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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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밤은 견딜 만한가요?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은 잔상이 오래 남는 책이다. 어떤 책은 그 속을 채운 내용보다 그 책을 둘러싼 에피소드가 더 기억에 남기도 하는데, 이 책은 내용도 에피소드도 오래 남을 것 같다. 나는 켄트 하루프라는 작가를 전혀 몰랐다. 내게 이 저자를 알려준 이는 얼마 전 완독한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의 어슐러 K. 르 귄이었다. 켄트 하루프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틈틈히 글을 쓰다 불혹을 넘긴 마흔한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소설을 발표했다고 한다. 생의 대부분을 콜로라도 주의 한 소도시에서 살았고, '홀트'라는 가상의 마을을 만들어 소설을 썼다고 했다. 이 소설은 저자의 마지막 작품이자 유작이다. 저자가 죽어가면서 썼다는 이 작품에 대해 르 귄은 감동과 경외감을 느꼈다며 버릴 것이 없는 말들로 가득한 귀한 인생 "보고서"라고 평했다. 사실 이런 리뷰에도 나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부터 내 몸과 마음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게 옳긴 한 건지조차 잘 모르면서도 옳다고 여기는 일을 계속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에게나 스스로에게 얼마나 가혹한지에 대해서, 우리들 대부분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갈망하고 얼마나 조금에 만족하는지에 대해서 계속 쓸 수 있었다. / . . . 수많은 소설이 행복 추구에 대해 썼지만, 이 소설은 실제 행복의 빛을 발한다."(<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403쪽) 

나이가 들면, 세상 경험이 많아지면, 세상에 좀 익숙해지면, 사는 것이 수월해지고 편안해질 줄 알았다. 그렇게 느껴지는 날들, 그렇게 느껴지는 순간이 언뜻언뜻 있기는 하다. 그런데 어느 날 에피파니(epiphany. 깨달음)가 찾아들었다. 아, 아무리 살아도 삶은 늘 낯설고 힘겹겠구나. 낯섬과 힘듬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거구나. 모두가 그렇게 사는 거구나. 이 깨달음은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의 싹을 틔웠다. 저기, 저 책에, 아주 많은 것을 갈망하지만 아주 조금밖에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이러고 사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 삶을 계속 영위해 가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니 읽지 않고는 배겨날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집 식탁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서점으로 달려가는 대신 자전거 페달을 밟고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나와 달리 <<밤에 우리 영혼이>>의 에디 무어는 두 발로 천천히 걸어 한 이웃을 찾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애디 무어는 루이스 워터스를 만나러 갔다. 오월,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바로 전의 저녁이었다."(7쪽)

이 책의 첫 문장은 이채롭다. 그냥 '어느 날'이 아니고, "그러던 어느 날"이다. "그러던"이라는 이 짧은 한 마디에는 많은 것이 함축돼 있다. 에디 무어가 루이스 워터스라는 인물에게 향하기까지 있었을 무수한 일들과 무수한 감정이 내포되어 있는 은유이다. 에디 무어는 환한 대낮도 아니고 야심한 밤도 아닌 어둑어둑해지는 저녁에 루이스 워터스의 문을 두드렸다. 황혼의 시각. 그들이 맞이한 인생의 시각. 숱한 망설임 끝에 당도한 시각이다. 찾아올 까닭이 없는 이의 영문 모를 방문에 어리둥절해하는 루이스에게 에디가 어렵사리 입을 뗀다. 르 귄도 지적했지만 켄트 하루프는 말을 아낀다. 입을 열기까지 에디의 감정이 어떠했을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을 수 있었겠지만 하루프는 사양한다. 그는 모든 행간을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 버린다. 이것이 하루프 문체의 매력이자 허점이겠다. 나는 대화체로 이루어진 이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가 정말 마음에 들지만 어떤 독자에게는 빈 공간이 많은 헐렁한 문체로도 읽힐 수 있을 테니까. 무튼, 하루프는 직진형이다. 시시콜콜 개입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뒤로 하고 오로지 등장인물들의 대화로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독자들도 같이 끌고 간다.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올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 / 우리 둘 다 혼자잖아요. 혼자 된 지도 너무 오래됐어요. 벌써 몇 년째예요. 난 외로워요. 당신도 그러지 않을까 싶고요. 그래서 밤에 나를 찾아와 함께 자줄 수 있을까 하는 거죠. 이야기도 하고요. / 아니, 섹스는 아니고요. 나야 성욕을 잃은지도 한참일 텐데요. 밤을 견뎌내는 걸,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걸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그렇죠?" (9쪽) ​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이 문장은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강력한 문장이다. 배우자를 잃은 지, 자식들이 세상 밖으로 나간 지, 삶의 흥미를 잃은 지 오래 된 70대의 두 노인이 앞으로 어떤 밤을 보내게 될지 궁금증을 던지게 하는 문장이다. 그러나 이 문장의 가장 큰 강력함은 등장인물을 향해 울컥 하게 만드는 연민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잠시 숙연해졌다. 마흔 하나에 남편을 잃고 홀로 긴 세월 살아낸 내 어미가 생각나서, 그 언젠가는 나도 겪을 일일지 모른다고(어쩌면 십중팔구) 느껴져서 말이다. 

