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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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31 우리는 누구나 자폐로 태어난다

엘리자베스 문의『어둠의 속도』를 알게 된 것은 알라알라북사랑님의 <읽은책>에서였다. 제목이 신선했다. 저자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가였다. 알라딘 소개글을 읽고 바로 구매했다. 저자의 이력이 이채로웠다. 1945년생인 엘리자베스 문은 역사학을 공부했고, 해병대에서 기술병으로 3년간 근무했으며, 다시 생물학을 공부했다. 응급의료원, 교사, 합창단 지휘자, 지역신문 칼럼니스트 등 다채로운 직종으로 여러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이런 이력만도 독특한데, 엘리자베스 문에게 이 소설을 탄생하게 만든 또하나의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것은 저자가 자폐아를 키운 엄마라는 사실이었다. 입양아였는데, 처음부터 자폐아를 입양했는지 입양하고 자폐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둠의 속도'라는 제목은 저자와 자폐 아들과의 대화에서 탄생했고, 이 비슷한 대화가 소설 속에도 등장한다. 

어느 날, 아들이 들어와 문틀에 기대 물었어요. 

"빛의 속도가 1초에 30만 킬로미터라면, 어둠의 속도는 얼마에요?"

제가 일상적인 답을 했죠.

"어둠에는 속도가 없단다."

그러자 아들이 말하더군요.

"더 빠를 수도 있잖아요. 먼저 존재했으니까요."(2003년 3월, 시네스케이프 매거진, 폴 위트커버와의 인터뷰에서) 

이 소설의 플롯은 복잡하지 않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자폐아에 대한 치료가 가능해진 근미래, '루'는 조기개입과 진보된 교육과 사회적 지원 제도 덕분에 성인이 되어 비장애인들처럼(소설에서는 정상인으로 쓰고 있다) 직장을 다니고 취미 생활도 하며 일상을 무난히 영위해 나간다. 사실 '루'라는 캐릭터는 자폐인이라기보다 좀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일반인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른바 정상인들(비장애인들)보다 훨씬 잘 산다. 일도 잘하고, 자폐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취미로 하는 펜싱 실력도 좋으며,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줄도 안다. 거기다 똑똑하기까지 하다. 감각 정보에 대한 민감도가 뛰어나며 패턴 인식 기술력도 탁월하다. 이런 루가 가진 문제점이 대체 뭐란 말인가? 자폐,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루가 다니는 회사의 부장 크렌쇼는 자폐 부서원들이 마뜩잖다. 그들이 거두는 높은 생산성은 보지 않고, 그들에게 지출되는 개인 체육관, 음향 설비, 주차장, 온갖 장난감들만 눈에 거슬린다. 때마침 자폐인들을 정상으로 만들어 주는 치료법이 등장해, 크렌쇼는 치료를 빌미로 그들을 쫓아내거나 강제 치료를 받게 하려 한다. 크렌쇼는 자폐인들의 자폐를 그 자체로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병들고 손상되고 "특별 대접받기를" 바라는 버러지로 본다. 크렌쇼와 비슷한 시각을 가진 인물이 또 있다. 루가 속한 펜싱 동아리 회원 돈이다. 정상인 돈은 루에게 노골적으로 너는 "병신이고 동물원에나 처박혀" 지내야 할 존재이자, 약자들에게 쏟아붓는 온갖 사회 지원 때문에 자기 같은 인재가 밑바닥 일을 하고 사회가 불경기로 빠져든다고 말한다.    

크렌쇼나 돈 같은 부류의 인간을 나도 만난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장애인들을 나랏돈 빼먹으려고 데모만 할 줄 아는 세금 도둑들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적잖이 황당했다. 그 말을 하는 당사자가 장애인의 손이나 발이나 눈이나 머리가 되어 주는 장애인 활동지원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반박했다. 장애인들 덕분에 일자리가 생기지 않았냐고. 그 덕에 당신이 일을 해 수입이 생기지 않얐냐고. 하지만 그 사람은 크렌쇼처럼 그건 그거고, 장애인들 때문에 나라 살림 거덜 날 거라고만 침 튀기며 말했다. 어쩌면 크렌쇼나 돈이나 그 활동지원사 같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이끌어 가는 쪽은 사회적 지원의 필요성을 느끼는 올드린 과장이나 경찰관 스테이시라고 본다. 운전을 하고 직업을 갖고 사랑에 빠지고 펜싱 시합에 나간다는 루의 이야기를 듣고 스테이시가 말한다.

"​저는 당신보다 장애가 심한 사람들이나, 당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지원 없이 사는 사람들이요. 이제 지원의 근거와, 지원의 경제성을 알겠어요. 탁자의 짧은 다리 밑을 괴는 것과 같아요ㅡ왜 튼튼하고 견고한 탁자를 마련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작든 쐐기만 있으면 견실해지는데, 왜 기울어져 불안한 탁자를 견뎌야 하죠?"(299쪽) 

그러나 사회적 지원 체계가 아무리 탄탄해도 장애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엘리자베스 문이 이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이라고 생각한다. 초기 개입 덕분에 루는 비장애인들과 비슷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자신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애를 썼는지를 고백한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여전히 안 된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는다. 같은 때 같을 말을 한다. 안녕하세요, 안녕, 잘 지내요. 괜찮아요. 잘 자요, 부탁합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아뇨, 사양할게요, 당장은 아니에요. 교통 법규를 지킨다. 규칙을 따른다. 아파트에 평범한 가구를 놓고, 내 별난 음악은 아주 조용히 틀거나 헤드폰으로 듣는다. 그래도 부족하다. 이렇게도 안간힘을 쓰는데도, 진짜 사람들은 내가 변화하기를, 그들과 같아지기를 바란다. / 그들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변화하기를 바란다. 내 머릿속에 이것저것 집어넣고, 내 뇌를 바꾸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렇다. /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며. 그러나 나는 안전하지 않았다.> (63쪽) 

안간힘을 썼다는 루의 고백에서 울컥했다. 왜냐하면 우리 대다수도 루와 다르지 않게 안간힘을 쓰며 바둥바둥 살아가기 때문이다. 빠르게 변모하는 사회의 진화에 발맞춰 '나를 바꾸라'는 압박을 받고 살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따라잡지 못하면 우리 누구나 어둠의 세계로 도태되어 나만의 자폐에 갇힐 수 있다. 우리 누구나 그런 불안을 안고 살지 않는가. 이 소설은 근미래가 배경이지만 루가 마주하는 문제들은 지난날 내가 겪었고 오늘날 내가 겪고 있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거의 흡사하다. 자폐인인 루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관계'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려 애쓴다. 모르면 겁이 나지만 알게 되면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인이 되면 모든 힘듦과 불안이 해소될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정상이 되고 싶다는 루의 친구 캐머런의 말이 가시처럼 아팠다.

