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별 레미나 이토 준지 스페셜 호러 5
이토 준지 글.그림 / 시공사(만화)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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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준지의 작품은 항상 단편에서 빛을 발해왔다. 유교 문화권에서 장남이 갖는 공포와 굴레를 기막히게 형상화한 「조상님」, 소재주의로 끝날 수 있는 꿈의 설정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철학적 흥취까지 얻은 「기나긴 꿈」 등 그의 단편은 소재와 테마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을 타왔다. 물론 그도 여러 편의 장편을 발표해왔다. 토미에 시리즈와, 소이치 시리즈, 사거리의 미소년 시리즈와 오시키리 시리즈 등이 바로 그러한데, 아쉽게도 이 작품들은 장편이라기보다는 동일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 연작이라 볼 수 있다. 하나의 테마로 이끌어가기 보다는 매 회 다양한 소재로 이야기를 꾸미기 때문에, 장편의 긴 호흡을 느끼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그나마 가장 장편에 가까운 형식인 『공포의 물고기』조차도 중간에 이야기가 옆으로 새는 것을 보면, 그가 장편에 대한 호흡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출간한 『지옥별 레미나』는 이토 준지 만화 사상 정말 처음으로 느낄 수 있는 장편의 감흥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소용돌이』처럼 인물이 테마가 아닌, 현상(혹은 사건)이 테마인 작품이다. 서기 20XX년의 미래. 오오구로 박사는 30년 전 발견한 웜홀을 통해 다른 우주에서 온 행성을 발견한다. 그는 이 행성을 자신의 딸 이름인 '레미나'라고 명명한다. 새로운 행성의 발견과 그 이름으로 딸 레미나는 스타가 되어 전 국민의 인기를 얻는다. 그런데 레미나를 관측하던 중, 레미나가 지나가는 곳에는 모든 행성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바로 그 레미나가 지구를 향해 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태양계의 행성들이 하나 둘씩 레미나에게 먹히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행성 레미나가 오는 이유가, 자신의 분신인 스타(!) 레미나를 만나러 오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십자가에 매달아 화형을 시키려한다. 이제부터 레미나와 공포로 정신을 잃은 사람들 간에 쫓고 쫓기는 마녀사냥이 벌어진다.  

전작 『블랙 패러독스』에서도 약간의 SF적인 요소를 넣었던 이토 준지가 『지옥별 레미나』에서는 본격적으로 SF적인 요소를 끌어왔다. 하지만 SF적인 요소는 배경을 드러내는 것일 뿐, 이야기의 진행상 큰 위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증명을 통해 이룩한 과학 세계에서 비이성적인 일로 인해 사람들의 이성이 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은, 그가 그리는 세계가 중세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아무리 이성주의가 발달한 사회더라도, 결국 인간의 심연 아래에 숨죽여 있는 광기의 본성은 숨길 수 없는 것일까. 이 끔찍한 마녀사냥은 읽는 내내 불편함과 숨 막힘을 불러일으킨다. 끔찍한 형상의 행성 레미나 조차도 미쳐버린 인간들의 공포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위력적이다. 이 작품에서 이토 준지는 드러난 공포가 아닌, 인간 내부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울림은 굉장히 크다.  

그렇다면, 『지옥별 레미나』는 그의 걸작이 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그러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다루려고 하는 주제나 끌어들인 소재는 참신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들의 익숙한 차용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으로 이토 준지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새로움을 느낄 수 있겠지만, 이토 준지의 전작을 섭렵한 사람이라면, 즉각적으로 『소용돌이』, 『공포의 물고기』, 『토미에』, 「낙하」, 「궤담」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익숙한 이토 월드의 결정판.  

어쩌면 이 위대한 작가가 매너리즘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도 없지 않다. 하지만, 행성 레미나의 부정할 수 없는 매혹과 인류의 멸망을 이토록 끔찍하게 그린 이토 준지의 악취미, 살아남은 자의 기쁨과 가족을 잃은 슬픔이 섞인 멜랑콜리한 결말부를 보면, 그래도 역시 이토 준지라는 기대감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이 책 마지막에 수록된 「억만톨이」를 보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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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패러독스 이토 준지 스페셜 호러 4
이토 준지 글 그림 / 시공사(만화)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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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준지의 신작(이라기보다는 시공사에서 드디어 발간한) 『블랙 패러독스』는 연작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6편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데, 각 에피소드마다 기이한 역설로 가득 차있다. 내용은 이토 준지의 다른 작품들처럼 소박하게 시작한다.  