그리하여 오로지 밤을 견디기 위한 두 사람의 동거 아닌 동침이 시작된다. 그들은 밤에만 만난다.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야기를 나눈다. 어쩌다 바람을 피웠는지, 어쩌다 결혼하고 어쩌다 아이를 잃었는지, 무엇이 되고 싶었는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등등등. 그 이야기들은 인생의 회한으로 가득하다. 그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이야기들로. 대개가 그렇듯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도 남자보다 여자 쪽이 더 현명해 보인다. 루이스가 후회 어린 어조로 토로한다.

"삶이, 결혼이 어때야 한다는 관념 같은 걸 갖고 있었는데 우리의 삶과 결혼은 거기서 멀었어요. 그런 점에서 나는 그녀를 실망시킨 셈이죠. 다른 남자였어야 했어요."(143)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구는 루이스에 비해 에디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기에 스스로에게 관대한 편이다. "눈먼 사람들처럼"(143쪽)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인생임을 먼저 터득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에디조차 어떻게 해도 태연자약해지지 않는 인생의 단면이 있다. 바로 자식 문제다. 한 아이를 잃고 남은 아이에게 충분히 눈 맞추고 귀 기울이지 못했다는 뉘우침, 분노와 억울함이 켜켜이 쌓여가는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에디의 가슴을 짓누른다. 그런 에디에게 이번에는 루이스가 심장을 마사지해주듯 위로의 말을 건넨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고쳐줄 수는 없잖아요. / 늘 고쳐주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죠." (155-6쪽)

그렇다. 자식도 품 안의 자식이고, 품을 벗어나면 다른 사람이다. 더 정확하게는 나와는 다른, 또 하나의 인격체이다. 부모의 손을 놓고 부모의 품을 떠나 사는 자식의 삶은 부모의 눈에 대개는 불안하고 미덥지 못하다. 할 수만 있다면 어긋나 있는 그 삶을 고쳐주고만 싶다. 자식은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부모의 눈길이 못 마땅하다. 내가 어때서요, 뭘 해줬다고 그래요, 라고 쏘아 붙이고는 부모로부터 멀리 달아난다. 내 딴에는 애를 쓴다고 썼지만 자식의 삶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때, 무언가를 했는데도 손에 쥔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 때. 그럴 때 찾아드는 무력감, 낭패감, 허무함, 그리고 쓸 쓸 함. 당신 인생에 그런 시기가 왔을 때, 그런 감정이 들이닥칠 때, 밤이면 이불 속을 뒤척거려야 할 때, 당신은 남은 나날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요? 라고 이 소설은 묻고 있다. 

에디와 루이스는 인생 70에 모험을 감행했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한 만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들뜨게 한 오랜 만의 설렘은 손가락질 따위 가뿐히 뛰어넘게 해주었다. 그들이 나눈 이불 속 동침과 대화는 별거 아닌 듯하지만 아주 별거인 것들이다. '나'라는 존재를 숨 쉬는 존재로 실감하게 해주는 것들이므로. 그들은 서로 나누고 공감하고 어루만졌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사실 나는 한 명의 독자로서 에디 무어가 자신의 발품을 들여 그런 과감한 제안을 하는 이가  꼭 남자여야 했을까 하는 대목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인생이 그렇게 마음에 차지 않게 흐르지 않던가. 그러니 나는 내 늙은 날의 밤들을 어찌 견딜 것인지, 그것만 더 고민해 보겠다. 

하루프의 문체가 마음에 들어 <<플레인송>>도 대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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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30 16: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모험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셀레이네요
행복한 책읽기님 리뷰를 읽으면서 나의 삶의 에피파니는 무엇인가? 떠올려봅니다.

하루키옹은 자신의 묘비명에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 않았다.
이렇게 적어 놓는다고 하는데,,,,

아마도 전,,,

적어도 끝까지 읽다 간다 ㅎㅎㅎㅎ
라고 적어 놓을까요 ^ㅎ^

행복한책읽기 2021-03-30 17:35   좋아요 3 | URL
scott님 묘비명 간지납니다. 끝까지 읽다 간다. 저는 한 지인에게 말했어요. 나는 책장(책과 함께 화장)할 거야 라고. ㅋㅋ scott님은 지금 모험 중이십니다. 1일 1클래식 페이퍼라는 엄청난 모험을요. 완전 대항해입지요.^^

미미 2021-03-30 16:5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르귄님 이번 책 속에 있는 책 중에 번역이 안되어 있거나 절판되어 있는 책들 넘 아쉬워요! 책읽기님 리뷰 구구절절 와닿네요. 이페이지도 저장~♡

행복한책읽기 2021-03-30 17:37   좋아요 4 | URL
그죠그죠. 저는 번역 안 된 책들 중 가장 읽고 싶은 것이 애트우드 단편이었어요. 르 귄 책 읽은 출판사 관계자나 번역자들이 손을 대줄 것 같아요.^^

