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씨의 행방불명>
원작 박민규 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극본 이명숙
연출 기민수
방영일 2005년 5월 7일
1. 들어가며
<낙타씨의 행방불명>은 내게 있어서 의미있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로 박민규 작가를 알게 됐으니까. 이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난 박민규라는 존재를 좀 더 늦게 알게 됐거나, 아니면 아직도 모르고 지냈을 거다. 뭐 박민규 작가야, "그랬거나 말거나" 했겠지만, 난, 그만큼 외롭고 우울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혹시 알어? 자살이라도 했을지. 농담이 아니다.
원작 소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창작과 비평, 2004년 가을호)」 는 지금껏 두 번 영상화 됐다. 처음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낙타씨의 행방불명 (KBS 드라마시티, 2005년 5월 7일 방송)>이고, 다른 하나는 <카스테라 (TV 문학관, 2007년 3월 2일 방송)>다. <낙타씨의 행방불명>은 기본적인 설정과 소설 특유의 분위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새로 쓴 이야기고, <카스테라>는 단편집 『카스테라』에 실린 작품 중,「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TV 문학관 답게 디테일한 묘사는 소설을 그대로 따라가지만, 그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원래는 원작 소설과 이 두 드라마를 같이 비교하려 했으나, 드라마 <카스테라>는 두 작품이 하나의 내러티브로 섞여 있어서 독립된 작품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기에,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낙타씨의 행방불명>만 이야기 하겠다.
2. 이야기
2-1. 소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소설은 박민규 특유의 문체로 가볍고, 엉뚱하고, 발랄하게 진행되지만, 그 내용은 참혹한 성장담이다.
상고를 다니는 '나(승일)'는 수많은 아르바이트르 하며 생계를 돕는다. 그런 내가 이렇게 실리적으로 변한 이유는 중학교 때, <무슨 상사>라 불리우는 작은 회사에 식물처럼 무표정으로 앉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난 이후부터다.
방학을 맞이해 신도림역에서 푸쉬맨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아버지와 '나'는 생계외에 어머니의 병원비까지 벌어야한다. 힘든 나날이 지속되던 중, 신도림역에 도착한 전철에서 튕겨나온 아버지와 조우하는 일이 발생되고, 나는 짐짝처럼 아버지를 열차에 구겨 넣는다. 그러던 아버지가 말없이 집을 나갔다.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깨어나 자신의 병원비를 벌고, 할머니를 요양소에 보내고, 우리집은 조금씩 생기를 찾고 있다. 어느날 나는 러시아워가 끝난 신도림역 벤치에 누워 있다가 기린을 보게 된다. 그 기린은 아버지의 양복을 입었다. 나는 기린을 붙잡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운다. "아버지, 그럼 한 마디만 해주세요. 네? 아버지 맞죠?" 그러자 멀뚱히 듣고 있던 기린의 끔찍한 대답이 이어지고 소설은 끝난다.
2-2. 드라마 <낙타씨의 행방불명>
드라마 역시 주인공 이정식(문지윤)의 시점으로 진행한다. 정식은 학교에서 달리기 선수로 재능이 있지만, 그 외의 일에는 무관심한 편이다. 그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박승태), 아버지(기주봉), 어머니(김선화), 누나(송지영)와 함께 곧 재개발이 이루어질 달동네에 살고 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명석형(서동원)의 소개로 경마장에서 인형탈을 뒤집어쓰고 일하는 아르바이트를 얻는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누나는 빛때문에 가출을 한다. 정식은 누나를 '업소'에서 만난다. 정식은 아버지를 경마장에서 만나고, 아버지는 정식에게 밥을 사준 후, 가출을 한다. 정식은 생계를 위해 학교를 그만두지만, 육상부 코치(이한위)의 부탁으로 이번 시합에는 나가기로 한다.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돌아오던 날, 재개발이 시작되고 정식의 집은 사라진다. 정식은 그 폐허위에 텐트를 치고, 아버지, 엄마, 누나가 돌아오길 기대한다. 정식에게 호감이 있던 미주(정구연)가 정식을 위로하러 동물원에 같이 간다. 정식은 동물원에서 아버지를 보는데, 자세히보니, 그것은 아버지가 아닌, 외로워 보이는 낙타였다.