자살 사이트 "블랙 패러독스"에서 만난 네 명이 자살을 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이들은 각기 사연이 있는데, 타블로는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난 후,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스스로 편안해지고 싶어서 자살을 하려 한다. 오른쪽 얼굴에 끔찍한 상처 자국이 있는 바랏치는 거울을 볼 때마다 거울 속의 자신이 "죽어버려"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아 삶의 의욕을 잃어 자살을 택했다. 로봇 공학을 전공하는 피탄은 자신을 모델로 로봇(?!!)을 개발했으나, 자신보다 더 자신다운 로봇을 보고 자신이 사라지기를 택했다. 그리고 마르소는 현실세계에 닥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견디기 어려워 자살을 하려 한다. 이들과 함께 자살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 마르소는 지나가는 옆 차에 타블로, 피탄, 바랏치가 있는 것을 본다. 저들은 누구일까? 저들이 진짜라면, 마르소와 같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도플갱어일까? 혹은 그 반대일까? 이제부터 원본과 가짜의 (끔찍한) 수수께끼가 벌어진다. 

첫 번째 에피소드 「집단 자살」은 여느 괴담에서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소재다. 그런데 이 평범한 소재가 자기 증식을 하기 시작하더니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돼버린다. 죽음을 갈망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통로'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문은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또 다른 자아(혹은 상처)를 자기 자신들이 스스로 받아들일 때 열리기 시작한다. 내부의 공포와 상처를 피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자들이 그것들을 스스로 받아들여 비로소 하나가 될 때 열리는 이 무시무시한 저승의 문!   

그러나 그들은 평안한 영면을 누리지 못한다. 이들이 저승에서 발견해오는 신비한 광물 패러드나이트 때문이다. 이 광물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담겨 있는 신비한 돌이다. 처음에는 이 돌을 보석으로 사용하려 하지만, 이 안에 엄청난 에너지가 담겨 있는 것을 깨닫고, 국가 차원에서 관리를 하기 시작한다. 패러드나이트는 대체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블랙 패러독스" 사이트에서 만난 이들 네 명은 "블랙 패러독스"라는 이름으로 인류의 미래를 위해 패러드나이트를 채굴한다. 자살을 꿈꾸었던 자들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활약하는 모습이라니!  

패러드나이트라는 광물 또한 이채롭다. 패러드나이트는 인간의 영혼이 들어있는 신비한 돌이다. 패러드나이트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것으로 보인다. 이토 준지가 그리는 이 끔찍한 미래는 작가 개인의 망상이 아니라, 작금의 현재를 그리는 것 같아 더 무섭게 느껴진다. 죽음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영혼을 담보로 인류의 미래를 맡기는 것은 이 얼마나 역설(逆說)적인가!  

이전의 작품들보다 끔찍함과 역겨움은 많이 사그라졌지만, 이토 준지는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말을 역설(力說)하고 있다. 역설들로 가득 찬 이토 준지의 세계는 세기말을 지나 더 광대무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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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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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이야기꾼(절대 폄하하는 말이 아니다) 스티븐 킹의 일생에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 때문은 아니더라도, 장르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리처드 매드슨은 언젠가는 꼭 한 번 겪어야할 고전의 반열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스스로 전설이 된)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를 2010년의 시선으로 읽는 것은 솔직히 아주 맥 빠지는 일이다. 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매체를 달리한 영화와 음악에서까지 원작의 영혼을 강탈한 수많은 아류들을 섭렵한 후에 다시 원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말을 다 알고 보는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지루한 법이다. 하지만, 그런 지루함을 감수하고 원전으로 돌아가는 까닭은, 다른 아류에는 없는 태초의 아이디어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 혼자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와 전설로만 존재했던 흡혈귀들의 이야기를 서로 한데 섞어 현실적인 이야기로 끌어나가는 작가의 실력은 책장의 첫 부분부터 강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보통 이런 비정상적인 이야기들은 사실적이지 못하고 어느 정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어서 쉽게 몰입하기 어려운데, 리처드 매드슨은 환상적인 요소를 과학적인 분석으로 돌려놓아 생생한 분위기를 간직했다.  

(핵전쟁 후라는) 묵시록적 배경에 (흡혈귀라는) 두려운 소재를 섞어 놓았지만, 소설의 정조는 혼자 살아남은 사람의 쓸쓸함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중간에 등장하는 강아지에 대한 에피소드는 읽는 이의 절창을 뜯어낼 정도로 가장 뭉클한 순간이다. 대화 없이 강아지에 대한 행동의 묘사만으로 이런 숭고한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분명 그가 천부적인 작가임을 방증하는 것임에 다름없다.  

