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xford Advanced Learner's Dictionary, 8th Edition: Paperback with CD-ROM (includes Oxford iWriter) (Package)
A. S. 혼비 지음, Dilys Parkinson 외 엮음 / Oxford University Press, USA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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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처음 접해본 영영사전은 콜린스 코빌드 영영사전이었다. 물론 내 돈으로 산 것은 아니고, 친구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준 사전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영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처음 접한 코빌드 사전은 상당히 신선하면서도 난해한 구성이었다. 왜냐하면 영단어의 뜻이 문장 형식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어 "obey (복종하다)"라는 단어를 찾으면, 그 해석이 이런 식이었다. 

If you obey a person, a command, or an instruction, you do what you are told to do. 

언뜻보면 복잡해 보이기도 하지만, 해석 자체를 문장 형태로 표현, 단어의 뜻과 활용까지 적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잘만 쓰면 정말 요긴한 사전이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실력이 기반이 되는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것이지, 거의 영어를 새로 시작하는 나 같은 초보자에게는 영 어려운 사전이었다. 그러다 접한 게 옥스퍼드 영영사전이었다. 

옥스퍼드는 콜린스와는 달리 문장이 아닌 구(phrase) 중심으로 단어를 해석하고 있었다. 위에 예로 든 obey를 옥스퍼드는 "to do what you are told or expected to do"라고 짧고 간결하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이런 단순한 이유에 끌려 거금을 주고 옥스퍼드 사전을 선택했다. 어차피 한국에서 통용되는 영영사전들은 다 그 나름 훌륭한 사전들 아닌가! 자신에게 맞는 사전을 택하면 그만이다. 내겐 여러 사전 중 옥스퍼드가 맞았을 뿐이고. 

2002년 6번 째 개정판(6th edition)을 처음 접한 이후로, 2007년 7번 째 개정판, 2011년 8번 째 개정판을 구입했다. 첫 번째를 제외하고는 공교롭게도, 새 직장을 구할 때마다 개정판을 사들이게 됐는데,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구입하는 것은, 영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영어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인 의무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요새는 옥스퍼드나 콜린스 같은 영영사전을 각 포털 사이트에서 무료로 제공해주기 때문에 굳이 사전을 살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사전을 사야한다면, 그것은 CD-ROM 전자사전 때문이라고 이야기해도 지나치지 않다. 종이 사전을 사면 CD-ROM을 주는 게 아니라, CD-ROM 전자사전을 사면 종이 사전을 끼워주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전자사전은 정말 놀랄만한 기능을 탑재하고 있다. 아마 6번 째 개정판부터 종이 사전과 CD-ROM 전자사전을 같이 판매한 것으로 아는데, 그 때엔 그저 구색맞춤이었고, 7번 째 개정판에서는 약간의 과도기 -지금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해주는 아주 기본적인 기능- 를 거치더니, 이번 최신 개정판에서는 그 기능이 만개한 상황이다. 이것은 어떻게 글로 표현하기 뭣하고, 직접 사이트에 들어가 한 번 경험해 보는 게 나을 것 같다.(OALD CD-ROM 데모화면 클릭

물론 CD-ROM이 아닌, DVD-ROM을 제공하는 롱맨 사전도 그 방대한 정보량으로 군침을 흘릴만 하지만, 내겐 이정도로도 충분, 아니 분에 넘치기까지하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CD-ROM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나같이 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기능이지만, 학습의 이유에서건, 독서의 이유에서건, 영어 사전이 필요한 다른 사용자들이 굳이 컴퓨터를 켜서 사전을 돌리고 단어를 찾아볼까? CD-ROM 전자사전은 능동적인 사용자에게는 훌륭한 기능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용자들까지 끌어들이기에는, 우리 주위에 다양한 형태의 훌륭한 사전들이 너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더 많은 사용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뭐 그런 것은 옥스퍼드 출판사 연구원들이 생각할 문제고, 난 그저 사용하기만 하면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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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04-05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는 얼마 전에 롱맨을 구입했는데 이 글 보니 옥스포드 살 걸 그랬나...^-^;; 싶어요. 그 롱맨의 디비디가 용량이 너무 커선지 컴에서 돌아가기 되게 헥헥 거리더라고요, 저 같은 경우엔. 그래서 첨에 깔려다가 그냥 포기. 별 도움도 안 된다 싶어요.