시합 당일, 정식은 앞서나갔으나, 실수로 넘어지고 만다. 그때 고개를 들어보니, 할머니, 어머니, 누나, 그리고 동물원에서 봤던 낙타의 모습이 보인다. 다시 보니, 결승선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누나가 정식을 기다리고 있다. 정식은 일어서서 가족이 있는 결승선을 향해 달린다.
3. 소설과 드라마
미안하구나.
아버진 그렇게 얘기했다. 또 그 소리. 내가 일만 한다하면 늘 같은 소리였다. 처음엔 들을 만했는데, 결국 들으나마나가 돼버린 지 오래다. 나이 마흔다섯에 시간당 삼천오백원, 즉 그것이 아버지의 산수였다. 여하튼 무슨 상사(商社)에 다녔는데, 여하튼 <무슨 상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직장이었다. 딱 한 번 나는 그곳을 찾아간 적이 있다. 중학생 때의 일인데 도시락을 갖다주는 심부름이었다. 약도가 틀렸나? 엄마가 그려준 약도를 몇 번이고 확인하며, 근처의 골목을 서성이고 서성였다. 간신히 찾아낸 아버지의 사무실은 - 여하튼 그곳에 있기는 한, 그런 사무실이었다. 쥐들이 다닐 것 같은 어둑한 복도와, 형광등과, 칠이 벗겨진 목조의 문. 혹시 외국(外國)인가? 라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깜짝이야, 그런 단어가 머리 속에 있었다니 넉넉한 환경은 아니어도, 제법 메탈리카 같은 걸 듣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세상은 뭔가 ESP 플라잉브이(메탈리카가 사용한 기타의 모델명)와 같은 게 아닐까, 막연한 생각을 나는 했었다. 했는데, 해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꼬박꼬박 도시락만 먹어온 얼굴의 아버지가 가냘픈 표정으로 사무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주인공 '나'가 어떻게 또래에 비해 얌전하고 현실적인 '산수'를 하게 되었는지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어린아이의 세계'에서 살다가 '어른들의 세계'를 알게되고, '아버지의 힘듦'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는 이 부분을 정식의 환상 부분으로 처리했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된 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정식은 놀란다. 이 전에도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도왔지만, 이 장면 이후로 정식은 더 많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체력적으로 힘들어한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엔 수학(數學)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 즉,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듯 -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기 마련이다. 디 엔드다. 어쩌면 그날 나는 <아버지의 산수>를 목격했거나, 그 연산(演算)의 답을 보았거나, 혹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그런 셈이었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는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았다. 그리고 느낌만으로 <아버지 돈 좀 줘>와 같은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참으로, 나의 산수란.
드라마에서 수학 시간은 총 두 번 나온다. 첫 장면에서 정식은 선생님의 설명을 이해못해 선생님 얼굴을 뻔히 쳐다보다가 무안을 당한다. 정식에겐 산수만으로도 벅찬데, 선생님의 수학은 이해 못하는 성질의 형이상학이다. 두 번째 장면은, 어머니가 입원하시고, 생계를 위해 무리하게 아르바이트를 해 수업시간에 자는 장면이다. 정식에겐 더 이상 수학은 이해 못할 차원의 학문이 아니라, 상관없는 학문이 된다.
처음 열차가 들어오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열차라기보다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거대한 동물이 파아, 하아, 플랫폼에 기어와 마치 구토물을 쏟아내듯 옆구리를 찢고 사람들을 토해냈다. 아아,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뭔가 댐 같은 것이 무너지는 광경이었고, 눈과 귀와 코를 통해 머리 속 가득 구토물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야! 코치 형이 고함을 질러주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놈의 먹이가 되었을 테지. 정신이 들고 보니, 놈의 옆구리가 흥건히 고여 있던 구토물을 다시금 빨아들이고 있었다. 발전(發電)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힘! 그때 코치 형이 고함을 질렀다. 해서, 엉겹결에 - 영차, 영차 무언가 물컹하거나 딱딱한 것들을 맘구마구 밀어넣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어찌 내 입으로 그것이 인류(人類)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원작에서는 지하철역, 게다가 악명 높기로 유명한 신도림역을 주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로 삼았다. 3분마다 들어오는 지하철,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과 타려는 사람들의 아비규환. 박민규 작가는 아마도 열차를 하나의 세상으로 본 게 아니었을까. 180명 정원에 400명이 들어가는, 그것을 '특권'이라고 허용해주는 잔인한 세상. 그 세상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나'와 그 세상에서 튕겨져 나오는 '아버지'를 다시 (세상 속으로) '우겨 넣는' 나. 지하철역이라는 공간은 세상을 환유하는 공간이다.