리처드 매드슨은 『나는 전설이다』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구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지금은 워낙에 많이 다루어 위력이 많이 줄었지만, 이 소설이 나온 1950년대에는 상당히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 것 같다. "나만이 정상이고 나와 다른 사람은 비정상"이란 기준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본 서구사회의 오랜 정신이다. 하지만 이 관계는 어느 순간 역전당하고 정상과 비정상이란 구분은 무의미해지는 상태에 이른다. 리처드 매드슨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보다 20여년 앞서 이야기를 꺼낸 셈이다. (물론 비약이다.)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나는 전설이다』에는 「나는 전설이다」말고도 다양한 단편들이 수록 되어 있다. 이 단편들 또한 흥미진진한데, 주인공의 망상을 다룬 작품부터 흑마술, 귀신 들린 인형, 귀신 들린 집, 무의식의 환영,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기괴한 장례식 등을 다룬 각각의 단편들은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에 수록된 중단편들은 이미 영혼을 강탈당한 작품들이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라도 기시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친숙한 작품들이지만, 아류들에는 없는 '그 무엇'이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고전을 찾아 읽는 게 아닐까. 『나는 전설이다』는 충분히 고전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는 소설이다.  

 

 

*덧붙임: 

원문을 접하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번역이 거칠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군요. 매끈한 문체가 좀 뭉개진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가장 아쉬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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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6-21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책은 영화로도 유명한데 지금까지 3편정도 영화화 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Tomek 2010-06-22 09:02   좋아요 0 | URL
윌 스미스 주연한 영화만 봤는데, 마지막은 정말 깨더군요! "전설"을 "희생"으로 만들어버린 할리우드의 안전한 성서귀의라 할까.. ㅠㅠ

L.SHIN 2010-06-2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원작을 접하지 않고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로 처음 만났었습니다. 2007년이었던가.
혼자 심야 영화를 보고 차를 끌고 돌아가는 길에 느껴진 그 감동을 잊을 수 없었어요.
나는 그가 개를 잃고 DVD 대여점 안에서 여자 마네킹한테 Say Hello to me 하고 울 때
가장 뭉클하더군요. 인간은 단 하루도 혼자 살 수 없는 거겠죠.

아, 리처드의 [줄어드는 남자] 읽어보셨나요? 그것도 신선하던데 말입니다.(웃음)

Tomek 2010-06-22 09:04   좋아요 0 | URL
영화에서 가장 애틋한 장면이었던 것 같아요. <캐스트 어웨이>에서 미리 사용했기 때문에 그 감동은 조금 반감되었지만... ㅠㅠ

『줄어드는 남자』는 L.SHIN 님 말 듣고 구매하려고 했는데, 조영학 씨 번역이라 조금 망설이고 있습니다. 번역서를 읽자니 답답하고, 원서를 읽자니 실력이 모자르고... ㅠㅠ
 
<영단어 인문학 산책>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영단어 인문학 산책 - EBS 이택광의 어휘로 본 영미문화
이택광 지음 / 난장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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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이제 언어와 학문의 위치를 넘어서 계급을 구분하는 척도가 되어 왔다. 명문대의 물리적 압박은 학창 시절에만 괴로울 뿐이지만, 이 영어라는 괴물은 학교를 졸업하고도 따라다닌다. 몇 년 전에 친구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고등학교 때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그 친구는 그 당시에 조숙하게도 술과 여자를 일용할 양식으로 여기고, 등교는 무슨 건수가 있을 때만 했으며, (동기와 선배와의) 싸움과 (선생님들에게) 개갬을 구분 못하는 소위 '개고기' 같은 평판을 얻었었는데,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으며 했던 말은 그때 나를 충격에 빠지게 했었다. "내가 다시 고등학교로 돌아가면, 다른 것 안하고 영어만 하겠어." 그랬다. 영어는 공부와 인륜에 별 상관이 없어 보였던 그 친구조차도 무릎을 꿇게 한 위력적인 존재였다. 하물며 다른 사람은 말해 뭣하랴.  