새파랑 2021-03-30 17: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려고 오늘 책상에 올려놓은 책인데 이렇게 리뷰까지^^ 밤에 읽어야 할거 같습니다 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03-30 17:38   좋아요 4 | URL
ㅎㅎ 새파랑님 리뷰도 기대돼요. 저는 이 책 잔잔하니 좋았어요. 여운이 길어요. 흠. 근데 새파랑님은 좀 젊으신 것 같은디 ㅋ

새파랑 2021-03-30 17:47   좋아요 2 | URL
이렇게 멋진 리뷰가 있어서 부담되네요... 잔잔한거 좋아합니다^^ (기준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막 젊지는 않습니다 ㅎㅎ)

붕붕툐툐 2021-03-30 17:4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목 넘나 좋아요~ 파아란 표지도 좋구요~ 저도 늙어 혼자인 밤에 뭘 해야할지~ 그땐 명상 고수가 되어 혼자가 두렵지 않으면 좋겠네요~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03-31 09:56   좋아요 0 | URL
그죠. 제목도 표지도 참 맘에 들어요. 네. 명상하기 좋아하고 실천하는 붕붕툐툐님은 명상 고수가 되실 것 같아요. 알라딘 친구들에게도 그 비법을 조금씩 흘려 주세요. 주워 먹게요. ^^

2021-03-31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31 10:04   좋아요 1 | URL
북사랑님. 저두 문을 닫고 산 시절이 있었어요. 태양이 아니었구나, 샘물이 아니었구나, 공감이란 불가능하구나 라면서 문을 꼭꼭 닫고 산 때가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문을 조금 열어 둘 수 있게 된 건, 리뷰에 쓴 현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에요. 몇 퍼센트의, 어쩌면 0. 00001 퍼센트의 공감에 기대어 사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요. 북사랑님, 건조한 삶에 이 글이 잠시 단비가 되어 주었나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우리 같이 으샤으샤해요!^^

2021-03-31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1-04-01 0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마지막이고 유작이라니... 자신보다 더 윗세대 이야기를 썼군요 나중에 저는 어떻게 지낼까 잠시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지 않네요 그때는 이렇게 컴퓨터 쓰기 어려울지... 조용히 책을 볼지도 모르겠네요 이 소설에 나온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어서 좋았을 듯합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4-01 11:37   좋아요 0 | URL
나이 든 나를 그리기가 쉽지 않죠. 한 가지 좀 확실한건 희선님도 저도 조용히 책을 보고 있을 거라는 거죠. 돋보기 쓴 모습으로 말이죠 ㅋ

scott 2021-04-09 15: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의 하루프
이달의 당선작을 ~*
축하 합니다.
요책 제가 끌고 가여 ~장바구니속으로~@@@

새파랑 2021-04-09 16: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읽기님 추천으로 읽은 책이라 더 기쁘네요~! 축하드려요^^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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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3  어떻게든 . . . 다 읽었다 ^^

2021년 3월 3일에 시작해 3월 22일에 마치다.  

​​읽는 내내 좋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 . . 거의가 모르는 작품들 리뷰라 뒤로 갈수록 힘이 딸렸다. 

​​"옳든 그르든 간에 나는 따분하고 서툰 스타일은 곧 사고의 빈한함이나 불완전함을 나타낸다고 믿는다. 다윈의 정확하고 폭넓고 탁월한 지력은 그의 명료하고 강하고 활력 있는 글로 표현된다고 본다. 그 글의 아름다움이 곧 지성이다."(10쪽)

​르​ 귄이 찰스 다윈의 글에 대해 한 이 품평을 르 귄 자신에게 그대로 되돌려 줄 수 있겠다. 르 귄의 리뷰는 명료하고, 선명하고, 시원하고, 활력 있고, 무엇보다 지적이다. 나는 리뷰 읽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르 귄의 글은 그가 말한 좋은 서평의 정의를 따르게 한다. 그러니까 서점이든 도서관이든 달려가게 만들고 디지털 세대에 맞게 온라인 매체에 터치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저자가 소개하는 책들을 모조리 읽어 주겠어! 라는 다부진 포부를 밝히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르 귄 덕에 모르는 작가들을 정말로 많이 알게 되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작품들을 다 읽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란 사람이 지금껏 왜 SF 장르를 밀쳐두고 살아왔는지 이 책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이 SF를 온전히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르 귄은 똑부러지게 말했다.

"이해하지 못하면, 지루하다."(10)

