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행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년에 대한 포부를 히로에가 묻자, 기리하라의 대답은, 한낮에 걷고 싶어, 라는 것이었다.
   "기리하라 씨, 그렇게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요?"
   "내 인생은 백야(白夜) 속을 걷는 것 같으니까.
  

 

   하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장편소설『백야행』은 1973년 10월부터 1992년 12월까지, 19년이라는 긴 세월을 점층적으로 묘사한다. 소설은 총 3권, 11개의 챕터(chapter)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챕터의 화자가 각기 다르다. 이 책의 두 주인공은 가라시와 유키오와 기리하라 료지이지만, 작가는 이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으며, 이들 주위에 있는 주변인들의 관찰로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작가가 주력한 것은 시대상황이다. 1973년부터 1992년의 시기에 일본에서 일어난 굵직한사건은 오일쇼크와 버블경제 성장 그리고 몰락의 시작. 작가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저작권, 인베이더와 슈퍼마리오 게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즈 등 시시콜콜한 것들을 각 장에 묘사하고 있다. 특히 작가가 관심을 둔 것은 컴퓨터라는 디지털 매체인데, 인간과 인간이 마주해서 처리하던 아날로그 시대가 저물고 인간이 기계와 소통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인성은 텅 비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들이 벌이는 범죄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기에, 버튼 하나로 수백만의 사람을 학살하는 행위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료지가 범죄의 판을 크게 벌리기 시작하는 것도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를 접하고부터다.  

 

   "그렇게 만든 카드는 물론 진짜와는 내용이 다르지. 비밀번호가 다르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것을 기계가 판정할 능력은 없어. 기계가 확인하는 것은 자기 테이프에 기록된 번호와 인간이 누르는 번호가 일치하는지 아닌지, 오직 그것뿐이야."
   명백한 범죄였지만 도모히코에게 죄악감은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위조카드를 만들기까지의 경위가 너무나 게임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돈을 훔치는 상대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리하라로부터 늘 듣는 말이 머리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떨어져 있는 것을 줍는 것과 남의 것을 내 것과 바꿔치기 하는 것이 어디가 달라? 돈이 든 가방을 멍하니 놓고 가는 게 나쁜 거 아냐? 이 세상은 빈틈을 보이는 자가 지는 거야."
   도모히코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전율과 함께 오싹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물론 『백야행』은 명백히 장르소설이다. 그런데 소설의 장르는 '미스터리 추리극'이지만, 작가는 독자와 두뇌 싸움을 적극적으로 벌이지 않는다. 소설은 이들의 범죄 사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숨기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인물 묘사에 치중한 것도 아니다. 하가시노 게이고 작가는 유키오와 료지의 내면 묘사를 거의 하지 않는다. 이들이 고통에 빠져 사는지, 아니면 이렇게 벌이는 범죄를 즐기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들의 내면은 텅 비어있는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이들은 가장 믿어왔고 믿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했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 유키오와 료지를 둘러싼 어른들은 모두들 괴물이었고, 이들은 우연한 사건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간다(개척이라... 흠). 소설 초반에 유키오와 료지가 읽던 소설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스칼렛 오하라의 억센 모습은 유키호에게는 롤모델이었던 셈이다. 

 

   "난 말이지……. 태양 아래에서 산 적이 없어. (…) 내 위에는 태양 같은 건 없었어. 언제나 밤. 하지만 어둡진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밝지는 않지만, 내게는 충분했지. 나는 그 빛으로 인해 밤을 낮이라 생각하고 살 수 있었어. 알겠어? 내게는 처음부터 태양 같은 건 없었어. 그러니까 잃을 공포도 없지." 

 

   하얀 밤. 유미호의 인생은 태양이 없는, 언제나 밤이지만 그녀는 스스로 빛을 만들어 지금껏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녀의 빛은, 그녀의 삶을 포장해줄 ‘돈’이다. 유키오는 빛을 잃지 않았다. 태양 아래는 아니지만, 유키오는 여전히 하얀 밤을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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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4-1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읽고 쓴 독후감인데..심하게 차이나게 우아하신 글솜씨..괜히 짱구만화에 나오는 여자아이처럼 토끼인형이 필요하다ㅋㅋ

Tomek 2010-04-13 09:04   좋아요 0 | URL
허걱... 아니어용...

Forgettable. 2010-04-1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영화랑 얼마나 달랐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전 유미호의 빛이 돈이라고 보지 않았어요. (유미호와 유키오가 동일인물인거죠?)

미호는 요한에 대한 '사랑'으로 그 모든 번뇌를 극복하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요한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었다고 봐요. 그건 단지 욕심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는거에요. 엇나가긴 했지만 그것은 사랑이었던거죠. 만약 그녀의 사랑이 조금이라도 덜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다 자백해버리지 않았을까, 해요. 자백해버리는 것이 훨씬 편하니까요. 모르는 척 해주지 않았다면 요한은 괴로움에 울부짖으며 죽어갔을거에요.

그 모든 것을 자기 혼자서 감당하겠다는 일념으로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그렇게 요한에게서 돌아섰죠. 전 영화관을 나서면서 이제 어떻게 살아.. 라며 계속 한숨을 내쉬었어요. 그녀는 검은 밤에 다리도 없이 홀로 동그마니 남은 것처럼 보였어요.

이 스토리의 결말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나름이지만, 저도 요즘 일이 있어서 이 영화를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는 와중에 유미호의 빛이 '돈'이었다는 말이 너무 아프게 다가와서 이렇게 변명조로 길게 글을 쓰고 있네요. ㅎㅎ

Tomek 2010-04-13 13:45   좋아요 0 | URL
책은 영화와 많이 다릅니다. 책은 19년간의 이야기를 점층적으로 보여줬지만, 영화는 현재와 14년 전의 이야기만을 다루었죠.

영화는 Forgettable님이 보신 것처럼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 유미호의 빛은 요한이었죠. 그녀가 만들어버린 '작은 유미호'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죽어가는 요한에게 다가갔을 거예요. 소설의 유키오는 여전히 하얀 밤을 걸을 것이지만, 영화의 유미호는 어둠 속을 걷게 되겠죠.

소설하고 영화는 전혀 다르지만, 각기 그에 걸맞는 결말을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

좀 더 자세한 것은 이곳에 있어요. :)
http://dvdprime.dreamwiz.com/dvdmovie/DVDDetail_Sub.asp?dvd_id=1846&master_id=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