영어는 어학(語學)이다. 말에 관한 학문. 여기 방점은 학문(學)이 아니라 말(語)에 있다. 말은 문화다. 그러니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를 배운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학교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 머리말에 다 언급되어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어를 문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험과 점수로 받아들인다. 중고등학교 때에 시험의 홍수에 빠져 지내고 졸업하면 토익과 토플이라는 괴물과 맞서야 한다.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점수의 줄서기이다. 토익을 예로 든다면, 솔직히 700점대와 900점대의 큰 실력 차이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는 895점과 905점의 차이를 분명히 둔다(실제로 나 자신이 받아본 점수다. 웃긴 일인데, 정말 차이가 존재한다).900점이 넘으면 930점대, 950점대, 970점대의 차이를 스스로 파악하고 '알아서 행동한다.' 이쯤 되면 시험 중독에 가까워지는데, 만점을 받기 전까지 시험을 끊기는 쉽지 않다. 이러니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문화를 점수로 매기고 그 결과로 계급을 나누니, 무슨 어학에 낭만이 있겠는가. (북한의 영어가 민족해방을 위한 도구라 한다면) 남한의 영어는 잣대다. 자신의 몸값과 계급을 구분해주는 잔인한 잣대.  

내가 대학 시절 철학대신 영문학을 택한 이유는, (6년간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게 아깝기도 해서였지만) 영화 때문이었다. 당시 난 영화에 거의 빠져 지내다 싶어 했는데, 내게 관심이 있는 영화들이 대개가 영어권 영화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태국이나 베트남 혹은 이란이나 아이슬란드 영화에 빠졌었더라면, 내 전공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하여간 그랬다. LA와 뉴욕에서 만들어진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에 빠져 있다가, 남부 지방(대개가 텍사스)을 다룬 영화를 보고 그 독특한 억양에 놀랐었고, 흑인들의 음악 같은 말투에 경악을 했고, 후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의 지방색이 뚜렷한 영화들을 만나고 그 자잘한 문화와 역사에 대해 놀랐었다. 그러니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시험이 아닌 관심과 놀이, 더 나아가 문화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이런 낭만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힘든 상황이 되어있지만.  

이택광 교수의 『영단어 인문학 산책』은 (수험자의 입장에서는 아쉽겠지만,) 수능이나 토익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로 채워있다. 간혹 어근 풀이나 어원에 대한 탐구도 있지만, 영단어를 외우는 비법은 아니다. 제목에 ‘인문학’이라고 쓰여 있듯이, 이 책은 하나의 영단어를 들여다보며 그 단어가 만들어지고 쓰이기까지의 과정을 탐구하는 책이다. 경어 체를 사용하고, 분량도 6페이지를 넘지 않게 짧은 호흡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게 썼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고대와 중세를 넘어 근대와 현대를 아우르고,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의 어원을 다룬다.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쉽게 접하는 단어들을 이야기하면서 그 단어를 둘러싼 문화 전반을 (가볍게) 아우르는 셈이다.  

이택광 교수는 이 책과 거의 동시에 출간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에서 인문좌파란 "학문을 입신양명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들"이라고 규정했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영단어 인문학 산책』은 어학좌파를 위한 실전 가이드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시험과 취업의 도구가 아닌 문화로써 만나는 영어! 이 당연한 사실이 이렇게 특별하게 외쳐진다는 사실이 서글프지만, 이렇게 조금씩이나마 세상에 맞서 살아간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다.  

언어가 더 이상 시험과 취업이 아닌, 문화로 당당히 받아들여지기를 꿈꾸며, 한국의 빌 브라이슨을 꿈꾸는 이택광 교수의 다음 행보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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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6-20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이제 한국에서 영어는 신분 상승의 계단이 되었지요^^

Tomek 2010-06-21 08:56   좋아요 0 | URL
부끄럽고 아쉬운 현상입니다... ㅠㅠ

LAYLA 2010-06-21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

Tomek 2010-06-21 08:5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인문 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택광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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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는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인문 ‘좌파’라니, 세상에. 이젠 학계에서도 서로 정치 성향의 검증이 이루어지고 있는 건가? 물론 그런 내용은 아니다. 이택광 교수는 남한에서 협소하게 쓰이는 ‘좌파’라는 용어를 원래의 의미대로 사용했을 뿐이다. 때문에 다소 도발적인 제목과 뻘그죽죽한 표지를 보고 지레 놀랄 필요는 없을 듯하다.  