Tomek 2011-04-05 16:07   좋아요 0 | URL
롱맨이 DVD를 제공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지체없이 구입했을텐데... 옥스퍼드만으로 만족한다고 쓰긴 했는데, 솔직히 롱맨의 그 엄청난 DB가 탐나는 것은 어쩔 수 없군요... 특히 corpus... @.@
아... 써놓고 보니 더 갖고 싶네요... >,.<

블랙스톤 2015-03-07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처음 접한 영영사전은 콜린스이고, 두 번째로 접한 사전이 바로 옥스포드였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옥스포드 사전은 꼭 있고, 영국사전에 씁쓸한 태도를 보이는 미국 내에서도 당당히 옥스포드 사전은 꼳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네 번째로 접한 사전 롱맨은 학습자를 대단히 배려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세 번째로 접한 사전은 웹스터) 명쾌한 정의 방식과 품사마다, 뜻 기술 마다 나눠서 표기한 것 역시 대단한 배려였습니다.

*콜린스/롱맨/옥스포드/캠브리지 = 영국
*웹스터/랜덤 하우스/어메리칸 헤리티지 = 미국
*맥밀란 = 영국 미국 합작

옥스포드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면, 롱맨은 사전의 명가입니다. 여러가지 종류의 사전을 편찬하며 개정판들도 속속히 내고 있는 부지런한 곳이죠. (롱맨도 영국 회사)

그래서 학습자에게 권한다면 저는 단연 롱맨을 추천합니다.

롱맨과 옥스포드의 차이점은 편찬한 동기인데요.
옥스포드는 영어의 보급성을 위해서 경제적인 정의를 내림으로서 쉽고 간결함을 중요시합니다.
한편 롱맨은 학습성에 집중하여 편찬되었기에, 어법과 뉘앙스, 문법, 발음 등 편집 과정에서 학습자를 여러가지로 배려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단어의 수는 적어도 활용할 수 있는 면을 늘려 독보적인 생산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지나가다가, 제 의견을 남겨보는 것입니다.
소비자로서 롱맨을 선택하고, 옥스포드를 선택하고는 순전히 소비자의 몫입니다. 저도 옥스포드에 한 번 빠졌었던 사람이기에, 옥스포드를 평가절하할 수 없더군요.

Tomek 2011-10-03 18:37   좋아요 0 | URL
각 사전들의 편찬 동기는 오늘에서야 처음 알게 됐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런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네요.

사전이야 무엇을 선택하든, 잘 활용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

Jinmoo 2011-10-03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무척 도움이 되는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세 가지 있는데요.

첫 번째는,
CD-Rom 데모 화면을 보니, 예문을 원어민 발음으로 들을 수 있는 기능은 없는 것 같던데
정말 그런지, 궁금해서요.
롱맨 현대영영사전은 CD-Rom에 있는 예문들을 모두 원어민이 읽어 주는데,
OALD 8th Edition은 그런 기능이 없나요?

두 번째는,
제가 롱맨 현대영영사전 4판이 있는데,
OALD 8th Edition을 구입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지금 고민중입니다.
제가 옥스포드 영한사전을 가지고 있어서,
OALD 8th Edition을 구입해서 영영사전과 비교하면서 공부를 하면
좋을 것 같다는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서 나쁠거야 없겠지만...
영영사전을 두 권을 구입할 필요가 있을지,
아니면 옥스포드 영한사전을 보면서, 인터넷상의 옥스포드 영영사전을 참고하고
영영사전은 그냥 롱맨 현대영영사전 4판을 보는게 나을지...
Tomek님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세 번째는,
Tomek님 개인적으로 보실 때,OALD 8th Edition과
롱맨현대영영사전 5판(DVD있는 최신판)을 비교한다면
영어학습자에게 어떤 사전이 더 나은 것 같으세요?

바쁘시겠지만, 답변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Tomek 2011-10-03 18:45   좋아요 0 | URL
옥스퍼드는 예문 듣기는 없습니다. 롱맨에는 있는데 좀 아쉬운 구성이지요.

순수하게 공부만 하신다면, 굳이 최신판의 사전을 구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옥스퍼드의 경우는 표제 단어 수가 늘어난 반면, 예문이 조금씩 줄었다고 하더라고요. 신조어 같은 경우는 윅셔너리 같은 것을 참고하는 게 오히려 더 빠를 정도니까요.