그랬다. SF는 내게 지루했다. 그 지루함이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내게 그 장르를 이해할 만한 지적 토양이 없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단지 취향의 문제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 달 았 다. 이 지점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아쉬우냐, 하면 뭐 그렇지는 않다. 세상 모든 분야의 책을 사랑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세 아이의 엄마라는 직업과 작가라는 직업을 양립해 나가면서 어느 쪽도 희생시키지 않고 그 둘을 조화롭고 풍요롭게 일궈왔다는 작가의 내공에 감탄했다. 문학의 성차 문제를 서늘하고 날카롭고 시원하게 지적하는 저자의 문제 의식과 용기에 박수 쳤다. 상상력이 글쓰기의 도구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를 결정 짓는 수단이라는 통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읽기는 "다른 누군가의 정신과 교감"(26쪽)하는 행위이고 문학은 "우리가 여행하는 '삶'이라는 나라에 가장 유용한 안내서"(27쪽)라는 저자의 견해에 깊이 공감했다. 돌아보면 일가친척 하나 없이 살아온 내 인생에서, 너는 어떻게 살고 싶니?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너라면 어떻게 할 거니? 등등의 무수한 근본 질문에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눠준 것이 책이었다. 책은 내게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듣도 보도 못한 작품들에 대한 리뷰만으로 독자에게 읽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르 귄의 글은 훌륭하다. 나는 주제 사라마구의 글보다 그 작가의 삶, 사라마구가 걸어온 길을 사랑하는 독자였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르 귄의 리뷰를 통해 주제 사라마구의 삶과 글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를 더욱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올해는 사라마구의 작품을 모조리 읽고, 아니아니, 이제 이런 무리수 공약은 난발하지 않으리^^, 몇 권 집에 들여다 놓고 그와 좀 더 친해지고 싶어졌다. 켄터 하루프도 그런 작가들 중 한 명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책을 읽은 후에 든 마지막 생각은 여기 수록된 책과 상관없이 어쨌거나 나는 르 귄 언니가 말한 대로 "고집스럽게" 책을 읽는 독자로 살다 죽을 것 같다는 것이다.  

"우리 손끝에 달린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 읽기를 익힌 고집스럽고 내구력 있는 소수가 오랫동안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으리라 믿는다. 종이든 화면이든,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면 대개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하기에, 그리고 아무리 막연하다 해도 그 공유가 중요하다고 느끼기에, 어떻게 해서든 책이 다음 세대에도 존재하도록 만들고야 말 것이다."(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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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23 11: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 독자로 살다 백세까지 장수를 !!
sf물은 영상부터 보시고 원작을 읽으신다면 재미 두배!

행복한책읽기 2021-03-23 16:20   좋아요 2 | URL
백세!!! 무섭슴다. 저 숫자는 ㅋ 저는 sf 영화는 나름 잘 봐요. 신기해서요. ㅋ 책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이나, 르 귄과 웰스는 올해 도전해보려구요^^;;

미미 2021-03-23 1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축! 저 <어둠의왼손>사놨어요! 언제 읽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르귄 쌤 때문에 읽어보고싶은 SF늘고있음ㅋㅋ 고집스럽게, 저도요!🤚

행복한책읽기 2021-03-23 16:23   좋아요 2 | URL
축하 고마워요 미미님. 저는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먼저 읽으려구요. 지인이 <어둠의 왼손> 읽다 내려놨대요. 낯선 용어들로 가득해 난독을 겪었다고 해서. ㅋ 암튼 우린 올해 르귄 언니네로 놀러갑시다요~~~^^

라로 2021-03-23 14: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리수 공약도 가끔은 필요한 거 같아요. 암튼 저보다 늦게 읽으시고 먼저 완독 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저도 그녀가 알려준 책 다 읽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중에 와이오밍의 카우보이가 30년 동안 말 안장 속에 넣고(넣고만 다닌 건지 읽은 건지는 모르지만,ㅎㅎ) 다녔다는 아이반호는 읽고 싶어요. 물론 우리 같이 읽기로 한 애트우드 여사의 책은 언젠가 읽어야죵??ㅋㅋ 읽을 책이 쓰나미로 몰려오니,,,이럴때일수록,,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책은 쌓아 놓아야 맛입니다요, 저는. ㅠㅠ

행복한책읽기 2021-03-23 16:29   좋아요 1 | URL
라로님은 교차 읽는책이 원체 많잖아요. 저는 원래 한권만 파는 스타일이었는데. 알라딘 서재가 제 독서 습관을 바꿔 놓았어요. 우왕좌왕 중입니다요. ㅋ 라로님 저 애트우드 <시녀이야기> 시작했어요. 언제 완독할진 몰겠지만. ㅋ 근데 도덕적 혼란과는 딴판이라 더디 읽힙니다. 낯설어요 ㅡㅡ

희선 2021-03-24 0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소설 저도 별로 못 봤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어릴 때 본 영화 같은 게 거의 과학소설이 원작이더군요 그런 걸 나중에 알다니... 그렇다고 그걸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과학소설은 어렵지만 재미있는 것도 있더군요 얼마 안 보고 이렇게 말하다니... 저도 앞으로도 책 읽을까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거 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3-24 10:02   좋아요 1 | URL
희선님이랑은 겹치는 책이 없는데 같이 읽음 것도 잼나겠어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시인선 54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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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1 #시라는별 18

불안도 꽃
- 이규리

누가 알고 있었을까
불안이 꽃을 피운다는 걸

처음으로 붉은 피 가랑이에 흐를 때
조마조마 자리마다
꽃이 피었던 걸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몸이 마르고
밤마다 어둠을 고쳐 보는 동안
불안은 피고 있었네

불안은 불안을 이해했을까
그 속에 오래 있으면
때때로 고요에 닿는다는 걸
그건 허공이니까
두드리면 북소리 나는 공명이니까

불안으로 불안을 넘기도 하는 것처럼
꽃은 그것을 알아보았고 그것은 꽃을 도왔으니

수많은 당신이 불안이었던 걸
이제 말해도 될까

흔들리면서
일어나면서

불안도 꽃인 것을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를 띄엄띄엄 읽다 날 잡은 듯 몰아서 다 읽어 버렸다. <<당신은 첫눈입니까>>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이규리 시인은 차가운 눈과 달리 속이 따뜻한 사람 같다. 인간을 보는 눈은 예리하나 인간을 대하는 태도는 부드럽다. 삶의 속성을 날카롭게 파헤치나 삶을 살아내는 존재들은 다정하게 보듬는다. 예순에 이른(출간 당시) 시인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지는 시집이다.

