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3 #시라는별 52 

버킷리스트 
- 이산하 

요즘 ‘다음 차례는 너‘라는 듯 지인들의 부고문자가 쌓인다. 
내 눈에는 내 잉여목숨의 고지서로 보인다. 
허공이 초점 없이 나를 내려다본다. 
40대 중반 서교동 골목길의 교통사고와 
50대 초반 합정동 골목길의 백색테러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반품된 후 모든 게 허망해지고 
오랫동안 애써 부정하고 망각했던 고문의 악몽마저 되살아나 
날마다 피가 하늘로 올라간다. 
우울증 알약으로 버티며 내 살점을 베어 멀리 이송하지만 
그마저 반품되자 벼랑의 꽃처럼 더욱 조급하고 초조해진다. 
언제 다시 또 죽음의 그림자가 급습할지 몰라 더 늦기 전에
수배 4년 동안 나를 ‘은닉‘ 혹은 ‘묵인‘해준 119명의 실명을 
여기 시 한 줄로나마 깊이 새겨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자 하며 
그나마 내 체포 뒤 한 사람도 연행되지 않아 큰 다행이었다. 
그 얼굴들 하나씩 떠올리며 새벽에 물안개처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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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시인은 1979년 대학생이 되었다. 나는 그보다 10년 뒤 대학생이 되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교정에 ‘백골단‘이라고 불리던 사복 경찰이 어슬렁거리지 않았다. 학교 안에선 고민은 있었지만 공포는 없었다. 옛날보다 운동하기 좋아졌어 라며 선배들이 투쟁 미담처럼 들려준 87년 이전의 교내 시위 에피소드 중 하나.

˝점심 시간에 말이야. 용감한 여학생이 옥상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 창문을 깨뜨리고 식당으로 들어와. 메고 있던 가방에서 유인물을 꺼내 밥을 먹고 있는 학생들에게 흩뿌리며 소리쳐. ‘독재 정권은 물러나라! 물러나라!‘ 그와 동시에 어딘가 있던 백골단 놈들이 후다닥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 그러면 여학생도 숨이 넘어갈 듯이 내달려 서로 둘러 앉아 밥을 먹고 있는 학우들 사이로 슬쩍 끼어들어. 마치 전부터 거기 앉아 있던 것처럼 말이지. 그러나 숨도 채 고르지 못했을 때 백골단 놈들이 다가와 그 여학생의 머리를 확 잡아채며 말하지. ‘요년, 이렇게 숨어 있으면 모를 줄 알았지. 얼른 나와!‘

이산하 시인은 그런 엄혹했던 시절 대학을 다녔다. 그는 정의와 민주를 지향하는 피 끓는 청춘이어서 독재 치하의 불의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친 여학생, 그 여학생이 뿌린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는 일을 한 사람이 이산하였다. 그 혐의로 그는 일찍부터 수배선상에 올라 오랜 기간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도피 4년째 되던 해인 1987년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장편 서사시『한라산』을 발표하면서 기어이 구속되고 만다. 스무살 대학 새내기가 장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스물여덟 살 때였다.

이산하 시인이 수배 기간 중에, 복역 중에, 감옥을 나와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쓴 시들을 통해 그의 고통을 짐작만 해볼 뿐이다. 그러나 ˝날마다 피가 하늘로 올라˝가는 ˝악몽˝과 ˝우울증 알약으로˝ ˝살점을 베˝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는 삶을 헤아리기란 역부족이다. 하여 다만 읽을 뿐. 아플 뿐. 나눌 뿐.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고 시인은 말했으나, 그 말을 보기 좋게 뒤엎은 시가 <버킷 리스트>이다. ˝비범성이 없는˝ 평범한 악이 도처에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두려움을 무릅쓰고, 때론 죽음을 불사하고 친구를, 아우를, 형을, 제자를 지켜준 아름다운 이들이 있었다. 이산하 시인을 ˝‘은닉‘ 혹은 ‘묵인‘˝해 주었다는 119명의 이름을 치는 동안, ˝그 얼굴들 하나씩 떠올리며 새벽에 물안개처럼 울었다˝는 이산하 시인의 말이 심장 언저리를 맴돌았다. 저들이 연행되지 않아 다행이고, 이산하 시인이 살아 주어 다행이다.