"나는 정상이 되고 싶어. 늘 그랬어. 다른 게 싫어. 너무 힘들어. 사실은 같지 않은데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척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지쳤어."  / . . . "나는 정상인처럼 보이기 위해 그렇게 힘들어지 않고 싶어. 그저 정상인이고 싶어." . . . "나는 잘못된 부분을 감추려고 애쓰는 데는 진력이 났어. 나는 제대로 되고 싶어." (382쪽) 

제대로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 루도 루의 동료들도 그 어떤 정상인들 못지않게 자기 앞가림을 잘하고, 자기 의사를 표현할 줄 알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인물들이다. 그랬기에 나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이만큼이어도 족하다고, 충분히 잘해 왔다고, 자폐인이어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나아야 할지 낫지 말아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선 루를 엄마처럼 안아 주고도 싶었다. 왜냐하면 나 또한 루와 똑같지는 않지만, 평균적인 아이들과는 성장 속도가 다른 아들을 키우는 엄마이기 때문이었다. 루가 삶의 지표처럼, 지렛대처럼 의지하는 엄마의 말씀들이 있다. 

ㅡ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고 그 사람들이 더 바르게 행동하게 되지는 않는다고 하셨어."(53) 

ㅡ 노력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같지 않다. Trying was not the same thing as dong. (71) 

ㅡ 네가 바꾸지 못할 일로 슬퍼하지 말거라, (101)

ㅡ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들을 나무라서는 안 된다.(115)

ㅡ 사람들은 가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하기도 해요. (137)

ㅡ 화난 채로 있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했다.(181) 

ㅡ 삶은 변화구를 던진단다. 그래도 그 공을 잡는 게 네 역할이지.(426) 

내게도 느린학습자인 아들에게 곧잘 건네는 두 가지 말이 있다. "Sapere aude 알려고 하라!" "노력하자!" 얼마나 많이 했던지 이제는 이 어린이가 엄마 표정만 보고도 이 말을 하겠구나 라는 눈치를 챌 정도이다. 이 소설에서 어둠의 속도는 무지, 편견, 미지(알 수 없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폐, 지적 장애, 다운증후군, 경계선 지능 등을 가진 아이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렇게 태어났다. 루의 말대로 그냥 "사고"였다. 그러나 언제나 "무지는 지보다 먼저 도착"하기에 이런 아이들의 미래를 상상하려 들면 환한 빛보다 캄캄한 암흑이 먼저 찾아든다. 그러면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고 암담함에 몸서리가 쳐지곤 한다. 그렇다고 넋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위험해진다. 다행히 때로는 아이들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장애아의 부모에게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어떻게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서, 그럼에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변화에 열린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 . . . . 만약/언젠가 그런 치료가 가능해진다면 아들이 결정해야겠지요." (521) (위의 인터뷰 중) 

나도 느린학습자인 우리집 어린이가 루처럼 자신의 머릿속을 읽고, 자신의 언어로 의사 표현을 하고, 자신의 의지로 결정을 내리는 어른으로 자라기 바란다. 그러자면 지금부터 그런 어린이로 살아야 할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의외였고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루가 좋아하는 펜싱 대결만큼 문장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런 탓에 SF를 선호하지 않는 내가 저자의 다른 소설『잔류인간』을 상호대차 신청했다. 기대만땅^^ 


저 밖에는 어둠이,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둠이 있다. 어둠은 언제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둠은 언제나 빛보다 앞선다. 예전의 루는 어둠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것을 불편해했다. 지금의 나는 그 사실을 기쁘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빛을 쫓는 한, 나는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란 뜻이기 때문이다. / 이제 내가 질문을 던질 차례이다. - P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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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31 0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파엘 2022-01-31 08:4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경험 때문인지 자폐를 잘 이해하고 쓴 소설 같네요. 이런 소설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ㅎㅎ

미미 2022-01-31 11:3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어제 김누리교수님 영상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는데 겹치는 부분들이 많아 공감됩니다. 우리사회의 뿌리깊은 문제 중 하나는 각 개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아요. 어떤 기준을 세우고 거기에 매몰되다 보니 기준에 못미치는 건 비정상이 되고 비정상이 된 사람들은 스스로를 탓하고 불행해지니까요. 이 책도 ‘잔류인구‘도 검색해볼래요!

희선 2022-02-01 00: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이야기 보니 책은 읽지 않고 일본 드라마로 본 《앨저넌에게 꽃을》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일본 드라마지만 소설 쓴 사람은 대니얼 키스예요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정상과 비정상이라 하다니...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애가 없다고 정상일지... 정상은 어떤 건가 싶기도 합니다


희선

얄라알라 2022-02-02 1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단, 읽기 전에 ˝영광입니다!˝ 저의 책친구, 행복한책읽기 님이 쓰신 <어둠의 속도>리뷰를 읽게 되어서!
저도 읽은지 한두달 지난 것 같은데, 계속 주변분들께 추천드리면서 정작 저는 재독 못했어요. 리뷰 읽고 다시 피드 남길게요^^ 신나요!

2022-02-02 1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악의 평범성 창비시선 453
이산하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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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0 #시라는별 53 


나에게 묻는다 

- 이산하 

꽃이 대충 피더냐. 

이 세상에 대충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소리 내며 피더냐. 

이 세상에 시끄러운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어떻게 생겼더냐. 

이 세상에 똑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모두 아름답더냐. 

이 세상에 아프지 않은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언제 피고 지더냐. 

이 세상의 꽃들은 모두

언제나 최초로 피고 최후로 진다. 