이규리 시인이 보는 우리 인간은 ˝저마다 아파˝하고(<붕붕 한라봉>), ˝의심과 불안˝을 껍질째 먹고(<껍질째 먹는 사과), 슬픔이라는 ˝찬란에 눈이 베이며 살며 또 견디며˝(<비유법>) 사는 ˝흠 있는 존재˝(<청송사과>)이다. 한마디로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당부한다. ˝넌 누굴 닮아 그 모양이니?˝ 같은 말로 누구에게나 있을 상처를 ˝꾹꾹 눌러 확인하지 마라˝고.(<그늘의 맛>) 왜냐하면 붉은 열매가 되지 못한 파란 열매는 파랗다는 사실만으로 생의 가혹함을 겪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나 불완전해서 인간은 또한 실수하고 실패하고 상처 입히고 산다. ˝절정인 줄 모르고˝ 절정을 놓치고(<벗꽃이 달아난다), ˝잘못 찾은 무덤 앞에서 통곡˝도 하고(<때가 되면>),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수 있다는 걸 모른 채 지낸다(<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불완전해서 불안이 점점 증폭될 수 있다.

어찌해도 가스통은 불안통
그 아슬한 불안들을 앞에 보면서

덜그럭 뭐, 그냥 간다.(<뭐, 그냥 간다>)

인생이란 불안을 싣고 가는 ˝가스통.˝ 불안의 용량이 초과하면 언제고 폭발할 가스통. 그럼에도 ˝덜그럭, 뭐 그냥˝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특별한 일> 중)

˝잘려나간 꼬리˝는 우리가 살면서 잃는 무엇일 것이다. 잃음으로써 얻는 것은 무엇일까. 젊음과 건강을 잃는 대신 지혜를 얻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대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에 대한 연민을 쌓는다(<특별한 일>). 모두가 최선을 다해 산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이 자기 나름의 최선으로 산다는 것쯤은 알게 된다. 최선이라는 것도 저마다의 역량과 경험에 따라 그 모양과 색깔이 다른 법이므로. 그러나 제 꼬리가 잘려 위태위태한대도 꿈틀거리며 기어코 어딘가를 향해 가는 존재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최선은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흔들리면서 / 일어나면서 / 불안도 꽃˝이 된다. 우리 모두는 ˝꽃˝이다.

봄이 성큼성큼 오고 있다. 꽃망울이 꿈틀대며 제 속을 톡톡 연다. 추운 겨우내 꽃을 피우지 못할까 얼마나 불안했을까. 아니 꽃들은 불안해하지 않는다. 불안해하는 것은 내 마음이다. 최선을 다해 줄기를 밀어올려 봉오리를 터뜨리는 꽃들을 지긋이 들여다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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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11 12: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흔들리면서 / 일어나면서 / 불안도 꽃 우리 모두는 꽃


╭ ⁀ ⁀ ╮
( ˘▾˘🌸❀°🌸 )
╰ ‿ 🌸❀° 🌸 ╯

행복한 책읽기님 오늘 멍때리기 잊지 말귀 ~ㅎ시력 보호를 위해!

행복한책읽기 2021-03-11 12:56   좋아요 2 | URL
넹~~~~^^

희선 2021-03-12 0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안도 사람이 늘 느끼는 거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것도 좋게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죠 아니 사람 본능이 본래 위험이 찾아올 것을 많이 생각하기도 한답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3-12 12:50   좋아요 1 | URL
희선님도 시인이시라 역시 뭘 좀 안다니까요. ^^
 
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421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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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5 #시라는별 14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 이성복

언젠가 그가 말했다,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고
(그것은 비정규직의 늦은 밤 무거운
가방으로 걸어 나오던 길 끝의 느티나무였을까)

그는 한 번도 우리 사이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우연히 그를 보기 전엔 그가 있는 줄 몰랐다
(어두운 실내에서 문득 커텐을 걷으면
거기, 한 그루 나무가 있듯이)

그는 누구에게도, 그 자신에게조차
짐이 되지 않았다
(나무가 저를 구박하거나
제 곁의 다른 나무를 경멸하지 않듯이)

도저히, 부탁하기 어려운 일을
부탁하러 갔을 때
그의 잎새는 또 잔잔히 밀리며 속삭였다
ㅡ아니 그건 제가 할 일이지요

어쩌면 그는 나무 얘기를 들려주러
우리에게 온 나무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무 얘기를 들으러 갔다가 나무가 된 사람
(그것은 우리의 섣부른 짐작일 테지만
나무들 사이에는 공공연한 비밀)


