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행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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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에 대한 포부를 히로에가 묻자, 기리하라의 대답은, 한낮에 걷고 싶어, 라는 것이었다.
   "기리하라 씨, 그렇게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요?"
   "내 인생은 백야(白夜) 속을 걷는 것 같으니까.
  

 

   하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장편소설『백야행』은 1973년 10월부터 1992년 12월까지, 19년이라는 긴 세월을 점층적으로 묘사한다. 소설은 총 3권, 11개의 챕터(chapter)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챕터의 화자가 각기 다르다. 이 책의 두 주인공은 가라시와 유키오와 기리하라 료지이지만, 작가는 이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으며, 이들 주위에 있는 주변인들의 관찰로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작가가 주력한 것은 시대상황이다. 1973년부터 1992년의 시기에 일본에서 일어난 굵직한사건은 오일쇼크와 버블경제 성장 그리고 몰락의 시작. 작가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저작권, 인베이더와 슈퍼마리오 게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즈 등 시시콜콜한 것들을 각 장에 묘사하고 있다. 특히 작가가 관심을 둔 것은 컴퓨터라는 디지털 매체인데, 인간과 인간이 마주해서 처리하던 아날로그 시대가 저물고 인간이 기계와 소통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인성은 텅 비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들이 벌이는 범죄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기에, 버튼 하나로 수백만의 사람을 학살하는 행위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료지가 범죄의 판을 크게 벌리기 시작하는 것도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를 접하고부터다.  

 

   "그렇게 만든 카드는 물론 진짜와는 내용이 다르지. 비밀번호가 다르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것을 기계가 판정할 능력은 없어. 기계가 확인하는 것은 자기 테이프에 기록된 번호와 인간이 누르는 번호가 일치하는지 아닌지, 오직 그것뿐이야."
   명백한 범죄였지만 도모히코에게 죄악감은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위조카드를 만들기까지의 경위가 너무나 게임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돈을 훔치는 상대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리하라로부터 늘 듣는 말이 머리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떨어져 있는 것을 줍는 것과 남의 것을 내 것과 바꿔치기 하는 것이 어디가 달라? 돈이 든 가방을 멍하니 놓고 가는 게 나쁜 거 아냐? 이 세상은 빈틈을 보이는 자가 지는 거야."
   도모히코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전율과 함께 오싹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물론 『백야행』은 명백히 장르소설이다. 그런데 소설의 장르는 '미스터리 추리극'이지만, 작가는 독자와 두뇌 싸움을 적극적으로 벌이지 않는다. 소설은 이들의 범죄 사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숨기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인물 묘사에 치중한 것도 아니다. 하가시노 게이고 작가는 유키오와 료지의 내면 묘사를 거의 하지 않는다. 이들이 고통에 빠져 사는지, 아니면 이렇게 벌이는 범죄를 즐기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들의 내면은 텅 비어있는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이들은 가장 믿어왔고 믿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했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 유키오와 료지를 둘러싼 어른들은 모두들 괴물이었고, 이들은 우연한 사건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간다(개척이라... 흠). 소설 초반에 유키오와 료지가 읽던 소설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스칼렛 오하라의 억센 모습은 유키호에게는 롤모델이었던 셈이다. 

 

   "난 말이지……. 태양 아래에서 산 적이 없어. (…) 내 위에는 태양 같은 건 없었어. 언제나 밤. 하지만 어둡진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밝지는 않지만, 내게는 충분했지. 나는 그 빛으로 인해 밤을 낮이라 생각하고 살 수 있었어. 알겠어? 내게는 처음부터 태양 같은 건 없었어. 그러니까 잃을 공포도 없지." 

