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9 #시라는별 83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 황동규

부동산은 없고
아버님이 유산으로 내리신 동산動産 상자 한 달 만에 풀어보니
마주앙 백포도주 5병,
호주산 적포도주 1병,
안동소주 400cc 1병,
짐빔 Jim Beam 반 명,
품 좁은 가을꽃 무늬 셔츠 하나,
잿빛 양말 4켤레,,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 장.

가족 모두 집 나가 오후
꼭 끼는 가을꽃 무늬 셔츠 입고
잿빛 양말 신고
답답해 전축마저 잠재우고
화분 느티가 다른 화분보다 이파리에 살짝 먼저 가을물 칠한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실란 꽃을 쳐다보며 앉아 있다.
조그맣고 투명한 개미 한 마리가 실란 줄기를 오르고 있다.
흔들리면 더 오를 생각 없는 듯 멈췄다가
다시 타기 시작한다.
흔들림, 멈춤, 또 흔들림, 멈춤
한참 후에야 꽃에 올랐다.
올라봐야 별볼일 있겠는가,
그는 꼿꼿해진 생각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다.
저녁 햇빛이 눈 높이로 나무줄기 사이를 헤집고 스며들어
베란다가 성화聖畫 속처럼 환해진다.
추억이란 애써 올라가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이 아닐까.
어느샌가 실란이 배경그림처럼 사라지고
개미만 투명하게 남는다.

그가 그만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지난해 읽은 신형철의 시화 <<인생의 역사>>에서 발견한 시다. 이 시를 읽으면서, 아니 이 책을 읽으면서 새해가 되면 #시라는별 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알라딘 서재에 깃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긴 글을 쓰겠다, 잘 쓰겠다는 욕심만 접는다면 글을 올리는 그 자체가 뭐 그리 대수랴. 물론, 정보가 넘쳐 나는 SNS 시대에 이 글이 읽을 가치가 있느냐는 자책도 접어놓자. 지금은 ‘시작‘이 중요하니까. 다행히, 시는 언제든 읽을 만하지 않은가.

이 시는 제목이 그저 멋있다.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라니. 그 의미를 황동규 시인은 신형철 평론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한다. ˝내 외로움은 가볍습니다.˝(<<인생의 역사>> 137쪽). 이 말씀이 인상적이었다고 신형철 평론가는 적었는데, 나 역시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가벼운 외로움. 아비가 떠나고 혼자가 된 상태, 부빌 언덕이 없어진 상태를 시인은 ˝홀로움˝이라고 표현했다.

{추억이란 애써 올라가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이 아닐까}

추억에 사로잡혀 생각이 꼿꼿해진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땐 세상은 적막하고 나는 외롭다. 쓸쓸하게, 컴컴하게, 외롭다. 개미는 그 외로움 끝에 올라 앉아 있는 시인 자신이다. 개미가 ˝그만 내려오기를,˝ 어둠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 끝에 도달한 곳, 거기가 ˝환해진 외로움˝에 이른 ˝홀로움˝이다.

나도 거기에 닿고 싶다.


플친님들 건강들 하시죠. 해피뉴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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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1-09 12: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책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행복한책읽기 2023-01-09 20:08   좋아요 2 | URL
나무님. 반가워요.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scott 2023-01-09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읽기님 2023년 새해 복 마뉘 🤗

행복한책읽기 2023-01-09 20:10   좋아요 1 | URL
스콧님~~~~방가방가. 보고 싶었네요. ㄱㅋ 새해에도 건강하귀. 복 듬뿍 받귀~~~~^^

페넬로페 2023-01-10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하면 행복한책읽기님의 우뚝 솟은 자태를 아무도 넘보지 못하죠!
반가워요.
잘 지내셨지요?
자주 글 올려주세요^^

새파랑 2023-01-10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읽기님 오랜만입니다~!! 2023년에는 시 전도사로 돌아와주세요 ^^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