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에 송성문 선생이 별세하셨다는 뉴스(클릭)를 늦게나마 보게 됐다. 80이라면 가히 호상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그거야 죽음을 맞이한 당사자의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흰소리일 뿐이고. 선생의 죽음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들락날락하던 내 학창시절이 정말로 과거가 됐다는 당연한 사실을 환기시켜줬다. 그야말로 한 시대의 종언.
내가 고등학교 시기를 보냈던 1990년대 초중반은 그야말로 복잡한 시기였다.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새로운 시험 형태인 '수능'이 도래하는 시기였다. 명문학교는 미리 준비를 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다니던 학교는 평소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모의고사를 보면 서울 소재 72개 고등학교 중 71위를 하는 학교였으니. 난 솔직히 72위가 더 궁금하긴 했었다. 선생들은 별 준비 없이 관성적으로 교과서를 가르쳤고, 배우는 우리도 별 생각 없이 관성적으로 수업을 듣고(졸고) 있었다. 특히 영어는, 언제나처럼 문법 위주의 교육이었고, 그런 우리가 관습적으로 선택하는 교재도 성문 시리즈였다. 수학은 정석 시리즈의 대항마로 해법수학이라도 있었지만, 영어는 거의 전무했다. 물론, 이런 호시절도 맨투맨의 아성으로 얼마 못가 흔들리긴 했지만.
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성문 영어 오딧세이는 뿌듯함이나 성취감보다는 언제나 좌절만을 가져왔다. 성문 기본영어가 특히 그러했는데, 적당히 얇은 두께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만을 가져왔을 뿐, 언제나 명사 부분만 시커멓게 연필칠을 했던 기억만 난다. (정석의 집합 부분도 마찬가지.) 게다가 짧은 독해는 왜 이리 어려운지. 특히 한글로 된 해석을 봐도 도대체 뭔 소리를 해대는지 머리를 싸맨 적이 부지기수 였는데, 그 어려운 글들의 저자가 버틀란트 러셀이라는 철학자라는 것을 알고, 한 때 철학을 저주하기도 했었더랬다. (얄궂어라. 그런데 내가 철학과를 선택할 줄이야.)
성문 종합영어는 더욱 할 말이 없게 한 책이다. 내가 이 책으로 공부를 하긴 했었나? 아마 베개로 더 많이 쓰지 않았나 싶다. 두툼한 두께는 학구열보다는 수면욕을 더 일으키게 했으니까. 침으로 부풀어오른 이 책은 한자책인지 영어책인지 도통 모를 고루한 구성과 참으로 불친절한 해설로 많은 악명을 떨친 책이었다.
그러다 그 해 여름과 겨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해 두 번의 수능이 시행되자, 판이 바뀌기 시작했다. 문법이 100% 차지했던 영어의 영역은 독해가 70%, 듣기가 20%, 나머지 10%를 문법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는, 여전히 학력고사를 대비한 수업을 진행했지만.
그 당시 영어 기본서 시장을 양분 한 것은 성문과 맨투 맨이었지만, 맨투맨은 그닥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성문에 비해 조금 친절하게 보일 뿐, 그 내용은 거기서 거기인 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책이 분권된 것도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성문은 어렵고, 맨투맨은 싫고. 그 때 내가 찾은 대체 교재가 안현필 선생의 영어실력기초다.
안현필 선생은, 아버지 세대는 아니고, 삼촌 뻘 되는 세대에 친숙한 이름인데, 서점에서 사온 책을 보고 "영어삼위일체, 그 책 아닌가?" 막내 삼촌이 반색했던 기억이 난다. 성문과 맨투맨이 문장의 형식 또는 명사 파트에서 시작하는 반면, 이 책은 "동사" 파트부터 시작했는데, 영어는 우리말과 체계가 달라, 그네들처럼 명사부터 시작해서는 흥미를 잃기 쉽다며 일갈했던 머리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책은 재미있는게, 곳곳에 선생의 잔소리가 메모장 형식으로 붙어 있었는데, 공부에 관한 것 뿐 아니라, 건강(이를테면 선식, 냉수마찰 같은)에 대한 정보도 깨알같이 적어 놓아 '혼자 공부하는' 재미를 일러주기도 했다. 문제는 그 잔소리 부분이 너무 재미있어, 공부보다는 잔소리만 읽게 된다는 것?
안현필 선생이 건강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한창 때에 암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때가 90년대 초반이었나? 어쨌든 선생은 이겨냈고, 그 이후에는 영어 보다는 건강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건강에 대한 책도 여럿 집필하셨다. 하지만,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인지. 건강을 되찾은 선생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천명(天命)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수능시험이 18년간 지속되면서, 이들 기본서는 점차 사라져갔고, 영어 문법도 이제는 원서에 자리를 밀리게 됐다. 옥스퍼드의 빨간책 파란책 시리즈는, "문법이 재미 있을 수도 있구나!" 하는 당돌한 생각까지 하게 할 정도니까. 수능, 토익, 토플 등으로 시험이 갈리면서, 이들 영어 기본서는 점점 설자리가 없어졌고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나 역시 이 문법책들을 버린지 꽤 오래다. 그 자리는 지금 『Practical English Usage』가 차지하고 있으니, 선생들이 보면 허탈할지도 모르겠다. 성석제의 표현처럼 꿈속에서 놀다보니 (슬픈) 소식을 맞이한 셈이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처럼, 흥망성쇄는 당연한 자연의 이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성문 선생의 부음에 이렇게 착찹한 마음이 드는 까닭은, 세월의 흐름을 목격하고 있다는 슬프지만 진실인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시대는 저물고, 그 시대에 발을 담궜던 우리들은, 다른 곳으로 건너간다, 계속.
RIP. 편히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