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 헌터 1 : 지(地)편 요괴 헌터 시리즈 1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 서현아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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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리와 시미코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검은 연구자 히에다 레이지로. 


그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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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학의 시 2
고다 요시이에 지음, 송치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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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 요시이에의 『자학의 시』를 지난 주말간 침대에 뒹굴거리면서 읽었다. 그 전에도 종종 트윗에 "폭풍감동"이라는 멘션 감상이 올라왔던지라 궁금하던 차에 이번에 큰 맘 먹고 감상을 했다. 4컷(가끔 5컷, 8컷이 있긴 하지만) 구성에 귀여운(혹은 성의 없는) 그림체인지라 읽는데 그리 큰 불편함은 없었다. 정독한 후, 책을 다 덮고 큰 한숨을 쉬었다. 

정말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 두 권의 책은 모리타 유키에의 끔찍한 인생을 담고 있다. 1권의 내용이 남편 하야마 이사오가 그녀를 착취하지만, 부인 모리타 유키에는 그 끔찍한 착취를 견뎌내고 그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미친 순애보"를 그 어떤 설명 없이 담고 있다면, 2권에서는 불쌍한 그녀, 유키에의 과거사가 담겨 있다. 그러니까 『자학의 시』는 1권과 2권 모두를 한달음에 읽어야 하는 책이다. 1권만 읽고 그 잔혹함에 못이겨 2권을 포기한다면, 소위 그 "폭풍감동"을 절대 느낄 수 없다. 그토록 착취만 당하는 유키에가 왜 그렇게 이사오를 사랑하고, 이사오에게 사랑을 갈구하는지, 그런 이해못할 유키에의 근원이 바로 『자학의 시』 2권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인생에 있어 나락의 끝이란 게 있는지, 있다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끝인지는 그 누구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을 법하지만, 유키에의 경우라면, 충분히 그 끝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저리까지는 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살기위해 스스로 우윳병을 집어 드는 갓난 아기 유키에, 무능력한 아버지에게 착취당하고, 여러 남성-어른들에게 착취당하는 어린 유키에, 단지 사랑받고 싶어서 물건을 훔치는 유키에, 그리고 기억을 지우듯 고향을 떠나는 10대 유키에, 도쿄에서 파란만장한 20대를 보내는 유키에, 그런 그녀를 쫓아 다닌 하야마 이사오. 그리고 그 절망의 끝에서 삶의 이유와 살아가야 할 이유를 깨닫는 엄마 유키에. 그녀의 삶은 세상에 쉽게 편입한 나 따위가 이러쿵저러쿵하기엔 왠지 숭고해보이기까지 하다. 정말로 인간의 삶이란, 인간이 만들어 낸 도덕이나, 법 따위를 넘어선, 어떤 초월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그런데, 꼭 이랬어야만 했을까? 

꼭 이렇게 한 여인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그것을 킬킬거리며 즐기게 한 후에 마치 인생의 큰 깨달음인양 "재회 장면"을 슬쩍 삽입해 그것을 감동으로 끌어냈어야 했을까? 책을 읽는 동안에는 무언가 가슴에 뜨거운 것이 출렁거렸지만, 그 뜨거움이 정말 감동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난 이 감동을 정말로 느끼고 있는 것인가? 유키에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사오는 여전히 도박에 관심이 있고, 그녀의 아버지는 이제 딸의 집에 얹혀 살기로 작정한 것 같다. 산달이 다가오지만, 유키에는 여전히 식당-배달일을 한다. 그녀가 애를 낳아도 아마 현실은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아마 옆집 아줌마의 상상처럼, 후에 자식과 아비가 쌍으로 유키에에게 밥상을 뒤집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가슴이 뜨겁다. 

아마도 그 이유는, 김기덕의 <나쁜 남자>처럼, 나카야마 테츠야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인생>처럼, 『자학의 시』도 한 사람의 삶의 일관성에서 느끼는 어떤 "경건함" 때문이 아닐까? 선과 악, 호와 오를 벗어난, 일관된 삶의 태도에서 오는 숭고함. 바로 그런 감동. 

그런 면에서 『자학의 시』는 이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등장인물들은 스스로를 자학하듯 끊임없이 반복된 -잔인한- 행동을 하지만, 바로 그 행동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확인에 다름 없으니까. 어떻게 그게 사랑이 되느냐고 반문하지는 말자. 그것은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니까. 사디즘/마조히즘이 대부분에겐 고통이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기쁨이니까. 

분명한 것은, 이런 삶도 있고, 이런 삶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으며, 이런 삶의 모습에서도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쓰레기통에서도 장미는 영롱하게 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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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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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대학교 때 일이다. 당시 과 사무실에서 연로하신 조교와 나이든 후배와 함께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마침 동물원의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가 흘러나왔다.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는 중학생 때였었는데, 그 때를 떠오르면서 이 노래에 대한 품평을 하기 시작하자, 그들이 나를 멋모르는 어린아이의 실수를 감싸주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을 했다. "이 노래를 제대로 들으려면 최소 서른은 지나야지. 이 노래를 이해하기나 하니?"  