드라마에서는 지하철역 대신 경마장을 택했다. 카메라가 비추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들, 그렇기에 다시 그 세상에 편입하기 위해 한탕을 원하는 사람들을 비춘다. 누구나 부자를 꿈꾸지만 결국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정식은 아버지를 만난다.
병실에 들어서자,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엄만 어때? 대답 대신 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초원의 복판에서 갑자기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 타조처럼 - 멍하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실은 그 동안 그나마 아주 잘 걸어왔다는, 아니 달려온 거라는 생각이 나도 들었다. 사라질 엄마의 봉급, 여전한 할머니의 약값, 발생될 엄마의 치료비... 아버지의 눈동자가 그토록 잿빛이었단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뭐랄까, 전지가 떨어진 계산기의 꺼진 액정과 같은, 그런 잿빛이었다. 이제, 계산이 안 나온다. 나도, 계산이 서질 않았다. 불 꺼진 병원의 비상계단에서, 나는 코치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의 절망 부분은 드라마쪽이 더 울림이 컸다. 기주봉 씨라는 대배우가 이 역을 맡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활자의 묘사보다는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크게 느껴진다. 이 장면 이후로 아버지는 가출한다. 아버지가 가출하기 전, 중국집 화장실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이렇게 한탄을 한다.
"구질구질해? 진짜 구질구질한 게 뭔 줄이나 아냐? 죽어라고 휴가 한 번 제 때 못내고 입 꽉 깨물고 일했어. 딴 눈 한 번 안 팔고, 살았는데, 그랬는데 결국, 여기 밖에 못 온거야.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여기 요만큼. 결국 제자리지 뭐."
끝내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대신 어머니의 의식이 기적처럼 돌아왔다. 의식이 돌아왔다는 사실보다도, 퇴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 나는 울었다. 글쎄 그 정도의 서러운 이유라면 누구나 눈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
그렇게 우리집은, 다시금 숨을 트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졌지만 할머니란 짐을 덜게 된 까닭으로, 또 엄마가 스스로 자신의 병원비를 번 까닭으로 그대로, 그렇게. 근처의 지붕에서 지켜본다면, 아마도 그것은 잔디의 작은 싹이 움을 튼 모습과 비슷한 관경이었을 것이다. 살아, 있다. 무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유사한 산수를 할 수 있단 것은 얼마나 큰 삶의 축복인가. 사라지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소설과 드라마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희망보다는 '암담함'의 분위기에 가깝다. 책은 "무사하진 않았지만", "살아, 있다"는 표현처럼,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삶의 질을 따지기 대신, '생존' 그 자체에 대한 안도감을 피력하고 있다. 이제 18세인 고등학교 2학년 생에게 이것을 희망이라 부를 수 있을까.
드라마는 더 처절하다. 마지막 생존의 보루인 집까지 없어진 상태다. 할머니는 요양원에, 아버지는 가출, 어머니는 병원, 누나는 업소에 뿔뿔이 흩어져있다. 정식은 무너진 집 폐허 위에 텐트를 세우고 가족을 기다린다. 여름이 오면 가족들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무너진 집 위에서 정식은 멀리 있는 아파트를 바라본다. 정식은 가족들과 저 앞에 보이는 아파트-Home, Sweet Home-에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된 거예요? 기린의 무릎을 흔들던 나는, 결국 반응을 포기하고 이런저런 집안의 근황을 들려주었다. 할머니의 소식과 어머니의 회복, 그리고 나는 부동산 일을 배울 수도 있다, 선배가 자꾸 함께 일을 하자고 한다, 자리가, 자리가 있다고 한다. 경제도 차차 좋아질 거라고 한다, 무디슨가 어디서 우리의 신용등급이 또 한 계단 올라셨대요, 좋아졌어요. 그러니 돌아오세요.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구름의 그림자가 또 빠르게 지나갔다. 아버지, 그럼 한마디만 해주세요. 네? 아버지 맞죠? 그것만 얘기해줘요.