이산하 시인이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이후 22년만에 꽃으로 피어 올린 『악의 평범성』​ 은 시인이 말하듯 "산 자들에 대한 한결같은 그리움으로" 쓴 추도 시집이다. 이 시집은 나에게 올해 최고의 시집으로 자리 잡을 듯하다. 그리고 이 시집을 읽는 독자라면 자우메 카브레의 『나는 고백한다』를, 『나는 고백한다』​를 읽는 독자라면 이 시집을 읽으라고 강력 추천하고 싶다. 앞서도 말했듯 이 시집은 시로 읽는 『나는 고백한다』 같기 때문이다. 두 책을 관통하는 공통 주제는 악이란 무엇인가, 악은 왜 존재하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그 묵직한 주제를 역사와 인간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이리 엮고 저리 엮어 비장하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시집에 수록된 71편의 시를 느리게 곱씹어가며 읽는 동안 제주 4.3 항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한라산』으로 숱한 고초를 겪은 시인이 세상을 향한 관심과 인간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온 것이 놀라웠다. 시인은 굵직한 역사의 어둠에 지워졌거나 그늘에 가려진 사건들과 인물들을 서사적 형태로 전면에 되살려 놓았다. 그의 펜 끝에서 나치와 아우슈비츠, 6.25 전쟁, 제주 4.3, 5.18 광주, 세월호, 동백꽃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세월호 등등의 크고작은 사건들이 내가 몰랐던 다른 이야기들과 맞물려 다른 시각으로 펼쳐진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그랬단 말이야? 이게 말이 돼?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내가 알고 있는 역사란 얼마나 좁쌀 만한가 라는 사실을 거듭거듭 확인할 수밖에 없어 입 안 가득 씁쓸함이 고이곤 했다.  

'지퍼헤드'(Zipperhead)가 한국전쟁 때 미군지프에 깔려 죽은 

북한 인민군들 머리와 몸의 바퀴자국이 마치 지퍼무늬 같다고 해서 

<플래툰> 영화에도 나오듯 미군이 한국인들을 경멸할 때 쓰는 

가장 잔인하면서도 가장 슬픈 말이란 걸 한참 뒤에 알았다. (<지퍼헤드 2> 중) 

이산하 시인의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얼떨결에 북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부상당한 친구를 등에 업고 후퇴하던 중에 포로가 되었던 모양이다.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중립국을 선택했지만 행정착오로(인생은 정말 알 수가 없다) 남한에 잔류하게 되어 주왕산 오지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혼자 밭을 일구고 덤으로 목수 노릇도 하며" 

자기 손에 죽어간 자들의 십자가로 오두막집 울타리를 쳤다. 

그렇게 청년은 날마다 비루한 생의 껍집을 대패로 밀고 

미리 짜놓은 자기 관짝에 못을 박으며 전쟁의 악몽을 잊어갔다. (<지퍼헤드 1> 중) 

이런 피도 대물림되는 것일까. 한평생이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쨌건 사는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이든 겪을 수 있다. 이승에서 지옥을 만났을 때, 인간에게서 악마를 보았을 때, 양심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을 때, 그런 경험을 한 후 인간의 태도를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의 아버지와 시인이 택한 길은 구도자의 삶 같다. 세상이 아무리 나를 속이고 속여도, 그럼에도 대쪽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그래서 더 대견하고, 그래서 더 아프다. 

끝을 뾰족하게 깎으면 

날카로운 창이 되고 

끝을 살짝 구부리면 

밭을 매는 호미가 되고 

몸통에 구멍을 뚫으면 

아름다운 피리가 되고 

바람 불어 흔들리면 

안을 비워 더욱 단단해지고 

그리하여 

60년 만에 처음으로

단 한 번 꽃을 피운 다음 

숨을 딱 끊어버리는 

그런 대나무가 되고 싶다.(<대나무처럼> 전문) 

2015년 제65주기 의성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합동위령제를 맞아 시인은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을 위무하는 추도시  <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를 썼다. 죽은 아비가 시인의 입을 빌어 말한다.

그리고 이 아비의 제사상을 차리는 데 60년이나 걸렸다고 비통해하지 말거라.

​600년 이상 걸려도 사과 하나, 배 하나

구경 못하는 넋들이 얼마나 많더냐.

그리고 나의 손주들아, 이 야만의 세월을 탓하거나 저주하지 말거라.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죽은 자보다

더 말이 없지 않더냐.

. . . . 

. (중략)

그대들이 어디에 있든 작고 낮고 가볍고 

그리고 아주 느린 것들의 두 손을 번쩍 들어주며 

그들 이름을 크게 불러주는 사람이 되거라. 

역사의 정수리에 우뚝 선 자, 

그가 곧 깨달은 자가 아니겠느냐. 

거듭 말하노니, 

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 

현대사 앞에서 우리 모두 문상객이 아니라 상주이거늘 

끝까지 그대들이 그대들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한 아무도 그대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모두 숨쉴 때마다 언제나 '최후의 한 사람'이다. 

"작고 낮고 가볍고 그리고 아주 느린 것들의 두 손을 번쩍 들어주"는 사람. 그러니까 약자의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사람이 되자고 시인은 말한다. 이 시집에는 그렇게 살았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던 벤야민,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운 니체, 아우슈비츠에서 금지된 베토벤 곡을 연주했다가 바이올린과 함께 교수대에 매달린 어린 소녀, 매장의 모든 식료품을 예멘 난민 구호품으로 보낸 독일 마트 주인, 자본의 위선과 기만을 거부하다 심야극장에서 심장이 멈춘 기형도 시인, 좁은 독방에 잠시 머물다 가는 "한 줌 햇빛"으로 20년 감옥살이를 버틴 신형복 선생님(진정 그리운 이름이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를 노래한 전우익 선생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친구를 위해 같이 넘어져준 이산하의 초등 친구,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다 영면한 법정 스님, 젊은 사형수가 "조금이라도 햇볕을 더 쬐고 가라고" "일부러 신발을 헐렁하도록 찢어놓"은 이산하. 그리고 수배 중인 이산하를 "은닉" 혹은 "묵인"해준 119명의 은인들까지.

목수 아버지가 숫돌에 간 칼은 언제나 푸른빛이 어리는 것을 보고 시인은 

약 40년이나 시를 썼지만 

아직도 내 언어의 날에는 푸른빛이 어리지 않았다. (<푸른빛> 중) 

라고 썼지만, 한 명의 독자로서 내게 읽힌 이 시집의 시들은 푸른빛 투성이였다. 저녁노을처럼 지고 말 인생이지만, "좀더 잘 지기 위해 / 잘 지기 위해 잘 써야지" (<베로니카> 중) 라는 바람을 시인이 이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산하의 『악의 평범성』​ 은 "세상을 간절히 본 자의 저문 눈빛"(<길상사> 중) 같은 풍경이 담겨 있다. 뭉근하게저릿한 통증을 동반하는 이 시집에서 딱 한 번 웃음을 유발한 시가 있었다. 강의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수면 위로 떠오른 시신의 얼굴은 눈을 반쯤 감은 불상의 미소를 머금고 있다고 한다.(<바닥>) 이산하 시인이 나중 가는 길이 그런 미소 띤 길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국가기밀>의 일부를 마지막으로 올린다. 