(<경계도시 2> 리뷰 썼을 때도 밝혔던 이야기지만,) 난 철학과를 졸업했다. 점수에 맞춰서 지원한 게 아니라, 내 신념대로 지원한 것이기에 부끄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철학과를 지원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유였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원인을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그러니까 94년에서 95년 사이에 참 많은 대형 사고들이 일어났었다. 한강 대교가 부서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가스 송수관이 폭발하고, 신문사는 연일 끔찍한 사진을 사회면에 쏟아내던 그런 시절(그러고 보니 생애 가장 화끈한 민방위 훈련도 그 때 이루어졌던 것 같다). 입신양명을 위해 사춘기마저 저당 잡히고 숨 막히게 살아갔던 시절이었지만, 너도 나도 비판만 일삼을 뿐, 대안이나 원인에 대한 고찰은 거의 없었던 답답한 시절에 새로운 사유에 대한 필요성과 그 시원은 철학에서 탐구해야한다는 내 유아적 망상은 날 철학과로 이끌게 했다. 게다가 95년 철학가 질 들뢰즈의 투신자살은 나를 더욱 더 철학이라는 학문으로 이끌었다.  

내가 철학에서 바랐던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스펙트럼 혹은 거리두기였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원한 철학은 그 자체로서의 학문이 아닌, 도구로서의 철학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너무나 세속적인 사람이어서, 지금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며 끼니를 때우는 것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내게 있어 실용적인 학문으로 여겼다. 하지만, 철학과의 분위기는 달랐다.  

내가 겪었던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상당히 지루했다. 철학의 역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칸트와 헤겔의 관념론은 거의 사람을 미치게 하는 학문들이었다. 나는 세기말을 살고 있는데, IMF를 겪어 세상은 만신창이가 되고 있는데, 신자유주의의 범람으로 세상은 점점 더 개인에게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교수님들은 18세기의 독일과 20세기의 박정희에서 벗어나지를 않으셨다. 세상과 담을 쌓고 숭고하고 순결한 인식론의 우주에서 유영하는 것. 이게 철학이었고 이게 학문이었나? 너무나 속상해서 입대하기 전, 연합 엠티에서 술기운에 “왜 우리는 죽은 사람들의 이론만 배워야 하는 거냐?”고 헛소리했다가 집단 다구리를 당한 경험이 있다. 뱉지 말았어야 할 말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 경솔하게 떠들었던 게 아닌가 반성하지만, 그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군대 제대 후, 21세기의 첫 해에 난 철학을 버리고 영문학을 택했다. 살면서 더 이상의 철학은 나와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그리고 돌고 돌아 2010년을 맞았다. 그동안 내 밥벌이가 되어준 영어는 점차 이 세상을 망가뜨리는 무서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고, 난 직장을 관두었다. 지옥이 되어가는 세상의 원인을 파악하길 원했던 내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끔찍해서였다. 세속적이란 표현은 때론 민만하고 때론 유치하지만, 영혼을 판다는 말은 아니다. 해방적이기도 하면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겪던 와중에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읽었다. 읽으면서 무릎을 쳤다. 그래, 바로 이 책이구나!  

이택광 교수는 ‘좌파’라는 단어를 남한에서 통용되는 소위 ‘빨갱이’라는 뜻이 아닌, 비판적 시각을 가진 존재로 봤다. 그가 바라보는 인문학에서의 우파는 학문을 취업, 승진 혹은 진학의 도구로 쓰는 존재들이다. 그가 언급한 인문좌파 역시 인문학을 도구로 사용하지만, 개인적인 용도로 쓰는 게 아닌,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는 사용가치가 다 끝났다고 생각한 마르크스를 시작으로 비평과 이론을 구분해내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현대 철학가들의 이론에 비추어서 바라본다. 벤야민의 만보자(flaneur)를 통해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새로운 주체를 읽어나가기도 하고, 랑시에르와 바디우를 끌어들여 2008년 촛불을 이끈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읽어나가기도 한다. 이택광 교수가 정의하는 ‘인문좌파’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거리를 두며 바라보아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행동하는 양심들을 말하고, ‘이론 가이드’란 그런 인문좌파 중 한명인 그가 꾸려내는 사상의 연속을 묶어낸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책이다. 사상의 흐름과 철학가들의 반론과 주장 그리고 저자의 진단 등 설렁설렁 읽는 대신 전투적으로 읽어야 겨우 그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들은풍월이 있어서 끝까지 손에 들고 읽을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중도에 포기했을 것이다. 끝까지 읽기는 읽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이해해 내 도구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는 못했더라도 읽는 것만으로도, 인문학의 효용성에 대해 회의하던 사람들이나 인문학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던 사람들이라면, 그 때 인문학에 기대했고 다가갔던 첫 마음가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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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6 15: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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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7 22: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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