무관심한, 그러나 잿빛의 눈동자가 이윽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소설과 드라마 모두 마지막은 주인공의 '환상'으로 끝난다. 소설의 '나'는 환상에서조차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지만, 드라마의 '정식'은 아버지는 물론, 흩어졌던 가족을 모두 만난다. 소설의 '나'나 드라마의 '정식'이나 깨어나면 결국엔 '혼자'일 것이다. 소설과 드라마 각기 결말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은, 말 그대로 '참혹한 성장담'이다. 어떤 결말이 더 나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은 소설대로,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감정의 울림이 있었으니까. 개인적으론 소설의 울림이 조금 더 크게 느껴졌다.
4. 드라마
정식이 사는 곳은 재개발이 부분적으로 들어간 달동네다. 용역깡패들은 수시로 등장해 이곳 주민들을 위협하고 공포에 질리게 한다. 동네가 부서지면서 정식의 가족들은 흩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정식의 가족이 모두 흩어졌을 때, 정식의 집은 헐린다.
소설과 드라마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아버지와 주인공에게 '짐'이 되는 역할이다. 단, 소설에서는 어머니가 의식을 잃은 것으로 처리해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드라마에서는 병원에 있는 것을 핑계로 '집안 일'에서 아예 신경을 꺼버리고 주인공 정식에게 모든 짐을 지게하는 '무책임한 엄마'로 나온다. 어찌보면 조금 다르게 갈 수도 있는 역할이었을텐데, 어머니 역을 맡은 김선화 씨가 워낙에 악역을 많이 맡아 어쩔 수 없이 스테레오 타입으로 비친 것 같기도 하다.
소설에 없고 드라마에 추가된 누나(송지영) 역은 어머니와 비슷한 역이다. 가족의 붕괴를 나타내는 한 축이자, 소년인 정식이 처음으로 '가장'의 관점으로 가족(누나)을 바라보고, 세상과 현실을 깨닫게 하는 역할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나'에게 여러 아르바이트를 소개하고, 인생에 대해 설교(조언)도 해주는 '코치 형' 역은 드라마에서 둘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소설에서 '코치 형'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최명석(서동원)'으로, 다른 하나는 학교에서 육상을 가르치는 '코치 선생님(이한위)'이다. 이 둘은 각기 여러 의미에서 정식의 인생에 개입한다. 명석은 정식에게 세상(사회)을 알려주고, 코치는 정식에게 "정식아, 네가 희망이다"라는 말을 한다.
소설에는 없는 주인공의 '여자친구' 송미주(정구연)가 드라마에선 추가 됐다. 큰 역할을 하진 않지만, 정식이 힘들 때마다 도움을 - 도시락을 싸온다거나, 동물원에 같이 간다거나, 노래를 녹음해 준다거나 - 준다.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 동네가 철거에 들어가자, 허둥지둥 짐을 싸던 정식이 갑자기 다 포기한 듯 주저앉고 미주가 선물해준 노래를 듣는다.
"거칠은 벌판으로 달려가자. 내일의 희망을 마시자. 보석보다 찬란한 무지개가 살고 있는 저 언덕 너머 내일의 희망이 우리를 부른다."
5. 맺음 - 희망
드라마를 보면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희망. 희망이 정말 있을까? 희망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달리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서 끝까지 달리는 것? 하지만 그 결과가 단지 '환상'이라면, 희망이란, 얼마나 잔혹한가.
6. 덧붙임
a. 언급하지 않으려 했으나 조금만 이야기한다면, <낙타씨의 행방불명>과 <카스테라>의 차이는 '분위기'에서 납니다. <낙타씨의 행방불명>은 (비록 내용은 끔찍하더라도) 박민규 작가의 문체처럼 발랄하게 진행하지만, <카스테라>는 그 발랄함을 걷어내서 굉장히 어둡고 무겁습니다.
위 <낙타씨의 행방불명>, 아래 <카스테라>
b. 기민수 PD는 <그저 바라만 보다가>, <굿바이 솔로>, <꽃보다 아름다워> 등을 연출했습니다.
c. 짧게 쓰려 했는데, 또 길어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