 

   하얀 밤. 유미호의 인생은 태양이 없는, 언제나 밤이지만 그녀는 스스로 빛을 만들어 지금껏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녀의 빛은, 그녀의 삶을 포장해줄 ‘돈’이다. 유키오는 빛을 잃지 않았다. 태양 아래는 아니지만, 유키오는 여전히 하얀 밤을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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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4-1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읽고 쓴 독후감인데..심하게 차이나게 우아하신 글솜씨..괜히 짱구만화에 나오는 여자아이처럼 토끼인형이 필요하다ㅋㅋ

Tomek 2010-04-13 09:04   좋아요 0 | URL
허걱... 아니어용...

Forgettable. 2010-04-1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영화랑 얼마나 달랐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전 유미호의 빛이 돈이라고 보지 않았어요. (유미호와 유키오가 동일인물인거죠?)

미호는 요한에 대한 '사랑'으로 그 모든 번뇌를 극복하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요한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었다고 봐요. 그건 단지 욕심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는거에요. 엇나가긴 했지만 그것은 사랑이었던거죠. 만약 그녀의 사랑이 조금이라도 덜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다 자백해버리지 않았을까, 해요. 자백해버리는 것이 훨씬 편하니까요. 모르는 척 해주지 않았다면 요한은 괴로움에 울부짖으며 죽어갔을거에요.

그 모든 것을 자기 혼자서 감당하겠다는 일념으로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그렇게 요한에게서 돌아섰죠. 전 영화관을 나서면서 이제 어떻게 살아.. 라며 계속 한숨을 내쉬었어요. 그녀는 검은 밤에 다리도 없이 홀로 동그마니 남은 것처럼 보였어요.

이 스토리의 결말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나름이지만, 저도 요즘 일이 있어서 이 영화를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는 와중에 유미호의 빛이 '돈'이었다는 말이 너무 아프게 다가와서 이렇게 변명조로 길게 글을 쓰고 있네요. ㅎㅎ

Tomek 2010-04-13 13:45   좋아요 0 | URL
책은 영화와 많이 다릅니다. 책은 19년간의 이야기를 점층적으로 보여줬지만, 영화는 현재와 14년 전의 이야기만을 다루었죠.

영화는 Forgettable님이 보신 것처럼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 유미호의 빛은 요한이었죠. 그녀가 만들어버린 '작은 유미호'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죽어가는 요한에게 다가갔을 거예요. 소설의 유키오는 여전히 하얀 밤을 걸을 것이지만, 영화의 유미호는 어둠 속을 걷게 되겠죠.

소설하고 영화는 전혀 다르지만, 각기 그에 걸맞는 결말을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

좀 더 자세한 것은 이곳에 있어요. :)
http://dvdprime.dreamwiz.com/dvdmovie/DVDDetail_Sub.asp?dvd_id=1846&master_id=1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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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어떻게 이야기해야할까? 인문서적으로 묶여있지만, 저자 자신의 에세이로도 볼 수 있고, 명사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잠언들을 모은 책으로도 볼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굳이 이렇게까지 번잡스럽게 글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책을 덮으면서 그런 생각을 말끔히 지웠다. 기억나지 않은 삶의 처음과 아직 경험하지 않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이정도의 번잡스러움은 필요하지 않을까? 

   데이비드 실즈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The Thing About Life Is That One Day You'll Be Dead)』는 크게 3개의 구성으로 되어있다. 하나는 저자 데이빗의 가족(97세의 아버지와 10대 딸의 이야기, 그리고 아주 가끔 전개되는 친척일지도 모르는 명사 조지프 실드크라우트의 이야기)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육체의 생성과 소멸에 관한 과학적 지식의 나열, 그리고 마지막은 명사들의 짧은 말을 담고 있다. 

   책은 '지식(정보)'적인 면에서는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고등 교육을 마친 사람이라면, 대충은 꿰고 있을법한 평범한 정보들의 나열이다. 사람의 몸이 성장하면서 어떻게 변하고, 노쇠하면서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오히려 이 책의 위력은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있다. 