물론,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를 제대로 들으려면, 정말 서른이 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해서, 이 노래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짝사랑했던 여자도 있어야 하고, 그 여자가 결혼도 하고 애도 있어야 하며, 1/2호선 안에서 우연히 마주쳐야만 하는가? 모든 예술 작품에는 그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선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초등학교 때 처음 들었던, 절규하는 듯한 전인권의 「이등병의 편지」의 울림이나, 스무 살,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앞으로 다가올 서른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느꼈던 그 때. 이런 일상의 결들을 꼭 "내가 경험해봐서 아는데~"하는 식으로 꼭 경험의 우위로 내세워야 하는 것일까? 그 때 대학교 때 일을 반면교사로 삼으며, 난 경험을 맹신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랬던 내가, 김애란 작가와 그녀의 첫 장편인 『두근두근 내 인생』을, 그런 꼰대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인생에 대해 얼마나 알겠니?" 하는 재수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사실, 어느 작가나, 인생이나 죽음이란 무거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더군다나 이제 (EU기준으로) 서른을 넘긴 작가가 첫 장편으로 이런 무거운 소재를 선택했음을 알게 됐을 때, 책장을 넘기면서 조마조마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김애란은 이 무거운 주제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멋지게 우회하며 나 같은 꼰대들을 "쓰러지게" 만들었다.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냥, "벅차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표현 같다.  

가장 행복해야 할 시간을 가장 힘들게 보낸 어린 부모와, 가장 짧게 살았지만, 가장 오래 산 그 어린 부모의 아이. 그리고 그 아이를 둘러싼 세상의 저열한 욕망. 어쩌면 정말이지 끔찍할 수 있는 이야기를 김애란은 정말로,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감싼다. 삶과 죽음, 외로움과 설렘, 실망과 우정. 이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만, 아름이는 김애란이라는 작가를 만나, 정말로 짧고도 긴 한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웃음을 쫓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슬프고 장렬하기 보다는, 너무나 가슴 벅차다.  

이전까지, 김애란의 단편들은 소재뿐인 작품들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고 나서, 그 생각을 버렸다. 그녀는 소재뿐인, 한계가 드러나는 이야기꾼이 아니다. 그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생을 담아내고, 자신이 창조한 세계와 인물들을 따스히 보듬을 줄 아는, 흔치 않은 작가다. 앞으로 살면서 그녀가 쏟아낼 수 많은 작품들을 미리 기대하니, 정말로 두근두근해진다. 그녀 때문에, "내 인생"은 "두근두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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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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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은 장르 소설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형이상학적인 물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예술에서 느낄 수 있는 숭고함을 문학에서 느끼는 기쁨을 누려왔다. 하지만 그런 숭고함이 커갈수록, 문학은 이야기 자체의 쾌감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문학은 있지만, 소설은 없는 시대. 바로 그것이 현재 한국 문단이 지니고 있는 딜레마가 아닐까. 물론 엄숙함이나 숭고함따위는 버린 일련의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으로 조금식 변화하고 있지만, '서사'의 쾌감에는 아직까지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의 등장은 그야말로 하나의 사건이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이제 3편의 소설을 쓴 작가에게 스타일 운운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기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녀의 스타일은 속도감이다. 일단 이야기가 시작되면, 절대 멈추지 않고 뒤돌아 보지 않는다. 물론 인물을 설명하기 위한 회상이 나오긴하지만, 그조차도 이야기의 속도를 방해하지 않고, 계속 내달린다.  

추리소설 같이 시작하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독자들에게 모든 패를 다 보여줬다는 점에서) 다분히 운명론적/신화적이다. "살인자의 아들"이자 이야기의 중심이자 관찰자인 서원이, 아빠 현수와 엄마 은주가 함께, 세상과는 고립된 세령호에서 겪는 끔직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 축에는 이들 가족 말고, 이 모든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려간 승환과, 딸과 부인을 잃은 영제가 있다.  

현수, 은주, 서원 가족과 승환, 그리고 비극의 희생자인 세령은 모두 망령에게 사로잡힌 인간들이다. 그들의 아버지/혹은 어머니는 (자식들의 입장에선) 모두 괴물들이다. 이 이야기는 세상과 고립된 세상에서 부모라는 망령에서 벗어나려하지만, 결국 그 자리에 가서 스스로 망령이 되어가는 이야기이다. 모든 (운명의) 자리는 마련되어있고, 등장인물들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이 비극에서 한 발 비켜있는 승환은 작가의 욕망이자 독자의 욕망을 대변한다. 그는 이 비극을 되돌릴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축소시킬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런지 스스로 궁금해했다. 그건 책을 읽는 독자도 마찬가지였고, 아마 소설을 창조하는 작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승환의 쾌락은 우리들의 쾌락이며,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한 쾌락은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칭찬은 여기까지다.  

