 이 책을 사서 선물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톨스토이 단편선은 언제나 서점가에 있었다. 여러 출판사에서 내고 있었고. 그런데 2003년 들어 갑자기 톨스토이가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느낌표 선정도서란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리뷰를 쓸 때 앞 사람이 지적한 측면을 가급적이면 답습하지 않으려 한다.(만일 새롭게 쓸 내용이 없다면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감성적인 책이라 그랬는지...  138개나 되는 리뷰의 상당수는 '독후감'에 가까웠다. 참고할 만한 것은 미디어천국 님과 평범한여대생 님의 것 정도.

많은 분들이 이 책이 기독교적 색채가 짙다고 하시는데, 내 생각은 정반대다. 오히려 기독교권 문학 가운데에서는 가장 동양사상과 가까운 작품이다. 비록 신과 천사의 이미지가 사용되긴 하지만, 가만히 보면 서사의 중심은 내면의 영적 성장과 의식의 각성이다. 심판하는 신, 교회중심주의, 선민사상, 신과 인간의 이원적 이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현대 기독교 교리와는 코드가 맞지 않는다.(톨스토이는 불교를 비롯한 동양 종교들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세 은자>(이 책은 아니고, 2권에 실린 작품)는 선불교의 우화 모티브와 놀랄 만큼 닮아 있다.(개인적으로 이 책을 '문학'이 아니라 '뉴에이지 자기계발서'로 분류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어떤 분들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적 측면을 지적하시는데 그것 역시 동의하기 어렵다.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면 때문에 혼동하신 듯한데, <바보 이반>에서 나타나듯 이상적 사회를 국가권력에서 일탈한 농촌공동체로 설정하는 사상은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사상과 공명하며, 아나키즘에 가깝다.(실제로 톨스토이 사상은 아나키즘으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많다) <촛불>에서 잘 나타나는 억압에 대한 비폭력 평화주의 사상은 불교의 아힘사(ahimsa) 사상과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톨스토이를 격렬하게 비난했다.(당연한 일 아닌가? 이따위로 착취계급에 대한 투쟁의지를 희석하려는 작품이 널리 퍼진다면 혁명이 가능하겠는가!) 재미있는 건 <바보 이반>이 제정러시아 시기에도 금서였다는 사실이다. 국가주의에 반대하는 사상을 담고 있다고 해서...(그러니까 검열관들도 이 작품에 담긴 아나키즘의 '위험성'을  꿰뚫어본 것이다)

나는 '러시아의 혼'이라 불릴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느낀 적이 여러 번 있다. 딱히 꼬집어 말하긴 어려우나 음악, 미술, 문학, 영화... 모든 부문에서 러시아인들은 다른 민족보다 더 영적인 깊이가 있다는 느낌이다. 톨스토이의 문학이 그랬고, 집시 음악(러시아어로 부른)이 그랬으며, 로에리치의 그림이 그랬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그랬다.(타르코프스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소련 사람'이 아니라 '러시아인'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톨스토이의 단편선 중 상당수는 1879년 야스야나 폴랴나를 방문한 이야기꾼에게서 차용한 러시아 민담이고, 어떤 것들은 자신이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고 밝혔다. 따라서 여기 실린 단편선은 사실상 톨스토이라는 필사자를 통해 발현되긴 했지만 '러시아의 혼'을 생생하게 노래하는 작품들인 것이다.

이 작품들이 세상에 나온 지 100년이 넘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건 영적인 깊이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특히 요즘 이런 책들을 사람들이 찾는 건 몸과 마음, 영혼이 조화를 이룬 삶, 진정한 의미에서의 웰빙을 갈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는 어쩌면 너무 일찍 왔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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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잠든 요정을 깨워라
제레미 W.헤이워드 지음, 백영미 옮김 / 예문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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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이런 책들을 많이 보아 온 덕인지, 이제 문장을 보면 저자의 마음공부 수준이 어떤 정도인지를 대충 파악할 수 있다. 제레미 헤이워드는 분명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달라이라마와의 친밀한 관계, 쵸걈 트룽빠와의 남다른 인연, 거기다 케임브릿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정통 과학자... 잘만 풀어냈으면 끝내주는 이야기가 나올 뻔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헤이워드는 그 경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초프라나 라즈니쉬, 김용옥보다 크게 떨어진다.

이 책은 아버지로서 딸 바네사에게 물질세계의 구성원리에 대해 영적 차원에서 이해하도록 돕는 25장의 편지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편지 하나 하나를 놓고 보면 꽤 근사한 주제들이 많지만, 순전히 말로만 풀어놓은 내용이고 뒷마무리가 흐지부지되어 독자들의 호기심을 사그라들게 해버린다.

예를 들어 이야기 일곱, '마음과 두뇌의 경계는 어디일까?'는 제목은 근사하지 않은가? 이 제목만으로도 신과학-뉴에이지 책 한 권을 낼 수 있겠다. 앞부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몸-마음과 세계 사이의 이 창조적인 춤에 대해 얘기하려는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번째는 사람이 순간순간 창조하려는 세계가, 그가 성장하면서 흡수해온 관념에 얼마나 깊이 규정되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싶어서야."(98쪽)

이야~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어가면서는 뇌의 구조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더니(전두엽, 변연계, 베르니케 영역, 시상 등) 시각적 이미지가 뇌에 전달되는 과정은 일종의 전기 회로와 같다고 설명하면서, "하지만 전기적 형태가 어떻게 의식적인 상이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얼버무리고 "우리 사회의 과학 비과학계의 권위자들은 마음이 뇌라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하고 있어. 그러한 노력이 성공한다면, 마음은 결국 물질로 축소되고 마는 거야"라고 끝내버린다. 이게 뭐야~

앞부분의 전제를 확인하려면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사람의 뇌가 순수하게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가운데 단지 2%만을 뇌에 정보의 형태로 전달하고, 그가 선호하지 않는 정보는 아예 보았거나 들었다고 느끼지도 못하게 필터링 처리한다"(이건 다른 책에서 본 것임. 이 말이 눈에 확 들어왔음) 정도의 설명을 덧붙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또 정통 과학자가 쓰는 글인만큼 사진이나 그림이 보강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로만 설명하니 신과학의 성과들을 감잡기가 쉽지 않다. 편지글이라는 형식 때문에 그런 점들을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초걈 트룽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핼리팩스에 들이닥친 빙산들 이야기 (84~85쪽)도 사진 한 컷이면 독자들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겼을 것인가!

그러나 저자가 과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와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덕에  칼 융의 집단무의식 담론, 일본 신도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신앙, 티벳불교의 가치관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흥미롭게 읽었다. 본질적 가치에 비해서는 포장과 가공이 부실한 탓에 너무 덜 알려져 안타까운 책이다.(표지도 꼭 무슨 페미니즘 에세이처럼 해 놔서...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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