서울시경 체포조에 검거돼 계속 고문받으며 지쳐 있던 어느날 

고향인 부산의 대공과 요원들이 불쑥 찾아와 한 시간쯤 면담했다. 

27살의 짧은 생애 중 가장 긴 악몽의 나날 속에서 

난 농담 반 진담 반처럼 얘기하며 딱 한 번 긴장을 풀었다. 

"아이고 ㅡ 이왕 잡히는 거 우리한테 잡혀줬으며 얼마나 좋노. 누이 좋고 매부 좋고 . . . . . " 

. . . . . . (중략) 

"진짜 말도 마이소. 우리가 당신 한 번 잡아볼라꼬 

몇년 간이나 새빠지게 고생하며 별 지랄을 다 떨었다 아이요." 

"아니, 뭔 지랄을 그렇게 떨었십니꺼?" 

"아, 나중에는 부산 경남에 신통하다는 점쟁이들 모조리 찾아가 

점까지 봤다는 거 아이요!" 

"예? 점을 봐요? 허허 ㅡ 소매치기 잡범도 아이고

빨갱이 잡는다카는 대공요원들이 과학수사는 안하고 . . . " 

. . . . . . (중략). 

"근데 점쟁이들은 뭐랍디까?" 

"다들 절대 못 잡는대요." 

"와요?" 

"빨갱이 주제에 인복, 여복이 억수로 많다고 . . . . . " 

"우하하하 . . . . . .!" 

"근데 . . . . . . 진짜 여복이 많았어예? 밥도 주고 양말도 빨아주는 . . . . . ." 

. . . . . . (중략) 

"그건 마 . . . . . . 국가기밀이라예." 

"국가기밀? 허허 ㅡ 이 양반 진짜 골 때리구마. 그나저나 우찌 잡혔십니꺼?" 

"아마 프락치 덫에 걸린 것 같네요. 쯧쯧, 짭새님들도 점쟁이 대신

프락치를 썼으면 잡았을 텐데, 다음엔 그렇게 해보이소." 

"다음에요? 언, 언제요?" 

"아이고 . . . . . "

"아, 그기 아이고 그냥 농담 한 번 . . . . . . 하아." 

"근데 점 보고 복채는 다 냈십니꺼?" 

"그건 마 . . . . . . 국가기밀이라예!" 

"예휴 ㅡ 국가가 좇 같으니까 점쟁이 돈 떼먹는 것도 국가기밀이구나 . . . . . . 

다음엔 복채 꼭 주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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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1-08-30 10: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ㅜㅜ

행복한책읽기 2021-08-31 00:51   좋아요 1 | URL
테레사님 울지 마세요. 시인이 울지 말라니, 저희는 상주로, 최후의 한사람으로 살아요^^

mini74 2021-08-30 10:4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지퍼헤드 ㅠㅠ 너무 슬퍼요. 배 하나 사과 하나 구경 못하는 넋들ㅠㅠ

새파랑 2021-08-30 10: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나에게 묻는다 시 너무 좋네요. 어떤 인생이든 쉽고 똑같지는 않은것 같아요. 국가기밀은 웃기면서 슬프네요 ㅜㅜ

행복한책읽기 2021-08-31 00:53   좋아요 1 | URL
저 시는 시인이 자신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는 위로 같아요. 한 명 한 명이 모두 소중하다는. 그죠.

scott 2021-08-30 11: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내 언어의 날에는 푸른빛이 어리지 않았다]
이산하 시인이 기억하고 기록한 푸른 빛, 소리없이 사라져 버린 생명들, 그 후손들 가슴에 새겨진 푸른 빛깔의 멍자국들 ㅜ.ㅜ

행복한책읽기 2021-08-31 00:54   좋아요 1 | URL
scott님 읽으셨죠?? scott님 리뷰나 페이퍼가 기다려져요^^

골드문트 2021-08-30 11:1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추천사가 강력합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8-31 00:55   좋아요 1 | URL
네. 강추합니다. 읽으십시오^^

붕붕툐툐 2021-08-30 22: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너무 좋아~ 구절 구절 다 좋아 현대사 앞에서 우리 모두 문상객이 아니라 상주래.. 어흑어흑...

행복한책읽기 2021-08-31 00:56   좋아요 1 | URL
아~~~이런 반응 너무 좋아요~~툐툐님도 울지 마요^^;;

희선 2021-08-31 01: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올해 최고의 시집이라니, 그런 시집을 만나서 좋으시겠습니다 여기 담긴 시는 그냥 보기 어려울 듯하지만... <지프헤더>에서 미군지프에 깔려 죽었다는 말 보니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일을 다시 생각하게 하겠습니다

행복한책읽기 님 팔월 마지막 날 잘 보내세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9-02 15:30   좋아요 3 | URL
네. 올해 이 시집 만나서 넘 좋아요. 이산하 시인 팬이 될 것 같아요. <지프헤더> 는 네, 저도 ‘미선이 효순이 사건‘ 생각났어요. ㅠㅠㅠ 아픈 일들이 사라지진 못하겠지만, 부디 적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테레사 2021-08-31 18: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네..하지만 너무 슬프네요..가족사도. 그렇고 ㅜ

행복한책읽기 2021-09-02 15:34   좋아요 4 | URL
그렇죠. 아들 절창에 갇힌 후 아버님이 충격으로 돌아가신 것이 시인에게 핏덩이 같은 응어리로 남아 있어 보여요. 더 나은 세상을 바란 행동이 가족에게는 아픔을 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저는 그게 참 아파요.

scott 2021-09-10 15: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 이달의 당선 추카~
금요일 저녁 맛나는 걸로 드삼 333

미미 2021-09-10 15: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mini74 2021-09-10 16: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새파랑 2021-09-10 1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플시인 책읽기님 축하드려요~!!