살아 있어야 날마다 가을맞이 열일하는 구름을 보며 살 기운을 더 내볼 수 있다. 시인처럼 나도 나를 살게 한 이들의 ‘버킷리스트‘를 써보아야겠다. 그 리스트 최상단에 오를 이는 단연코 나의 엄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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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8-23 06:5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시와 글의 내용이 좀 가슴이 아프네요 ㅜㅜ 그래도 사진에는 희망이 보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8-24 00:32   좋아요 3 | URL
그럼요. 희망도 고문이 되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은 있죠. 잠깐의 취하는 행복감이 긴 시간을 버티게 해준다고 저는 믿어요.^^

mini74 2021-08-23 10: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산하 시인 ㅠㅠ 이 책을 내셨군요. 큰언니가 가끔 그때 이야기해요.백골단. 그리고 사복입고 대학생인척 하던 경찰들. 눈빛이며 행동이며 표가 확 나는데. 참 무서웠다고 ㅠㅠ

행복한책읽기 2021-08-24 00:34   좋아요 4 | URL
어머. 큰언니가 그 시절 대학을 다녔군요. 정말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학교조차 살얼음판이라니오. 야만의 시대였어요. 이만큼 숨통을 트이게 해준 분들에게 고마워하고 살자 생각해요.^^

미미 2021-08-23 11:5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열일하는 구름들~♡ 요즘 하늘을 보면 어찌나 황홀한지 미켈란젤로의 구름도 한번씩 보이더라구요.
백골단..그 여학생은 끌려가 무슨일을 당했을까요ㅠㅠ 살벌한 시대가 아직도 세상 곳곳에서 진행 중이란것도 가슴아픈일이네요ㅠ

행복한책읽기 2021-08-24 00:36   좋아요 3 | URL
그죠. 요즘 하늘은 보는것만으로 넘 찬란찬란. 이 찬란함에 찬물 끼얹는 일들이 제발제발 줄어들기만을 바래요.

붕붕툐툐 2021-08-23 22: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이 시집 읽고 있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8-24 00:41   좋아요 3 | URL
툐툐님 진정 좋아하실 것임. 주의. 좀 아프고 많이 찔립니다^^;;;

붕붕툐툐 2021-08-27 02:26   좋아요 1 | URL
진짜 진정 너무너무 좋았어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렇게 시 소개 안해주셨으면 안 읽어봤겠지만 시집의 맥락 안에서 읽으면 <버킷리스트>에서 감동 쓰나미가 100배~
진짜 이건 다들 시집으로 꼭 읽어보셨음 좋겠어요~ 흐엉흐엉~~

행복한책읽기 2021-08-27 11:20   좋아요 1 | URL
툐툐님 다 읽으셨어요?? 저는 아직두 읽는 중인데. 맞아요. 맥락 안에서 읽음 진짜 감동 쓰나미. 툐툐님이 좋아할 거라 예상했지만 너무너무라 해서 지두 감동 쓰나미^^

scott 2021-08-23 22: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날마다 피가 하늘로 올라˝]갔던 시인의 삶이 그의 시어 속에서도 느껴집니다
버킷 리스트 작성하기전 오늘 ,지금 이순간 열쉼히! 살아야 하겠죠 ^ㅅ^

행복한책읽기 2021-08-24 00:42   좋아요 3 | URL
지당한 말씀. 이 순간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는 이가 scott님 같습니다. 대단대단^^

희선 2021-08-24 00: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70년대 대학교는 무서웠겠습니다 그때 대학생이 싸워서 지금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때뿐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많은 사람 덕분에 지금이 있네요 이산하 시인이 힘들었겠지만, 많은 사람이 도와줘서 살아 있군요 어쩌면 한사람은 많은 사람 도움을 받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8-24 00:48   좋아요 2 | URL
정곡을 지적해주시네요. 네 우리 모두는 많은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걸 모르고 살 때가 넘 많죠. 그걸 재인지시켜 주는 데 책만한 것이 없는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