이성복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의 발문을 쓴 나무 조각가 홍경님은 이 시집을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을 소세키의 문장을 빌어 표현한다. ˝용케 여태까지 무사히 지내오셨소. / 예, 그럭저럭 어쨌든 무사히 지내왔습니다. / (그러나) 그 마음 또한 그 얼굴처럼 주름이 접혀 파삭파삭 메말라 있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한다.˝(<<유리문 안에서>>, 김정숙 옮김, 민음사 pp. 100, 149)

그렇다. 이 시집을 읽고 있으면 이승에서 60년의 삶을 산 시인이 독자인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듯하다. ‘잘 지내십니까, 고단하시지요, 그래도 오늘 하루 용케 견디셨군요. 삶이 겨울 같지요, 그러나 언제고 봄은 온답니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홍경님처럼 나도 ˝여든두 편의 시와 함께 미소짓고 어깨 토닥이고 한숨 쉬고 손 잡아주고 눈물 글썽이고 쓸쓸해하고 다시 미소 짓기를 반복˝했다.(p 145)

‘오다, 서럽더라‘의 뜻으로 해석되는 <<래여애반다라>>는 나처럼 인생을 반백 년 이상 산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시집이다. 우리 인간은 ‘응애‘ 소리와 함께 이 세상에 던져진 그 순간부터 ˝뜻 없고 서러운 길 위의 / 윷말˝ 같은 존재다.(‘죽지랑을 그리는 노래‘ 중) 목적지향을 꿈꾸나 인생은 결국 정처가 없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렇기에 생은 속절없지만, 인생 초입엔 ˝우리를 받아들인 세상에서 / 언젠가 소리 없이 치워질 줄을 /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는다.(‘식탁‘ 중) ˝속속들이 바람 든 순무˝처럼 어리석어도 괜찮다. ‘來​(오다)의 시기다.

이어 남들과 같아지려고 분투하는 ‘如(여)‘의 시기가 온다. ˝어제도 많이 힘들었겠지만, / 내일 걱정을 다 쓸어 담을 만큼 / 두개골의 용적은 충분하다.˝ 아직은 팔팔하다. 그러다 슬픔이 차오른다. 슬픔은 ˝갈가리 찢긴 암컷의 아랫도리˝에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알들˝(‘뚝지‘ 중)처럼 무더기로 우리 몸 구석구석에 들어찬다. ‘애哀‘의 시기다. 슬프고 애달프고 허물어지고 ˝무언가 안 되고˝(‘극지에서‘ 중) 있지만 그래도 ˝어린 다람쥐처럼 이 생의 저변을 콩닥거리며 뛰어다˝닐 여력이 아직은 남아 있다. ‘반反(맞서다)‘의 시기다. 이제 맞서 대드는 것도 지친다. 하여 돌아보게 되는 것은 돌과 물과 나무와 어둠과 연과 소멸과 남지장사와 북지장사 같은 삶의 면면들이다. ‘다多(많은 일을 겪다)‘의 시기다. 그렇게 50년을 보내고 60에 이른 나는 이런 모습이다.

˝허옇게 삭은 새끼줄 목에 감고 버팀대에 기대 선 저 나무는 / 제 뱃속이 온통 콘크리트 굳은 / 반죽 덩어리라는 것도 모르고˝(‘來如哀反多羅 1‘ 중)

뱃속이 콘크리트처럼 굳어 나는 마치 ˝남의 순간을 사는˝(‘來如哀反多羅 3‘ 중) 존재 같고, 내가 ˝어떤 누구인지˝(‘來如哀反多羅 6‘ 중) 헤아릴 길이 없다. 그런데도 더 살아야 하나. 더 살아 무엇하나. 살아 있음의 속절없음, 하고 있음의 부질없음이 내 속을 박박 긁는다. 그러나 ˝수의처럼 찢어지는˝ ˝걸으며 꾸는 꿈˝(‘來如哀反多羅 7‘ 중)에 불과하고 ˝애초에 잘못 끼워진˝ 단추 같고 ˝장난기 가득한˝(來如哀反多羅 9) 생일지라도 우리는 끝끝내 살아야 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들 그렇게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기에. 이 깨달음 앞에서 나는 ‘羅라‘, 비단처럼 펼쳐질 수 있다.

