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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맨 앤드 블랙
다이앤 세터필드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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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보다 뇌가 먼저 죽어가고 있는 엄마 생각이 납니다. 동전의 양면 같은 삶과 죽음의 세계를 그로데스크하게 그려놓았나봐요.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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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기억 보르헤스 전집 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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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를 처음으로 진득하게 읽었다. “읽다”는 의미에 “이해한다”는 의미가 곁들여져 있다고 본다면 사실 “읽었다”라고 말하기에는 낯 뜨거움을 배제할 수 없다. 보르헤스 글의 첫 느낌은 어렵다, 벅차다가 맞을 것 같다. 그리고 음미하지 않고, 이해 없이 글자만 읽어내려가는 경우엔 이보다 더 좋은 수면제가 없는 듯하다. 밤늦게 이불 밑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들여다보면서 읽다 졸다 읽다 졸다를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그의 글이, 아니 더 정확하게는 글의 분위기가 머리맡에서 둥둥 떠다니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 그렇게 그 힘에 이끌려 뒤죽박죽으로 책을 다 읽었다.

보르헤스의 방을 방문하고 온 느낌이라고나 할까. 문제는 이 방에 문이 수도 없이 있다는 것.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방에 또 다른 문들이 있고, 그 중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문들이 있고 . . . 또 있고. . . 또 있고. . . 미궁 속 같아 어지럽고 답답한데도 호기심이란 놈이 자꾸만 그 문을 열게 만드는 . . . 어쩌면 그것이 보르헤스의 힘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난해하지만, 생살을 씹었을 때 조금씩 배어나오는 쫀득쫀득한 단맛처럼 특이한 맛깔스러움이 있다.

민음사의 보르헤스 전집 5는 단편집 『모래의 책』(1975)과 『셰익스피어의 기억』(1983) 두 권을 묶어서 펴낸 책이다. 보르헤스는 장편소설은 한 번도 쓰지 않고 단편소설만을 썼다고 한다. 이 책에는 17편의 단편과 『모래의 책』에 대한 작가의 후기가 수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들은 「셰익스피어의 기억」「파란 호랑이들」 「모래의 책」이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에서 헤르만 세르겔이란 화자는 다니엘 토프라는 사람에게서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받는다. 셰익스피어가 인생의 최종 목적지였던 그로서는 “바다를 제공받는 것” 같은 환희를 느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셰익스피어의 기억은 “억압과 공포”로 바뀐다. 셰익스피어를 기억할수록 헤르만 세르겔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잃어갔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려움과 함께 내가 모국어를 잊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의 자기 정체성은 기억에 근거하고 있는지라 나는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 . /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모든 사람은 늘어가는 기억의 무게를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된다. 두 기억은 이따금 서로 뒤섞이면서 나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어쨌거나 나의 기억과 또 다른 사람의 기억은 서로 교통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 스피노자는 <모든 것은 자신의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192) 

결국 그는 아무 데나 전화를 걸어 지적인 음성을 가진 누군가에게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떠나보내고 해방감을 맛본다. 하지만 그것은 반쪽 해방감일 뿐이다. 이 작품에서 보르헤스가 이야기하는 기억의 문제는 실로 흥미롭다. 사실 화자가 얻게 된 셰익스피어의 기억은 셰익스피어의 생애 전체가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기억하는 기억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를 모조리 기억할 수 없다. 책을 읽었다고 해도 일부만 기억할 수 있다. 기억이란 재봉에는 그렇게 여기저기 빈 땀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백과사전을 구입한다고 해서 그가 모든 행, 모든 단락, 모든 페이지, 모든 삽화를 다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그러한 것들 중 어떤 것을 알게 될 가능성만을 얻게 되는 것이다. . . / 아무도 한 순간에 자신의 과거 전체를 회상할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셰익스피어도 그의 부분적 상속인인 나에게도 그러한 선물은 주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기억은 종합이 아니다. 그것은 무규정적인 가능성들의 혼돈이다. . . / 마치 우리들의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기억은 그 스스로에 의해 자발적으로 배척한 어둠의 지역들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셰익스피어의 기억」189)

더 나아가, 보르헤스는 한 번 들어온 기억은 완전히 지울 수 없다고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다른 누군가에게 주었지만, 화자는 새벽이면 또 다른 자가 되어 꿈을 꾼다. 어떤 묘책도 소용이 없다. 이 대목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는, 그 모든 행위들이 어쩌면 다른 누군가의 기억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 . . 그래서 나란 존재에 여러 사람의 기억들이 혼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 . . 그것으로부터 나란 사람이 완성되어 가지 않을까 하는. . . 흠 . . . 더 생각해볼 일이다.