그리고 사전은 사용하는 사람과 궁합이 잘 맞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모두 뛰어난 사전들이니 어느게 더 나은지는 사용자의 선택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선택을 해야 한다면... 롱맨이 조금 더 친절한 것 같습니다.

:)
 
만다라
김성동 지음 / 청년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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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분명 쉬운 책은 아니다. 법운과 지산으로 갈리는 수도승과 파계승 혹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이야기는 불교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3년 만에 다시 손에 들고 읽은 이 책은, 3년 전과 마찬가지로 한달음에 읽게 하는 힘이 있다. 김성동 작가의 『만다라』는 분명 쉽게 읽히는 책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깨닫는 책은 아니다.  

법운은 수도승이다. 그는 인간사의 허무와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 위해, 그래서 이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의 윤회를 끊기 위해 수도에 매달린다. 법운은 불교의 엄격한 계율에 자신을 맞추고 수행을 정진한다. 법운이 중이 된 것은 속세의 인연을 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자신과 누나를 버리고 도망간 어머니에 대한 충격과 증오, 그에 대한 인간사의 허무. 그는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것을 뛰어넘기 위해 수도에 정진한다.  

그런 그가 우연히 만난 법운은 파격의 연속이다. 말이 좋아 파격이지, 불교의 계율이란 계율은 모조리 무시하는 땡중의 모습이다. 법운은 이런 지산을 처음에는 경멸하지만, 그의 파격적인 행보가 결국엔 자신이 가는 길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같이 객질을 하며 다닌다. 산 속 선방서 수도만을 정진한 법운에게, 지산은 이 세상의 더럽고 추악한 면을 보여주며 이야기한다. 불교가 다시 제대로 서기 위해선 그들만의 불교가 아닌, 이런 세상을 껴안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법운은 지산과는 달리 수도승이 먼저 깨달음을 얻은 후에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법운과 같은 중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끔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법운과 함께 선방에 있던 수관의 모습이 특히 그러하다. 수관은 깨달음을 위해 자신의 왼손 손가락을 매년 한 개씩 부처님께 공양했다. 각(覺)을 깨치기 위해 자신의 생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쯤은 쉬이 견뎌낸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부처가 되는 것은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법운과 지산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은 법운의 죽음 때문이다. 지산이 산에서 동사하고, 지산의 잡기장을 읽은 이후, 법운은 심한 무력감 혹은 상실감에 시달린다. 자신이 가는 길이 맞는지, 지금의 불교에 소승이 맞는 것인지 때늦은(혹은 제때 찾아온) 방황을 한다. 파계와 같은 온갖 계율을 뛰어 넘음. 그리고 법운은 다시 산으로 들어간다.  

이 책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중 어느 것이 더 위대한가를 구분하는 소설이 아니다. 소승과 대승은 불교라는 종교에서 다 각기 필요한 부분이다. 법운은 자신의 방식으로, 지산은 자신의 방식으로 각을 향해,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타락한 불교를 다시 세우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감, 인간의 육신을 지니고 어떻게든 살아 나감, 그게 바로 이 땅의 불교가 살아나가는 방법이 아닐까.  

치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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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8-14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때 '문학과 종교'라는 수업 강의 교재로 이 소설을 읽었어요. 책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불교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겠죠. '구원은 어디로부터 오나?' 고민을 했는데, 해서 제겐 깊이 다가왔던 소설이었어요.

Tomek 2010-08-15 07:16   좋아요 0 | URL
처음엔 불교의 비리 혹은 치부에 관한 이야기로 읽어서 엄청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생각해보니 인간의 치열함을 다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의 화두를 가지고 이렇게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종교적 숭고함을 끌어내는 것 같아요.