   지나치게 건강한 저자의 아버지, 그리고 그 지나치게 건강한 아버지가 결국엔 노화라는 자연의 섭리에 귀속되는 모습과 저자인 아들의 갈등이 책 내내 부딪힌다. 이렇게 부딪히는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는 아트 슈피겔만의 『쥐(Maus)』가 떠오를 정도로 소소한 재미와 작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의 이야기는 정보적인 측면에도 도움이 된다. 70세에 쓴 아버지의 에세이, 저자의 현재 이야기, 저자의 과거 이야기와 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생애를 미시적인 관점에서 풀어내고, 그 뒤에 그 시기에 인간의 육체가 겪는 일들을 거시적으로 풀어놓는다. 

   이렇게 장르를 넘나들면서 독자는 인간의 '한살이'와 '죽음'에 대해 느끼게 된다. 이성의 인식이 아닌 감정의 고양이다. 죽음을 대비하는 상조서비스 같은 책이 아니라, 죽음을 인식하고, 인정하며, 오늘의 삶에 더 충실하게 하는 책이다. 인문 서적이라기 보다는 문학 서적에 더 가까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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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4-13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7세의 아버지와 10대 딸의 이야기라는 단어에서 순간 착각했어요.노인네 참 힘도 좋구만..하고 말이죠 ㅡ.ㅜ

Tomek 2010-04-13 09:12   좋아요 0 | URL
아... 카스피님 댓글에 저 잠시 쓰러졌어요. ^.^;
 
블랙 달리아 1 밀리언셀러 클럽 53
제임스 엘로이 지음, 이종인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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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엘로이의 1987년 작 『블랙 달리아(The Black Dahlia)』의 첫 장을 펼치면, 이 책을 그의 어머니께 바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십 대 때 강간당하고 무참히 살해되어 거리에 버려졌었다. 제임스 엘로이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20대 때까지 거의 '미친 사람'으로 살아갔다. 그리고 그는 작가가 되었고, 그의 어머니를 보내기 위한 '씻김굿'으로 이 소설을 썼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블랙 달리아'사건은 그의 어머니처럼, 끔찍히 살해되어 거리에 버려진 한 여인의 이야기이다.  

   소설의 화자는 드와이트 블라이처트(일명 '버키'로 불림)다. 권투선수 출신의 경찰관인 버키는 역시 권투선수 출신의 리랜드 블랜처트와('리'로 불림)의 시합으로 서로 파트너가 된다. 리는 예전에 블러바드 시티즌스 은행털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케이 레이크와 같이 동거하는 사인데, 케이의 말로는 서로 섹스를 하지 않는 사이라 한다. 케이는 버키에게 호감을 보이지만, 버키는 리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애써 그녀를 외면한다. 주니어 내시라는 흑인 유아 강간범에 대한 사건을 전담한 버키와 리는 어느날, 내시의 범행장소 근처에서 끔찍한 시체와 조우하게 된다.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블랙 달리아'사건이라 칭하고, 시민들은 이 끔찍한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버키, 리, 케이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간다.  

   블랙 달리아의 신원은 엘리자베스 앤 쇼트로 밝혀진다. 그녀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시체는 상반신과 하반신 둘로 절단되어 있었으며, 안의 장기는 모두 적출된 상태였다.    

 