독서괭 2021-09-10 16: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행복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얄라알라 2021-09-10 19: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아!!!! 축하드립니다!!! 아싸^^ 제가 행복한 책읽기님 대행도 아닌데 넘 기뻐하나봐요^^

행복한책읽기 2021-09-10 20: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플친님들 축하인사 감사드려요.~~~~^^

희선 2021-09-11 00: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한책읽기 님 축하합니다 주말 즐겁게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9-11 13:02   좋아요 0 | URL
희선님도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1-09-11 0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한책읽기님, 축하드려요**
서재의 좋은 점이 제가 모르는 책과 작가를 많이 만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드려요**

행복한책읽기 2021-09-11 13:01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저도 딱 그렇습니다^^ 편안한 주말 되세요

초딩 2021-09-11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멋진 날 되세요~
 

20210823 #시라는별 52 

버킷리스트 
- 이산하 

요즘 ‘다음 차례는 너‘라는 듯 지인들의 부고문자가 쌓인다. 
내 눈에는 내 잉여목숨의 고지서로 보인다. 
허공이 초점 없이 나를 내려다본다. 
40대 중반 서교동 골목길의 교통사고와 
50대 초반 합정동 골목길의 백색테러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반품된 후 모든 게 허망해지고 
오랫동안 애써 부정하고 망각했던 고문의 악몽마저 되살아나 
날마다 피가 하늘로 올라간다. 
우울증 알약으로 버티며 내 살점을 베어 멀리 이송하지만 
그마저 반품되자 벼랑의 꽃처럼 더욱 조급하고 초조해진다. 
언제 다시 또 죽음의 그림자가 급습할지 몰라 더 늦기 전에
수배 4년 동안 나를 ‘은닉‘ 혹은 ‘묵인‘해준 119명의 실명을 
여기 시 한 줄로나마 깊이 새겨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자 하며 
그나마 내 체포 뒤 한 사람도 연행되지 않아 큰 다행이었다. 
그 얼굴들 하나씩 떠올리며 새벽에 물안개처럼 울었다. 

강양희 故 강철주 강춘희 강형철 고광헌 고원정 고형렬 故 기형도 김경미 김경형 김동건 김명곤 김선택 김선희 김성걸 김소영 김숙경 김영호 김은숙 김인호 김재승 김지나 김진경 김형경 김형수 김해숙 김호성 김홍희故 나병식 노승만 도정일 라종일 문장순 박덕규 박몽구 박방주 박순선 故 박영근 故 박이엽 박재현 박정희 故 박종철 박해현 故 백두산 백무산 부수아 서천 손수호 송인성 신경준 신동근 신명식 신현태 신형식 안상호 안선희 안수철 원용선오해영 유기홍 유승찬 유시민 유재주 유진월 윤현주 이권우 이규동 이기숙 이동형 이만희 이명호 이명환 이무명 이문재故 이범영 이봉선 이상희 이승철 이연철 이영애 이영진 이옥자 이윤재 이인재 이정국 이정우 이택희 이해영 이화형 장인식 장지태 전경하 전경희 전선하 전성희 故
전우익 정경미 정경연 정상홍 정승혜 정원영 정연수 정호승 조미아 故 조영관 조정아 차미경 차응춘 故 채광석 채현국 최상무 최상일 최성우 최성필
하재봉 한홍구 현무환 홍명규

이산하 시인은 1979년 대학생이 되었다. 나는 그보다 10년 뒤 대학생이 되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교정에 ‘백골단‘이라고 불리던 사복 경찰이 어슬렁거리지 않았다. 학교 안에선 고민은 있었지만 공포는 없었다. 옛날보다 운동하기 좋아졌어 라며 선배들이 투쟁 미담처럼 들려준 87년 이전의 교내 시위 에피소드 중 하나.

˝점심 시간에 말이야. 용감한 여학생이 옥상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 창문을 깨뜨리고 식당으로 들어와. 메고 있던 가방에서 유인물을 꺼내 밥을 먹고 있는 학생들에게 흩뿌리며 소리쳐. ‘독재 정권은 물러나라! 물러나라!‘ 그와 동시에 어딘가 있던 백골단 놈들이 후다닥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 그러면 여학생도 숨이 넘어갈 듯이 내달려 서로 둘러 앉아 밥을 먹고 있는 학우들 사이로 슬쩍 끼어들어. 마치 전부터 거기 앉아 있던 것처럼 말이지. 그러나 숨도 채 고르지 못했을 때 백골단 놈들이 다가와 그 여학생의 머리를 확 잡아채며 말하지. ‘요년, 이렇게 숨어 있으면 모를 줄 알았지. 얼른 나와!‘

이산하 시인은 그런 엄혹했던 시절 대학을 다녔다. 그는 정의와 민주를 지향하는 피 끓는 청춘이어서 독재 치하의 불의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친 여학생, 그 여학생이 뿌린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는 일을 한 사람이 이산하였다. 그 혐의로 그는 일찍부터 수배선상에 올라 오랜 기간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도피 4년째 되던 해인 1987년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장편 서사시『한라산』을 발표하면서 기어이 구속되고 만다. 스무살 대학 새내기가 장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스물여덟 살 때였다.

이산하 시인이 수배 기간 중에, 복역 중에, 감옥을 나와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쓴 시들을 통해 그의 고통을 짐작만 해볼 뿐이다. 그러나 ˝날마다 피가 하늘로 올라˝가는 ˝악몽˝과 ˝우울증 알약으로˝ ˝살점을 베˝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는 삶을 헤아리기란 역부족이다. 하여 다만 읽을 뿐. 아플 뿐. 나눌 뿐.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고 시인은 말했으나, 그 말을 보기 좋게 뒤엎은 시가 <버킷 리스트>이다. ˝비범성이 없는˝ 평범한 악이 도처에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두려움을 무릅쓰고, 때론 죽음을 불사하고 친구를, 아우를, 형을, 제자를 지켜준 아름다운 이들이 있었다. 이산하 시인을 ˝‘은닉‘ 혹은 ‘묵인‘˝해 주었다는 119명의 이름을 치는 동안, ˝그 얼굴들 하나씩 떠올리며 새벽에 물안개처럼 울었다˝는 이산하 시인의 말이 심장 언저리를 맴돌았다. 저들이 연행되지 않아 다행이고, 이산하 시인이 살아 주어 다행이다.