카스피 2010-08-15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소승 불교란 말은 없다고 하더군요.대승불교쪽에서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에 자신을 대승으로 개인 수행이 위주인 쪽을 소승으로 폄하했다고 합니다^^

Tomek 2010-08-16 06:47   좋아요 0 | URL
처음 알게 된 사실이예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D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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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을 닦는다. 처음엔 더위에 흘린 땀이라 생각했지만, 아니다. 더위로 흘리는 땀은 외부의 열기를 이기지 못해 몸속에서 밀어내는 땀이다. 내보내려는 힘과 남아있으려는 힘이 서로 부딪히는 치열한 전투. 언제나 지는 쪽은 인간의 나약한 육체 쪽이다. 닦아내려 손을 대면 언제나 뜨듯하고 끈적인다. 마치 날선 칼날이 나약한 몸에 구멍을 내어 몸 밖으로 쏟아지는 피처럼. 하지만, 이번에 흘린 땀은 식어있었다. 몸의 긴장이 풀려 저 스스로 흘러나온 물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이번에 출간된 김영하 작가의 단편집 제목은 이 책에 수록된 네 번째 단편 「밀회」에서,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92쪽 위에서 13번째에서 15번째 줄에 걸쳐있는 혹은 밑에서 6번째에서 8번째 행에 걸쳐있는 문장의 한 구절을 따온 것이다. 처음에 이 제목을 접했을 때는. 마치 김경주 시인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를 따라한 치기어린 겉멋이라 생각했었다.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선 책을 읽어야하고, 꼼꼼히 읽은 독자들만이 알아챌 수 있는, 작가가 독자에게 베풀 수 있는 멋진 은혜(혹은 선물).  

흐릿한 눈으로, 침대에 몸을 파묻고 한 편 한 편 심드렁하게 읽던 중, 서울의 온도가 35도에 가깝게 다가간다는 아나운서의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들은 지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난 까닭 없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소설집의 거의 끝을 향해가고 있는 「퀴즈쇼」에서였을 것이다.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퀴즈쇼」는 2007년에 출간한 장편 『퀴즈쇼』와 다르면서도 같은 작품이다. 단편 「퀴즈쇼」의 기본 골격은 장편 『퀴즈쇼』의 민수와 지원의 이야기를 조금 변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읽고 있는 어느 순간, 나와는 상관없을 거라 생각한 공포가 순식간에 내게 범람했다. 살인, 그리고 죽음.  

여주인공 은이의 부모와 오빠는 한순간에 유명을 달리했다. 어느 한 연쇄살인범이 "방범창을 장도리로 뜯고 안으로 들어"가 은이의 부모를 장도리로 내리쳐 죽이고, 오빠는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유유히 사라진 사건이 발생했다. 후에 그 연쇄살인범이 잡혔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차를 몰고 돌아다니다가 문득 영감이 떠오르면 차에서 내려 자신에게 영감을 준 집으로 들어"가 살인을 저질렀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연쇄살인범을 만날 확률은 "0.0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논리의 세계"에서나 벌어질 일이다. "현실세계"는 다르다. 우리가 살면서 한강다리가 무너질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나? 백화점이 무너질 것이라 생각한 적은? 한창 일하고 있는 건물에 비행기가 부딪힐 것이라 생각한 적은? <추격자>의 개미슈퍼 아줌마는 무식해서 그렇게 죽었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 비극은 우리에게는 "놀라운 행운"이 된다. 김영하는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저 멀리 있는 공포를 슬그머니 우리의 일상 곁에 놓아둔다. 그는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낸다. 그리고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시제를 살짝 바꿔 묻는다. 정말 그렇게 안녕할 거라 확신하세요? 당신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악몽을 꿨다. 하늘에 불꽃이 일어나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던 지난 새벽에, 나는 보고 말았다. 노란색 우비를 입고 4층 빌라를 올라 방충망을 뜯어내고 들어와 내가 누워있는 침대 앞에 선 한 사내의 모습을. 가위에 눌렸다. 소리를 질렀지만 목구멍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사내는 (칼이 아닌) 긴 송곳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 거의 터진 목소리에, 놀란 아내가 잠을 깨웠다. 밖엔 비바람이 몰아쳤고 난 멍하니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 수록된 단편 소설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로봇」, 「여행」, 「악어」, 「밀회」, 「명예살인」, 「마코토」, 「아이스크림」, 「조」, 「바다이야기 1」, 「바다이야기 2」, 「퀴즈쇼」, 「오늘의 커피」, 「약속」. 각각의 이야기들은 제각기 다른 빛을 뿜고 있었지만, 감히 규정된 흐름으로 엮어본다면, 그것은 상실과 공포다. 그가 다룬 상실과 공포는 일상과 밀접하기도 하지만 때론 멀리 떨어져있기도 하다. 그의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일상과는 멀리 떨어진 사건들이다. 일반인들이라면 신문에서나 접할 수 있는, 0.01% 정도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 사건을 겪는 이들은, 0.01%의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바로 우리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확실히, 동생이 사고를 당해 회사 사장에게 돈을 빌릴 확률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헤어진 옛 애인을 만날 일은, 내 얼굴 때문에 회사 매출이 오를 일은, 국문학 박사과정의 일본인을 만날 확률은, 기름 맛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확률은, 일하는 매장에서 엄청난 물건을 도둑질을 할 일은, 연쇄살인범을 만날 일은, 주먹다짐으로 다른 사람의 코뼈를 부러뜨릴 일은, 다짜고짜 돈을 빌려달라는 여자를 만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돈을 갚지 못해 사장에게 몸으로 때우는 사람은,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은, 매출 때문에 죽는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온전히 오해해 감정의 골을 수습하지 못하는 사람은, 일 때문에 기름 맛 나는 아이스크림을 앉은 자리에서 4개나 먹어치우는 사람은, 타락한 사람은, 죽은 부모의 돈을 부러워하는 개새끼들은, 그래서 내 코뼈를 순순히 대주는 사람은, 집나간 아내를 찾는 사람은 우리 주위에서 (쉽지는 않겠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들은 희극적 혹은 비극적 혹은 그 둘이 섞인 채로 살아간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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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펭귄클래식 63
윌리엄 셰익스피어, 김강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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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토록 무섭고 끔직한 이야기가 있었던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는 정말이지 몸서리칠 만큼 끔찍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너무나 끔찍해서 책 표지를 확인한 것도 몇 차례인지 모른다. 아, 이런 이야기라니!  