   
  상반신은 더욱 참혹했다. 양쪽 유방에는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수도 없이 나 있었다. 오른쪽 유방은 축 늘어져 몇 조각의 피부만 남은 채 간신히 붙어 있었고 왼쪽 유방은 유두 주위가 예리하게 베어져 있었다. 그 자상은 너무 깊어서 뼈가 다 드러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가장 참혹한 것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차라리 보라색의 상처 덩어리라고 해야 더 적절했다. 코는 짓이겨저 푹 꺼져 있었고 입은 귀 있는 곳까지 양옆으로 찢겨 기괴한 미소를 만들고 있었는데, 마치 자신에게 가해진 이 참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주니어 내시 건을 맡고 있는 리는 상부에 거짓 보고를 하고 블랙 달리아 사건에 집착한다. 그가 이 사건에 집착하는 이유는 어렸을 적 리의 여동생 로리가 실종되어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이해한다고 말하지 마. 더 끔찍한 얘기를 해 줄 테니까. 어떤 타락한 놈이 내 여동생을 목 졸라 죽이고 시체를 토막 쳤어. 여동생이 죽어 가고 있을 때 나는 로리에 대해서 지저분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버지가 로리는 공주처럼 대하고 나는 깡패 대하듯 했기 때문에 얼마나 여동생을 미워했는지 몰라.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의 그 여자 시체처럼 동생이 토막 나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상상하기까지 했어. 그러면서 그때 사귀던 창녀 같은 년과 그 짓을 하고 그 여자 애 아빠의 술을 훔쳐 마시면서 그런 상상이 멋지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트렸던 거야. (...) 난 과거에 여동생에게 잘못한 것을 속죄하는 뜻에서라도 꼭 범인을 찾아내고 말겠어. 자네가 도와주든 말든 개의치 않아. 꼭 잡아내고 말 테야.    
   

 

   버키와 리가 수사를 진행하면서 엘리자베스 쇼트의 과거가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그녀의 아버지, 룸메이트, 영화사 직원, 군인들 등 여러사람들의 증언은 그녀가 문란한 성생활을 했다는 것과 스타를 꿈꾸며 헐리우드에서 몸을 굴리는'창녀'같은 여자였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녀는 룸메이트와 레즈비언 포르노를 찍었고, 임신 중독증에 걸렸으며, 꾸며낸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천부적이었다. 수사를 진행하면 할수록, 그녀의 실체는 점점 더 모호해진다. 

   물론 그녀에게도 가슴아픈 과거가 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동네 불량배들에게 강간을 당했으나, 해군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임신을 했을까 두려워 병원에 갔으나, 그녀는 난소에 혹이 있어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고, 자포자기한 채 살았다. 하지만 이 사실은 뉴스에 실리지 않았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거대한 스케일과, 끔찍한 사건, 그리고 점층적이고 숨쉴틈 없는 전개와 기막힌 반전의 연속으로 정말이지 정신없이 읽었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느낀점은, 죽은 엘리자베스에 대한 연민이었다. 그녀는 살아있을 때 수 많은 남자들의 욕정을 채워주더니, 죽어서도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야욕을 위해 이용당했다. 선거에 출마할 야심을 가진 검사관보 엘리스 로는 달리아 사건을 이용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언론 플레이를 한다. 경찰청에 몸을 담고 있는 프리츠, 조니 보겔 부자는 자신들의 지위를 위해 그녀에 대한 증거와 증인을 은닉한다. 가장 헌신적으로 수사에 참여한 리조차 그녀를 이용해 한 몫 챙겨 외국에서 방탕한 생활을 한다. 주인공 버키는? 그는 그녀를 시간(屍姦)한다.

 

   
  당신은 기둥서방에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에요.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시체나 안고 사시지.   
   

 

   이 책은 '블랙 달리아'에 대한 책이 아니다. 물론 이 책의 주 내용은 '블랙 달리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블랙 달리아, 엘리자베스 쇼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망자는 말이 없듯이, 그녀는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연결하는 고리일 뿐이다. 우리는 1990년에 이와 흡사한 이야기를 TV에서 봤었다. 로라 파머. 『블랙 달리아』의 세계는 <트윈 픽스(Twin Peaks)>와 겹친다. 

   책은 소설만의 매력을 듬뿍 담고 있지만, 영화적인 매력 또한 담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헐리우드의 배우가 되고 싶었던 여자이고, 이 시기는 헐리우드에 있는 거대한 간판 HOLLYWOOD LAND에서 LAND가 떨어진, 지금의 헐리우드가 완성된 시기이다. 꿈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악몽같은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둘러싼 끔찍한 악다구니들. 이 소설은 너무나 어둡고, 슬프다. 