살아 있어야 날마다 가을맞이 열일하는 구름을 보며 살 기운을 더 내볼 수 있다. 시인처럼 나도 나를 살게 한 이들의 ‘버킷리스트‘를 써보아야겠다. 그 리스트 최상단에 오를 이는 단연코 나의 엄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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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8-23 06:5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시와 글의 내용이 좀 가슴이 아프네요 ㅜㅜ 그래도 사진에는 희망이 보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8-24 00:32   좋아요 3 | URL
그럼요. 희망도 고문이 되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은 있죠. 잠깐의 취하는 행복감이 긴 시간을 버티게 해준다고 저는 믿어요.^^

mini74 2021-08-23 10: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산하 시인 ㅠㅠ 이 책을 내셨군요. 큰언니가 가끔 그때 이야기해요.백골단. 그리고 사복입고 대학생인척 하던 경찰들. 눈빛이며 행동이며 표가 확 나는데. 참 무서웠다고 ㅠㅠ

행복한책읽기 2021-08-24 00:34   좋아요 4 | URL
어머. 큰언니가 그 시절 대학을 다녔군요. 정말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학교조차 살얼음판이라니오. 야만의 시대였어요. 이만큼 숨통을 트이게 해준 분들에게 고마워하고 살자 생각해요.^^

미미 2021-08-23 11:5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열일하는 구름들~♡ 요즘 하늘을 보면 어찌나 황홀한지 미켈란젤로의 구름도 한번씩 보이더라구요.
백골단..그 여학생은 끌려가 무슨일을 당했을까요ㅠㅠ 살벌한 시대가 아직도 세상 곳곳에서 진행 중이란것도 가슴아픈일이네요ㅠ

행복한책읽기 2021-08-24 00:36   좋아요 3 | URL
그죠. 요즘 하늘은 보는것만으로 넘 찬란찬란. 이 찬란함에 찬물 끼얹는 일들이 제발제발 줄어들기만을 바래요.

붕붕툐툐 2021-08-23 22: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이 시집 읽고 있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8-24 00:41   좋아요 3 | URL
툐툐님 진정 좋아하실 것임. 주의. 좀 아프고 많이 찔립니다^^;;;

붕붕툐툐 2021-08-27 02:26   좋아요 1 | URL
진짜 진정 너무너무 좋았어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렇게 시 소개 안해주셨으면 안 읽어봤겠지만 시집의 맥락 안에서 읽으면 <버킷리스트>에서 감동 쓰나미가 100배~
진짜 이건 다들 시집으로 꼭 읽어보셨음 좋겠어요~ 흐엉흐엉~~

행복한책읽기 2021-08-27 11:20   좋아요 1 | URL
툐툐님 다 읽으셨어요?? 저는 아직두 읽는 중인데. 맞아요. 맥락 안에서 읽음 진짜 감동 쓰나미. 툐툐님이 좋아할 거라 예상했지만 너무너무라 해서 지두 감동 쓰나미^^

scott 2021-08-23 22: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날마다 피가 하늘로 올라˝]갔던 시인의 삶이 그의 시어 속에서도 느껴집니다
버킷 리스트 작성하기전 오늘 ,지금 이순간 열쉼히! 살아야 하겠죠 ^ㅅ^

행복한책읽기 2021-08-24 00:42   좋아요 3 | URL
지당한 말씀. 이 순간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는 이가 scott님 같습니다. 대단대단^^

희선 2021-08-24 00: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70년대 대학교는 무서웠겠습니다 그때 대학생이 싸워서 지금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때뿐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많은 사람 덕분에 지금이 있네요 이산하 시인이 힘들었겠지만, 많은 사람이 도와줘서 살아 있군요 어쩌면 한사람은 많은 사람 도움을 받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8-24 00:48   좋아요 2 | URL
정곡을 지적해주시네요. 네 우리 모두는 많은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걸 모르고 살 때가 넘 많죠. 그걸 재인지시켜 주는 데 책만한 것이 없는 듯해요^^
 
포옹 창비시선 279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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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8 #시라는별 47 

넘어짐에 대하여 

- 정호승 

나는 넘어질 때마다 꼭 물 위에 넘어진다 

나는 일어설 때마다 꼭 물을 짚고 일어선다

더이상 검은 물속 깊이 빠지지 않기 위하여 

잔잔한 물결 

때로는 거친 삼각파도를 짚고 일어선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만 꼭 넘어진다 

오히려 넘어지고 있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면 넘어지지 않고 

천천히 제비꽃이 핀 강둑을 걸어간다 

어떤 때는 물을 짚고 일어서다가 

그만 물속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아예 물속으로 힘차게 걸어간다 

수련이 손을 뻗으면 수련의 손을 잡고

물고기들이 앞장서면 푸른 물고기의 길을 따라간다 

아직도 넘어질 일과 

일어설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일으켜세우기 위해 나를 넘어뜨리고 

넘어뜨리기 위해 다시 일으켜세운다 할지라도

정호승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포옹>>에는 총 66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정 시인의 시들은 아주 난해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쉽지만도 않은데, 이 시집은 일단 잘 읽힌다. 모든 시가 마음에 차는 건 아니지만 몇 편에 한 번씩, 혹은 연달아 아, 하는 탄성을 지르게 한다. 

산다는 것은 결국 

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작고 낡은 의자에 한 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중) 

정호승 시인은 1950년생이다. 이 시집은 시인의 나이 58세 때 출간되었다. 지천명을 넘어 예순을 바라보는 시기.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을 때 찾아드는 감정이 있다. 지금껏 무엇을 하고 살았나. 산다고 살았는데 왜 손에 쥔 것이 없나. 그런 마음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이

너덕너덕 누더기가 되어 밤하늘에 걸려 있다 (<다시 자장면을 먹으며> 중)

"누더기" 인생에 남은 것이라곤 "부러진 나무젓가락과 먹다 만 단무지와 낡은 칫솔 하나뿐"이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다시 자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아무렴. 황천길도 식후사(食後事)가 아니겠는가. 

배는 부르나 늙어가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늙으면 밥이 똥이 되지 않고 돌이" 되곤 한다. 똥을 못 눠 관장약을 항문 깊숙이 밀어넣어야 하는 늙은 아비를 보며 시인은 늙음의 처량한 현실을 직시한다.

사람이 늙은 뒤에 또다시 늙는다는 것은

밥을 못 먹는 일이 아니라 똥을 못 누는 일이다 (<노부부> 중) 

"똥을 못 누는" 나이가 되도록 살고픈 이가 누가 있을까마는 저승길은 내가 정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사는 데까지 살다 갈 생이 그리 길지 않을 때 찾아드는 또 다른 감정은 이런 것이 아닐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려고 뛰어가지 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잔해라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중) 