대부분의 공포는 맥베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햄릿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맥베스의 머릿속은 공포와 의심으로 얼룩져있다. 모든 것이 운명대로 맞추어진 삶. 광야의 세 마녀들이 직조한 맥베스의 벗어날 수 없는 삶. 맥베스는 왕이 될 거라는 그녀들의 예언을 이루게 하기 위해 온갖 살육을 자행하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으로 인해 공포에 떨게 되고 또 다른 살육을 자행한다. 이미 정해져 놓은 운명을 이루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나,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이나, 다 부질없는 짓으로 보일 정도로 맥베스의 행동은 가련해보인다. 이쯤 되면 마녀들의 예언은 예언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살육의 중심에 아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맥베스가 (예언을 이루기 위해) 덩컨 왕을 살해하려는 것을 주저할 때, 그의 부인은 "그러나 만일 제가 당신처럼 이 일을 맹세했었다면, 갓 난 어린 것이 제 얼굴을 쳐다보며 웃을지라도 저는 그 말랑한 잇몸에서 젖꼭지를 잡아 빼버리고 둘러메쳐 머리통을 부숴버렸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왕이 된 맥베스가 마녀들을 찾아가 다시 예언을 들을 때 등장하는 피투성이의 아이 환영이라던가, 자신을 위협하는 맥더프 영주의 아내와 아들을 살육하는 장면은, 활자만으로도 끔찍함을 불러일으킨다.   

맥베스는 아이가 없다. 그는 왕이 됐지만, 자손이 없기에 그 왕권은 다른 자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아이들에게 집착을 했던 것일까? 그의 권력욕은 자기 대에서 끝나는 일장춘몽에 불과하게 되었고, 고작 그 정도의 권력을 누리기 위해 그는 그 수많은 살육을 벌이고, 수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한 사람의 망상이 이토록 끔찍한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누가 알았겠는가!  

이번에 읽은 펭귄 클래식의 번역은 민음사 판본보다는 읽기에 수월했지만, 여전히 이게 최고의 번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책을 고를 때에 부딪치게 되는 딜레마. 제대로 감상하려면, 활자보다는 연극이나 영화가 낫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공연을 목적으로 쓰인 것이니까. 하지만, 원본에 대한 열정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궁금한 점. 천둥과 번개, 환영과 유령, 등장인물들의 갑작스러운 사라짐 그리고 쉴 틈 없이 진행되는 재빠른 전개 등을 17세기의 셰익스피어는 어떻게 무대에서 보여줬을까? 맥베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방백은 그저 서서 배우들이 낭독했을까, 아니면 다른 장치를 고안해서 표현했을까? 궁금하지만, 이제는 알 수 없는 것. 사료에 기대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 그의 광기가 어떤 방식으로 초연되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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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8-05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토멕님이 생각하는 잘된 번역은 뭔가요?
어쩌면 원작 보다 공연물을 보는 것이 더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연출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그냥 그것을 즐기는 거죠.
그러고 보니 멕베스는 저도 못 본 거네요.
어디선가 하고 있으려나?ㅜ