아메리칸원주민들에게 나무는 ‘서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주목나무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사는 나무이다. 우리의 생도 어쩌면 그러할지 모르겠다. 한 생은 짧지만 그 생의 앞과 뒤를 잇는 역사성을 생각하면 이 생이 결코 짧은 생이 아닐 수 있겠고, 그렇기에 무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여기까지 살아낸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

나는 올해 이성복 시집을 모조리 읽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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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25 1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의 순간을 사는 존재 같고, 내가 ˝어떤 누구인지 헤아릴 길이 없다.]
이 문장은 인생의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하는 문장
아메리칸원주민들에게 나무는 ‘서 있는 사람‘ 천년이 지나도 나무, 천년이전의 세계에서도 나무
코로나 질병으로 인간의 수명을 확 줄이거나 사라져버리게 만든
지구 생태계를 위협한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자연의 무섭운 섭리, 생명을 존중하라는 깨우침이라는것,,,,


행복한책읽기 2021-03-01 09:21   좋아요 1 | URL
제 생각엔 스캇님이 저보다 시 읽는 눈이 밝아 보이십니다. 읽기 도사 같으심 ㅋㅋ

희선 2021-02-27 02: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성복 시인 시집 다 보시기로 하셨군요 즐겁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가끔 사는 게 덧없고 뭔가 하는 게 무슨 뜻이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 없겠지요 그게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부질없고 덧없다 해도 사는 동안은 괜찮겠지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3-01 09:21   좋아요 0 | URL
즐겁게 만나려 했는데 급 좌절 중이요 ㅡㅡ

라로 2021-03-01 0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진 결심이에요!! 응원합니다!! 빠샤~~~

행복한책읽기 2021-03-01 09:23   좋아요 0 | URL
라로님 응원에 힘입어 꿇은 무릎 다시 세워보지요. 영차!!! 감솨!!!^^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 에밀리 디킨슨 시선 1
에밀리 디킨슨 지음, 박혜란 옮김 / 파시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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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2 #시라는별 13

군함 없이도 책 한 권이면 돼
-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군함 없이도 책 한 권이면 돼
우리를 멀리 대륙으로 데려다주지
군마 없이도 한 페이지면 돼
시를 활보하지ㅡ
이런 횡단이라면 아무리 가난해도 갈 수 있지
통행료 압박도 없고ㅡ
인간의 영혼을 실을
전차인데 이다지도 검소하다니ㅡ

There is no Frigate like a Book
To take us Lands away
Nor any Coursers like a Page
Of prancing Poetryㅡ
This Traverse may the poorest take
Without oppress of Tollㅡ
How frugal is the Chariot
That bears the Human Soulㅡ


파시클 출판사에서 2018년에 출간한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 첫 권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을 거의 한 달 만에 다 읽었다. 디킨슨의 시는 거의가 짧아서 맘 잡고 읽으면 몇 시간만에 완독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느릿느릿 쉬엄쉬엄 읽었다. 이 시집에는 총 56편의 시가 실려 있다. 번역가이자 파시클 출판사 대표인 박혜란님은 디킨슨의 시들 중 자신이 특히 좋아하는 시들을 첫 권에 담았다고 한다. 또한 독자들에게 ˝에밀리 디킨슨을 읽는 즐거움에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시들을 골랐다고. 그런 점에서 절반은 성공한 듯하다. 기존에 출간된 디킨슨의 시집들에 소개되어 있는 시들이 많아 낯설지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문도 함께 수록돼 있어 영시로 읽기를 원하는 독자는 디킨슨의 시가 가진 군더더기 없는 응축의 정수를 십분 맛볼 수 있다.

내가 절반의 성공이라 한 것은 번역의 아쉬움 때문이다. 시는 사실 번역이 가능한 것인가에 의문 부호가 붙을 수밖에 없는 영역 같다. 산문 번역과 달리 운문 번역은 내용 전달 뿐 아니라 운율도 살려야 하는 애로가 따른다. 박혜란 번역가는 디킨슨만의 줄표 기호와 간결함을 잘 살려 번역했다. 이렇게 다듬기까지 얼마나 노고가 컸을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다. 내용 번역은 대체로 깔끔한데, 아주 가끔씩 오역이 보인다. 저번에 올린 ‘희망은 한 마리 새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가 그랬다. 물론 시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고, 번역가의 말대로 읽는 맥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원문을 실은 건 번역가에게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나처럼 이런 딴지를 거는 독자가 없지 않으리라 예상하지 않았을까. 예상했을 것이고 그럼에도 용기를 발휘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좋아한다. 대학원 시절 디킨슨의 영시를 읽고 차암, 좋다, 고 생각은 했지만 생활에 치여 다른 관심사에 쫓겨 시중에서 볼 수 있는 시집 외에 다른 것을 일부러 찾아 읽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서 파시클 출판사에서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계속 출간해 주고 있어 기쁘고 고맙다. 디킨슨 시 전집 첫 권인 이 책은 시인의 주관에 입각해 여덟 개의 소제목으로 나눠 시를 소개한다. 파트별로 나름의 주제가 있다.

‘파시클 fascicle‘은 분할 간행되는 책의 한 권을 뜻하는 말이다. 에밀리 디킨슨이 생전에 발표한 시는 7편 정도에 불과하다. 그녀의 시는 당시의 문학계에서는 수용하기 힘든 파격성과 도발성을 띤 실험시들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디킨슨은 평단에서 외면 당한 후 자기 스스로 평단을 외면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 시를 쓰는 일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읽고 날마다 썼다. 그녀가 글을 쓰는 시간은 매일 새벽 세 시부터 아침 식사 준비 전까지였다. 그렇게 쓴 시들을 40여 편씩 묶고 바느질로 엮어 책자를 만들었다. 그런 책자를 ‘파시클 fascicle‘이라고 부른다. 디킨슨이 이렇게 만든 시집은 모두 44권이었고 시의 수는 무려 1800여 편에 이르렀다.

