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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ㅣ 창비시선 279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평점 :
20210708 #시라는별 47
넘어짐에 대하여
- 정호승
나는 넘어질 때마다 꼭 물 위에 넘어진다
나는 일어설 때마다 꼭 물을 짚고 일어선다
더이상 검은 물속 깊이 빠지지 않기 위하여
잔잔한 물결
때로는 거친 삼각파도를 짚고 일어선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만 꼭 넘어진다
오히려 넘어지고 있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면 넘어지지 않고
천천히 제비꽃이 핀 강둑을 걸어간다
어떤 때는 물을 짚고 일어서다가
그만 물속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아예 물속으로 힘차게 걸어간다
수련이 손을 뻗으면 수련의 손을 잡고
물고기들이 앞장서면 푸른 물고기의 길을 따라간다
아직도 넘어질 일과
일어설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일으켜세우기 위해 나를 넘어뜨리고
넘어뜨리기 위해 다시 일으켜세운다 할지라도
정호승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포옹>>에는 총 66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정 시인의 시들은 아주 난해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쉽지만도 않은데, 이 시집은 일단 잘 읽힌다. 모든 시가 마음에 차는 건 아니지만 몇 편에 한 번씩, 혹은 연달아 아, 하는 탄성을 지르게 한다.
산다는 것은 결국
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작고 낡은 의자에 한 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중)
정호승 시인은 1950년생이다. 이 시집은 시인의 나이 58세 때 출간되었다. 지천명을 넘어 예순을 바라보는 시기.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을 때 찾아드는 감정이 있다. 지금껏 무엇을 하고 살았나. 산다고 살았는데 왜 손에 쥔 것이 없나. 그런 마음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이
너덕너덕 누더기가 되어 밤하늘에 걸려 있다 (<다시 자장면을 먹으며> 중)
"누더기" 인생에 남은 것이라곤 "부러진 나무젓가락과 먹다 만 단무지와 낡은 칫솔 하나뿐"이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다시 자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아무렴. 황천길도 식후사(食後事)가 아니겠는가.
배는 부르나 늙어가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늙으면 밥이 똥이 되지 않고 돌이" 되곤 한다. 똥을 못 눠 관장약을 항문 깊숙이 밀어넣어야 하는 늙은 아비를 보며 시인은 늙음의 처량한 현실을 직시한다.
사람이 늙은 뒤에 또다시 늙는다는 것은
밥을 못 먹는 일이 아니라 똥을 못 누는 일이다 (<노부부> 중)
"똥을 못 누는" 나이가 되도록 살고픈 이가 누가 있을까마는 저승길은 내가 정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사는 데까지 살다 갈 생이 그리 길지 않을 때 찾아드는 또 다른 감정은 이런 것이 아닐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려고 뛰어가지 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잔해라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중)
움켜쥔 손을 놓기. 환갑을 앞둔 중년의 시인이 얻은 혜안이다. 젊은 날엔 무엇이든 붙잡으려 애를 쓴다. "나를 가방 속에 구겨넣고"서라도 (<가방>) 날마다 출근 도장을 찍고 "남들이 가진 것을 다 가지려" 아등바등한다.(<옥산휴게소>) 그렇게 나를 향해, 오직 나를 위해 쓰이는 손가락을 시인은 어느 순간 가차없이 잘라버리고 하나는 "불국사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 또 하나는 땅에 심는다."( <손가락>) 잘린 두 개의 손가락이 썩어 문드러질지,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할지는 알 수 없지만, 잘려서 비게 된 자리에 우리는 나 아닌 다른 것을 들일 수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늙어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 한 켠에 타인의 자리를 내주는 일이기도 하다. 연민의 자리를 말이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기보다는 덜 아프게 넘어지는 법을, 넘어지더라도 더 가뿐히 일어서는 법을 체득하는 것이 나으리라. 그러니 넘어질 때는 꺼끌꺼끌한 시멘트 바닥이 아닌 말랑말랑한 "물 위로" 넘어질 것이며, "물을 짚고 일어서다" "물속에 빠질" 것 같으면 물고기처럼 힘차게 물을 차고 나아가면 될 일이다. "아직도 넘어질 일과 / 일어설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시인의 말처럼 "큰 축복"이 되려면 시들어갈 일밖에 없는 나와 너를, 장차 뼈만 남게 될 나와 너를, 신석기 시대의 한 부부처럼 꼭 껴안아주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너와 내가 서로 포옹하고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삶은 결국 이런 것일 테니.
사람 사는 일
누구나 마음속에 절 하나 짓는 일
지은 절 하나
다시 허물고 마는 일 (<지하철을 탄 비구니>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