「모래의 책」은 페이지 수가 무한한 어떤 책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떤 페이지도 첫 페이지나 마지막 페이지가 될 수 없는 무한 분량의 책을 통해 보르헤스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한의 수는 그 어떤 수도 받아들인다는 것”(136)인 듯하다. 페이지가 정해져 있다고 해도 모든 책은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 그 점에서 현대판 괴물의 존재를 통해 인간의 감지 능력 너머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이야기한 「더 많은 것들이 있다」라는 단편과 상통하지 않나 싶다. 

어떤 사물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 흔들의자는 사람의 몸, 관절들과 사지를 연상케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가위는 자르는 행위를. 등 하나, 또는 자동차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야만인은 선교사의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행자들은 선원들이 보는 것과 똑같이 밧줄들을 보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세계를 보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더 많은 것들이 있다」65) 

「파란 호랑이들」은 그 수가 감소하기도 하고 증식하기도 하는 마법의 파란 돌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기 증식하는 돌들은 수학적 질서를 거부한다. 그런데도 화자는 그러한 붕괴 속에서 어떤 질서를 찾으려 애쓴다. 카오스 이론을 적용한 이 이야기에서 재미난 대목은 홀로 있는 돌은 증식되거나 사라져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화자가 획득한 최대의 수는 419이고, 최소의 수는 3이다. 수학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수학을 파괴하는 돌의 무게에 짓눌리고 혼돈에 휩싸인 화자는 그는 어느 날 적선을 바라며 손을 내미는 한 거지에게 자신이 가진 파란 돌을 떨어뜨려 준다. “내 적선은 무시무시한 것”이라고 말하는 화자의 말보다 더 무시무시했던 것은 거지의 답이었다. “나는 당신의 적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오. 그러나 내 것은 무시무시한 것이오. 당신은 낮과 밤, 분별력, 일상적 습관, 그리고 세상을 되찾게 될 거요.” 혼돈보다, 무질서보다 세상에 정해 놓은 룰에 갇히게 될 거라는 의미 같아서 나는 오히려 더 섬뜩했다.

이 세 편의 단편들 외에 20대의 보르헤스와 60대의 보르헤스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타자」, 70대의 보르헤스가 80대의 보르헤스를 만나는 「1983년 8월 25일」, 하룻밤과 아침 나절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사랑과 죽음이라는 삶의 두 가지 본질적인 사건을 경험하는 「은혜의 밤」(풍자적인 제목이다), 사람의 개별성을 나타내는 이름이 없고, 불필요한 책을 생산해내는 인쇄술이 사라지고, 100세가 되면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미래 세계를 그린 「지친 자의 유토피아」도 재미있게 읽었다. 이 작품집에서 내가 두 번을 읽고도 이해를 못한 단편은 「의회」이다. 후기에서 보르헤스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야심작이라고 말했지만, “너무 거대해서 우주, 모든 날들의 총합과 혼동되는 어떤 조직체에 관한 것”이라는 그의 설명에도 나는 이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고 보르헤스의 글이 주는 생각의 여운도 누릴 수가 없었다. ㅠㅠ. 

무수한 책에서 인용으로만 접했던 보르헤스의 작품을 실제로 읽어 보니, 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인용하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 그의 상상의 세계는 지평선처럼 끝이 없어 보인다. 작품을 모두 읽고 싶은 정도로(너무 힘들어서리...) 보르헤스에게 매료되진 않았지만, 삶에 찌들려 내 생각의 날갯짓이 허우적거릴 때쯤 다시 찾고 싶은 작가이다. 

- 기실 그 새롭다는 것들 속에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없고, 그것들은 단지 원래의 것들에 대한 변형들에 불과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 거다.(「의회」31)
- 모든 모임은 나름의 방언과 의식들을 탄생시키는 경향이 있다.(35)
- 단어란 공유된 기억을 담고 있는 상징들이다.(54)
-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다시 안다는 것을 뜻한다는 플라톤의 이론을 들먹였다. 나의 어머니가 배우는 것은 다시 기억하는 것이고,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 망각했다는 것이라는 말이 베이컨이 쓴 글에 나와 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은혜의 밤」73)

- 시력 상실은 암흑이 아니야. 그것은 고독의 한 형태지.「1983년 8월 25일」151)
- 나는 그것을 말로 뭐라 표현할 수가 없어. 모든 단어는 경험을 선전제로서 요구하니까 말이야. (「1983년 8월 25일」153)

- 나이가 들면 사람은 많은 것을 위장할 수 있지만 행복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셰익스피어의 기억」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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