정말 안타깝게도, 『7년의 밤』은 문학이 아닌, 영화에서 너무 많은 것을 빌렸다. <샤이닝(스티븐 킹 소설보다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을 주축으로 삼고, 유령들의 자리를 <아메리칸 싸이코>의 패트릭 베이트먼(마찬가지로 브렛 이스턴 앨리스의 소설에서라기 보다는 크리스천 베일이 연기한 캐릭터)과 <깊은 밤 깊은 곳에>의 석유왕 콘스탄틴 데미리스를 한 데 섞은 듯한 영제가 대신한다(은주는 영제의 캐릭터를 절반 정도 나눈 경우다. 현수의 경우는 잭과 이호성을 한데 섞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야기의 구조는 액자 소설이라기 보다는 <포레스트 검프>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그 외 자잘한 디테일들 역시 영화에서 빌려왔다. 하나하나 나열하고 싶지만, 그러지 않겠다. 책을 읽은 내가 (상기할수록) 부끄럽기 때문이다.  

모든 창작 작품이 100% 새로운 것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또한 싸구려 SF 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소재를 차용한 작품 아닌가! 내가 『7년의 밤』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지점은, 너무 많은 것을 영화에서 빌렸다는 점이다. 영화는 (시하고는 자웅을 겨룰 수는 있어도) 소설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영화사에 남은 문학 원작의 작품들은 대부분 감독의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지, 소설 그 자체를 옮기지 않았다. 소설의 가능성은 물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보다 훨씬 우월하다. 그런데 『7년의 밤』은, 그런 우월한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스스로 영화에 종속된다.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7년의 밤』은 소설이 아니라 시나리오다. 시나리오를 소설 형식으로 풀어 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5개나 되는 영화사들이 판권을 사들이려고 했겠지만.  

『7년의 밤』은 확실히 한국 문학에선 쉽게 발견할 수 없었던 "보석 같은" 작품이다. 하지만, 난 이와 비슷한 영화들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7년의 밤』은 재미있다. 책을 읽으면, 손을 쉽게 뗄 수 없다. 하지만 너무 아쉽다. 영화에 종속된 가능성이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솔직히 지금 정유정 작가에 대한 평단의 호의는 너무 과대포장 되어있지 않은가 싶다. 마치 16년 전, 김미진 작가의 『모짜르트를 찾아서』가 나왔을 때의 현상 같기도 하다(당시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 소설을 읽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정유정 작가는 다음 소설에서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한 미래를 그린다고 했다.  

 

난 『20세기 소년』은 만화책으로만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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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6-23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을 읽고 올린 리뷰 제목이 <문학 작품이 아니라 시나리오 같은> 이랍니다.
이거였군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긴 한데...' 하면서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던 이유가.
영화를 잘 아시는 분 입장에서 써주시니 더 확실하게 제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알겠습니다.

Tomek 2011-06-24 09:07   좋아요 0 | URL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군요! 저 혼자 엉뚱한 소리 한 게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그렇지 않아 다행입니다.

확실히 서사의 힘은 정말로 위대한데, 그에 반해 인물에 대한 설명은 너무나 평면적이었어요. 영화로 제작되고, 적절한 배우들을 만나면, 아마도 소설의 인물들은 피와 뼈와 살을 갖춘 실체가 될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읽은 반면, 그만큼 허탈해서 너무 아쉬움이 큰 소설이었어요.
 
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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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작가의 『허수아비 춤』은 (이미 알려졌다시피) 재벌에 대한 이야기다. 대하소설 『한강』(의 한 부분)이, 박부길 사장을 통해 이 나라에서 재벌이 어떻게 탄생했고 그 치부를 어떻게 만들어냈지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허수아비 춤』은 그 모은 치부를 어떻게 세습하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소설이라는 이야기 형식에 맞추어 풀이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허수아비 춤』을 읽으면 자동스레 『삼성을 생각한다』가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빠른 전개와 놀랄만한 이야기, 묵직한 울림 등은 조정래 작가의 소설이라면 으레 느끼는 특징이기에 그다지 놀랄만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허수아비 춤』을 읽으며 놀란 점은 주제보다는 형식적인 면이었다.  

소설을 읽다보면 중간 중간 내러티브에 방해가 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가 서술을 멈추고 직접적으로 독자들을 향해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그렇다. 이 부분을 처음 접했을 때는 당혹감과 불쾌감이었다. 아무리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그렇지, 이렇게 직접적으로 작가가 소설에 개입한다는 것은, 책을 읽는 독자들의 수준을 무시한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 아닌가. 특히 후반부로 갈 수록 이런 작가의 개입은 더해가는데, (그 절정은 허 교수의 신문 사설 부분일 것이다) 책을 덮을 즈음에야 이런 시도들이 작가의 형식적 실험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마당놀이나 판소리 사설과 같이, 이야기 꾼이 직접적으로 개입해 그 공연을 보는 사람들의 흥을 키우듯이, 작가는 독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런 실험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 나라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무시무시한 소설을 써내려간 작가가 바라본 21세기는 이 소설의 리듬처럼 신명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비록 현실은 어둡고 답답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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