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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바람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월
평점 :
20230330 #시라는별 84
서쪽 바람 West Wind
- 메리 올리버 Mary Oliver
1
내생이라는 게 있다면, 나와 함께 갈래? 그때까지도? 우리가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면, 함께인 게 좋겠지. 상상해봐! 작은 돌멩이 두 개, 갈매기 날개 아래 붙어 안개를 헤치고 날아가는 벼룩 두 마리! 아니면, 풀잎 열 장. 레이스로드 가장자리에 뒤엉켜 있는 인동덩굴 열 줄기! 해변자두! 겨울 숲으로 미끄러지듯 날아들어 먼지 빛깔 리기다소나무와 결합하여 아주 조그맣게
소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소리 내는 눈송이들. 아니면, 바다 위로 내달리며 수면에 마맛자국 내고 래커 칠하는 회색의 빛, 비. 오전내 그리고 오후까지, 서쪽 바람의 젊음과 풍부함, 즐거움에서 나와 프로빈스타운의 지붕들을 탁탁 두드려대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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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8
그 젊고 키 큰 영국 시인ㅡ곧 죽음을 맞이할 자, 작은 배 타고 푸른 연무를, 그다음엔 폭풍을, 그다음엔 선회하는 잿빛 파도의 문턱을 지나게 될 자ㅡ친구를 만나러 피사에 갔지. 친구를 만나 화창한 오후를 함께 보냈지. 나는 이 시인을 사랑하고, 그건 여기서든 저기서든 아무 의미도 없지만 내 마음속 정원과도 같지. 그러니 내 사랑은 자신에게 주는 선물. . . . . (중략)
10
어둠은 어둠다운 일을 하지
작디작은 날개를 지닌 무언가가
나무껍질의 엄지손가락 아래서 떨고 있어.
바다는 은빛 재킷을 입고 숨을 쉬어
밖에서는, 달빛 아래, 격자에 매달려,
꽃들이 피어나,
저마다 어려운 생각처럼 멋지게 펼쳐져.
그렇게 우리는 함께 어둠을 건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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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12
귀뚜라미는 사실 난로가 아니라 냉장고 밑 카펫 덤불을 찾아든 거였어. 위에서 울리는 위잉 소리와 친구 되었고, 거기서 밤낮으로 신의 가장 귀중한 선물이 나왔지. 온기. 특히 저녁때면 귀뚜라미는 행복해서 노래를 불렀어. 그리고 밤이 되면 냉장고 밑에서 기어 나왔어. 귀뚜라미는 매일 밤 마루 틈새에서 달콤한 부스러기를, 작고 통통한 씨앗을 발견할 수 있었지. 그렇게 희망에 익숙해져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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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13
이제 바람이 전등을 흔들어
불빛 너울거리고
바깥에선 백만 개 별들이 빛나고 있어
이제 바다가 바람을 부르고
이제 바람은 물처럼 창문으로
마당으로 정원으로 긴 검은 하늘로 흘러가지
나,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방에 앉아, 미소 지어.
나, 연필을 집었다가,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어.
나, 너를 생각하고 있어.
나, 늘 너를 생각해.
메리 올리버의 시집 『서쪽 바람』을 출간되지마자 구매해 놓고 띄엄띄엄 읽다 며칠 전 다 읽었다. 언제나 그렇듯 메리 언니의 시들은 편안해서 좋다. 시어들을 해체할 필요 없이, 숨은 뜻을 헤아릴 필요 없이,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시. 그러다 어느 순간 ‘아!‘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 시. 나는 메리 올리버의 이런 편안함과 묵직함이 참 좋다.
이 시집의 표제작인 <서쪽 바람>은 13편의 시들로 이루어진 시집 속의 작은 시집 같은 시다. 형식이나 소재가 다양하지만 13편의 시들에서 내가 찾아낸 주제어는 ‘함께, 어둠, 사랑, 온기‘이다.
우리가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면
함께인 게 좋겠지
. . .
그렇게 우리는 함께 어둠을 건너지.
나는 혼자 있음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살면 살수록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 셋보다는 여럿이 함께했을 때의 기운을 느껴가는 중이다. 물론 그 기운에는 스트레스도 섞여 있다. 그럼에도 ‘함께‘가 선사하는 어마무시한 그 ‘무엇‘은 경험해본 자들은 알 것이다.
메리 올리버는 이 시에 등장하는 ˝젊고 키 큰 영국 시인˝ 퍼시 비시 셸리를 평생 흠모했다고 한다. 이 시의 제목과 내용도 셸리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셸리는 바다를 사랑한 시인이었다. 시간만 나면 배를 타고 ˝푸른 연무˝ 같은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것을 즐겼다. 어느 폭풍우 치는 날, 셸리는 자신의 아이를 밴 메리 셸리의 만류를 뿌리치고 바다로 나갔다가, 자신이 사랑한 ˝잿빛 파도의 문턱˝을 넘어 바다에 묻혔다. 나는 엄마가 되기 전 셸리와 셸리의 시를 좋아했다. 엄마가 되고 난 후에는 뱃속 아이와 아내를 남겨두고 자기 만족을 위해 죽을 길로 나선 셸리를 더는 좋아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의 시들은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
셸리를 사랑한 메리 올리버는, 그 사랑이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내 마음속 정원과도˝ 같은 구실을 한다고, 그렇기에 사랑이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거름이 뿌려지는 ˝내 마음속 정원˝은 ˝온기˝와 ˝찰기˝로 따스해지고 끈끈해지리라. 그 따스함과 끈끈함을 ˝함께˝ 나누었을 때,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도 거뜬히 함께 통과할 수 있다. 그런 뒤엔,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방에˝ 홀로 앉아 미소 지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