Tomek 2010-08-06 09:07   좋아요 0 | URL
잘 된 번역이라기 보다는 완벽한 번역을 꿈꾸는 것 같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소네트처럼 운율이 잘 지켜졌기 때문에, 이것을 낭송할 때 배우의 목소리가 그 자체로 음향효과 같은 느낌이 드는 반면, 이걸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그 효과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그 흥취의 없어짐이 너무 아쉬워서 더 나은 번역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헛된 꿈이죠.

그제 서점에 가서 여러 번역본을 살펴보았는데, 다 훌륭한 번역이더군요. 직역에 가깝건, 의역에 가깝건, 과도한 로컬라이징이건, 다 나름 의미가 있는 번역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바람은 그저 투정에 가까운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잘 된 번역이란 바벨탑이 다시 세워져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
 
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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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특히 그 중에서 희곡은, 읽을 때마다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가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번역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가오는 느낌이 확 다르다. 소네트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번역, 실제 연극무대에서 읽혀질 법한 대화체의 번역 등, 항상 새롭고 다르게 느껴진다. 때문에 가장 정확한 방법은 원문을 읽는 것이겠지만, 그건 일찌감치 포기했다. 정말이지 쉽지 않은 선택이다.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을 때면 항상 지엽적인 문제에 빠지게 된다. 특히나 『햄릿』을 읽으면서 그런 함정에 많이 빠지게 됐다. 햄릿의 내면의 질문, 도덕적 고민, 실존적 갈등, 자포자기의 행위 등은 도외시하게 되고, 이 번역이 적합한 번역인지에 대한 생각과, 이 대본으로 도대체 무대 연출은 어떻게 했을까하는 두 번째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난 『햄릿』을 읽었지만, 아직까지 햄릿이란 인물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그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나약하고 천박하고 음란한 미치광이 왕세자로만 내게 남아있다. 햄릿이란 인물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방해를 하고 있어서일까?  

그래서인지 내게 햄릿이란 인물은 영화 속 배우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 케네스 브레너의 햄릿. 심지어 멜 깁슨의 햄릿도 좋았고, 에단 호크의 햄릿도 좋았다. 햄릿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영향을 받은 미후네 도시로의 니시 코이치 또한 햄릿의 정수를 표현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이 목록의 명단은 더 길게 채워지겠지만, 적어도 내게 햄릿은 활자가 아닌 이미지로 남아있다.  

무언가 읽기는 읽었는데, 손에 잡히지 않는 연기 같은, 실체가 없는 인물. 어쩌면 햄릿은 그런 인물이 아닐까? 아직 속단은 금물이다. 아무래도 다른 번역본으로 몇 편 더 읽어봐야 그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지 않을까. 『햄릿』은 내게 있어 햄릿의 아버지이자 선왕의 유령 같은 존재다. 책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의 믿음에 의하면, 유령은 말을 걸어주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말을 시작할 능력이 없다"고 한다. 내게 있어 『햄릿』을 읽는 것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실체에 대해 말을 거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렇게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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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8-02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번역이 문제 있다고 하든데 그래서도 어려운 거 아닐까요?
아니면 고전이라 그럴까요?
저는 예전에 아침이슬에서 나온 김정환 선생의 오셀로를 읽어봤었죠.
현존하는 번역판 중 원문에 충실하다고 해서.
권하긴 좀 조심스럽고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Tomek 2010-08-03 09:09   좋아요 0 | URL
번역에 대해선 제가 잘 모르니 뭐라 할 사항은 아니지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번역은 솔직히 좀 낡은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특히 이상욱 선생의『암흑의 핵심』번역은 정말 깼어요. ("무서워라, 무서워라!"라니... 나의 커츠 대령은 그렇지 않아... ㅠㅠ)

내일쯤 서점에 가서 stella09 님이 추천해주신 김정환 선생의 번역을 필두로 여러 판본을 비교해보려고요. 비슷하면 미친척 하고 원문을 사던가 아니면 지금 있는 것 다시 한 번 읽어볼까 합니다.

조언 고맙습니다. :)