에밀리 디킨슨은 1830년 12월 10일에 태어나 1886년 5월 15일에 눈을 감았다. 인생 후반부에는 ‘신경쇠약‘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증은 오래 전부터 내재되어 있던 질환이었을 것이고, 어느 순간 통증이 격발했을 것이다. ˝나를 피곤하게 하는 것은 오랫동안 쌓여온 슬픔이야. 그게 전부야.˝(<<진리의 발견>> 586쪽) 라고 디킨슨은 한 친구에게 말했다. 마리아 포포바는 고작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에밀리 디킨슨을 삶을 두고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달랠 길 없는 슬픔을 품은 채 그토록 오랫동안 살기 위해서는 영웅적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느낀다. 에밀리 디킨슨은 가장 사랑하는 친구, 통렬할 정도로 가장 가까웠던 친구를 36년 동안 자신의 온 존재를 다해 사랑했다.˝(<<진리의 발견>> 609쪽)

달랠 길 없는 슬픔. 디킨슨이 사랑한 사람은 친구이자 오빠의 아내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을 먼 발치서 바라보며 그녀는 ˝달랠 길 없는 슬픔˝을 시로 달랬다. 그 위안이 얼마나 컸을까만은 55세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을 줄만큼은 되었다. 오랜 세월 시인은 분명 뼈가 깎이는 고통을 겪었을 테지만, 깎인 뼛가루에서 ‘시‘라는 사리가 탄생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수천 개가. 그 구슬들은 하나같이 반짝거렸다.

에밀리 디킨슨은 이십 대 후반부터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그녀는 두 개의 창이 있는, 햇살 잘 드는 작은 방에서 가로세로 대략 45센티미터의 책상에 앉아 세계를 누볐다. 책이라는 ˝군함˝을 타고 시라는 ˝군마˝를 타고 대륙을 넘나들며 사랑과 상실,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아름다움과 추함, 읽기와 쓰기의 즐거움을 노래했다. 디킨슨의 시를 읽는 것은 그 노래를 듣는 것이다. 이 노래에는 다운로드 비용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가난해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노래를 매일 들어볼까 일단 생각만 해본다.^^;;;

If I read a book and it makes my whole body so cold no fire can warm me I know that is poetry. If I feel physically as if the top of my head were taken off, I know that is poetry. These are the only way I know it. Is there any other way?
내가 읽은 책 한 권이 내 온몸을 어떤 불로도 데울 수 없을 만큼 싸늘하게 만든다면, 그게 시예요. 마치 정수리부터 벗겨지는 느낌이 들게 한다면, 그게 시예요. 나는 시를 이렇게밖에 알지 못해요. 다른 방법이 있나요?
ㅡ 에밀리 디킨슨이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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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2-22 0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군함이란 단어보고 처음에 응?뭐지 했다가 감탄했네요! 시에 있어서의 번역. 전에 팔스타프님이 한국의 어떤 시를 올려주셨는데 그걸 보니 그 문제가 보다 더 와닿더라구요.
‘작은 방에서 세계를 누비다 ‘이 말도 너무 좋으네요!!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2-23 10:01   좋아요 1 | URL
ㅎㅎㅎ 미미님은 글을 넘 잘 읽어주셔 참 고마워요. 디킨슨은 시의 압축미를 가장 잘 표현한 시인 같아요. 어려운 말로 식자연하지도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이유^^

scott 2021-02-22 1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랑과 상실,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아름다움과 추함, 읽기와 쓰기의 즐거움을 노래했다. 디킨슨의 시를 읽는 것은 그 노래를 듣는 것]
˝아무리 가난해도˝ 들을 수 있는 시,에밀리 디킨즈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시네요.
저도 매일 라이브러리 오더블에서 에밀리의 시 한편씩 들어야겠네요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Emily Dickson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That perches in the soul
And sings the tune without the words
And never stops - at all

And sweetest - in the Gale - is heard
And sore must be the storm
That could abash the little Bird
That kept so many warm

I’ve heard it in the chillest land
And on the strangest Sea
Yet - never - in Extremity,
It asked a crumb - of me

희망은 날개가 달린 것



에밀리 디킨슨



희망은 영혼 속에 앉아 있는

날개가 달린 것이다.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르며

결코 그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거친 바람 속에서 가장 달콤한 노래 부른다.

아무리 매서운 폭풍일지라도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따스하게 감싸준

그 작은 새를 당혹하게 할 수는 없으리라.



나는 가장 추운 땅에서도,

가장 낯선 바다에서도 그 노래를 들었다.

그러나 어떠한 극한상황 속에서도 결코

그것은 내게 빵 한 조각 달라고 하지 않았다.


행복한책읽기 2021-02-23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cott님의 영역은 무궁무진하신 듯. 라이브리리 오더블. 지는 아직 전자책과 오더블 세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어요. 그저 종이책이 좋아서리. 암튼. 같이 읽거나 듣게 돼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