   엘리자베스를 둘러싼 그 많던 욕망들은 결국 모든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었다. 모두들 목숨을 잃거나, 직업을 잃거나 가정을 잃거나, 평판을 잃었다. 엘리자베스가 살아있었더라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엘리자베스는 입이 찢어진 채로 죽었다.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에 나오는 그윈플레인처럼, 그녀의 표정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리즈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그날 어디 있었는지 잘 알고 있어요, 마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죽었을 때 우리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듯이 말이에요.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가서 그걸 고칠 수 있었으면 하는 부질없는 희망을 갖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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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거장의 수려한 실패작
    from 내가 읽은 책과 세상 2010-04-17 10:08 
       <블랙 달리아>는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실패작입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해도 이러한 평가는 불가피합니다. 물론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기는 합니다. 이 영화가 정말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의도한 최종 편집본인지, 아니면 스튜디오의 강권에 밀려 편집한 버전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가편집본을 보고 원작자인 제임스 엘로이가 만족을 표했다지만, 영화의 러닝타임이 121분이라는 점이 이 영화의 최종 편집이 스튜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
마쓰오카 세이고 지음, 김경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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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에 대한 책들은 대개가 원론에 치우친 경우가 많다. 내 옛 이야기를 해보자면, 중학교 1학년 때, 공부를 잘 하고는 싶은데,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해야하는지 막막했던 그 때,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공부 잘 하는 방법』이란 책을 사고 열심히 읽었던 경우가 있었다. 그 책에는 교과서 읽는 법, 수업시간 노트 필기 방법, 복습과 예습 방법, 심지어 수면시간과 식단까지 친절하게 제시해 놓았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하나마나한 소리들의 나열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자세하고 친절하게 사례까지 들어 공부방법을 설명해봤자, 결국 공부란, 내가 하는 것이고, 내 생체리듬과 내 지적 수준에 맞게, 공부를 맞추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론은 원론일 뿐이고, 방법은 당사자가 찾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 역시, 읽기 전에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독서에 무슨 방법이 있나. 그냥 자기에 맞게 읽는 것이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어느정도는 내 생각이 맞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한 부분도 있었다. 이 책은 일본에서 "독서의 神"으로 불리운다는 마쓰오카 세이고 선생의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 방법과 철학을 인터뷰 형식으로 푼 책이다. 지루한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마쓰오카 선생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독서에 대한 생각을 엿듣는 책이다. 미시적인 이야기를 거시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형식은 대개 지루하지 않듯이, 이 책 또한 흥미로운 요소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선생은 잡지 독서를 다독술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하나의 잡지에는 여러 내용이 실려있다. 전문적인 이야기부터 가벼운 가십성의 내용까지, 정치 이야기부터 TV 연애면 내용까지 다양한 방면의 글들이 실려있다. 이런 상관없는 글들을 한번에 읽어나가기 시작하는 것, 그리고 그 상관없는 내용들에서 어떤 흐름(계통)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다독술이라 생각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랄까? 거칠게 예를 들어,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찾을 수도 있고, 『대망』이나 『도꾸가와 이에야스』로 옮길 수도 있으며, 당시 포르투칼 선교사들과 조총의 수입경로를 파악하는 책을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마쓰오카 선생의 다독의 폭은 더 넓고 깊지만. 