움켜쥔 손을 놓기. 환갑을 앞둔 중년의 시인이 얻은 혜안이다. 젊은 날엔 무엇이든 붙잡으려 애를 쓴다. "나를 가방 속에 구겨넣고"서라도 (<가방>) 날마다 출근 도장을 찍고 "남들이 가진 것을 다 가지려" 아등바등한다.(<옥산휴게소>) 그렇게 나를 향해, 오직 나를 위해 쓰이는 손가락을 시인은 어느 순간 가차없이 잘라버리고 하나는 "불국사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 또 하나는 땅에 심는다."( <손가락>) 잘린 두 개의 손가락이 썩어 문드러질지,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할지는 알 수 없지만, 잘려서 비게 된 자리에 우리는 나 아닌 다른 것을 들일 수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늙어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 한 켠에 타인의 자리를 내주는 일이기도 하다. 연민의 자리를 말이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기보다는 덜 아프게 넘어지는 법을, 넘어지더라도 더 가뿐히 일어서는 법을 체득하는 것이 나으리라. 그러니 넘어질 때는 꺼끌꺼끌한 시멘트 바닥이 아닌 말랑말랑한 "물 위로" 넘어질 것이며, "물을 짚고 일어서다" "물속에 빠질" 것 같으면 물고기처럼 힘차게 물을 차고 나아가면 될 일이다. "아직도 넘어질 일과 / 일어설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시인의 말처럼 "큰 축복"이 되려면 시들어갈 일밖에 없는 나와 너를, 장차 뼈만 남게 될 나와 너를, 신석기 시대의 한 부부처럼 꼭 껴안아주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너와 내가 서로 포옹하고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삶은 결국 이런 것일 테니. 

사람 사는 일

누구나 마음속에 절 하나 짓는 일 

지은 절 하나 

다시 허물고 마는 일 (<지하철을 탄 비구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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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7-08 09:1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구절 좋은데요?! 짓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허물고 말기에‘ 더 절절하고 와닿는 느낌😊

행복한책읽기 2021-07-08 12:13   좋아요 3 | URL
미미님은 마지막 구절 콕!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것이 삶인가봐요. ^^

새파랑 2021-07-08 09:1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넘어짐에 대하여> 시 정말 좋네요~!! 넘어지는 것보다는 다시 일어난다는게 중요한게 맞는거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7-08 12:16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은 넘어짐에 콕!! 새파랑님은 닉넴 탓인지 밟혀도 꿋꿋하게 고개 쳐들고 파릇함을 뽐낼 것만 같아요. 북플의 새싹이시더니 어느새 여름숲을 이루심 ㅋ

페넬로페 2021-07-08 10: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 요증 시 계속 읽으시네요. 시가 참 좋은데 이상하게 손이 가질 않아요. 한번씩이라도 시를 읽고 마음을 정화시켜야할것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7-08 12:19   좋아요 4 | URL
시를 읽는 시간이 좋아요. 작년에 제가 찾은 마음의 안식이었거든요. 글고 얇잖아요. 손에 쥐기 편하다는 ㅋ

얄라알라 2021-07-08 11:0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낡은 의자에 한 번 앉았다 일어나는, 그런 무심한 경지... 제게서 스르륵 빠져나간 의욕, 활기도 무심함의 경지로 끌어올리고 싶네요^^ 이 또한 욕망인가요?^^

행복한책읽기 2021-07-08 12:22   좋아요 5 | URL
아. 그런 욕망이라면야. 바래도 되지 않을까요. 또한 욕망해야 무심핝경지 근처라도 가보지 않을까요. 북사랑님 손잡고 앉았다 일어나드리겠음. 여~~~엉~~~차!!!!^^

scott 2021-07-08 11:4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이 목요일에 읽어주시는 시!
이 시를 읽으며
저는 오늘 하루 제마음 속에 시집을 짓고

절대로 허물지 않을 겁니다.
(*Ü*)ﻌﻌ💓💓💓💓

행복한책읽기 2021-07-08 12:24   좋아요 4 | URL
ㅋ 마음에 절대 허물지 않을 시집을 짓겠다니. scott님은 능히 그러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읽기 무섭게 곧장 글귀들이 허물어지고 만다는 ㅡㅡ^^;;

희선 2021-07-10 0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설 힘이 있을 때는 괜찮겠습니다 나이를 많이 먹으면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지 못하기도 한다잖아요 그렇게 넘어져서 병원에 갔다가 그 길로... 거의 그렇게 갈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거 생각하면 슬프기도 하네요 넘어지지 않고 가고 싶기도 합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7-10 09:42   좋아요 1 | URL
맞아요. 나이 들수록 넘어졌다 일어서기가 점점 힘들어져요. 그래서 넘어지는 거 자체가 무서워지나 봐요. 우리 가능한 넘어지는 횟수를 줄여보고 잘 넘어지는 법도 터득해 가봐요~~^^
 
학교의 슬픔
다니엘 페낙 지음, 윤정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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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1 


초반부엔 정말 키득키득 웃으면서 읽었는데, 뒤로 갈수록 내용이 점점 진지해졌다. 그러나 다니엘 페낙은 결코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끝까지 웃겼다. 


교사가 된 열등생이 프랑스 교실에서 자신이 겪은 열등생의 경험과 교사가 되어 자신과 비슷하면서 다른 열등생들을 가르친 경험담을 기록한 책이다. 훌륭하다. 내 아이가 이런 샘을 만난다면 공부를 잘하지는 못해도 학교 가는 길이 적어도 지옥철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다는 저자가 어떻게 이런 유머 감각을 가졌을까 궁금했는데, 답은 역시 유전자였다. 알파벳 a를 외우는 데 꼬박 일 년이 걸린 저자에게 아버지가 말한다. 


"걱정할 거 없어. 어쨌거나 이십육 년 뒤면 알파벳은 완벽하게 알게 되겠지."


아버지와 자식의 공모 방식. 심각한 일을 "웃어넘기는 쪽"으로 전환한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이 교사이자 작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고 노인이 되어서도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래, 넌 뭘해 먹고 사니?"라고 물었다. 어쩔겨. 


나는 저자의 아버지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느림을 느긋하게 바라볼 줄 아는 엄마가. 


다니엘 페낙은 공부를 못하는, 그것도 지지리도 못하는(꼴찌 아니면 꼴지 바로 앞) 학생이어서 열등생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선생들 자신은 적어도 자기가 가르치는 과목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으므로 열등생들이 서서히 만들어가는 무지상태를 이해하는 일에서 절대적으로 무능하다. 선생들의 가장 커다란 장애는 자기들은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상태를 상상하지 못하는 그 무능에서 기인할 것이다.(360) 


나는 저자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나는 알아도 아이가 모르는 상태를 상상할 줄 아는 엄마가. 


"날개가 부러진 제비떼" 같은 아이들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방법으로 저자가 제시한 것은 황당하면서 엄청나다. 이건 밝히지 않겠다.^^  


쓰고 싶은 말이 더더더 많지만, 우선은 밑줄로 대신한다.  