   선생의 독서는, (일반 독자의) 독서라기 보다는 편집에 가깝다. 선생은 독서라는 '행위'를 수동적으로 저자의 말을 듣는다기 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쌍방향의 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의 독서는 저자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그 스스로 그 생각을 재구성한다. 이런 독서 방식은 한 권의 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권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독서는 책장의 배열까지 연관이 된다. 책장에 책이 배열되어 있는 것으로 저자들의 생각을 자신의 방식으로 편집시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선생이 생각하는 '미래의 책'에 대한 생각이다. 책이란 매체는 거의 1천년간 종이를 넘기는 방식으로 굳어져 왔다. 인터넷과 비교하자면, 책의 페이지는 '인터넷 창'이다. 하지만  인터넷의 문서는 책장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스크롤로 음직이게 되어 있다. 책은 각 새로운 창을 계속 띄우는, 스크롤이 없는 고정된 윈도우의 연속이지만, 인터넷은 하나의 문서로만 되어 있기때문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지식의 정리'라는 측면에서는 디지털의 장점이 뛰어나지만, 정보를 선택하는 '검색' 능력에서는 자본의 영향력(프리미엄 광고같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책의 제목은 무언가 독서에 관한 비법을 하나쯤 가르쳐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 책에선 마쓰오카 선생의 책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보여진다. 한 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서, 자신의 정신적 성장을 체크하는 선생의 모습만큼은 좋은 귀감으로 보인다. 선생만큼 지독한 독서는 하지 못하지만, 나 자신에 맞는 독서 방법을 찾는 것은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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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헌법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7
이국운 지음 / 책세상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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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세상에서 출간한 비타 악티바: 개념사 시리즈는 글자 그대로, '개념'에 관한 책이다. 시공사에서 나온 디스커버리 총서나 책세상문고의 고전의 세계 시리즈와 같은 맥락으로 보면 쉽게 이해할 듯 하다. 그러니까 총 200쪽을 넘지 않는 얇은 두께, 작은 판형의 책. 하지만 생각보다 쉽게 읽혀지지는 않는 만만찮은 책. 특히 저자인 이국운 씨가 이야기하는 '헌정주의'에 대한 개념은 고대 폴리스와 동아시아의 역사로부터 시작해 지금 현재의 헌정주의까지 다루는 것이라 그 범위가 상당히 깊고 넓다. 

   이 비타 악티바: 개념사 시리즈가 다 그런지는 확인을 안해봐서 모르겠으나, 이 『헌법』은 다른 개념사 시리즈와는 다른 구성을 취하고 있다. 다른 책들이 '개념' 그 자체만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이 『헌법』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 연관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2008년 촛불정국 이후에 쓰여진 책이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대의 민주주의 제도, 책에 쓰여진 대로 표상정치이다. 투표를 통해 '나'를 투영할 수 있는 후보를 선출하는 것. 말 그대로 표상으로의 정치다. 문제는 이 표상정치의 표상성이 정치인들의 폭정으로 갈 수도 있고, 국민들의 거센 저항으로 무정부상태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2008년에 우리 모두가 보았던 일들이다. 그렇다고 표상정치를 포기하기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저자는 촛불에서 보았던 또 다른 가능성,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노래를 불렀던 '대한민국 헌법 1조'에서 그 가능성을 찾고 있다.  

   저자는 바로 대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어떻게 권력의 가장 최상층을 헌법이 차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역사에 기록된 고전적 헌정주의에 대한 개념부터 16세기 종교혁명에서 비롯된 '자유와 민주의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정치'로서의 헌정주의, 왕권신수설로 대표된 권력이 어떻게 주권이란 개념을 도출하게 되었는지, 그럼으로써 인간의 지배에서 성문화된 법의 지배로 이행이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2년여에 걸쳐 배운 국사, 세계사, 정치경제, 사회문화의 교과목이 200여쪽이 채 안되는 페이지에 압축되어 들어있기 때문에 읽기는 녹록치 않다. 하지만, 어떻게 대다수의 국가에서 정치인과 국민들 사이의 견제 도구로 법이 상위에 위치하게 됐는지에 대한 개념을 얻을 수 있다. 쉽지 않지만, 한번 부딪혀볼만한 주제다. 

   그렇다면,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한 표상정치의 새로운 모델은 무엇인가? 그것은 직접 이 책을 읽고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지나치게 낙관적이지만, 더 다른 대안도 없는 것도 같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최장집 교수의 일갈이 생각나지만... "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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