두려움은 분명 학창 시절 내내 나의 가장 큰 문제였고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된 뒤, 나의 급선무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두려움을 치료하고 방해물을 치워버려 앎이 스며들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었다.
- P30

"선생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제 나이 열두 살하고도 반년이 지났는데,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요." - P75

우리의 ‘공부 못하는 아이들‘(앞날이 없다고 여겨진 학생들)은 학교에 결코 홀로 오지 않는다. 교실에 들어서는 것은 한 개의 양파다. 수치스러운 과거와 위협적인 현재와 선고받은 미래라는 바탕 위에 축적된 슬픔, 두려움, 걱정, 원한, 분노, 채워지지 않는 부러움, 광포한 포기, 이 모든 게 켜를 이루고 있는 양파. 저기 다가오는 학생들을 보라. 성장해가는 그들의 몸과 책가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거운 짐들을. 수업은 그 짐이 땅바닥에 내려지고 양파 껍질이 벗겨져야만 진정으로 시작될 수 잇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단 하나의 시선, 호의적인 말 한마디, 믿음직한 어른의 말 한마디, 분명하고 안정적인 그 한마디면 충분히 그들의 슬픔을 녹여내고 마음을 가볍게 하여, 그들을 직설법 현재에 빈틈없이 정착시킬 수 있다. - P81

"아이들과 함께 있거나 숙제를 검토할 때 나는 딴 데 가 있지 않아요. 내가 다른 곳에 있으면 절대로 아이들과 함께할 수 없죠." - P161

"아이들 각자는 자기 악기로 소리를 내고 있는 건데, 그걸 거스를 필요는 없어요. 까다로운 일은 우리의 음악가들은 잘 꿰뚫어 보고 조화를 찾아내는 거죠. 좋은 학급이란 발맞춰 행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모두 함께 같은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예요. - P162

앎이란 무엇보다 육체적인 것입니다. 앎을 포착하는 것은 우리의 귀와 눈이고, 그것을 옮기는 것은 우리의 입입니다. - P190

내 직업의 일부는 스스로를 가장 많이 포기해버린 내 학생들을 설득해, 따귀보다는 정중한 대우가 더 영향력 있는 반성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었다. - P206

날개가 부러진 제비떼를 학교생활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일. 그때마다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길을 따라가는 데 실패하고, 몇몇은 다시 깨어나지 못해 카펫에 그대로 남아 있거나 다음번 유리창에 목이 부러지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은 제비들을 묻어준 정원의 깊숙한 구덩이처럼 우리 의식 속에 회한의 구멍을 남긴다. 하지만 매번 노력하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학생이니까. 이 아이 혹은 저 아이에 대한 호감이나 반감(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인 문제이긴 하지만!)의 문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에 대한 우리 감정의 정도를 말하는 건 너무 쉽다. 지금 문제가 되는 사랑은 그런 게 아니다. 기절한 제비는 되살려야 하는 제비일 뿐이다. 그뿐이다. -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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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6-11 03:2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앎이란 육체적인 것이었네요! 표지,제목보고 슬프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런 내용이군요. 웃음만큼 전염성이 큰 것도 없죠~♡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6-11 10:44   좋아요 3 | URL
육체적. 저는 정말로 그렇게 느껴요. 체화된 지식이야말로 살아있는 거라구요. 학자연은 가라!!!^^ 웃음은 좋은 바이러스^^

희선 2021-06-11 03:29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다니엘 페낙이 학교 다닐 때는 열등생이었지만 그때 책읽기에 관심을 가졌다는 말이 있네요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하는 건 시험을 잘 못 보는 거죠 열등생이라 해서 머리가 나쁜 건 아닌데... 열등생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안 좋은 듯합니다 다니엘 페날 아버지 재미있네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6-11 10:47   좋아요 5 | URL
맞아요. 열등생이 교사가 되는데 공을 세운것이 책이었어요. 많은 책을 섭렵했더라구요. 열등생이라는 말에 대한 딴지, 격하게 공감합니다^^

새파랑 2021-06-11 07:4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책읽기님 🌟 5개는 읽어봐야 하는 책인데^^ 요즘은 너무 빠른게 강조되는데 전 좀 천천히 하면 어때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책읽기님을 응원합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6-11 10:48   좋아요 5 | URL
아. 새파랑님 응원 왠지 눈물겹게 고마움요. 제가 점점 지쳐가고 있는 중이라 그런가봐요. ㅡㅡ 심기일전. 아자!!!!^^

페넬로페 2021-06-11 09:1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노인이 되어서도 자식 걱정한다는 엄마도 이해가 되고 느긋하게 자식을 응원해주는 아빠도 좋은 부모인것 같아요~~다니엘 페닉은 교실에서 여러 학생의 상황은 잘 이해해줄수 있을것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6-11 10:50   좋아요 7 | URL
네. 저도 노인 엄마의 걱정이 십분 이해돼서 ㅋㅋㅋㅋ 웃을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지금 저러거든요.^^;; 이해하기가 무쟈게 어렵습니다^^;;

독서괭 2021-06-11 10:3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천천히 해도 괜찮다˝라고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은데, 잠깐만 방심해도 어느새 빨리 하라고 다그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행복한책읽기 2021-06-11 10:51   좋아요 6 | URL
앗. 독서괭님도. 오늘도 온라인 수업 늦은 아들에게 소리쳤더니, 조용히 말해달라고 되려 저를 가르치더군요. 온화한 엄마 되기도 역시 어렵습니다^^;;

scott 2021-06-11 16:3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좋은 학급이란 발맞춰 행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모두 함께 같은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이말이 넘 ㅎ
좋네요
알파벳a!를 몇달 몇해동안 익혀도
인간美는 누구보다도 빛날 수 있잖아요 ^ㅅ^

행복한책읽기 2021-06-11 19:12   좋아요 4 | URL
역쉬. 1일1클래식 필자는 저 구절을 뽑을 줄 예상했습니다. 인간미 넘치는 scott님은 반짝반짝^^

mini74 2021-06-11 19: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가르치는 건 머리도 필요하지만 가슴속 공감도 중요한 것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6-11 19:14   좋아요 4 | URL
맞아요. 맞아요. 머리와 가슴 둘다를 고루 갖추기가 쉽지 않네요^^;;

얄라알라 2021-06-23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록 26년 기다려줄 초인내는 대다수 부모에게 없겠지만, 말뿐이더라도 26년이면 알파벳 익히겠지 하고 응원해준다면....그게 진심의 응원이라면, 무슨 일인들 못할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